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어 얻은 가장 큰 축복
마태복음강해 (249)



http://youtu.be/SlHawHa5DZ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마27:23-26)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유대인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로마에 반역을 도모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대신에 유대인들이 시기로 넘겨준 줄 잘 알았다. 아내도 악몽 때문에 그 처형을 적극 만류했다. 자기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려고 바라바를 처형시키고 예수를 풀어주자고 유대인들에게 제안까지 했다. 그러나 그 제안이 역으로 그들의 분노에 더 불을 질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게 만들었다.

그로선 유대인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창조주 참 하나님만을 믿고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산다고 자랑하는 이들이지 않는가? 지금 양심은커녕 상식마저 파괴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23절)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 질문은  잘못한 일이 전혀 없지 않느냐는 뜻의 반어법적 질문이었다.  

그럼 이런 저런 잘못이 있다고 답해야 한다. 대신에 유대인들은 막무가내로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만 쳤다. 귀찮게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무조건 예수를 이 땅에서 제발 없애달라는 뜻이었다. 빌라도로선 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한 젊은 랍비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과 등을 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예수도 마침 유대인의 왕이라고 시인했으므로 명목상으로 로마 반역죄에 해당되었기에 십자가형에 처한다고 공식적으로 허락해주었다.

이는 그에게 정치적 종교적 해결책에 불과했다. 자신의 정신적 내면에는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무리들 앞에서 물에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와 자기는 무죄하다고 선언했다.(24절) 어떤 범죄에 대해서 자기의 결백을 표시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다.

그리고 너희가 당하라고 즉, 그 죄 값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 했다.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대답했다. 언뜻 보면 빌라도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준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뜻이었다.

그 피를 유대인의 후손에게 돌린(?) 하나님

이 문구 또한 유대인들의 관용적 표현이었다. 사울이 죽은 후에 그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다윗과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그를 시기하여 다윗 몰래 그를 죽였다. 그러자 다윗은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삼하3:28)하다고 선언했다. 또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중에 고린도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자 유대인들이 대적하고 훼방했다. 바울도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행18:6)라고 선포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이 관용구를 일종의 반어법적 의미로 사용했다. 우리에게는 허물과 죄가 없으니 그 피를 얼마든지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려도 된다는 뜻이었다. 자기들의 결백을 자신한 것이지 나중에 회개할 것이며 또 그래서 하나님의 벌을 달게 받겠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시기해서 넘겨준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이 예수를 보는 관점은 달랐다. 그들에겐 예수가 율법과 성전제도를 무시 내지 부인하는 것 같고 인간이면서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너무나 큰 참람 죄를 범한 자였다.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다. 회심하기 전의 바울이 그랬듯이 유대의 전통적 종교 사상에 비추면 용서 받지 못할 죄인으로 십자가 처형을 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십자가 이후의 유대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주님의 핏 값을 그들과 그 후손에게 돌린 것 같다는 것이다. 당장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잔인하게 살육되었다. 그 후로는 성전은 물론 나라도 없이 세계 곳곳으로 유랑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는 이차 세계대전 때에 히틀러에 의해 육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는 홀로코스터의 참극을 겪었다. 지금도 이슬람 강경파들의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map-out) 즉,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겠다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무죄한 예수를 죽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그 당대의 성전 파괴 사건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근 이천 년이나 지나 십자가와 아무 관련이 없는 후손들 육백만이 인류 역사상 최고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는가? 아무리 유대인들이 완악하고 교만하여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라고 큰소리쳤다 해도 하나님이 너무 포악하고 불공평한 것 아닌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세월호 참사에서도 아무 죄 없는 순진한 어린 학생들을 무참하게 죽도로 방치하신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신자들마저 곤혹스러워 한다. 이런 의심은 신학적으로 여러 어려운 주제를 망라해 깊이 살펴보아야만 하는데 이 짧은 설교 시간에 다 다룰 수는 없다. 대신에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다루는 절대적 원칙 몇 가지만 꼭 기억하여야 한다.  

죄의 출발은 하나님이 아니다.

먼저 죄악의 출발은 절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 쪽에서 죄를 계획 주도하지 않는다. 사탄이 그 기원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충분하고도 필요한 여건과 의지를 인간에게 다 베풀었다. 그럼에도 인간 쪽에서 의도적으로 사탄을 쫓아서 죄를 범했기에 인간에게 죄악에 대한 근본적이고 직접적이며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

역사상 최고로 불공평한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대제사장과 그를 호응한 유대 대중에게, 또 역사상 최고의 참극 홀로코스터는 히틀러와 그를 추종한 나치당에게, 즉 인간에게 근본책임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런 참극을 하나님이 왜 막아주지 않느냐고 반발할 수 없다.

