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가득 찬 가인의 후예들
마태복음강해 (243)



http://youtu.be/_azfFGIzNqs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마26:57-62)


역사상 가장 사악한 재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오밤중에 긴급 체포된 예수님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이 곳 저 곳으로 끌려 다니며 재판을 받았다. 마태는 먼저 가야바에게 심문받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57절) 그러나 네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먼저 그의 장인이자 전임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 재판받았다. 안나스가 아직도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섭정을 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주님은 가야바, 빌라도에게 일차 심문을 받은 후에 헤롯왕에게 보내졌다. 다시 빌라도에게 마지막으로 이차 심문을 받은 후에 금요일 아침 9시 경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그렇게 열렬히 환영하던 유대 대중들이 단 며칠 사이에 십자가에 매달라고 돌변한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이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 다윗 왕국의 영광으로 회복시키는 정치적 메시아의 역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기 마련이다.

그러나 재판이 밤중에 비밀리에 황급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유대 대중들은 본문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때에 사실은 단잠에 빠져 있었다. 비록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녀 소란스러웠겠지만 혹시라도 민요가 날까 극도로 염려했기에 대제사장이 동원했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이 재판을 주도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다고 한다.(60절)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았거나 자진해서 잘 보여 나중에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이 저녁의 예수님 재판은 역사상 가장 불공평하다 못해 사악한 재판이었다. 절차상의 하자가 너무 많았다. 판결은 물론 재판 자체가 원천적으로 무효였다. 첫째, 유대 소송법 상 밤중에 재판을 할 수 없었음에도 자정이 넘어 새벽까지 강행했다. 둘째, 산헤드린 공회를 공회당에서 개최하지 않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진행했다.

셋째, 온 공회라고 표현했지만(59절) 공회원 총 72명이 다 모였다는 뜻이 아니다. 그곳에 모인 공회원 모두가 의견 일치를 보였다는 뜻이다. 의사 정족수인 23명은 채웠겠지만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온건파가 반대 의견을 개진할 가능성을 차단했다. 밤중에 강경파끼리 모여서 사전에 정해진 각본에 따라 재판을 진행한 것이다.

넷째, 예수님에겐 변호인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피고 본인이 변호사가 아닌 이상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심지어 적국의 원수라도 국선 변호인은 붙여준다. 다섯째, 사형을 시킬 정도의 중요한 재판은 최소 이틀은 심리해야만 하는데 몇 시간 만에 속전속결로 해치웠다. 여섯째 이틀간 심리를 하려면 유월절 같은 절기나 안식일 하루 전에는 재판을 해선 안 되었다.

일곱째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나스의 재판 때에 아예 증인을 부르지도 않고 대제사장이 직접 피고를 심문했다. 여덟째 마가복음(14:56-60)은 증인들 사이에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증거로 성립되지 않는데도 대제사장은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고 기소근거로 채택했다. 이처럼 명백한 하자사항만 여덟이나 되는 완전 불법재판이었다.

사형 받아야 할 공회원들

그들에게 율법을 적용하면 재판에 참여한 대제사장과 공회원들과 증인들 모두가 율법에 따라 사형 받아 마땅했다. 쌍방 간에 반드시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하며 타국인에게도 그래야 했다.(신1:6) 원수에게도 변호인을 붙여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 쪽에는 변호인은 물론 증인도 한 명도 세우지 않았다. 이것만 해도 율법을 대놓고 어긴 것이다.    

더 결정적인 하자는 따로 있었다. 율법은 위증자가 거짓 모함을 하면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했던 그대로 되돌려주라고 규정한다.(신19:14-21) 거짓 증거가 채택되어 가해질 형량과동일한 벌을 주라는 것이다. 이어서 생명에는 생명,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그 유명한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성경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는가? 잘못을 범한 자에게 동해로 보복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거짓 증거한 자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말이다.

지금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얽어매 사형을 시키려 한다. 거짓 증인은 물론 그 증거를 채택한 대제사장과 공회원 모두가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 형제에게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9계명마저 눈도 깜짝 않고 범했다.

