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히 기이한 유대인의 왕
마태복음강해 (247)
http://youtu.be/RVwNg7fM8Po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마27:11-14)
변경된 고소장
복음서를 문학적 형식으로만 따지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역사란 반드시 당대의 문화 관습 제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재판을 로마 총독에 이관했다. 본문은 유대 공회가 고소한 죄목에 따라 빌라도가 주님께 인정심문을 하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기에 더더욱 당시의 배경을 살펴야만 한다. 거기다 다른 복음서의 기록들과 연결해서 종합해 보면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큰 경각심을 줄 뿐 아니라 이천 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실제적 현실상황처럼 여기게 만든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온 이유는 잘 알다시피 로마 총독만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도 실제로 “우리에게 사람을 죽일 권이 없나이다.”(요18:31)라고 예수를 살해하려는 의도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예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다면 왜 빌라도에게 바로 데려오지 않고 먼저 대제사장에게 갔는가? 그야 물론 역사상 최고로 사악한 이 모의를 유대공회가 주도했기 때문이다. 또 그 모의에 따르면 빌라도는 단지 사형을 선고하는 들러리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따라서 유대공회로선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확정하고 그 증거를 보강했어야 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예수님이 성전을 헐려고 시도했다는 것과 인간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는 두 가지를 문제 삼았다. 둘 다 하나님을 모독한 참람 죄가 적용된다. 대제사장이 공회원들에게 어떤 판결이 합당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만장일치로 사형에 해당된다고 합의했다.(마26:66)
그런데 막상 사형집행의 승인을 요청할 수 있는 빌라도 법정에선 그 고소장 내용을 바꾸었다. 신성모독이 아니라 예수가 유대인의 왕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11절) 바로 이 대목의 당시 정황을 상세히 살펴야만 주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아직은 로마 황제 숭배가 본격화되기 전이었기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시작되지 않았다. 대신에 로마 제국은 각 식민지의 고유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주고 있었다. 단 로마에 반역을 도모하지 않아야 하고 또 세금을 성실히 납부한다는 두 가지 조건은 충족시켜야 했다. 바꿔 말해 신성모독 같은 종교사상범은 로마 법정이 취급하지 않았고 유대 공회의 소관이었다는 뜻이다.
주님에 대한 재판을 요청 받은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로 그를 넘겨준 줄 알았다.(마27:18) 로마법으로 다스릴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18:31)고 응답했다. 유대 종교법으로 판결하고 집행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심지어 신성모독 죄로 사형 판결을 내려 유대법에 따라 돌로 쳐죽어도 된다는 것이며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컨대 빌라도는 예수를 너희가 죽여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영악한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이 눈치를 못 챘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구태여 죄목을 바꾸어가며 계속 고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는 것이다. 유월절 절기 중에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이 절기 동안에 예수님에 대한 대중의 호응이 상당했기에 혹시라도 민요가 날까 염려했었다.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예수 죽음에 대한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를 죽인 직접적이고도 최종적 책임을 로마 총독에게 떠넘기려 한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재판을 진행한 후에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하랴 물었다. 이번에도 유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마27:22) 소리쳤다. 결국 유대인들의 의도는 예수를 죽이는 것은 오래 전부터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고 반드시 이방인의 손으로 그것도 십자가에 죽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처형은 알다시피 인간이 고안해 낸 사형 방법 중에 고통이 최고로 극심하다.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에 대한 미움이 그만큼 극심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외식적 도덕과 형식적 종교와 영적 무지를 지적당하고 야단맞았다. 그들의 자존심이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앙갚음을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예수님을 모함하다보니 무리수가 연발 되었다. 필연적으로 모순과 불합리함이 드러남으로써 자기 얼굴에 자기가 침 뱉는 결과를 낳았다. 극도의 분노에 사로잡히다보니, 시쳇말로 눈이 뒤집혀 사리 판단을 전혀 하지 못하고 악의 화신처럼 되었다. 지금 사탄의 최고 부하가 되어 설쳐대고 있는데 불행하게도 그 본인들은 그렇다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정반대로 최고의 의를 행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역사상 최고로 큰 착각이었다.
