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때문에 심히 통곡한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5)
http://youtu.be/ls8cu58O-R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69-75)
회개가 구원의 조건(?)
마태는 예수님의 재판 기사 중간에 두 가지 사건을 삽입하고 있다.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사건과 스승을 배반 밀고한 유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자살한 사건이다. 사건이 발생한 순서대로 기록한 것은 아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주님의 재판 중에 일어났지만, 유다의 자살은 모든 정황상 십자가 사건이 끝난 이후이기 때문이다.
유다의 자살을 구태여 베드로 사건 바로 뒤에 기록한 저자 마태의 의도는 분명하다. 독자더러 이 두 사람을 상호 대조 비교해보라는 것이다. 둘은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 마무리는 전혀 달랐다. 조금 전까지 마지막 만찬을 함께 나눈 열두 제자로 주님의 은혜, 사랑, 권능을 함께 받던 동료였다. 그러나 이날 밤 이후로 그 영원한 운명은 정반대로 나뉜다. 모든 인간은, 특별히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도 궁극적으로 이들이 걸어갔던 두 종류의 길만 따를 수밖에 없다.
먼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부터 살펴보자. 이 사건은 네 복음서가 부분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하자마자 새벽닭이 울었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이야기다.
불신자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내용으로 인간의 연약하고 치사한 모습을 가장 잘 대변하는 예화가 되었다. 그러나 몇 주 전에 말씀드린 대로 신자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인 본문의 베드로에게서만 위로 받고 나태하게 안주해선 안 된다. 반드시 상령을 받은 후에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한 그를 본받아야만 한다.
엄밀히 따져 본문의 베드로의 영적 상태는 유다와 동일하다. 그럼에도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정반대로 갈린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유다는 스스로 예수를 떠났고 베드로도 거의 비슷한 처지였으나 예수님이 끝까지 품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럼 베드로의 어떤 점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는가?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어도 심히 통곡하며 전정으로 회개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유다도 예수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쳤다고 한다.(마27:3) 그것도 한 번의 반성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 생명을 버리는 더 진지하고 심각한 회개를 했지 않는가? 그렇다면 다른 말로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 결코 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유일한 도덕적 피조물
외부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심하게 반발하는 이유는 착한 자가 천국을 가야지 왜 예수만 믿는다고 구원을 주느냐는 것이다. 착하게 사는 것으로 따지면 자기들이 예수쟁이들보다 훨씬 잘한다고 자부하고 실제로 그런 자들이 많다.
문제는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고 또 설명해주어도 결코 시인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희생하고 수고하며 선행을 한 것이나, 어쩌다 죄를 지으면 반성하고 고치는 것이나 자기 스스로 이뤄낸 일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성품을 가꾸고 자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학교에서 국민윤리를 열심히 배우고 집에선 부모로부터 도덕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에 지금처럼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는 주변에서 의인이라 칭찬받는 자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착각이며 또 바로 그 착각 때문에 영원한 운명이 나뉜다고 선언한다. 대신에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을 닮게 창조했다는 것이다.(창1:26-28)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의미는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공유하게끔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유일한 도덕적 존재다.
하나님은 추하고 더러운 죄악과는 절대로 공존하지 못한다. 오직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로만 100% 충만하신 분이다. 인간은 그래서 처음부터 선을 알고 실행할 수 있는 피조물로 지어졌다. 선을 행하면 기쁨이 생기게 마련이다. 선의 수혜자가 칭찬하고 보상해서가 아니요, 선행한 결과물의 유익과 효과 때문만도 아니다. 그 본성에서부터 충만한 기쁨이 절로 샘솟게 된다. 그럼 반대로 만약 악을 행하면 필연적으로 부끄럽고 두려워지며 죄책감이 들게 된다. 심지어 선행을 하지 않거나 선과 멀리 떨어져만 있어도 그 심령은 답답하고 침체해지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어기고 과실을 따먹자 곧바로 부끄럽고 두려워졌다. 아직 도덕률은 제정되지 않았고 교육도 시행되기 전이었다. 당시의 인간 공동체는 아담과 이브 둘 뿐이었다. 그들 사이에 잘못한 것 하나 없고 서로 피해 준 것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함께 나눠 먹고 즐거워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유익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낳아야 했으나 그 영혼의 본성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부정적인 죄책감으로만 가득 찼다. 본성이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잘못한 것이라곤, 정확히 말해 이전보다 달라진 것이라곤 오직 모든 선의 원천이자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배제하고 그분과 등을 진 것뿐이었다. 쉽게 말해 인간은 하나님과 등을 지면, 죄를 짓게 되고, 그 죄로 자연스레 괴로워지게끔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 점이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이자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첫째 요소다.