거기다 하나님이 모든 불행을 다 막아줄 수는 없다. 그럼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큰 불행만 막아 준다면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한 명밖에 죽지 않는 작은 일이라도 그 가족이나 직접 당사자에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최고로 큰 비극이다. 또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은 여전히 생긴다.

하나님이 이 땅의 죄를 다스리는 원칙은 인간을 상실한 마음 그대로 두신다는 것이다.(롬1:24,28) 죄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판단, 선택, 결정, 시행한 것이기에 인간의 책임이다. 세월호 참극도 직접적으로는 학생들을 구출하지 못한 해양경찰에 있지만 근본적으로 돈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끼리 서로 눈감아 준 결과가 아닌가? 불신세상도 그래서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고 결론짓지 않았나?

하나님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는 죄악의 근원인 사탄이 인간을 미혹하고 인간도 그 죄에 찌든 본성대로 살도록 그대로 두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당신의 직무를 유기한 것이 결코 아니다. 스스로 자기가 잘났다고 고개를 하늘로 향해 빳빳이 쳐들고서 주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들을 당신만의 인내와 긍휼로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다. 일일이 처벌하지 않고 단 한 명이라도 더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주시는 것이다.  

홀로코스터는 언제든 생긴다.  

홀로코스터나 세월호 참사를 하나님이 묵인하신 가운데는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완벽하게 선하신 그분만의 고유의 뜻과 계획이 반드시 있다. 인간은 그것을 도무지 알 수 없고 추측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 그분을 맞대면 하면 이 땅에서 가졌던 모든 의심과 불만과 불신이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천국 보좌에서 세마포를 입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지 않는가? 하나님은 사탄처럼 인간을 미혹 세뇌시키지 않는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 안에서 온전한 진리를 깨달았기에 기꺼이 자발적으로 찬양을 하는 것이며 또 그래야 참된 찬양이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죄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남았다. 우리 눈에는 그분이 죄를 묵인하는 것처럼 보여도 절대 그렇지 않으며, 의로운 이가 더 억울하고 이해조차 안 되는 불공평과 불의를 당하는 것 같아도 그분이 방조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그 죄 값을 묻는다.

일대일 개별적으로 징계 심판하지는 않기에 홀로코스터나 세월호가 어떤 죄에 대한 형벌인지는 인간으로선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분은 죄와 그로 인한 폐해는 철두철미 저주하신다. 또 인간을 죄 중에 가만 버려두지도 않으신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죄에 대한 당신의 진노를 십자가에 쏟아 부으셨다. 대신에 죄 중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하든 살려내려는 것이 그분의 심정이다.

요컨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자기들과 후손에게 돌리라는 말 때문에 유대인들이 겪은 비극이 하나님이 그 형벌로 주신 것이라고 직접 연관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비극이 많기로는 한국도 유대인 못지않다. 아니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다 그렇다.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느 세대 어느 장소에서도 죄악은 관영했기에 그 필연적 결과로 참극이 생겼을 뿐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여 인간의 죄에 찌든 본성을 완전히 고치고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을 멸망시키기 전까지는 그런 참극들이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정작 따져볼 내용은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공평성보다는 인간의 완악한 본성의 정확하고도 구체적인 실상이어야 한다.

지난 몇 주간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순서대로 살펴보았다. 각자 나름의 느낌과 결론이 있을 것인데 무엇인가? 인간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참으로 치사하고 비겁하며 완악하다 못해 사악하기까지 한 존재라고 결론지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정답이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결론이다. 좀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자칭 예수라고 적으라.

인간이 너무나도 어리석은 것 같지 않는가?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합리적인 변별력마저 너무 수준이 낮다. 어리석다는 것은 지식이 모자란다는 것과 다른 뜻이다. 바보 영구가 전구를 손으로 돌리지 않고 몸을 돌려 끼운다고 해서 야단 칠 수 없다. 자기 지식의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는 모르는 것이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자기 지식과 능력을 제대로 합당하게 발휘 못하는 것이다. 몇 번 강조한 대로 십자가는 합리적 이성에서 최고였던 로마와 도덕 종교 영성에서 최고인 유다가 합작한 것으로 인간 최고의 지혜가 총동원된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 죄가 없고 심지어 한 인간으로서 그만큼 선한 일을 많이 한 적이 없는 예수를 무참하게 죽이는 죄악을 저질렀다. 거기다 재판 진행되는 과정에서부터 온갖 모순과 불합리성을 표출했다.

