주님이 십자가를 주저하신 이유는?
마태복음강해 (241)
http://youtu.be/QuOrdCUer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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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36-46)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잠시 혼자만의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죽음의 잔이 자기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 결국은 자신의 원대로 마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라고 결단하며 순종했다.
성자 하나님으로선 도무지 받을 수 없고 받아선 안 되는 그런 수치와 고통이 코앞에 닥쳤다. 베드로를 필두로 열한 제자 모두 당신을 버릴 것이다. 어떤 인간도 당신과 동행할 수 없고 이해도 하지 못하는 길을 혼자서 외롭게 걸어가려니 기도는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 온 인류의 죄 값을 당신께서 다 지고 대속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해 성육신하셨다. 그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게 되는 그 간의 모든 상황과 일정을 당신께서 완벽하게 주관하셨다.
그렇다면 왜 마지막 순간에 세 번이나 십자가를 회피하는 기도를 하셨는가? 그것도 땀이 핏방울로 변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 대부분의 신자들로선 완전히 납득할 수 없다. 이에 관해 크게 두 가지 전통적인 해석이 있다.
최고로 고통이 심한 십자가 처형
먼저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고안해 낸 사형 방법 중에 최고로 심한 고통이 따르기에 주님도 인간이신지라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얼마나 처참하고 잔인한지 설명해주는 실화가 있다.
중세 봉건시대의 동 유럽에 한 포악한 성주가 있었다. 외적이 침공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영지로 진입하는 길 좌우에 가로수처럼 일렬로 세웠다. 침공해오던 적군들이 너무나 비참하고 흉측한 시체의 모습과 또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의 단말마 소리 때문에 공포에 질려서 싸울 생각도 않고 스스로 퇴각했다고 한다.
그 폭군 영주의 이름이 드라큐라 백작인데 흡혈귀를 다룬 동명소설은 바로 그를 모델로 했다. 로마제국도 반역 죄인은 반드시 십자가 처형으로 다스렸는데 그 고통이 두려워 감히 항거할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십자가를 식민지 통치의 효과적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육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을 당하면 혼절하거나 곧바로 죽음이 닥친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런대로 견딜만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배려다. 예컨대 수십 층 빌딩에서 투신하면 콘크리트 바닥과 충돌할 때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할까 염려되지만 수초 내에 기절해버리기에 막상 고통을 못 느끼고 죽는다고 한다.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가장 극심한 이유는 반대로 금방 죽지 않고 며칠에 걸쳐 서서히 죽기 때문이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말라비틀어지는 식으로 죽는다고 한다. 머리는 빠개질 듯이 아프고 그 와중에 새들이 눈알이나 장기를 쪼아 먹는 것을 빤히 보면서 당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자마자 곧바로 운명하셨다. 유월절 절기에 나무에 시체가 달리는 것을 유대인들이 원치 않아서 좌우의 두 죄수를 빨리 죽이려고 그 다리를 꺾었다. 주님은 그 때 이미 돌아가셨기에 꺾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19:32-33) 그전에 채찍에 맞은 것을 비롯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경우 십자가 고통의 시간이 통상보다 아주 짧았다는 뜻이다. 주님이 십자가의 육신적 고통을 피하려고 기도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
둘째 해석은 아무 죄도 없으신 주님이 스스로 죄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만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는 것이다. 율법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고 선포한다. 나무 십자가에 달릴 예수님은 율법에 규정된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당신의 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절감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삼일 간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와 소통은 완전히 단절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인간뿐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하여 당신 혼자만 완전히 고립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가 저절로 튀어나온 것이다. 주님으로선 이 단절이야말로 육체적 고통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께서 부활하실 것을 마태복음 기록만으로도 네 번이나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죽을 것과 또 삼일 후 부활 할 것은 사전에 확정되어 있었다. 이 두 번째 해석도 흔히 말하듯 뭔가 2%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부활이 어떤 것인가? 사상 초유의 일로 오병이어의 기적과도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그대로 실행할 수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다. 인간으로선 절대 불가능하며 입 밖에도 못 내는 말이다. 아예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주님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부활을 실제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또 성령의 역사로 부활 생명을 이미 자기들의 것으로 소유하고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인간 신자도 자기 죽음 앞에 그럴진대 주님은 더더욱 당당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겟세마네 기도가 납득되려면?