세 번 부인 후에야 회개했는가?
베드로는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와 은혜 안에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베드로나 유다 두 사람의 회개의 방식과 세기로 그들 의로움의 우열을 결정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의 의는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들 둘 다 성숙을 지향하며 자신의 의지적 노력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회개였다.
한번 생각해보라. 베드로가 3번 부인한 후에 비로소 회개했을까? 결코 아니다. 첫 번째 부인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얼떨결에 그랬을 수 있다. 스승이 너무 무기력하게 체포되어선 군병들이 뺨을 때리고 침을 뱉으며 모멸감을 주는데도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반발할 기세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히 빠져나갔고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것 같다. 자기마저 스승과 똑같은 신세가 될까 덜컥 겁이 난 것이다. 무조건 살고보자 싶어서 부인했지만 부인한 직후 아차하고 양심의 가책을 분명히 본성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둘째 부인 때는 더 크게, 마지막 셋째는 부인하기 전부터 양심에 찔렸을 것이다.
본문 75절을 다시 보라. 세 번 부인한 후 베드로가 통곡한 이유를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양심에 찔려서”가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라고 했다. 누차 강조하지만 성경이 참으로 정미하고 흥미롭지 않는가? 베드로가 심히 통곡한 첫째 이유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윤리적 자책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외에 더 깊은 내면의 원인이 있음도 살펴봐야 한다.
저자 마태가 본문에서 강조하는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을 올바르게 묵상하는 아주 간단한 팁이 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와 문구에 주목해야 한다. 본문에선 단순히 부인했다고 하지 않고 맹세하며 부인했다고 한다. 실제로 베드로가 그렇게 했기에 저자가 그렇게 기록했다. 그럼 마태가 아닌 베드로가 강조하는 내용이다. 지금의 그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라는 뜻이다.
뭔가 연상되는 내용이 없는가?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때에 베드로더러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자 그는 죽을찌언정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자기 생명을 걸고 맹세했다.(마26:35) 그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정작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할 때가 되자 거꾸로 세 번이나 맹세하며 부인했다. 그는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고 뒤죽박죽되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한 것이다. 예수 십자가를 모르고 성령을 받지 않는 인간의 의로움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베드로는 알다시피 심심찮게 맹세를 했고 그 때마다 주님은 잘못을 지적하고 만류했다. 인간은 맹세를 하면서 죽으라고 자기 약속을 실천하려 해보지만 장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렸다는 것이다. 또 인간은 자기 맹세를 끝까지 지켜낼 만큼 강하거나 의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베드로는 비로소 주님이 자신의 성의를 매정하리만큼 무시하고 야단까지 친 이유를 조금은 깨달은 것이다.
베드로가 심히 통곡한 이유?
베드로는 스승을 가장 뜨겁게 사랑했고 가장 열성적으로 섬겼다. 정말 목숨을 걸고 따르겠다고 헌신했고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자를 때에 일부 행동으로 옮기도 했다. 그런 순수한 마음이 제자 중에 유일하게 본문의 현장에까지 이르게 했다.
그런데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 자기 맹세대로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 닥쳤는데도 자신의 의로움이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아직은 외부에서 확정적인 핍박이 가해진 것도 아니다. 그의 앞에 놓인 선택의 결단은 자기 목숨을 치사한 모습이나마 유지하느냐 아니면 과감하고도 당당하게 포기하느냐 둘 중 하나였다. 결과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자신이 거룩해지며 세상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쳐 보려했던 의지적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정말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무참하게 자기 안의 의가 자기 안의 악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너무나 치사하고 비겁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가 스승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해서 예언한 대로 정확하게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이전에도 주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많이 보았고 체험했다. 자기 생명을 걸고 실행해보려는 선은 절대적 선이다. 절대적 선이라면 반드시 이뤄내야 하는 선이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맹세했고 일부 실행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의가 완전히 휴지조각에 불과함을 깨달은 것이다.