누가 그랬는가? 백성이 율법을 어기는지 조사, 판단, 징계, 교육 시킬 책임이 잇는 대제사장이다. 쉽게 비유하면 대법원장이 스스로 헌법을 어겨가며 아무 죄 없는 무고한 자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셈이다.

절차를 무시하며 재판이 가능한 유일한 예외가 있다. 전투 중에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할 때에 즉결처분의 권한을 주는 것이다. 그 외에는 서부 영화에 가끔 나오듯이 무법자들이 시민을 멋대로 린치하여 교수형 시키거나, 현대에는 테러리스트들이 아무 연관 없는 자를 무차별로 살해하는 경우뿐이다.

예수님의 재판은 도무지 재판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바로 린치요 테러였다. 정작 사형을 받아야 할 자들은 예수님 한 분만을 제외한 그날 밤 가야바의 뜰에 모인 모든 인간들이었다. 본문의 간단한 상황을 조금만 따져 봐도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 하나님께 드려진 어린양 제물임이 틀림없지 않는가?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못 느꼈을까?

그들이 재판을 진행하며 절차상 불법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까? 율법의 최고전문가들로서 매일 율법을 가르치고 토론했기에 모세오경은 암송할 정도였다. 평소 사람들에게 아주 세밀한 규정까지 적용 판단하는 자들이 몰랐을 리는 없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어쩌면 재판 내내 심령이 찜찜하게 억눌렸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이성적 판단과 양심의 가책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들보다 더 강력한 자기들만의 어떤 목적이나 동기, 혹은 자기들을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예수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다. 죽여서 갈아 마시고 싶을 만큼의 예수에 대한 증오와 저주였다.

아무리 포악한 피의자라도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취급해야 하는 것이 재판의 절대적 원칙이다. 예수님은 재판 전에 이미 유죄로 확정된 차원을 넘었다. 반드시 사형시켜야 한다고 형벌이 정해졌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에 매달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모습으로 처형하기로 확정되었다. 재판은 그에 무리하게 끼워 맞춘 최소의 요식행위였을 뿐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 빌라도에게 재판을 요청했지만 그는 예수가 로마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유대의 종교사상범에 불과한 줄 알고선 “너희 법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항변했다.(요18:31) 재판장인 빌라도에게 무슨 죄목인지 밝히기도 전이었다. 우린 이 사람을 꼭 죽이고 싶다. 특별히 유대 지도층 모두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러니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당신이 우리 대신에 꼭 죽여 달라는 간청이었다. 바로 살인교사 죄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빌라도로선 도무지 사형시킬 만한 잘못을 찾지 못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자기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는 발뺌을 했다.(마27:24) 유대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까지 꼭두새벽에 찾아와서 꼭 죽여 달라니 그의 체면을 봐서라도 죽여주겠는데 정치, 종교적 특별히 도덕적 책임은 너희가 지라는 것이다. 본문도 “예수를 죽이려는 증거를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59절) 명백한 증거에 따라 형량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사형을 정해놓고 거짓 증거를 조작했다.  

이 얼마나 가공할 죄악인가? 인간이 이렇게 끔찍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가? 그것도 당대의 최고로 경건한 의인으로 존경받는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말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것이 바로 인간이란 존재다. 짐승의 탈을 쓴 게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 인간의 탈을 쓴 것에 불과하다. 아니 짐승은 이렇게까지 교묘하고 음흉한 죄를 짓지 못한다. 짐승이 아니라 사탄의 영에 묶여 있다.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고상한 존재라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끼리 노력하면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목표로 한다. 그럼 믿음이 절대적으로 틀렸고 너무나 어리석기까지 하다는 것을 철두철미 입증하는 것이 바로 예수 십자가 사건이다.

주님을 십자가에 매단 더 근본적인 이유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대중의 인기가 예수님에게 쏠리자 자기들 기득권에 대한 위협이라고 간주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자기들 밥 그릇 크기가 줄까 걱정한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유대교 자체를 부인하고 폐지하려 했다면 성전 제물과 헌금이 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문둥병을 치료해주고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정결례를 치르라고 가르쳤다.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계속 강조했다.

