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판(版) Passion of the Christ가 강조하는 것은?
마태복음강해 (250)
http://youtu.be/sHYlgb3sKac
(클릭하시면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마27:27-37)
감독의 의도를 알고 영화를 보라.
영화배우 멜깁슨이 2004년에 제작 감독한 “Passion of the Christ”(예수의 수난)는 전 세계적인 흥행돌풍과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특별히 예수님에 관한 영화로선 처음으로 미성년자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십자가 처형 장면이 너무 잔인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분분했지만 일부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불신자들에겐 아무 죄 없으신 예수가 그렇게까지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음을 알고 충분히 존경할 만한 기독교 창시자로 다시 각인되었다. 신자들도 주님의 십자가 수난의 실상을 정확히 앎으로써 그분의 대속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십자가 처형을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하려 했던 감독 멜 깁슨의 의도에 관객들이 호응했기 때문이다.
본문은 바로 그 영화가 다룬 내용이다. 그 잔인했던 영화도 감독의 의도를 알고 보면 그런대로 감동이 되듯이, 마태 판(version) “Passion of the Christ”도 온전히 이해하려면 독자는 저자의 저작 의도를 먼저 찾아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여러분에게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예수 십자가 처형을 연상할 때에 가장 먼저 혹은 강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무엇인가?” 십중팔구는 ‘고통’이라고 답할 것이다. 멜깁슨도 사람들의 그런 보편적 정서를 최대한 자극하려고 시도했는데 크게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단순히 밧줄에 꼼짝 못하게 묶여도 5-10분도 채 견디기 힘들다. 어렸을 때에 손들고 벌을 서본 경험이 다들 있지 않는가? 손발을 대못에 박혀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고통이다. 멜깁슨의 영화에서 쇠말뚝 같은 것을 사용하자 관객들이 큰 쇼크를 먹었다. 그러나 사람의 뼈를 뚫어야 하고 몸무게를 지탱하여 나무에 달려있게 하려면 그 정도 굵기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너무나 끔찍해 보였어도 영화 기법상 과장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몇 번 설명한 대로 십자가에 달리면 서서히 탈진해서 죄송하지만 말라 비틀어져 죽는다. 머리는 빠개질 듯이 아프다. 벌레나 새들이 산 채로 눈과 장기를 파먹는다. 성인 남자는 그런 상태로 평균 3일 정도 고통을 당해야 죽는다고 한다.
십자가 처형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며 인간이 고안해낸 최고의 극형이다. 고대는 범죄를 엄격히 다스려야 했고 적국의 원수를 무참히 보복해야 하므로 원시적 도구나 무기를 동원해 최대한 처참하게 죽이는 방안을 연구했다. 그 중에서 십자가가 최고 고통임을 경험으로 알았다. 로마는 제국에 거역할 시도도 못하게 반역 죄인에겐 반드시 십자가로 처형했으니 그 고통을 가지 짐작할 수 있다.
마태가 강조하는 포인트는?
그런데 본문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라. 예수님이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했다는 설명이 있는가 없는가? 사실상 없다. 채찍으로 맞았다는 기록은 있다.(26절) 쇠 방울이 달린 가죽 끈을 물에 적셔서 때리면 살점이 찢겨나가고 심하면 뼈까지 드러난다. 사십에 하나 감해 39대를 때리는데 간혹 채찍질만으로도 죽는 경우가 생긴다.