이처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세 번의 주저함은 부활과 전제 혹은 연결되어선 2%의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는다. 그럼 역으로 따지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이 이 때 부활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기도했다고 치면 그런 의구심은 사라지고 온전히 납득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본문의 기도는 네 복음서를 통 털어서 평소의 주님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예수님답지 않은 유일한 기록이다. 주님이 고민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37,38절) 실제로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는 표현이다. 십자가 죽음의 잔은 태초에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었다. 때가 차매 주님께서 그 잔을 마시러 오셨다. 이제 당신의 구주되심을 온 천하에 명백히 밝혀야 하는 결정적 시점이 닥쳤는데 갑자기 꽁무니 뺄 수는 없다.
따라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완전한 인간으로써 간구하신 것이다. 신성(神性)은 0%로 비워지고 인성(人性)은 100%로 채워진 상태에서의 기도였다. 지금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체 안에서 어떻게 상호 공존, 교통, 작용했는지에 관한 신학적으로 아주 난해한 문제를 살필 의도도 필요도 없다.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정미한지 모른다. 다시 38절을 보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했다. “죽게 되었으니 심히 고민된다.”고 하지 않았다. 문장의 주어는 마음이다.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죽음이 주어가 아니다. 영어 번역으로 보면 뜻이 더 확실해진다. “My soul is sorrowful, even to death.” 예수님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찼는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슬픔 때문에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는 극도의 슬픔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우리말에도 자주 쓰는 비슷한 표현이 있지 않는가? 쉬운 예로 배가 고파 죽겠다고 하는데 죽음이 닥쳐 배가 고파진 것이 아니다. 너무 허기가 져서 오직 밥 생각뿐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님의 마음에는 오직 슬픔으로만 가득 찼고 그 슬픔 때문에 죽을 정도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슬프게 된 이유는 십자가 처형의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정신적 영적 고뇌도 당연히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완전한 100% 인간으로써 드린 기도라면 그 외에도 인간의 정서상 생길 수 있는 비애도 더 있다고 봐야 한다.
죽을 정도로 슬픈 까닭은?
그것은 바로 제자들과 육신적 이별을 하는 슬픔이었다. 삼년이나 동고동락했음에도 제자 한 명은 은 30냥에 스승을 밀고하고 곧 잡으러 올 것이다. 수제자는 겨우 몇 시간 안에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며 나머지 제자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사람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이지 않는가? 거기다 주님은 그런 버림받음보다도 제자들의 너무나 가난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그 영적 실태가 더 안타까웠던 것이다.
이런 추정도 가능할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죽음의 잔을 피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룟 유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자의 대표가 되지 않았고, 또 베드로도 가장 비겁한 자의 대표가 되지 않았을 수 있지 않겠는가? 주님이 더 오래 함께 계셨더라면 당신의 권능으로 직접 그들을 의인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많이 아쉽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렇게 함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립되지 않고 십자가의 진리와 상충되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제자들을 그 어리석고 부족한 상태로 두고 가자니 슬프지 않았겠는가?
주님이 심히 슬퍼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약 오십 일 후에는 성령이 오시어 그 연약하고 비겁했던 제자들에게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담대한 권능으로 입히시고 십자가 군병으로 세울 것이다. 마지막 만찬 때에 주님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복음 전파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면 필연적으로 이 땅의 세상의 나라와 충돌이 격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 때에 제자들 각자가 겪을 핍박을 생각하니 슬픔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도 중에 왜 두 번이나 제자들을 찾아와 깨어서 기도하라고 당부했겠는가? 일차적으로는 당신이 가시는 외롭고 힘든 길에 동참은 할 수 없어도 기도로라도 후원을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만약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당신과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 즉, 십자가 처형의 고통과 하나님과의 단절에 관한 것뿐이었다면 구태여 중간에 제자들의 상태를 두 번씩이나 확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같은 세상 권력이 예수님의 권능에 눌리고 대중들의 호응이 신경 쓰여 절제했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서 없어진 다음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제자들도 스승이 당했던 것처럼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을 것이고,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이며, 산 채로 말에 찢기거나 껍질이 벗겨지거나 톱으로 토막 나서 죽게 될 것이다. 제자들이 당할 그런 핍박을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애처로워 땀이 핏 망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당부한 후에 두 번째로 와보니 아예 누워 자고 있으니 더더욱 뜨겁게 기도했던 것이다.
간혹 산모가 중병이 들었거나 이상 임신이 되어서 산모와 아기 둘 다 살릴 수 없고 둘 중 한 쪽의 생명을 포기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엄마가 아기를 위해 희생하기로 하면 앞으로 그 아이가 엄마 없이 자라면서 받을 상처는 엄청 클 것이다. 또 죄악과 고난으로 가득 찬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갈 때에 겪을 고통에 대해선 아기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엄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만 잘 것이다.
