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를 터트리는 믿음을 가졌는가?
마태복음강해 (253)
http://youtu.be/FQxHP1k1Syc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마27:51-56)
(참고: 설교 말미에 “여리고 성이 지진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모습으로 무너졌다”고 해야 하는데 착오로 그 반대의 뜻으로 말했습니다. 설교 텍스트대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술궂은(?) 고집불통 하나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한 후에 운명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감당한 것이다. 본문은 그 후에 일어난 초자연적 사건들이다.
자연을 초월했다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근원과 힘이 자연 자체에 기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이 깨진 것인데 자연을 만들고 운행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겉보기에는 인과율이 전혀 작동되지 않은 것 같기에 즉, 필연이 아니기에 불신자는 대놓고 기적을 우연의 일치로 취급한다. 일부 신자들도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나 본문처럼 한 시간대에, 한 장소에서 몇 가지 신령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났고, 특정하고도 일관된 의미까지 지니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일관된 의미를 지닌다면 사전에 계획된 것이다. 또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기록된 그대로 순전히 믿어야 한다. 본문은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 따라서 본문의 기적들에 대해 그 사실성도 따져봐야 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을 추적하는데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본문은 ‘이에’(51절)라고 시작한다. 예수님의 영혼이 떠난 후라는 뜻이다. 그럼 언뜻 하나님이 참 심술궂고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처럼 여겨지지 않은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더러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그러면 믿겠다고 조롱했다. 유대 대중들도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주는지 두고 보자고 난리를 쳤다. 그 때는 사방천지가 조용했다. 하나님은 완전히 침묵하고 인간 사회와 멀리 떨어져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는 당신의 독생자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는데도 그랬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그렇게 두 번이나 외쳤다. “다시 크게 소리 질러”(50절)라고 한다. 큰 소리를 질렀으면 분명히 그 내용도 알았을 텐데 밝히지 않은 것은 동일한 말씀을 했다고 봐야 한다. 단순히 비명과 신음을 질렀다고 해도 더더욱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버려둔 셈이다.
지금 뒤늦게야 엄청나고 신비한 기적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일으켰다. 마치 버스 떠난 뒤에 손을 흔드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왕 기적을 일으킬 바에야 우리가 흔히 기대하듯이 땅이 흔들릴 때에 대제사장과 빌라도의 저택이 무너져 내려야 했다. 또 온 땅이 캄캄해지고 바위가 터질 때에 예수님을 조롱했던 로마 군병과 유대인들이 그 자리에서 벼락 맞아 즉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그들은 멀쩡하게 잘 먹고 잘 살기만 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그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독생자에게 세상 죄 즉, 그들의 죄까지 감당시킨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외면당하며 죽은 것과 지금 뒤늦은 기적들이 모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꼭 그런 모습과 순서로 사태가 진행되어야만 했던 그분의 뜻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휘장
성소의 휘장이 저절로 찢어졌다.(51절) 출애굽기 26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식양(式樣)대로 아주 정교하고도 튼튼하게 만들어진 휘장이다. 어른 여럿이 힘껏 당겨도 찢을 수 없다. 그냥 찢어진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하나님 당신이 지시해서 만들도록 한 휘장을 하나님 당신이 찢으셨다. 이전과 다른 새 시대를 당신께서 여신 것이다.
성소 휘장은 두 종류가 있다. 성전 뜰과 성소를 나누는 것과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찢어졌는지는 불명이다. 둘 다 찢어졌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만약 하나만 찢어졌다면 히브리서에 따라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어야 한다.
바깥 휘장이 찢어진 것은 성전 전체가 무너졌다는 의미다. 당시에 관광명소로 꼽힐 정도의 장엄했던 헤롯 성전이 예수님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지금 그 예언이 곧 성취될 것을 예표한 것이다. 성전 자체가 무너짐은 유대의 형식적 가식적 종교를 하나님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그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은 일 년에 일차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모든 죄를 대속할 때에 통과한다. 어린 양의 피를 언약궤 시은좌(施恩座) 위에 뿌림으로써 부지중에 지은 죄나, 미처 속죄제를 드리지 못한 죄까지 모두 용서 받는 것이다. 그런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대로 이전의 동물 희생 제사는 불완전했다는 뜻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지 않았고 또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았다.(히4:15) 완전한 인간으로써 인간의 대표가 되었다. 또 죄가 전혀 없었기에 완벽한 제물이었다. 나아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로 희생제물을 받았으니까 영단번(永單番-once for all)의 제사가 되었다. 영원하고도 완전한 속죄가 이뤄진 것이다.