주님이 엄청난 육신적 고통을 겪은 것은 틀림없으나 마태는 피를 흘리고 살이 찢기며 실신했다는 식의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동일한 상황과 사건을 멜 깁슨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접근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할 때부터 이미 상당히 지쳐 있었고 채찍을 맞으면서 그 기력은 완전히 소진되었다. 오전 아홉시에 십자가에 달려 오후 세시에 운명했다. 십자가 고통은 여섯 시간만 겪었기에 다른 이에 비해 비교적 짧았다. 뼈도 꺾이지 않았고 새에게 눈을 파 먹히지도 않았다. 가시 면류관이 이마를 찔러 피를 흘렸겠지만 치명적인 고통은 아니다(29절). 갈대로 머리를 맞았어도 몽둥이나 채찍만큼 아프지 않다.(30절)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너무 힘겨워하니까 구레네 시몬으로 대신 지게 했다.(30절)
오해는 마셔야 한다. 채찍으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손발에 대못에 박힌 채로 십자가에 여섯 시간 동안 달리는 육신적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단지 마태는 십자가 처형에서 예수님이 겪은 육신의 고통보다는 다른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린 십자가를 연상하면 ‘고통’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마태는 지금 29절과 31절에서 반복해서 강조했듯이 ‘희롱’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것도 우상숭배를 하는 이교도 로마 군대의 최고 졸병에게서 조롱당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대제사장의 관정에서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을 때렸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서 결국은 빌라도로부터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아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저주 받는 죽음이라 인간으로서 당할 최고의 수치였다. 유대인들로선 예수를 더 이상 조롱할 필요가 없어졌다.
반면에 로마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물론 구약성경에 계신된 메시아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했다. 오직 군사 정치 경제로 당시 세상을 지배했다. 로마 황제가 이 땅 모든 사람의 주인 행세를 했다. 지금 기껏 로마의 최고 말단 군인 주제에 유대 대제사장이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고 어떻게 하든 제거하려 했던 예수를 마음껏 조롱 멸시한 것이다.
그들로선 유대인들이 예수가 하나님 아들인지 시비하는 일에 대해선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에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소했는데 너희들 사회에서 어떤 위치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로마 군대의 장교도 아닌 사병에게도 꼼짝 못하고 있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만큼 너희는 열등한 종족이기에 너희 주제와 신분을 똑똑히 보고 알라는 것이다.
로마군의 한 바탕 마당놀이
먼저 주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는데 군인 망토로 황제의 도포 흉내를 낸 것이다. 가시 면류관은 침이 달린 로마 황제의 왕관 모양을 본뜬 것이다. 갈대를 오른 손에 쥐게 했는데 왕의 지휘봉인 홀(笏)을 상징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라고 한 것은 “만수무강 하소서!(Long live King!)” 같이 왕에게만 하는 찬사를 그대로 따라했다는 뜻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은 것도 실제로 엎드려서 절하는 시늉을 한 것이다.
다른 사형수들처럼 곧바로 골고다 처형장으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로마 총독의 관정 마당에서 일종의 마당놀이 촌극을 신나게 한 판 벌인 것이다. 예수로 유대 왕 주인공으로 꾸며 희화화(戲畫化) 한 것이다.
마태는 특별히 유대인 독자를 대상으로 이 복음서를 저작했다. 예수가 구약성경에서 계시된 메시아이자 유대인의 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마태는 본 기사를 통해 “봐라! 우리 왕으로 오신 이가 이렇게까지 조롱당했지 않느냐?”라고 유대 독자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하여 도전을 주려는 의도였다.
비록 주님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들의 광대놀음에 놀아났지만 한갓 촌극으로 끝날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방인의 입을 빌려서 유대인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날 베드로 설교의 결론처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 되게”(행2:36) 하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었다는 것이다.
마태가 육신적 고통을 강조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뿐일 것이다. 먼저 예수님이 신음하며 처참하게 고통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면 스승이자 메시아에게 결례가 될까 염려했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조롱당하는 모습을 훨씬 더 길고 자세하게 설명했기에 그런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럼 남은 한 가지 다른 이유는 주님이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지라 분명 힘겨운 신음 소리는 냈을 것이지만 마태의 눈에는 주님이 그마저 끝까지 담담히 이겨내시는 모습이 더 인상적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지금 저자의 의도를 살펴본다고 해서 마태의 개인적 의견으로만 간주해선 안 된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저작되었다. 하나님이 그의 열성적인 민족의식을 들어 사용했다. 따라서 후대 신자들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고통보다 수치에 더 주목하라는 것이 성경의 실질적 저자인 하나님의 뜻이다.