십자가 처형을 고집한 첫째 이유
그들이 십자가 처형을 끝까지 고집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것이라는 율법의 규정(신21:23) 때문이었다. 고소한 죄목이 유대인의 왕 행세를 했다는 것도 제발 십자가로 처형해달라는 뜻이었다.
유대인의 왕은 로마 황제가 임명한다. 예수는 유대 왕으로 로마 황제로부터 임명 받은 적이 없으니 황제를 거역한 셈이다. 로마에 반역하는 죄는 십자가 최고 극형에 처하는 것이 관례였다. 지금 고소장 내용을 살짝 바꾼 까닭이다.
지난 삼년 간 예수님의 가르침과 섬김과 이적으로 인해 대중의 인기가 완전히 주님께 쏠렸다. 마지막 고난 주간 중에는 유대의 형식적 종교 체계를 개혁하려는 모습을 보였기에 메시아로 인정하는 분위기마저 생성되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설 자리가 없어졌고 그 시기가 극도에 이르렀다. 쉽게 말해 밥 그릇 숫자가 줄게 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예수님이 성전 제사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부인한다는 것으로 시비 거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대중들로 인식시킬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예수가 성전을 헐고 인간으로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했으니 메시아로서 100% 결격사유가 있다고 유대 법정에서 먼저 밝힌 것이다. 이제 로마인의 손을 빌려 하나님께 저주 받는 모습으로 죽게 함으로써 결정적인 쐐기를 박을 작정이었다.
참으로 인간이 사악하지 않는가? 거기다 머리는 팽팽 잘 돌아간다. 그 잘 돌아가는 머리로 지금 무고한 자를 살인하려는 죄악을 자행하고 있다. 그것도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독생자를 말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몰랐을 수 있다. 알고도 일부러 부인했을 수도 있다. 그런 종교적 영적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기본적 양심에 비추어 봐도 도무지 낯이 뜨겁고 수치스런 짓인 줄 그들이 몰랐을 리는 없지 않는가?
양심이 전혀 힘도 못 쓰게 만든 그들이 소지한 또 다른 힘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재물에 대한 탐욕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고 했다.(마6:24) 지금 예수님을 신성모독 참람 죄로 문제 삼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실명 야훼를 거론하는 것조차 그분께 누가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아도나이로 개칭해서 부른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의 진짜 주인이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종교적 열성으로, 정확히 말해선 종교적 형식으로 포장하여서 사람들 앞에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양 경건하게 보이려 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열성이 지극하다 해도 참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과는 별개 문제일 수 있다. 오늘날도 기독교를 빙자하여 자기 탐욕을 채우려는 종교 장사꾼들이 성행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초록은 동색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재물을 자기 주인으로 모시고 있으면서도 남들에게 경건하게 보이려고 종교로 치장하는 대중들이 많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해 자신들의 영적인 실체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 보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다. 양심이 탐욕과 상대하면 항상 패배한다는 사실을 솔직하고 겸허하게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종교를 부자 되고 출세하는 수단과 능력으로만 이용 한다. 그래도 어쨌든 기독교에 의지하니까 마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양 착각하고 있고 하나님도 자기를 인정해 주리라 기대한다. 그들이 부자가 된 것도 죄송하지만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과 똑같이 사업도 뜨겁게 했기 때문일 뿐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심은 없고 종교를 이용해 사람들 앞에 자기를 잘 보이려 했으니 그 주인이 하나님일 리도 없다.
빌라도의 두 번째 재판
본문은 사실 빌라도가 하루 밤 새 행한 예수님에 대한 두 번째 재판이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했고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고 고발했다.(눅23:1-7) 빌라도는 곧바로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했다. 그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로마 총독이 식민지를 통치할 때에는 항상 반역과 세금 문제에 가장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만약 예수님이 납세 거부나 로마 반역의 낌새를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유대인들이 고소하기 전에 로마가 먼저 체포하여 사형시켰을 것이다. 거기다 지금 로마 황제가 임명한 헤롯왕이 엄연히 있었다. 예수가 유대 왕이 되려고 시도했다면 헤롯이 처리할 문제라고 보고 빌라도는 먼저 헤롯에게 보내었다.
