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체포에 숨겨진 하나님의 큰 역설
마태복음강해 (242)



http://youtu.be/H89jS1RImZg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세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47-56)


죽기 위한 기도였나?  

예수님은 십자가 구속 사명의 완수와 남겨둘 제자들이 겪을 어려움을 위해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핍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십자가 죽음으로 이어졌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님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 사실상 당신의 죽음을 위한 기도였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결코 한 개인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았다. 인간 역사를 그 전과 후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다. 골고다 언덕에 나무 십자가가 세워짐으로 이 땅에 강력히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굳건히 뿌리박히게 되었다. 반면에 그때까지 이 땅을 무지함과 완악함과 사악함으로 뒤덮어 씌운 사탄의 나라는 뿌리 채 흔들리게 되었다.    

그 시발이 된 예수님의 체포 사건은 간단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에 언뜻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인다. 베드로가 무력으로 스승을 보호하려 시도했으나 주님은 그를 제지한 후에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유다처럼 가까운 사람을 배반하지 말라, 베드로처럼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함부로 하지 말라, 예수님을 닮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희생적 이타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해 적용하고 치운다.

하나 틀린 내용은 없고 다 옳다. 그러나 우리 신앙이 이 정도라면 너무 가난하고 부족한 모습이 아닌가? 황금 같은 일요일 오전에 교회에까지 와서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내용이지 않는가? 예수님의 이름만 들어가지 않으면 불신자들도 잘 알고 있고 어쩜 그 실천도 우리보다 잘할 것이다.

최근의 한국영화가 수준이 높아져 인기가 많아졌다. 장면의 전환이 빠르고 구체적인 설명을 진부하게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에 암시와 복선을 적절히 배치해서 관객들 스스로 판단토록 하여 그 얻는 감동을 배가(倍加) 시킨다. 이처럼 소설이나 영화 같은 다른 장르를 대할 때는 행간의 의미를 열심히 추적하면서도 신자들이 유독 성경만은 수박겉핥기 식으로 읽고 치운다.

그 이유가 믿음과 지성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다. 사탄의 훼방이 심해서도 아니다. 믿음을 가진 후에도 우리의 본성은 거룩을 향해 걷는 행보를 너무 게으르고 더디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을 고치려면 십자가 복음이 우리 심령에 살아 역동하는 생명으로 깊이 뿌리내려야만 한다. 아이러니 하게 그 길은 규칙적으로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길밖에 없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잘못은 성경을 읽어야만 없어진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자기 삶을 윤택하게 하려하지 말고 그 이전에 성경부터 제대로 읽어야 한다.  

본문에 깔린 암시와 복선들

본문 기사에는 자칫 놓치기 쉬운 암시나 복선이 몇 개가 깔려있다. 우선 예수님이 55절에서 지적하신 대로 당신께서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는데 왜 그 때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 오밤중에 체포한다고 난리를 치는가? 예수님은 또 시쳇말로 유대사회에서 한참 뜨고 있는 대세였다. 고난주간 첫날 종려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찬양하며 열렬히 환영하는 광경을 유대와 로마 당국도 예의주시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의 얼굴도 못 알아보고 유다와 입맞춤의 암호를 짰어야만 했는가?

나사렛의 한 젊은 랍비를 추종하는 무리가 급격히 늘어나자 유대 종교 지도층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조사단을 파견했고 구약성경과 하나님의 영적 원리에 대해서 토론도 해봤지만 신학적 하자를 발견할 수 없었고 도리어 자기들 잘못만 지적당하며 야단맞았다. 주님이 여러 이적까지 베풀자 대중의 인기는 예수님께 쏠리기에 죽이기로 결안했다.