죄를 지으면 고통스러운가?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구원이란 근본적으로 죄에서 사함을 받는 것이다. 또 죄로 인한 모든 부정적인 결과, 영향, 폐해도 깨끗이 씻음 받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마태는 죄로 인한 육신적 고통보다는 정신적 수치를 예수님이 제거했다고 강조하는 셈이지 않는가?
죄를 지은 후에 육신적 고통이 따르는가? 물론 그럴 수 있다. 쉬운 예로 술 마시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술로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했다든지, 많이 마셔서 머리가 너무 아파 다음날 출근이나 약속을 펑크 낼 수 있다. 그러나 폭행의 상처는 치료하면, 또 숙취는 사우나에서 한숨 푹 자고 나면 깨끗해진다. 정작 괴로운 것은 주사를 부리며 추태를 행한 것이다. 다음날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무슨 창피한 짓을 했는지 모르거나, 금주 선언을 한지 몇 일만에 또 고주망태가 된 것 등은 너무 부끄러워 못 견딘다.
인간은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거나 육체적 질병의 고통은 사실 생각하는 만큼 괴롭지 않으며 비교적 잘 견뎌낸다. 형편이 궁핍하면 더욱 악착같이 일하고, 중병이 걸리면 생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나 최근 백세시대가 되면서 치매로 죽느니 차라리 암으로 죽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수치보다 훨씬 견디기 쉽다는 뜻이다.
인간이 가장 못 견디는 일은 자존심이 구겨지고 체면과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남에게 모욕적인 언사로 비방을 받으면 밤새 끙끙 앓는다. 그 사람을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것 같은 분노와 저주에 사로 잡혀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 백약이 무효하다. 자기가 당한 것과 똑같이 아니, 몇 배로 앙갚음을 해야만 비로소 풀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죽으신 까닭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인간도 죄를 범하면서 그 죄로 인한 죽음의 형벌과 그에 따른 고통을 미리 염려하지 않으며 그런 인식조차 없다는 것이다. 죄를 범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그저 이 땅의 쾌락과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유대인들조차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 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자를 옳다고 말할 정도다.(롬1:32) 예수를 무고하게 죽이려는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율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음에도 대중들을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라고 선동했음이 그 확실한 증거이지 않는가?
불행하게도 예수를 믿은 신자들도 가끔 죄를 지을 수 있어나 그 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슬퍼하거나 안타깝게 여기지도 않는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불신자를 포함해 모든 이가 죄를 지으면 공통적으로 부끄러움은 느낀다.
인간의 고상한 착각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세상만사가 자기중심으로만 돌아야 된다는 관념이 고착되었다. 그런 인식의 바탕에서 말하고 행동한다. 다른 이들도 똑같이 자기중심성을 갖고 있으니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시기 질투 분쟁이 발생하고 상호 비방과 멸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성으로 자기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는데 그것이 훼손되면 못 견디는 것이다.
거기다 하나님은 인간을 반드시 이웃을 사랑으로 섬겨야만 참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타락하면서 자기만 사랑하는 존재로 변질시켜 버렸다. 그런 자기 사랑이 윤리적으로도 자기가 가장 고상하고 경건하다는 착각과 오류 속에 가두어 버렸다. 죄를 지어도 죄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모두가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의 티끌을 끄집어내는 전문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자각 인식은 못해도 하나님의 닮게 지어진 그 형상이 영혼 속에 남아서 죄를 짓고 나면 너는 더럽고 추하다고 인간의 이성에게 경고를 발하고 있다. 그러니까 누구나 스스로 의도하거나 의식하지 않는데도 죄를 지으면 자연적으로 수치심이 생기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방금 전까지 예수를 죽인 피를 자기와 자기들 후손에게 돌리라고 윤리적 종교적 자부심으로 가득 찼었다. 그런데 로마 군인들의 한바탕 촌극이 틀림없이 그들의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여 수치와 굴욕을 느꼈을 것이다. 그 영혼 깊숙이 심겨진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불신자들이 착한 자가 천국을 가는 것이 옳고 예수만 믿으면 구원 준다는 기독교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자신의 윤리적 점수가 평균 이상이라는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인간도 평생을 두고도 절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하나 있다는 점은 모른다. 또 모르는 채로 죽어간다.