요컨대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적 절망에 빠진 것이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숨을 곳도 없다. 더 깨어질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자기 영혼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서 세상의 윤리 도덕 철학 사상 종교로는 분별도 가름도 할 수 없는 파산 상태가 된 것이다.
이 때 베드로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모른다. 예수님과 동년배라고 보면 30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겪는 경험이다. 특별히 지난 삼 년간은 예수님과 동역하느라 은혜와 감동의 도가니 속에 살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심령은 충만해졌다. 스승이 병자들을 치유하고 말씀으로 감동을 주는 일을 수제자로써 곁에서 보고 돕는 동안에 큰 보람과 가치도 느꼈다. 이 땅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영적 의로움과 감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런 최고 의인이 곧바로 급전직하해 최고의 악인으로 떨어졌다. 베드로의 회개는 그래서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는 윤리적 죄책감 차원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자기 심령 최고 밑바닥의 가강 깊숙한 곳이 완전한 흑암으로만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또 그 어둠이 예수님의 빛 아래에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했다. 예수님의 성육신한 십자가 복음의 첫 열매가 되었다. 자기 안에 의로움이 전무(全無)함을 깨달은 첫 번째 인간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선행하고 이웃을 섬겼지만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헛것을 넘어 배설물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주님이 부재한 자가 존재와 심령 전부가 누더기임을 철두철미 실감한 것이다.
종류가 다른 통곡
그의 통곡은 그냥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행동은 부끄럽고 두렵기는 하지만 슬픔과 통곡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부모의 회초리가 무서워서 울면서 용서를 빌 수 있다. 어른이 되면 죄로 인해 야기되는 "부정적이고 고통스런 결과"로 인해 잠시 슬퍼질 수는 있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 심령이 슬픔으로 채워지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정상적 반응이 아니다.
지금 베드로의 통곡은 자기 지난 인생 전부가 완전히 소멸되어 가는 첫 단계다. 도무지 주체할 수 없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선행이든 악행이든 모든 자신의 행적이 눈물과 함께 쓸려나가는 중이다. 잘못한 행동을 씻어내는 차원이 아니다. 한 불쌍하고 가련한 죄인 전부가 완전히 새롭게 되는 울음이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우는 울음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이 그를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벌거벗겨 데려와 엎드리게 하고 성령으로 그 심령에 가득 채우게 해서 울음보를 터트려 낸 것이다. 삼위 하나님이 베드로 한 명의 실존과 존재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구원 사역을 지금 수행하는 중이다.
이는 예수를 처음 믿는 순간 정말로 십자가 은혜를 제대로 깨닫는 신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의식이다. 울음의 소리와 눈물의 양은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전의 내가 완전히 파괴되고 예수 십자가 안에서 새 인생이 되었음을 본인만은 알 수 있는 그런 순간을 거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울음은 절대로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완전히 새 것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내려 갈 곳은 없다. 인간 세상에서의 나의 의지적 수고와 노력으로는 도무지 소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 위에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히 임재하게 된다. 나 같은 이런 죄인조차 주님이 사랑하시어 대신 죽음으로써 하나님이 나의 아빠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환희와 감격이 넘치게 된다. 절대 절망에서 절대 소망으로 순간적으로 옮겨졌다. 울음과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교체된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조금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세상이 결코 줄 수 없고 알지 못하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저자 마태의 또 다른 의도적 배열
마태는 본문 앞에 어떤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위반하면서까지 맹세하며 약속한 말씀 둘이다. 하나님 보좌로 돌아갈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이다. 이 둘로 당신의 하나님 아들 되심이 증명된다고 했다. 주님은 맹세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진리이자 선 자체이시기에 담담히 선포, 아니 말씀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맹세한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당신을 낮춘 것이다.