아기의 잠자는 모습을 보는 엄마의 가슴은 찢어질 것 아닌가? 중병으로 죽기보다는 끓어 넘치는 슬픔 때문에라도 죽을 것이다. 본문 38절의 설명이 바로 그런 뜻이다. 엄마는 또 죽을힘을 다해서 신생아실의 아기를 몇 번이고 보러 갈 것이다. 주님이 기도 중에 몇 번이나 제자들을 보러 오신 까닭이다. 이해가 되는가?
완전한 인간의 기도란?
다시 말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한마디로 100% 완전한 인간으로써의 기도였다. 세 번이나 동일한 내용으로 기도한 후에 유다가 올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리라고 말씀하셨다.(45절) 당신의 인간 메시아 되심을 스스로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상호 교통이 이뤄지는 정확한 시점과 양태는 인간이 구분하기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분만의 신비에 속한다. 확실한 사실은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부활하심으로 주님은 100% 완전한 신성을 회복할 것이다. 성자 하나님의 본래의 영광과 권능만으로 충만히 채워질 것이다. 이 땅에서 3년간 공사역 기간 동안에는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신성과 인성이 성호 완벽하게 교차했었다. 이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선 100% 완전한 인성을 갖고 기도하시고 있다.
무슨 뜻인가? 완전한 인간 제물로서 바쳐질 준비를 하는 기도였던 것이다. 주님은 제 2의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 원죄에 묶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들의 모든 죄 값을 지고서 인간을 대표하여 십자가에 올라가야 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완전한 결별이 이뤄질 것이다.
우주 전체에서 오직 혼자로 내버려질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함께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몰라 인생의 소망, 목적, 의미, 가치, 방향 등이 없이 세상에 완전히 내버려진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완전한 결별을 이룰 것이다. 그래야만 완전한 구속이 가능하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하신 의미이자 까닭이다. 주님은 실제로 완전히 버려졌던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지 않았고 모든 일에 우리처럼 시험 받되 죄는 없으신(히4:15) 상태로 십자가에 올라갔다. 주님은 단번에 자기를 드려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 것이다.(히7:27) 그래서 운명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요19:30)
주님의 그 의를 믿음으로 붙드는 자는 예수님의 피에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 즉,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장벽을 주님의 몸이 찢김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새 생명으로 살려주는 새로운 길이 활짝 열렸다.(히10:19,20)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해 그 새 길로 들어선 죄인을 주님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의 법이 아닌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에 들어왔기에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롬8:1,2)
겟세마네에서 주님의 기도는 스스로 완전한 죄인이 되려는 기도였다. 제자들과 똑 같은 비참하고 저주받는 위치로 내려가려 한 것이다. 당신의 신성을 완전히 벗고 인성만 입으려는 기도였다. 하나님 본체이신 주님의 입장에선 참으로 주저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십자가상의 “다 이루었다.”는 선포는 바로 그런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되었다는 뜻이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철두철미한 저주를 받으러 완전한 흑암으로 들어간다는 선언이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받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형벌을 당신 혼자서 어깨에 메겠다는 것이다. 또 그 어리석고 연약하며 잠만 자든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입혀서 세상 땅 끝까지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게 할 것이다. 나아가 그들로 그 복음전파로 겪을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이 새로 얻은 생명에 비해 정말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해주어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주님이 대속하신 결과
베드로가 스승을 잡으러 오는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칼로 자르자 주님이 손으로 만져 다시 붙여주셨다. 신성이 일부 작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한 인간되심의 취소나 변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신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감에 인간 제자의 도움이나 개입을 절대적으로 배제하려는 뜻이었다. 또 그럼으로써 베드로로 하여금 나중에 십자가의 구원 진리를 제대로 깨닫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 일은 이 땅에서의 주님의 마지막 기적이었다. 그럼에도 완전한 인간으로써 완전한 제물로 십자가에 드려지려는 목적이었다. 십자가만의 신비였다.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갈 때에 조금이라도 신성이 남아 있었다면 어떤 이단의 주장처럼 잠시 죽었다 깨어나는 깜짝 쇼를 했다는 오해를 받을 것 아닌가?