며칠 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 사실상 유대의 왕으로 경배했고 왕처럼 행진했다. 유월절을 지키러 온 2백만이 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그 흐름에 가세하면 큰일이다 싶어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단지 절기 중에는 민요가 날까 두려워 축제가 끝나고 체포하려 했다.(마26:5) 그런데 지금껏 살펴본 대로 주님은 유월절 식사를 하루 앞당겼고 또 그 식사 중에 유다의 모반음모가 탄로 난 줄 알고 부랴부랴 서둘러 결행한 것이다.  

만약 대낮에 체포를 하면 사람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한 밤중에 사람의 시선이 차단되는 아주 한적한 곳에서 체포해야 했다. 유대인을 비롯해 고대 남자들은 면도가 쉬운 일이 아니라 다들 수염이 터부룩하게 길었다. 당시 옷도 투박하고 우중충한 색깔에 모두 동일한 스타일이었다. 컴컴한 밤중에 성인 남자들이 함께 모여 있으면 누가 누구인지 식별하기 힘들다.

결정적 이유로는 주님께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과 풍채가 전혀 없었다.(사53:2)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처럼 남들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크지도 않았다. 둘째 왕 다윗처럼 소년의 영민한 기풍도 없었다. 너무나 평범한 보통 유대 남자였다.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제물로 드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노예 한 명의 몸값 밖에 안 되는 은 30냥이라는 헐값에 팔아 넘겼다. 그가 꼭 돈에 욕심이 있었던 것만이 아님을 이미 살펴보았다. 거기다 구태여 유다의 도움 없이도 유대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체포가 가능했다.(55절) 지금처럼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체포할 수 있는 정보만 제공했기에 값이 쌀 수밖에 없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왕에 주님을 빨리 체포하게 되었으면 유월절 전에 모든 절차를 마치려 했다. 나무에 시체를 달리게 할 수 없어서 속전속결로 밤새 무리하게 재판을 결행하고 곧바로 사형을 집행했다. 또 그래서 좌우의 강도의 다리를 꺾어서 빨리 죽였는데 주님은 이미 죽었기에 다리를 꺾지 않았다.
  
뱀처럼 사악하고 지혜로운 유대 지도자들

이처럼 유대 지도자들은 뱀처럼 사악하고 지혜로웠다. 자기들 계산대로 십자가 처형을 완벽하게 진행시켰다. 혹시라도 예수님이 신기한 능력을 사용할까 가장 염려했기에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들고 왔다.(47절) 그런데 주님은 전혀 예상 밖으로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틀림없이 속으로 이렇게 유약하고 별다른 능력도 없는 자였던가라고 여겼을 것이다.

잔뜩 겁을 먹고 긴장했다가 막상 아무 것도 아니면 오히려 화가 난다. 대제사장 하속과 로마 군병들이 주님을 더 멸시하고 비아냥거렸던 것도 바로 이런 사람의 치사하고도 추한 본성의 발로다. 네가 메시아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놀린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들이 그 유명하고 능력이 많다는 랍비를 꼼짝 못하게 묶었으니 마치 자기들이 더 능력이 있고 똑똑한 양 헛된 착각에 도취된 것이다.  

스승이 너무나 무력하게 당하는 모습을 본 제자들은 순식간에 다 도망쳤다. 유대 지도자들로선 이렇게 간단히 끝날 일을 그 동안에 괜히 골머리 썩이며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시간과 경비를 낭비했나 싶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골칫거리가 없어져 시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너무 싱겁게 끝나 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순순히 체포에 응해준 배경에 깔려 있는 하나님의 암시와 복선들을 전혀 읽지 못했다. 무엇보다 예수님 말씀대로(54, 56절) 성경과 선지자의 글들이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을 예고한 것과(시4:9), 은 30냥에 팔릴 것과(슥11:12), 죄인과 함께 못 박힐 것과(사53:12), 수족이 찔릴 것과(슥12:10), 그럼에도 뼈는 꺾이지 않을 것과(시34:20), 부자의 묘실에 묻힐 것(사53:9) 등등 그 많은 예언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었다. 한두 개까진 우연의 일치일 수 있어도 구약성경 전체가 완벽하게 십자가로 집대성되어 실현된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이 태초에 완벽하게 작정한 것이 틀림없다.