누가복음 23:8절에 정말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했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말이 될 법한가? 결코 아니다. 자기와 유대 왕의 자리를 다툴 경쟁자 내지 모반자를 보고서 어떻게 심히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들었고 또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헤롯은 예수님이 불치병자 불구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도 말씀 한마디로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베푼 것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헤롯 본인이나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어서 고쳐달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잠잠히 있자, 행정만 관할하는 왕으로서 종교사상범에다 로마 반역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가 걸려 있어서 다시 빌라도에게로 돌려보낸 것이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시기로 넘겨준 줄 잘 알았지만 이 새벽에 대제사장까지 나서서 설쳐대니 어쩔 수 없이 재판을 진행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고소 죄목에 대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14절) 우선 직접 이해 당사자인 헤롯왕이 전혀 문제 삼지 않았는데도 유대인들이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창조주 참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너무나 몰상식하게 자기들 양심마저 철저히 외면하는 행태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인 빌라도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지금 그들의 광신자적 분위기가 기이하게만 여겨졌던 것이다.
이처럼 사탄은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마저 악용하여 한 개인을 완전한 멸망으로 이끌 수 있다. 집단적으로 기독교는 물론 예수님의 이름마저 훼방한다. 오늘날 교회가 분란이 일어나면 양쪽 당사자 모두가 열심히 기도한 결과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까지 그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결국은 세상 사람보다 더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지금 예수님이 모든 전후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본인 입으로 시인하면 어쨌든 십자가에 처형할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 그런데도 순순히 시인하니까 빌라도로선 납득이 되지 않았다. 죄를 조작하여 무고하게 덮어씌우면 통상적으로 반론과 증거를 적극 제시한다. 도무지 그런 변론이 받아들여질 분위기가 아니면 침묵으로 일관할 것이다.
주님은 지금 이도 저도 아니라 순순히 시인함으로써 없는 죄를 스스로 뒤집어썼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직 골고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우리 죄에 대한 철저한 저주를 우리 대신에 받아야 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려고 오신 것이다.
빌라도의 위태한 정치적 위치
문제는 정작 빌라도다.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다. 마누라도 처형을 극구 만류했다. 나름대로 바라바를 죽이고 예수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당시의 로마법은 아주 공정, 합리, 민주적이어서 지금도 세게 모든 법전의 텍스트로 삼을 정도다. 총독이 되려면 그런 법률에 능통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다. 그런데도 결국에는 유대인들의 떼쓰는 대로 따랐다. 사도행전 25, 26장의 기록에 의하면 동일하게 유대인으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쓴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직소(直訴)하는 바람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억지를 쓸 수 없게 되었다. 빌라도도 정말로 자기 책임을 모면하고 양심의 가책을 없애려면 예수를 황제에게 보내면 되었다.
그러나 빌라도 또한 자기 탐욕이 자기 양심에게 무력하게 완전히 패배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에 로마 황제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시쳇말로 줄을 잘 서서 예루살렘 총독이 되었지만 자기 후견인의 정치적 파워가 약해졌다. 거기다 빌라도 자신의 폭압적인 통치가 황제에게 이미 여러 차례 보고되었다. 그는 결국 십자가 사건이 얼마 지나지 않아 AD 36년에 프랑스 지역으로 귀양에 처해졌고 그 귀양지에서 죽었다고 한다.
정치적 위치가 아주 불안정한 상태에서 예수님이 유대의 왕으로 로마 황제의 통치를 거역했다고 송치할 수는 없다. 만약 황제가 자세히 조사해서 반란이 아니라 종교사상범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당장 총독의 자리에서 파면될 것이다. 반대로 예수를 살려주면 유대 공회원들이 로마 황제에게 계속해서 예수에 대한 고발장을 보낼 것이다. 이래저래 황제에게 무능력자로 취급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자기 선에서 유대 지도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사건을 무마하는 것이 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빌라도는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것이다. 그는 예수가 무죄한 줄 잘 알고도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순전히 자기 처신을 위해 살인한 너무나 큰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럼 예수님도 이래저래 십자가에 죽기는 마찬가지임을 알고 구차하게 변명하기 싫어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시인한 것인가? 예수님이 비록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에게는 인간의 죄로 타락한 모습은 단 한 치도 없었다. 또 인간의 치사하고 비굴한 속성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예수님은 실제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거짓말은 당신과 공존할 수 없기에 있는 사실 그대로 시인한 것뿐이다.