그 결과 예수의 피에 힘입는 자는 성소로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된다.(히10:19) 주님이 휘장 가운데로 새롭고 산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휘장은 바로 예수의 육체를 상징하는데(히10:20) 그 몸이 십자가에 찢겨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했다. 더 이상 동물 제물은 필요 없어졌다. 주님이 대신 죽음으로써 죄인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십자가 이후 신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의 중보적 역할이 더 이상 필요 없다. 죄에 찌든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진노의 담을 주님이 허물었다. 정작 죽어 마땅했던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죄를 지었던 주님의 보혈에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구원 후에도 미쁘신 하나님께 자기 죄를 고백하면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을 만남에 필요한 종교적인 사전 절차와 의식은 제거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탄탄대로가 열렸고 그 위에 깔린 예수의 붉은 피로 물든 주홍 카펫 위를 달려가면 된다. 죄인인 인간 쪽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두 가지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진심어린 갈망과 자신의 전부를 특별히 그 심령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참 겸손뿐이다.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렸다.
바위가 터졌다고 해서(51절) 요세미티 같이 산에 있는 바위들이 터진 것이 아니다. 성경은 원래 장절 구분이 되어있지 않기에 52절과 53절을 연결해 읽어야 한다. 유대 무덤은 인공적으로 굴을 파고 가족들을 층계별로 안치한 후에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아 놓았다. 엄청 큰 맷돌 밑에 비스듬히 홈을 파서 굴리도록 했는데 장정 몇이 붙어야 겨우 열 수 있었다. 성도들의 무덤을 막고 있는 바위가 터진 것이다.
여러 번 강조했던 성경의 정미함이 바로 이 부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바위가 굴러가고 무덤이 열리며”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랬다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단지 지진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주장이 먹힐 뻔 했다. 지진이 나면 바위가 구르다 갈라지거나 부셔질 수는 있어도 터질 수는 없다. 원어로도 조각조각으로 박살나는 것을 뜻한다. 지금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고 바위가 절로 터졌다는 표현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면 도무지 기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주목할 것은 자던, 죽어서 무덤에 있다는 유대식 표현임, 성도가 일어난 일이 예수의 부활 후라는 점이다.(53절) 예수가 운명한 직후가 아니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부활시킨 후라고 해석하지만 기록된 그대로 예수님의 부활 후라고 봄이 타당하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였다. 주님 부활 후에 성도들이 그분의 부활에 연합할 수 있지 주님 부활 전에 성도가 부활할 수는 없다. 또 유대무덤은 가족 묘지로 귀중품과 소장품들을 함께 안장했다. 만약에 미리 무덤이 열린 채로 방치되었다면 도굴꾼이 설쳤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가 의도적으로 그 일을 시간 순서에 관계없이 삽입구처럼 앞당겨 기술한 것이다. 그 의도를 너무 어렵게 따질 필요 없다. 기록된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로마 백부장과 그 부하들이 지진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다.(54절) 그 되는 일은 바로 바위가 터지고 성도들이 부활하여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많이 보였던 그 일이다.
많은 신자들이 이 이적들이 주님이 십자가에 운명하신 직후에 골고다 언덕에서 다 일어났고 그 현장에 있던 로마 군병들이 주님을 인정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에는 사방이 캄캄해진 것뿐이다. 혹시라도 땅이 진동했을 수는 있다. 그럼 54절 기록은 “지진을 보고” 두려워서 예수를 인정했다라고 고쳐야 하고 “그 되는 일을 보고”라는 부연설명은 필요 없다.
또 그럼 일식과 지진이라는 자연 현상들만 보고 우상숭배를 하는 이교도이자 가장 이성적인 로마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리는 없다. 그들은 분명히 무덤이 터지고 성도들이 부활한 것을 보았으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틀림없다고 인정한 것이다. 마태가 앞당겨서 성도 부활 사건을 기록한 이유가 이제 이해되는가?