요한복음 19:17-22에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후에 히브리어, 헬라어, 로마어 세 방언으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써서 붙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죄목을 당시 세 공용어로 기록한 것은 모든 이가 보고 알게 하려는 뜻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렇게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 써달라고 요청했다.

참 웃기는 일 아닌가? 자칭한다는 것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데 혼자서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사실상 로마에 반역을 시도한 적이 없다고 유대인들 스스로 시인하는 셈이다. 다른 말로 자기들이 무고한 죄를 덮어씌워 죽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어떻게 하든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죽임을 당하게 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자들이다. 그래서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서 십자가에 매달고 완전히 운명한 것을 확인했다. 그 소기한 목적이 달성되니까 예수를 명목상으로도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빌라도가 이번에는 그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유대인들의 억지를 수용하여 십자가 처형까지는 허락했기에 이젠 “나의 쓸 것을 썼다”(22절)고 큰소리쳤다. 로마를 반역한 죄인임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양심은 물론 상식까지 파괴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뜻이다. 그들이 유대 지도자가 아니라 아무 죄 없는 이 예수야말로 유대인의 왕이 될 자격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그 팻말을 보는 모든 이에게 전하는 빌라도 자신의 메시지였다. 나의 쓸 것을 썼다는 것은 바로 나의 생각이라는 뜻이지 않는가? 유대인들이 눈치 챘는지는 몰라도 빌라도 나름대로 일종의 소심한 복수를 한 것이다. 끝까지 예수의 죽음이 자기 책임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빌라도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앞에 그런도 비석을 세웠을 것이며, 그럼 유대인들은 그 비석을 밤중에 몰래 훼손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은 정치적 종교적 동기에 따라 한 배를 탄 동지였다. 그러나 유치원생들이 사탕 하나 두고 온갖 치사한 말싸움을 하는 꼴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앞뒤 사정을 전혀  분별하지 못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라고 큰소리칠 정도로 자기들은 정당하고 의롭다고 자부했다. 이젠 자기들 수치심을 제거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 그런 요구는 바로 자기 얼굴에 자기 침을 뱉는 격이었다. 자기들이 소리친 그대로 그 피가 자기들에게 벌써 돌아가고 있음을 어리석게도 자기들만 모르고 있었다.

모든 인간의 근본적 문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현실 세계를 헤쳐 나갈 지식이 부족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세상에서 형통하는 처세술에선 뱀보다 더 지혜로웠다. 돈을 버는 상술은 최고였다. 문제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는데 완전히 빵점이었다. 자기가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전혀 없다. 술에 취한 것처럼 그 인생이 갈지자 행보만 이어간다. 그 자리를 맴돌거나 뒤로 퇴보하고 있다.

성경이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선언하는 뜻이 그 폭력성, 음란성, 사기성에서 사형감이라는 뜻이 아니다. 평범한 소시민들은 선행을 자주는 못해도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그 말은 인간의 지정의적 내면 질서가 완전히 뒤죽박죽이라는 뜻이다. 장소와 시간과 사건과 사람에 따라 수시로 생각이 바뀐다. 동일한 사건을 동일한 인물이 처리해도 이랬다, 저랬다 한다.

아주 쉬운 예가 있다. 부부 싸움을 하거나 자식을 야단 칠 때에 그 당시는 자기가 100% 옳거나 훨씬 더 옳은 반면에 상대가 100% 잘못이거나 최소한 잘못이 크다고 확신한다. 일방적 언어폭력을 행사한 한참 후에 냉정을 되찾고 나면 오히려 자기 쪽에 허물이 더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 가서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도 혼자서 부끄럽고 치사해져 괴로워한다. 그런데 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있다. 그런 깨달음이 있으면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도 똑 같은 경우가 닥치면 더 크고 더 다양하며 교묘하게 야단친다. 또 다시 한참 후에야 그 잘못을 깨닫는다.