주님은 나아가 유대인의 왕을 넘어 만왕의 왕으로 오셨다. 유대인의 왕을 로마 황제가 임명한다는 당시 정치제도를 주님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로마 황제에게 임명 받은 적이 없는 주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 당시 세상 최고 권력자인 로마 황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높은 권세를 가진 자라고 선포한 셈이다. 로마 황제도 당신의 허락 없이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을 다스리는 진짜 왕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유다는 물론 로마의 참 왕은 하나님이며 모든 인간의 주인이 바로 주님 당신이라는 뜻이었다.
양심과 탐욕
십자가 사건을 표면적으로만 살피면 유대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이 합작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무죄한 랍비를 죽인 것이다. 살펴본 대로 본문을 다른 복음서와 상호 종합 연결해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주도한 일임을 알 수 있지 않는가?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일정과 세부 과정과 등장인물 등이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한 주님의 각본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그 등장인물이 꼭두각시처럼 주님의 조종에 따라 자동적으로 움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의지, 지략, 감정, 철학, 도덕, 종교가 있는 그대로, 아니 최상의 상태로 동원되었음에도 그랬다. 그 결과로 십자가에 하나님의 참 빛이 비취자 그것들이 실은 인간의 모든 불공정과 불의와 치사하고 사악했던 어두움의 종합이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그 대중들, 빌라도와 로마 군병들은 물론 당시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와 스승을 밀고한 유다까지 모두가 자기들은 정당한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을 것 아닌가? 최소한 죄악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최대한 양보하여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낀 자가 일부 있었을 것이다. 대제사장 가야바도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는 예수가 무죄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들 이익을 얻는데 최고 방해꾼을 제거하겠다는 본심은 숨기고 하나님을 위한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포장했다.
엄밀히 말해 이날 저녁의 모든 사람들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길을 택한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구린 냄새가 나기는 어차피 마찬가지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하고 쾌적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자기 양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당시 세계에서 최고가는 양심과 영성을 가진 유다 공회가 세계 최고의 합리성과 이성과 지혜를 자랑하는 로마와 힘을 합쳤다. 인간 사회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상의 조합이다. 그러나 그 실상은 사탄의 미혹과 조종을 받으며 돈의 신 맘몬에게 충성하고 있는 꼴밖에 아니다.
그들은 십자가 현장에서 그리 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빌라도나 대제사장은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의 해결책을 선택했다고 자부했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며칠 동안은 조금 찜찜했을 수 있다. 그러나 며칠만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상으로 돌아가서 십자가가 어떤 양심의 찔림 없이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의 이면적 의미
그러나 성경의 기록과 당시 정황을 대조해 보면, 특별히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와 그분의 그분다우심에 비추어 보면, 흔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진술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너무나 후한 평가라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모든 인간에게서 코를 아무리 막아도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고 선언한다. 인간이 몇 가지 잘못된 행동과 허물을 범할 때에 국한되는 말이 아니다. 인간 존체 전체에서, 그 진짜 실체에서 너무나도 치사하고 추하며 음흉하고 사악한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아무 변론도 하지 않아 빌라도가 심히 기이히 여기게 만든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들 모두의 죄 값을 감당하고 대신 죽은 것 외에 어떤 인간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제발 깨달으라는 것이었다. 비록 착하게 살려고 간혹 노력은 하지만 그 근본적인 심령의 중심에 하나님을 정말로 순전하게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서로서로의 잘못을 적당히 눈 감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자 아무도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면 마땅히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 똑같이 먼지 묻은 상태로 지내는 것이 더 편하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이다. 거기다 남의 눈의 티끌은 잘도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절대 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베드로 같은 예수님의 수제자마저 스승을 세 번 부인했고 다른 제자는 배반하여 팔았다. 