물론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주저하신 것처럼 보이는 이유와 그 기도하신 내용을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성경 앞뒤의 문맥에 나타난 당시 정황으로 봐선 처형의 고통과 하나님과 완전한 단절을 괴로워했다는 전통적인 두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거기에 이제부턴 추가로 두 가지 사항에도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주님은 제자들이 당할 고통에 대해 100% 완전한 인간으로 기도하셨고 또 그래서 슬픔이 가득 차 죽을 지경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온전한 인간으로 십자가에 드려져서 십자가가 온전한 십자가가 되게 하려는 기도였다는 것이다. 당신께서 가장 비참하고 애처로운 인간 사형수 죄인의 신분까지 내려가기 위해 당신을 완전히 비우는 고뇌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대속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이 행해야 할 일을 대신 하셨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행했던 일을 이제 직접 스스로 행해야만 한다. 죄가 없으신 주님이 완전한 인간, 한 인격체로서 당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인간의 죄가 사해지고 형벌에서 면죄되었다. 신자도 마찬가지로 자기 존재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서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여야 한다. 주님의 부활에도 동참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거듭남은 새로운 성품이나 기질같이 자신의 일부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열성과 믿음만 받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존재 자체를 하나님께 받는 것이다. 자신의 전부를 바쳤기에 자기 전부가 새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져서 그분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다. 이전과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또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야 한다. 신자는 베드로가 십자가 전후로 바뀌어졌던 과정을 동일하게 거쳐야만 한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대한 새로운 관점
본문의 기사를 접하는 신자는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예수님도 세 번이나 주저하는 기도를 했을까, 그것도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하셨다니 하면서 도리어 주님을 걱정해주는 것 같은 감상적인 이해는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또 기도는 신자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야 한다는 너무나 ABC 같은 교훈으로만 받아들이고 그쳐서도 안 된다. 나아가 예수님이 3일 간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었다면 그 사이에 영계에 어디로 갔었는지, 지옥을 방문했는지, 또 거기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같은 종교적 호기심을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다.
본문은 우리에게 죄 중에 빠져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너희가 거듭나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또 믿음을 갖고 난 후에 한 번이라도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린 적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자기의 전부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린 적이 있는지 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영적 어리석음과 가난함과 연약함을 아시고 애통해하는 마음이 가득 차서 죽을 지경이 된 것처럼, 신자도 자신의 가난함과 추함과 탐욕을 가슴을 찢으며 애통해야 한다. 최소한 주님의 우리를 보는 그 심정이라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세 번을 기도한 후에 당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로 따르겠다고 결단함으로 우리의 구속을 다 이루신 결과가 무엇인가? 어떤 흉악한 죄라도 예수님의 피로 씻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이다. 또 어떤 완악한 죄인이라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게 할 죄인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어떤 위대한 업적을 쌓아도, 인간 사회에서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데 메리트가 되지 못한다. 반대로 살인죄를 저질러 인간사회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아 그 집행만 기다리는 죄수라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당신의 자녀로 품어주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단 자기 존재 전체를 예수님께 바치고 그분의 십자가 진리 생명의 말씀 앞에 자신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완전히 찔러 쪼개어 내어드리는 한해서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 선행, 공로 등을 심사하지 않았다. 한 인격체 전체로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당신의 품 안으로 받아주셨다. 그 이후로도 신자가 어떤 일을 행해도 그것으로 신자를 평가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우리 존재 전체를 받으시고 품어주신다. 신자에게는 더 이상의 정죄는 없다. 구원이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예고했던 일과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일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의 인간 스승으로써 그들의 가난하고 연약한 모습을 품고 슬픔이 가득 차 죽을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다는 뜻이다. 성경 기사는 바로 앞뒤의 사건과 연결하여 해석함이 당연한 원칙이지 않는가? 이 기도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죄와 사탄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에 긍휼이 가득 차서 슬피 우셨던 것과 동일한 모습이다. 또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사탄의 흑암의 세력을 향해 저주하며 속으로 크게 통분했던 것과 같은 심정으로 기도하셨던 것이다.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오늘날의 신자는 예수님의 이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에게 채움으로써 부활 생명을 소지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마음은 아주 간단하다.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선 슬픔이 가득 차서 죽을 지경이다. 또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라도 되찾으면 기쁨으로 가득 차서 죽을 지경이다. 신자는 주님의 그 큰 기쁨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다. 그분이 우리를 볼 때에 기쁨이 넘쳐 주체하지 못하신다. 그런데도 어찌 이 땅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걱정과 염려와 슬픔에 잠겨 있을 수 있단 말인가?
10/19/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