거기다 공회원 같은 지도자들은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부와 권력을 누렸다. 만약 자기들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면 스스로 해결하거나 로마의 개입을 요청할 수 있었다. 가야바와 안나스 모두 로마총독이 임명한 대제사장들이었다. 주님을 십자가로 내몬 것에는 경제적 종교적 동기가 일부 작용한 것은 맞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12장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지나다 이삭을 잘라 먹었다. 밀밭에 떨어진 이삭을 발로 밟아서 먹는 것은 괜찮아도 손으로 잘라 비비는 것은 노동 행위에 해당되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모세의 율법에는 없는 바리새 율법의 위반이다.

그러자 주님은 다윗이 안식일에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 진설병을 먹었지 않느냐고 변호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세율법도 어길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 율법이 바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덧붙였다. 안식일 제도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러 왔는데 바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되 더 풍성하게 주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안식일 논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제2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를 떠나 회당에 들어가서 손 마른 자를 주님이 고쳐주셨다. 그를 마사지 하거나 안수하지 않았다. 단순히 “손을 내밀라”는 말씀 한마디로 치유했다. 노동행위가 전무했다. 모세 율법은 물론 바리새 율법도 어기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의 기록이 참으로 정미하지 않는가? 정확히 말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으로 완벽하셨기에 그대로 기록한 성경도 자연히 정미할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예수를 죽일꼬 논의했다.(마12:14) 그 이후로는 오직 죽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주일예배 중에 급성맹장염으로 쓰러진 신자를 병원응급실로 데려다 준  사람을 예배에 빠졌다고 죽이려 드는 꼴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주님이 치료해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미워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자기들이 정한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바로 자기들의 구겨진 자존심 때문에 죽이려 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 경제 정치 종교 차원에서 손해를 입힌 적이 하나 없다. 유대교 체계 전체를 향해선 야단을 쳤어도 개인적으로 모독한 일도 없다. 바리새인들이 구약성경을 두고 신학적 논쟁을 먼저 걸어와선 본전도 못 찾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들에겐 없는 하나님의 권능을 예수님이 발휘하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자기들이 구약성경에 가장 능통하고 또 실천하고 있기에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자기들과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주님이 월등히 많이 갖고 있기에 자기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시기와 질투심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성경에서 십자가와 아주 비슷한 사건

성경 어딘가에 아주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것 같지 않은가?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바로 그랬지 않는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고 자기 제사는 그러지 않자 격분했다. 아벨이 가인에게 손해 입히거나 잘못한 것 하나 없었다. 말싸움조차 하지 않았다. 각자가 따로 하나님께 제사 지냈다. 가인도 나름대로 열심과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다.

그럼에도 자기 자존심이 상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자기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친 동생을 죽였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바로 이런 가인의 후예였다. 또 다시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인 빌라도 총독마저도 그들이 시기하여 예수를 넘겨준 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마27:18)

가인의 후예라고 해서 저주 받은 혈통에서 태어난 타고난 살인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 이전에 바로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이라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서 서로 나눠 먹었다. 인간끼리는 손해 입히거나 잘못한 것 하나 없고 오히려 신나고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이 너희들이 하나님처럼 될까봐 시기해서 선악과를 못 먹게 했다고 부추겼다. 자식이 잘 되면 부모로선 너무나 자랑스럽기만 하다,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릴 자로 인간을 세운 하나님이 그들을 시기 질투할 리 만무하다.

사탄의 거짓에 속아 넘어간 아담은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이 낙원을 가꾸는데 하나님이 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데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자기가 다 가꾸었고 혼자서도 충분히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낙원에서 제일 좋은 과일은 먹지 못하게 하다니 하나님이 나를 시기 질투한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무시 내지 경시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높아진 자존심을 건드린다면 하나님도 거역하겠다고 덤빈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시기 질투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께 그랬다.  

가인이 동생 아벨에 대해서도 시기 질투를 느낀 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에게 더 큰 분노를 표출했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도 모세에게 수여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대놓고 어겼다. 하나님을 무시했고 나아가 거역하고 대적했다. 하나님 본체 되시는 예수님 그분을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죄목을 씌워 죽였다. 자기들 자존심을 건드리면 하나님의 율법은 물론 그분마저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후예이자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의, 특별히 세상에서 가장 경건하고 의로웠던 자들의 영적인 실상이었다.