진짜 아이러니한 일은 그렇게 반복되는 분명한 잘못이라면 고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수치와 자책감이 괴로워서 의도적으로 잊으려 하고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제대로 잊히지 않으니까 이젠 자기 정당화를 시도한다. 나아가 선한 의미를 덧입히기 시작한다.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운다.  

신자들도 맞아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라고 혹은 지금은 모르지만 그분의 오묘한 계획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 관련 성경구절을 찾아서 일부러 끼워 맞추기도 한다. 빌라도가 어찐 일이냐고 탄식할 정도로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도 처형했다. 그후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써 붙이며 내 쓸 것을 썼다고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다. 유대인들은 그 피를 자기와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말할 정도로 정당하다고 강변했다가 자칭이라는 단어를 첨가해 달라면서 자신들의 수치심을 죽이는 대신에 자존심을 지키려 들었지 않는가?

예수님 재판에 참여한 모든 당사자들, 빌라도 대제사장 공회원 유대대중 로마군병 베드로와 유다에겐 딱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무엇인가? 믿음의 유무 여부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사이코패스이거나 나면서 사기꾼도 아니었다. 나름의 상식, 이성, 도덕을 갖출 만큼 갖추었다. 그러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완전한 일치를 보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이의 모든 생각들이 혼돈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불신자의 인생이 끝까지 허망한 까닭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부인한 심히 통곡한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겨우 이 모양 이 꼴밖에 안 되었는가 철저한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승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맹세했고 실제로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칼로 자른 나와, 비천한 하녀 앞에서도 맹세하며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내 중에 대체 누가 자기인지 헷갈렸던 것이다.

사실은 그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던 적이 이전에도 수도 없이 많았다. 자신의 실존 전부를 걸고 정말로 살고 죽느냐는 영원하고도 절박한 과제로 다가온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스스로 인정하긴 너무 싫었지만 세 번을 부인했고 앞으로도 언제든 그럴 수 있는 내가 진짜 자신의 실체임을 자각했기에 자신에 대한 너무나 큰 애처로움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그 후에 주님의 사랑의 용서를 받고서 주님을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신 후에야 비로소 참 소망이 생겼던 것이다.

생각이 뒤죽박죽인 원인은 자기가 붙들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완전한 100%의 진선미의 실체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신자의 인생이 끝까지 허망하고 갈급한 까닭이 끝없는 물질적 탐욕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들 중에는 검소하게 자족하면 사는 자도 많으며 심지어 무소유를 실천하는 자들도 있다.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이 좌정하지 않고 그 생각이 하나님이 심어주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팡질팡하는 자기 마음을 스스로 주체하지 못하기에 무엇을 해도 항상 허망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성경의 인물 가운데 인간적 기준으로는 바울만큼 모든 것을 갖춘 자도 없을 것이다. 특별히 그는 스스로 율법에 완전하다고 했다. 도덕적으로 최고로 의로운 자라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위한 열심에서 최고라고 자부했다. 종교적 하자가 전무하며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열심 때문에 스데반의 순교를 주도했다. 성전과 율법을 부인하는 것 같고 나무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 받은 죽음을 당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스데반이 바울에겐 하나님을 위해 반드시 돌로 쳐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또 그러고 나면 당연히 기쁨과 만족이 생겨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전혀 평강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스데반은 바울을 위해 기도했다. 천국 보좌에 주님이 앉아계심을 보았다고 선포하면서 실제로 그 얼굴에 빛이 넘쳤다. 오히려 그에게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모습을 보고 바울은 큰 쇼크를 먹었다.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지는 큰 은혜를 입었다. 그 회심 체험을 한 후에 그는 결국 무엇을 깨달았는가?

자신이 도덕과 사상과 종교에 능통하다고 해서 자신을 절대 구원할 수도 없고 아무 평강도 얻지 못함을 알았다. 그 전까지는 종교적 열성이나 감정적 흥분이 영적 만족인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과 권능 안에 살지 못하면 무엇을 해도 절대 평강이 없음을 절감했던 것이다.  

예수 믿어 얻은 최고의 축복

세상에서 최고로 지혜롭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어도 자기중심적 사고에 젖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혼란스러운지 자신도 모른다.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특별히 그 삶의 지혜와 연륜이 높아질수록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하나 있다. “지금이 최고 말세야. 지금 같은 말세는 이전에는 없었어.” 죄의 타락상이 하늘을 찌를 것 같다는 뜻이다.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탄식이다. 그런데도 정작 하늘을 쳐다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땅이 그 상태로 머물거나 더 악화되어도 그 안에서 신나게 살고 있다.  