죄를 지으면 본인의 의도와 의지와는 무관하게 수치심이 항상 생긴다는 사실이다. 본인의 의도와 의지와 상관없다는 것은 본래 그렇게 지어진 존재라는 뜻이다. 자신이 우연히 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 수치심은 죄를 지은 개별적 행동에 대해 스스로 윤리적 반성을 하거나, 타인의 훈계를 듣기 전부터 생긴다. 자신이라는 존재 전체가 사실은 치사하고 비겁하고 추한 상태라는 뜻이다. 그 수치스런 본질이 죄를 범할 때에 일부가 겉으로 드러난다. 또 그렇게 노출된 내면적 실체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지정의로 부끄럽다고 감지하고 인식되는 것이다.
벌거벗겨진 예수
인간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스스로 느끼는 모멸감은 절대 스스로 해소하지 못한다. 이런 짓을 서슴없이 감행하고 또 자꾸 반복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진다. 다시 술을 예로 들면 다음날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취해서 온갖 부끄러운 짓을 해놓고는 그 다음날 또 다시 그런 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정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고 한탄한다. 그냥 성급하게 과장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죽음이 아니고는 그 부끄러움을 해소하지 못함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권력, 명예, 재물을 죽을 때까지 추구하는 이유가 육신의 고통을 없애 편하게 살려는 뜻만이 아니다. 스스로 해결 못하는 내면의 무질서한 부끄러움을 그런 방식으로라도 감추고 싶은 것이다.
가룟 유다가 왜 자살했는가? 비록 스승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내몬 큰 죄를 지었지만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악하지 않다는 점을 제발 알아달라는 뜻이지 않는가? 땅에 떨어진 자존감을 인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오히려 역사상 최고로 비겁한 자의 표상이 되어버렸고, 그는 그 사실도 모르고 허무하게 죽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나눠가졌다.(35절)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 옷을 벗긴 것이 아닐 옷을 벗기고 십자가에 달았다. 유대인들의 복식은 겉옷, 속옷, 허리띠, 샌들 간단하게 넷으로 구성되었다. 십자가에서 시체를 훔쳐가는 것을 방지하고 완전히 죽었는지 확인하도록 한 분대로 보초를 세웠다. 로마 군 분대는 네 명으로 이뤄졌다. 옷을 찢어서 가졌을 리는 없기에 각 사람이 하나씩 그 네 종류를 나눈 것이다. 요컨대 주님은 속옷도 벗겨져 치부까지 드러냈다는 뜻이다. 그것도 생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같은 아녀자들 앞에서 말이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한 번 가정해보라. 그분은 이 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달릴 때는 그 인성이 더욱 완전히 충만한 상태였다. 그럼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에 육체적 고통과 벌거벗긴 수치와 어느 쪽이 더 괴로웠을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당할 죄의 형벌과 그 고통을 대신 지신 것은 다들 잘 알고 있다. 주목할 것은 모든 인간들이 스스로는 도무지 해소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모멸감, 자괴감까지 완전히 다 감당하셨던 것이다. 살다 보면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벌거벗긴 것처럼 부끄러워 죽을 뻔 했던 경험을 누구나 한두 번은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벌거벗김으로 해서 우리의 그 지우고만 싶었던 부끄러운 과거까지 다 깨끗이 씻어주신 것이다.
죽음으로도 지울 수 없을 것 같던 우리의 그 많은 허물과 수치를 당신께서 다 짊어지셨다. 엎질러져 다시 담을 수 없는 물처럼 완전히 끝났다고 체념한 인생에 새 생명을 채워주셔서 새롭고도 더 충만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이 어찌 십자가가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구원의 길이 아니겠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
예수 믿었다는 의미는 불신자들과 반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평생을 두고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자기 모멸감이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깨끗이 씻음 받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수치가 필연적으로 따라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렇게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 놓은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만 사랑하면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현상이다.