유대인들의 복수에 숨겨진 뜻

유대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구겨진 자존심을 예수님께 어떻게 복수했는지 그 과정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자고 제안했다.(요11:50) 민족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지만 무죄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무나 교묘하고 치사하고 음흉한 모략인데도 겉으로는 의로운 명분으로 포장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정말로 오묘하고 신비하지 않는가? 공회원들은 예수를 꼭 죽여야만 하겠다는 속마음을 꼭꼭 숨기고서 아주 그럴싸한 핑계를 대었다. 그런데 자기들이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의 경륜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아니 상상도 못했지만, 어쨌든 예수가 유대 민족을 구원시킬 희생양이었음을 결과적으로 자기들 입술로 시인한 셈이지 않는가?

그들은 이미 율법을 어길 대로 다 어겼다. 그럼에도 유월절 절기가 시작하기 전에 재판을 마치려 했다. 또 절기 중에는 사형집행을 하지 않고 시체가 나무에 걸려있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나름대로 일부 율법의 규정을 열심히 지켰다. 율법을 온전히 준수한다는 핑계를 마련한 것이다. 또 이미 율법을 어긴 잘못을 다른 율법을 지킴으로써 상쇄하려 한 것이다.

또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로마인의 손을 빌려 예수를 처형했다. 예수님을 처형했다는 근본적이고도 최종적 책임에서 빠져나가려는 얕은 수였다. 역으로 말하면 자기들이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는 반증이며, 그 스쳐지나간 도덕적 찔림에서마저 해방되려는 너무나 이기적인 자구책이었다. 죄를 인간 스스로 씻어보려는 헛수고였다.  

인간이 얼마나 더럽고 추하며 치사하고 비겁한지 이젠 조금 실감이 들 것이다. 모든 인간의 본성이 이러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려, 나아가 당신을 십자가로 내몬 유대지도자들의 죄마저 용서받게 하려고 하나님께 어린 양으로 바쳐졌다. 그러나 너무나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 받은 랍비로, 오늘날의 불신자들은 로마의 한 사형수로만 취급하고 무시, 외면, 거역, 대적하고 있다.

현재에도 다반사로 일어나는 린치와 테러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본문의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린치요 테러였다. 그런데 이천 년 전에 한번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오늘날도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다. 한국 군사정권 때에 간첩으로 조작하여 반공법으로 사형 시킨 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뒤늦게나마 판정을 번복하고 복권시켜서 보상했다.

그보다 교회 안이 더 문제다.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할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도 자존심을 걸고 피가 나게 싸우고 있다. 그것도 쌍방이 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앞세우고 말이다.

매일 살을 맞대고 살며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는 신자 부부사이에도, 혈연의 사랑으로 묶인 신자의 부모자식 간에도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 치고받고 싸운다. 언어폭력을 사용해 정신적 인격적 살인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자행한다.  

교회에서 비천하고 소외되고 상처 받은 자들을 주님의 사랑과 긍휼로 치유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어떻게 하든 뜨겁고 열성적 믿음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복을 더 받아내는 경쟁 터로 변모했다. 그 이전에 비슷한 지위, 신분, 소득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교제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친목단체로 전락했다.

죄송하지만 담임목사에게 사주 받은 사람들이나 담임 목사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주도하는 이익집단이 되어버렸다. 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자아실현, 자기만족 즉 자신의 자존심을 높이는 데만 믿음을 동원하고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적 허울만 벗겨버리면 아담의 원죄에서 한 걸음도 진전되지 않은 모습이다. 기독교라는 종교는 왕성한데 하나님의 참 생명은 완전히 실종되었다.

절망만 안기는 본문의 기사?

본문이 말하는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라. 캄캄한 밤중에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반드시 십자가에 달아 죽이고야 말겠다는 한 가지 일에 완전히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율법은 안중에도 없었다. 유대 민족의 자긍심이자 자랑이었던 율법의 최종 수호자인 대제사장이 평소에는 그렇게도 싫어하던 헤롯왕과 빌라도 총독 앞에서 오직 예수를 죽여만 달라고 간청하며 굽실거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거룩한 명분을 앞세우고서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거역하면서 자기들의 구겨진 자존심만 세우려 든 것이다. 사탄이 거짓으로 증거 하여 아담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 즉, 본문의 유대인들도 사탄에게 미혹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인간들의 이 얼마나 가련하고 비참한 실존이자 운명인가?