인간의 내면은 거짓, 의심, 음모,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 또 그런 죄인들끼리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다투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맹세가 남발 될 수밖에 없다. 베드로도 목숨을 걸고 스승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역설적으로 따지면 자기가 평소에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존재임을 최소한 자기 본성은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겁을 먹은 개가 먼저 짓듯이 말이다.
베드로는 그런 자기가 너무나 초라하고 한심해서 절망에 빠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 쪽에서 보면 그런 모습임에도 그를 당신의 그 두 가지 약속 안으로 이끌어 들이는 중이다. 당신께서 하늘 보자 우편에 앉아 그의 기도를 중보하게 될 것이다. 때가 차면 그의 구원을 영광스럽게 완성시키러 다시 오실 것이다. 그 전에 죽는다면 하늘에 그를 위한 아름다운 장막을 지어줄 것이다. 아니 지금 이 순간 베드로의 천국 맨션은 완공되었고 큰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베드로와 유다 인간끼리만 비교하라는 것이 저자 마태의 의도가 아니다. 인간, 그것도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맹세와 하나님의 약속을 대조하고 있다. 오늘날의 성경을 읽는 신자로 하여금 너희가 과연 어떤 위치, 소속, 신분, 특권을 소지하게 되었는지 제발 깨달으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지금 베드로 구원의 첫 단계로 그를 심히 통곡케 하고 있다. 그 위에 주님은 그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는 사역을 이루려 한다. 베드로가 이전과 달라져 새 사람이 되면 필연적으로 세상에서 환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로 하여금 담대해져 모든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려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당신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오시도록 하는 일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근본 의미는?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를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최고로 치사하고 비겁한 자로만 인식한다. 또 현장에 있던 유대인들은 대제사장을 최고의 의인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신자는 그 둘을 보는 관점이 달라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비교 판단해야 한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하자면 대제사장은 부정적 절망적 의미에서 가장 웃픈 심문을 했다. 반면에 본문의 베드로는 긍정적 소망적 의미에서 가장 웃픈 울음을 울었다. 이 두 “웃픈”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창조주이자, 구원주이자, 심판주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았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시고 유지시켜 주시는 분을 자기가 감히 목숨을 걸고 지켜주겠다고 큰소리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주님은 바로 그런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존재와 인생 전부의 처음이자 끝,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었다. 어떤 인생도 예수가 없이는 절대적 절망으로 떨어지는 죽음뿐임을 알았다.
또 그래서 처음에 스승이 자기를 제자로 삼을 때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의미를 비로소 올바로 깨닫게 되었다. 정말로 자기 생명을 걸고 행해야 할 일은 아직도 이전의 자기처럼 예수를 모르는 미혹되고 불쌍한 영혼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알게 해주는 그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간이 예수님을 위해서 행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이 주님을 위한 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본문을 접하는 신자들이 베드로의 치사하고 비겁한 모습에 자기를 비추어서 위로 얻는 수준에 그쳐선 안 된다. 그의 존재 전부가 무너져 내리는 통곡을 해야 한다. 사실은 주님을 제대로 믿는 신자는 이미 그런 절차는 당연히 거쳤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맹세까지 하며 주신 두 약속에 의거한 새로운 신분과 특권을 알고 누리며 살고 있어야 한다. 베드로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세상에선 필연적으로 환난과 핍박을 당하나 당당하게 싸워 이기고 있어야 한다.
너무 거창하고 신령한 요구인지라 현재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비교해 보니 혹시라도 신앙 양심에 찔리는가? 그럼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진리만이라도 온전히 기억하면 된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아주 기본적인 의미다.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이 되고 두렵고 부끄러운 것으로만 그치면 여전히 불신자의 단계다. 예수를 알고 믿었다는 것은 죄를 지으면 자신의 심령이 너무나 애처롭고 슬퍼서 눈물이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일순간이라도 예수님과 멀어지는 것이 삶에서 가장 애통한 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신자가 된 우리의 신분과 특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통곡한 진정한 이유와 뜻이다.
11/23/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