참으로 신묘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킨 것을 말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정도는 그분에겐 아무 일도 아니다. 구약성경의 최고 전문가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부인시키고 나사렛 이단 운동을 말살하려 도모했다. 그리고 완벽하게 그 계획은 성공했다. 그런데 역으로 따지면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더 확실히 보장된 꼴이 되었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그렇게 되리라 상상도 못했고 그렇게 된 후에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인간 사회의 최고 지성인이자 종교가가 모략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최대의 정치적 종교적 승리를 이뤘다고 자부했다. 반면에 하나님의 관점에선 역사상 가장 사악하고 교만하고 무지하기까지 한 최대의 실패였다.    

주님이 마지막 세 번째 기도를 마친 후에 인자가 죄인에게 팔리우리라고 했다.(45절), 십자가 처형을 속 시원히 해치우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표정관리하기 바쁜 세상의 최고 의인들을 두고 하나님의 본체로서 죄인들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그들에게 더 불행했던 사실은 예수님이 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려 그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 그 죄인 중에는 당신을 체포하여 사형시키는 자기들까지 포함된 줄 알지 못했다. 바로 자기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그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전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시기 직전에 저들이 자기들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는가?

바로 이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기준은 도덕적 선행이나 종교적 업적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은혜 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세상 사람들도 신자가 로마의 사형수에 불과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이성적으로 합당하다고 자부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자기 인생 최대의 실패임을 모른다.

체포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복선

이 체포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복선이 하나 더 남았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 특별히 베드로를 함께 체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법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은 사상범이지만 베드로는 살인미수 현행범이다. 칼로 저항했기에 공무집행 방해죄도 된다. 물론 예수님이 그 귀를 금방 붙여주었기에 문제를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 대제사장의 관정에서 세 번이나 의심을 받았을 정도라면 속된 말로 일단 잡아 족치면 예수님과 공범임이 밝혀질 것이다. 십자가 처형까진 몰라도 투옥시키거나 채찍의 형벌을 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오직 하나다. 아주 간단하다. 유대 지도자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예수를 잡아 죽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큰 무리가 검과 몽치로 무장한 것도 예수님이 또 다른 권능을 드러낼까 노심초사한 것이다. 가룟 유다더러 예수님만 정확하게 지목하라고 요구한 까닭이다.

역으로 따지면 무슨 뜻이 되는가? 예수님을 그토록 증오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가 없으면 그 추종하는 무리들이 단번에 오합지졸이 된다는 점을 알았던 것이다. 예수 한 명만 제거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와해될 것이라고 믿었다. 제자들이 주님을 따른 이유도 질병을 고쳐주고 오병이어로 먹을 것을 채워주고 비천하고 소외되고 율법에 따라 죄인으로 취급받는 자들을 교제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 믿는 까닭이 현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예수가 없어지면 그런 복 받을 일이 없어지니까 자연히 소멸되리라 예상한 것이다. 예수 운동은 자기들 구약성경 같은 심오하고 경건한 도덕율과 종교계명은 물론, 거룩한 성전과 체계적인 조직도 갖추지 못한 한갓 이단 사설에 불과하다고 무시한 것이다.

예수만 제거하면 된다는 그들의 계산 또한 그대로 적중되었다. 세상 최고 수준의 지혜가 또 한 번 빛을 발휘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부인하려다 오히려 더 확증시켜 주었듯이, 이번에도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가 동일하게 개입되었다. 그들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진리가 온전히 드러났다. 무엇이겠는가? 바로 예수가 없이는 모든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부재한다고 해서 단순히 그분의 능력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인생과 삶에서 소망, 의미, 가치, 목적, 방향까지 모두 상실된다는 점이다.