그러면서 꼭 어떤 말을 덧붙이는가? “이렇게까지 타락했는데도 멸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 신기해!” 그들이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구체적인 표현만 안했다 뿐이지 그들도 타락한 세상은 멸망하는 것이 순리요 정상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거기다 뭔가 세상을 망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아직은 회개할 여유를 주고 있다는 뜻인데도 절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에 전혀 질서가 없는 까닭은 사탄이 좌정하여 그 영혼을 미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광채가 비치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 예수님 재판의 저녁이나 히틀러의 홀로코스터 참극은 사탄이 사람들을 농간해 집단적 광기에 휩싸이게 했다는 것 외에는 합당한 설명이 불가능함을 불신자도 시인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으려고도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역으로 말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 되는가? 그 정신내면에 절대적 선의 기준이 서있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보여 알고 그대로 따르고 싶은 예수님이 함께 하고 있다. 이전의 사탄의 견고한 진이 완전히 부서지고 대신에 성령이 좌정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이미 되었다. 성령이 이끄는 대로 거룩하게 살며 이 세상을 본받지 않을 수 있다. 당장에 성인군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각한 대로 우리도 생각하고 그분이 말하고 행동했던 것처럼 우리도 동일하게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자기 인생의 절대적 지표가 되는 의미와 가치를 정립하고 또 그렇게 이끄시는 참 주인을 모시고 있기에 세상의 어떤 것에도 비굴해지지 않게 된 것이다. 담담하게 대처하며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 어떤 환난이 닥쳐도 평강을 잃지 않게 된 것이다.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그 인생의 일관된 방향성이 없고 우왕좌왕 하고 있다면 그 믿음의 출발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 한다. 예수 믿어 얻은 가장 큰 축복은 이제는 더 이상 향방 없는 달음질과 허공을 치는 싸움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바로 이 큰 축복을 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 단순히 죽은 후에 천국 가게 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 땅에서부터 내가 모든 것을 걸고 달려갈 목표지와 종착점을 알기에 열심히 달려가고 있고 또 그럼으로써 주님이 맺어주시는 성령의 열매를 맛보고 있는 자가 신자라는 것이다.  

12/21/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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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범죄는 인간 최고의 의로움이다. (창세기강해 #15 - 창2:15-17)

선악과 범죄는 인간 최고의 의로움이다. 창세기 강해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살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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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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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창세기 강해 #14 - 창2:7-9)

에덴동산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가? 창세기 강해 (14)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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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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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창세기강해 #13 - 창2:1-3)

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을 꾸중할 수 있는 믿음 창세기 강해 (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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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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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 창2:1-3)

안식일에 대한 중대 오류 창세기 강해 (12)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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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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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창2:4-7)

진정한 철학은 창조주를 만난다. 창세기 강해 (11)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耕作)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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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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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 창1:26-28)

신자 인생의 첫째 가는 소명 창세기 강해 (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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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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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 창1:31)

믿음을 가진 첫째 증거 창세기 강해 (9)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이 가장 먼저 훈련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쩌면 영어를 숙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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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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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강해 #8 - 창1:20-23)

환난을 기뻐할 수 없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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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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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세기 강해 #7 - 창1:9-13)

한국교회의 양날 선 검 (창1:9-13) 창세기 강해 (7)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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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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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 창1:14-19)

열등감이 남아 있다면 신자가 아니다. 창세기 강해 (6)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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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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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초대교회의 열정으로 되돌아가려면? (롬1:1-4) 부활절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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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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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 창1:9-13)

당신이 세계 최고임을 확신하는가? 창세기 강해 (5) http://youtu.be/rMSIX3C2UK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 창1:9-13)

다윈에 앞서 진화론을 주장한 세상 모든 종교 창세기 강해 (4) http://youtu.be/qHjkSiEz-O0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 창1:6-8) [2]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http://youtu.be/opQj6Y6sXw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 창1:1-5) [2]

귀신은 좋아도 하나님은 싫다. 창세기 강해 (2) http://youtu.be/ASb2eX056xc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 창1:1)

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http://youtu.be/eCSGTueOy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조적 진화론? 저는 서른세 살에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마28:17-20) [2]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http://youtu.be/IiltnYNxUe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 마28:17-20)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1) 마태복음강해 (257) http://youtu.be/lEzdZEu44xU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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