마태가 앞당겨 기록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성중의 사람과 로마 군병을 대조할 목적이었다. 마태는 지금 구태여 “거룩한 성”이라고 표현했는데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성전이 있고 율법에 따라 경건한 제사를 드리며 언약 백성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곳의 거룩한 백성인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이 성도의 부활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여전히 인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에 부활한 성도가 누구인지 몇 명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성도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는 아주 드물다. 이스라엘이 언약공동체이자 선택된 민족임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 지칭한다. 성도는 다니엘서에서만 예수님의 초림 이후 재림 때까지 메시아에 의해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이라는 종말적 제한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고 예수님에게서 직접 복음을 전해 듣고 주님을 온전히 믿다가 최근 2-3년 사이에 죽은 신약성도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 성경에서 성도는 도덕적 종교적 하자나 잘못이 없는 성자를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큰 종으로 그분을 위해 큰 업적을 쌓은 자도 아니다. 하나님이 죄와 흑암의 세상에서 따로 구별해 내어 구원의 은혜를 베푼 모든 자가 성도다. 구약시대에도 비록 소수이긴 해도 성도는 분명히 있었다.
무덤 속에 자던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영단번의 제사가 성취되기 전에 죽은 성도들이다. 쉽게 말해 예수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죽은 성도들도 하나님께 불려나옴의 은혜를 입었기에 부활의 영광에 절대 누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인할 수 없는 진리
그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들이 최근에 죽은 지인이었거나,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였거나 분명히 부활했다는 사실만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 텅 비웠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거룩한 성의 거룩한 사람들은 끝까지 주님을 믿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선 이때는 완전한 부활이 아니라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안 가 다들 다시 죽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다. 로마 군병들은 문자 그대로 “그 되는 일을 보고”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그 되는 일을 보고도 오히려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 군병은 자기들의 기존 사고방식, 가치관, 철학 종교 사상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았다. 순전히 중립적인 바탕에서 일어난 일들을 합리적 이성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들에게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일련의 기적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연결시켜 따져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결론 밖에 나올 수 없다. 이는 도무지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진실이다.
심히 두려웠다는 것이 방금 전에 조롱했던 일로 벌 받을까 두렵기도 했겠지만, 그 엄청나고 신비롭고 대단한 일들 앞에 오금이 저렸다는 뜻이다. 그들로선 사상 초유의 장관이었다. 아니 기적 자체가 생전처음 겪는 일이었다.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초라한 한 육신만 달려 있었다. 이 엄청난 기적들은 아무 말도 못하는 바로 그 시신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인간으로써 마땅히 보여야 할, 아니 자연스러운 반응을 한 것뿐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도 저절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냥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심히 두려웠기에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이다.
로마 군병들은 방금 전까지 예수를 유대인의 왕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고 직접 맘껏 조롱했었다. 주님은 그럼에도 항거는커녕 한마디 변론도 않고 묵묵히 담담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주님이 아무 말 않고 죽었어도 죽기 세 시간 전부터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이 당신만이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더 크고 분명하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로마 군병에 대한 기록이 삽입구이기에 55,56절의 여인들도 로마 군병을 쳐다본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님을 쳐다본 것이다. 지금 모두가 예수를 조롱했고, 제자들도 다 도망갔지만 이 여인들은 끝까지 골고다 언덕까지 따라갔다. 여성 특유의 모성애도 작용했겠지만, 죄송하지만 여인들은 그 생각이 단순하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지금 눈앞에 일어난 일들을 있는 그대로 믿었다는 뜻이다.