참으로 신묘하지 않는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이적을 일으키는 권능만 사라지면 예수 운동도 자연히 소멸될 줄 알았다. 실제로 처음에는 그들의 기대대로 되었다. 그런데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자 사정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비록 처음에는 두려움에 빠져 숨어서 만나긴 했지만 제자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예수 운동은 오히려 더 활활 불붙게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는 주님의 약속이 실제로 확증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긴 후에 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 성령이 오시면 당신께서 가르친 것이 영원한 절대적 진리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해준다(요8:32)고 약속하셨는데 실제로 제자들에게 그 약속이 응해져 자유롭게 되었던 것이다.
`        
그럼 그 진리는 또 무엇인가? 성경이 계시하는 기독교 교리나 계명이 아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님 당신이 곧 진리다. 예수님 그분이 누구인지, 십자가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다. 또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지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만 제거하면 나머지 모두는 상대할 필요도 없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진짜로 그렇게 되었다. 역으로 제자들에게 예수만 있다면 그들이 도무지 감당 못할 예수 같은 자가 된다는 뜻인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 않는가? 이 얼마나 놀라운 기독교의 역설인가?

예수로 살고 죽는가?

서두에서 많은 신자들이 본문을 스승을 배반 부인하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예수님처럼 평화주의자로 살아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치운다고 했다. 그럼 예수라는 이름만 빼면 세상의 도덕률과 똑같이 된다. 실제로 그렇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도 절대자, 신, 하느님 그 이름을 어떻게 부르든 어쨌든 하나님은 믿는다. 우리의 믿음은 다르다. 예수의 거룩한 이름을 붙든다. 그 이름에 담긴 너무나 풍성하고 오묘하며 거룩한 권능과 은혜와 진리와 사랑을 우리 존재 안에 담는 것이다. 예수 생명이 실제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만이 나의 처음이자 끝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 그분을 인격적 개인적으로 만나서 새로운 사람으로 완전히 뒤집어지는 체험을 한다. 그 이후로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광채를 받아서 주변 이웃을 향해 반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그분으로 인해서 살고 죽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자더러 완벽하게 경건하고 거룩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기독교 활동만 하라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땅 끝까지 복음 전하다가 순교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예수로 인해 참 인생으로 바뀌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첫째 기준이 있다.  예수 믿기를 정말로 잘했다는 확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고 실토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뜻에 따라는 것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성공으로 이보다 더 큰 성공은 결코 없다는 고백이 따라야 한다. 예수 그분을 몰랐다면 내 인생이 죽을 때까지 허망하고 갈급하여 살아갈 의미, 가치, 소망이 전혀 없고 그 방향마저 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절감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주로 어부, 병자, 불구자, 세리, 창녀, 과부 등과 교제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비참한 이웃을 몸소 섬기는 본을 보였다. 불쌍해서 도와준 것 이전에 죄에 묶여 있기에 안타까이 여긴 것이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죄인인지라 하나님만의 긍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 도무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신들의 영적 가난함과 무지함을 온전히 시인하며 오직 하나님의 용서만 바라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구원하셨다. 그 사람 안에 자신의 전부를 부어 넣어주셨다. 당신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주셨다.  

너희 부르심을 보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 부르심을 보라고 도전한다.(고전1:26-31)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예수님이 인격적 개인적으로 만나준 자다. 지혜 있고 능하며 문벌 좋은 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대신에 미련하고 약하며 천하고 멸시 받는 자들을 택하셨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예수 믿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어서 더 중요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많은 신자들이 간과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신자는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자다. 예수님 그분을 내 존재와 삶과 인생의 유일하고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면 그분이 신자로 지혜롭고 의롭고 거룩한 구속을 이뤄주신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그분의 자녀로 삼아서 그분의 은혜 가운데 살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십자가 우편의 사형수 강도는 예수님 그분만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교리대로 살아 성화를 이뤄나가는 신앙생활을 할 기회라곤 전혀 없었다. 교리 자체를 몰랐다. 그럼에도 예수님과 인격적 교통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옮겨졌다. 만약에 순전히 가정이긴 해도 그가 사형을 면제 받아 더 살게 되었다 쳐도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해도 예수만은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신자도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지 점검하는 기준이 바로 그것이다. 비록 가끔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죽으면 죽었지 예수 믿기 이전의 삶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신이 있느냐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대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숨겨진 복선을 읽지 못했던 것 같은 인간으로써의 가장 큰 착각과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 예수 안에 있는 것이며 또 주님도 그 신자 안에 반드시 살아 역사하여 당신의 영광의 자리로 이끌고야 만다.