본문의 기록이 그래서 우리로 한없는 절망으로 빠트리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본문은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사건이었다. 지금은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다. 거짓 증거를 한 사탄을 하나님의 동해보복법에 따라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에게 동일한 죽음의 벌을 주었다. 그 권세를 십자가로 완전히 깨트리고 사탄에게 미혹된 영혼들을 구원할 길을 활짝 열었다. 그때까지 죄에 빠진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 막고 있던 벽을 완전히 허물었다. 인간들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소망을 심어주셨다.

오직 자존심 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은 누구라도 자기 기분을 건드리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잔뜩 웅크린 고슴도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는 절대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껏 살펴 본대로 인간은 물론 사탄의 요구까지 하나 빠지지 않고 다 들어주셨다.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역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없이는 인간에게 절망과 죽음뿐이라는 절대적 진리를 보여주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뜻이다. 당신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당신의 전부를 바쳐서 깨닫게 해주셨고 실제로 신자에겐 당신의 전부를 부어주셨다. 성령이 임하자 한 죄인의 속에 견고히 버티고 있던 사탄의 진이 완전히 깨트려졌다. 그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가 쪼개어지고 벌거벗겨졌으며 그 위에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충만히 채워졌다.

예수를 믿는다는 근본적인 의미는 그래서 먼저 철두철미 추하고 더럽고 사악하기까지 자신의 영적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런 자신과 대조해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너무나 크신 사랑 앞에 나의 전부를 바치며 항복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예수님을 인격적 개인적으로 대면하여서 그분을 나의 소망과 의미와 가치로 온전히 받아들였어야 한다. 그것도 내 자신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이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와 충만히 채워졌던 것이어야 한다.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인간이 가진 최고의 지혜와 모략을 총동원해도 예수를 알기 전에는 내 주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린치와 테러를 자행했었다. 그러나 이젠 예수님의 사랑을 날마다 받아 누리기에 그 사랑을 주위에 나누고 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이 반드시 살고 있어야 할 온전한 모습으로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써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수님 안에서의 참된 자존심을 회복한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 진리를 아니 엄연한 사실을 실감하는가? 또 그렇게 살고 있는가?

11/2/2014

운영자

2014.11.10 15:33:32
*.63.152.149

어제 11/9 주일은 제가 급하게 타지에 여행하여
그곳의 미국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설교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분들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가 한 주 휴가 간 것으로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부터 다시 강해를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샬롬!

prisca kim

2014.11.10 21:17:46
*.231.18.168

네^^ 목사님.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말씀 감사히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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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ster
  • 201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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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믿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16 - 창2:15-17) [1]

목숨 걸고 믿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살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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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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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범죄는 인간 최고의 의로움이다. (창세기강해 #15 - 창2:15-17)

선악과 범죄는 인간 최고의 의로움이다. 창세기 강해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살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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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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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창세기 강해 #14 - 창2:7-9)

에덴동산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창세기 강해 (14)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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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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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창세기강해 #13 - 창2:1-3)

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 창세기 강해 (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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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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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 창2:1-3)

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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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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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창2:4-7)

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耕作)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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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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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 창1:26-28)

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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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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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 창1:31)

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이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영어를 숙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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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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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강해 #8 - 창1:20-23)

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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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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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세기 강해 #7 - 창1:9-13)

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1:9-13) 창세기 강해 (7)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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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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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 창1:14-19)

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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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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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부활절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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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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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 창1:9-13)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http://youtu.be/rMSIX3C2UK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 창1:9-13)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http://youtu.be/qHjkSiEz-O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 창1:6-8) [2]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http://youtu.be/opQj6Y6sXw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 창1:1-5) [2]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http://youtu.be/ASb2eX056x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 창1:1)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http://youtu.be/eCSGTueOy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조적 진화론? 저는 서른세 살에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마28:17-20) [2]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http://youtu.be/IiltnYNxUe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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