신자는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온전히 깨닫고서 자기 영혼에 다시 하나님을 완전하고도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게 된 자다. 그럼으로써 나라는 존재 전체에 대해 항상 지니고 있던 의구심, 불안감, 수치심, 자괴감 등을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분의 너무나 소중한 자녀가 이미 되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관계로 맺어졌다. 그분의 취소되지 않는 영광 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다윗 왕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후에 어떻게 회개했는가? “주께만 범죄 했다”(시51:4)고 고백했다. 우리야를 죽이고 그 가정을 파괴한 잘못에 대한 죄책은 무시했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 아이를 우리야의 아이로 속이려다 실패했고, 그래서 그를 최전선으로 내보내어 적군의 손으로 죽인 자기 자신이 너무 싫고 괴롭다는 뜻이었다. 지금 유대 대제사장이 로마에 반역한 죄로 예수를 팔아 넘겨서 자기들의 대적인 로마의 손을 빌려 죽이는 것과 똑 같은 죄를 다윗도 범한 것이다.
그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던 것이다. 하나님을 잠시 멀리한 데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 잘못된 행동만이 아니라 자기 전부를 던지며 회개하는 것이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했다. 내가 모친의 죄 중에 잉태되었다고 한다. 엄마까지 공범 죄인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다윗은 그런 후회와 반성으로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의 얼굴을 제발 내 죄에서 돌이켜 주시고 대신에 하나님께서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간구했다.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해달라고 했다. 자기를 자기중심성으로 자기만 사랑했던 존재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다시 되돌려 달라는 절실한 소원이었다.
신앙이 성숙한 증거
신자가 되었다고 죄를 안 짓고 거룩해졌거나, 죄를 지어도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간혹 십자가 은혜로 미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 받았다고 하니까 죄에 대해 아주 무감각해지는 신자들이 있다. 너무나 잘못하는 죄다.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더 거할 수는 결코 없다.
예수 믿은 후에도 신자는 불신자와 같이 죄를 짓고 또 수치심도 느낀다. 상당수 불신자들도 육신이 고통보다 정신적 수치가 훨씬 더 괴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해결 방안을 전혀 모르거나 스스로 해결하려 들 뿐이다.
신자는 다르다. 그 수치심의 근거와 이유와 해결방식을 정확히 알아서 실행할 수 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한 대로다. 자기 지체 속에 또 다른 법이 자기를 죄 아래로 끌고 간다. 그런 곤고한 사망의 몸에서 자기를 건져 줄 자는 예수님과 그 십자가 은혜뿐이라고 고백했다. 바울도 사망의 몸이라고 표현했고 또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죄 아래로 끌고 간다고 했다. 즉 개별적인 죄보다 자기 존재 전체가 부끄럽다고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만 참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존재다. 그 온전한 생명을 누리려면 신자도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며 그분의 십자가를 함께 지어야 한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그 수치를, 특별히 자기 존재에 대한 모멸감을 없애야 한다.
신자가 신앙이 성숙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기도와 말씀에 능통하고 교회 집회에 성실히 참석하는 것으로만 점검해선 안 된다. 자기 자신 전부에 대한 자괴감, 모멸감, 열등감을 얼마나 많이 깨끗하게 씻어냈는지 따져야 한다.
정말로 하나님이 자기로 인해 심히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내가 나를 볼 때나, 세상 사람이 나를 볼 때에는 여전히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수치를 대신 감당했기에 하나님은 나를 절대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다.
또 그런 확신을 바탕으로 실제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도 당당하고 담담할 수 있어야 진짜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인 것이다. 바로 그런 신자가 되라고 주님이 로마 군병들에게 온갖 희롱을 당한 후에 죽으신 것이며, 마태 판 Passion of the Christ의 저작 의도인 것이다.
12/28/2014
근데도 자꾸만 제 자신이 해결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이 모습이 신앙이 아닌 것임을 절절히 배웁니다.
헤결할 수 없는 부끄럼, 수치스럼들을 모두 용서하시려 오신 주님만이 참 소망이며 참 기쁨이심을 또 배우며
진정 감사하신 울 예수님을 섬세히 가르쳐주시는 말씀이 또 너무 감사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