이런 판국에 너희 죄 값을 너희 스스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너희의 썩어질 죄에 대한 하나님의 극심한 저주를 대신 지고 갈 어린 양이 어찌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진리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를 테니까 주님은 아무 변론도 않은 것이다. 언제나 돈에 대한 탐욕을 채우느라 양심이 죄악에 패배하거나 함께 섞어서 비빔밥을 만드는 인간 죄악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시인한 것은 모든 인간의 주인이 당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실질적 주인으로 모시면서 입술로만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겐 절대 주인이 되어주지 않는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때에 주님은 누가 진짜 너희의 왕인지 알게 해주셨다. 그 때에 가서도 십자가에 항복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 반면에 겸손하게 주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시고 재물이 주인 되기를 포기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공짜 선물로 받고 주님의 영원한 은혜 안에 들어가게 된다.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한 신자의 몰염치
오늘의 본문이 말하는 바가 한마디로 무엇인가? 재물을 하나님 대신 혹은 앞선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자는 그 양심이 언제나 돈에 너무나 무기력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십자가 진리라는 것이다. 이 진리는 예수님 당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밖은 물론 교회 안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한국에서 올해 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현실의 밥그릇을 더 많이 챙기려 했고 또 그래서 본문의 유대종교 지도자와 로마총독이 그랬듯이 끼리끼리 서로 적당히 봐주었기 때문 아닌가? 그러는 당사자들 중에 교인들도 분명히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 아닌가?
이곳 이민 사회도 어서 빨리 벤즈 몰고 골프 치려는 욕심에서 탈세하고 미국 법을 대놓고 어기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서도 양심의 가책에 찔려 헌금을 많이 해 교회 장로 직분을 맡는 것으로 위장하려 든다. 하나님이 과연 그 피 묻은 돈을 받으시겠는가? 헌금 적게 해도 되고 교회에 자주 안 모여도 되니 제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며 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앞에 순전한 모습으로 서고 이웃부터 사랑하라고 할 것 아닌가 말이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 없이 죽으면서 저들이 자기들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실제로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영적으로 무지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전이었다. 성령을 아직 받지 않았고 한참 동안 성경은 없는 채로 지냈다. 반면에 지금은 성경이 완비되었다. 성경을 해석한 신학과 교리체계도 정립되었다. 성령도 오셨다.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모여 예배하고 성경공부를 한다.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데도 왜 온갖 분쟁과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오늘날의 교인들도 본문의 빌라도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이하게만 여기고 그 참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를 열심히 믿기는 하는데 오직 자기 형통과 출세에만 이용하고 있다. 십자가를 통과하며 내 존재 전체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참 신자라면 십자가를 빌라도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심히 기이히 여겨야 한다. 나 같은 죄인을, 내 속에 빌라도와 로마 군병과 유대 대제사장과 유대 대중과 베드로와 유다의 모습 전부 다 포함되어 있는데도, 주님이 나를 먼저 택하시고 십자가 앞에 항복케 하신 은혜가 너무 기이해야 한다.
신자는 재물을 하나님 대신에 또 우선적인 주인으로 모셨던 예수 이전의 삶이 죽음과 방불했음을 절감케 된 것이다. 대신에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고 있으면 참 생명으로 살아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얻게 된 자다. 최소한 참된 평강이 무엇인지 알고 누리고 있는 자다.
예수 이전에는 내 양심이 재물에 속수무책으로 졌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양심을 재물과 비교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재물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녔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사탄의 농간임을 알게 되었다. 예수 이후인 지금 그렇다고 양심이 재물에 백전백승한다는 뜻은 아니다. 가끔, 아니 종종 질 수밖에 없지만 누가 나의 진짜 주인인 줄은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와 비춰볼 때에 자신의 현실적 궁핍과 풍족은 부차적 지엽적인 문제로 변했다. 최소한 그것들이 나의 평강을 방해하지는 않게 된 것이다. 대신에 예수 안에서의 자유함이 인생의 목적과 소망이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자가 누리는 진짜 복이라고 본문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12/7/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