지금 참으로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늘날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는데도 불신자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 눈에 교회 안에 예수가 부재(不在)함을 보고  신자가 예수가 없이 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작금 신자들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이유가 자기 속에 있는 예수 생명을 더 키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의 능력을 빌려서 자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려는 목적뿐임을  불신자들도 눈치 채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대제사장이 예상한대로 예수의 능력만 없어지면 곧바로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처럼 된다. 주님의 부활을 보고 성령을 받아 부활생명을 소지했기에 십자가 후의 베드로처럼 십자가마저 달게 지는 신자들을 너무나 보기 힘들어졌다.

신자는 세상에서의 위치와 신분이 아무리 궁핍해도 예수의 의로움으로 어떤 핍박과 손해도 감수하며 죄악과 사탄과 사망에 당당히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이 부재하자 오히려 실재했을 때보다 더 큰 권능을 갖고 담대해졌다. 본문의 상황에선  예수 한 명만 체포하면 되었지만 십자가 후로는 예수와 같은 자 수백, 수천, 수만 명을 상대해야만 했다. 바로 그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바로 주님의 그런 큰 권능 안에 있다. 주님에 대한 진정한 확신으로 날마다 그분 앞에 겸손히 엎드리면 예수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으로 우리를 세워주신다. 베드로 바울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우리를 통해 세상이 도무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나라가 염병처럼 번져나가게 해주신다.      

10/26/2014

사라의 웃음

2014.10.27 00:18:04
*.109.85.156

세상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교회안에 있는 신자임이...예수님 안에 있지 못하기에, 그 분의 빛을 저희 모습으로 가리우고 있기에 그러한 것임을 배웁니다.
십자가에 감추인 하나님의 역설로 구원받은 자임을 자주 잊고, 아니 어쩌면 그 예수님 조차도 저의 의로 또 덮어버리고, 가리우고 있기에 그러한 것임을.,,,

prisca kim

2014.10.28 03:31:52
*.231.18.168

아멘!! 주님께 아무런 요구조차 할 수 없는 자격없는 죄인에게 ...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너무나 감사하고 귀함을 깨우칩니다.
날마다 나부터 살피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나갈때 주의 귀한 복음이 전해지게 하소서...귀 한 말씀 되새기고 되새기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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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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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창세기강해 #13 - 창2:1-3)

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 창세기 강해 (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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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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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 창2:1-3)

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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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31
  • 조회 수 551

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창2:4-7)

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耕作)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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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24
  • 조회 수 361

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 창1:26-28)

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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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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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 창1:31)

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이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영어를 숙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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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0
  • 조회 수 479

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강해 #8 - 창1:20-23)

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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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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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세기 강해 #7 - 창1:9-13)

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1:9-13) 창세기 강해 (7)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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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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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 창1:14-19)

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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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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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부활절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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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5
  • 조회 수 426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 창1:9-13)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http://youtu.be/rMSIX3C2UK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 창1:9-13)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http://youtu.be/qHjkSiEz-O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 창1:6-8) [2]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http://youtu.be/opQj6Y6sXw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 창1:1-5) [2]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http://youtu.be/ASb2eX056x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 창1:1)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http://youtu.be/eCSGTueOy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조적 진화론? 저는 서른세 살에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마28:17-20) [2]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http://youtu.be/IiltnYNxUe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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