마태의 기록처럼 십자가 전후에 되는 일들을 보면 즉, 오늘날의 사람들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읽으면 로마 군병처럼 어떤 완악한 이교도이던, 갈릴리 변방에서 왔던 아녀자처럼 아무리 비천한 자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부활을 보고도 믿지 않은 이유
이제 거룩한 성의 유대인들이 부활한 성도를 보고도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가 자연스레 밝혀졌다. 로마 군병이나 여인들처럼 단순하고 중립적인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어난 기적들을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해석하지 않았다. 합리적 이성적 판단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다. 기존의 가치관과 종교적 사상에 고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선민으로써 출애굽과 홍해의 엄청난 기적을 맛보았다. 어지간한 기적에는 그 감각이 무디어져 있었다.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아 성전에서 율법대로 성실하게 제사를 드리기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었다.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할 바는 다했고 인간사회에서도 구제와 기도와 금식과 십일조에 열심이라고 칭찬을 받고 있었다. 이제 하나님 쪽에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주는 일만 남았다고 조르고 있었다.
그들도 예수님이 이적을 베풀자 처음에는 메시아인지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주님이 창기, 세리, 죄인, 불구자, 심지어 귀신들린 자들만 상대하는데다 자기들도 그들과 같거나 더 못하다는 지적을 들었다. 또 하나님 앞에 완전히 죽어야 한다고 하니까 죽어야 할 자는 자기들이 아니라 예수라고 덤벼든 것이다. 그 후로는 예수와 연관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싫고 틀렸다고 정죄한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자기 전부를 내어드리는 겸손이 없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알고자 하는 갈망도 없었다. 대신에 자기 속에서부터 자기를 높이는 고집으로만 가득 차있었다. 자신이 자기에게 신이었고 자기를 치장하는 일이 그들의 종교였다.
신자는 불신자와 반대여야 한다.
지금 이천 년 전의 완악했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예수쟁이들이 주는 것 없이 밉다고 하는 불신자들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신자가 더 문제다. 불신자들은 자기를 높이려는 생각에 고착되어 있고 그 생각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그렇다면 신자는 그 정반대로 자기를 완전히 낮추고 예수님만을 높이려는 생각에 고착되어서 그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어야 한다.
믿음을 방해하는 어떤 시험과 유혹 앞에도 흔들림 없이 당당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는 하나님의 친 백성임을 확신해야 한다. 세상의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어야 한다. 힘들고 지치더라도 싸우고 있는 중이어야 한다. 최소한 싸우려고 준비는 해야 한다.
마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전후의 일들을 일어난 그대로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특별한 자기 생각을 피력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사건 발생 순서를 한 번 바꾼 것 외에는 말이다. 사건의 관찰자인 제 삼자로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한 구절, 한 구절이 즉, 그 기적들이 표명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예수가 구약성경에 계시, 예언된 유대인의 왕이자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신학, 자기가 배운 기독교 교리로 변증하는 것이 아니다. 마태는 단순히 독자더러 일어난 사건을 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로마 군병이나 아녀자들처럼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임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이자 구원주요 심판주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성경기록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심지어 예수님을 알아 믿고자 하는 소망이 구태여 없이도 예수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만 없이 중립적 바탕에서 논리적으로 묵상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로 살아 운동력이 있다. 겸손하고 순전한 독자의 심령을 찔러 쪼갠다. 성령이 간섭하면 그 사람을 완전히 뒤집어서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 성령의 역사가 없어도 세상의 종교와 사상과는 전혀 다름을 깨달을 수 있다. 도덕적 영적인 큰 찔림이 임하고 예수를 더 깊이 알고 싶어진다.
공포의 어둠이 아니었다.
본문의 사건 현장에 있었다고 가정해보라.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인가? 너무나 경이롭고 광대한 하나님의 역사 앞에 감히 숨도 못 내쉴 판 아닌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이 본문을 읽고 어둡고 부정적인 감상만 갖는다. 천지가 캄캄해지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에서 시체가 걸어 나오니까 심히 두려워하는데 즉,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본문의 뜻은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다. 예수님이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며 완전한 제물로 드려졌다. 정말로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 되었다. 사방이 캄캄해진 것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흑암은 거기까지 뿐이었다. 땅이 흔들리는 것도 하나님이 새 땅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전조였다.
바위가 터졌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안에서 밖으로 폭발했다는 뜻이다. 밖에서 안으로 터졌으면 무너져 내렸다고 해야 맞다. 관찰자가 밖에서 보았고 또 보이는 대로 기록하니까 터졌다라고 한 것이다.
여리고 성 함락 사건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지진에 의한 것이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고 반발했다. 놀랍게도 그 성을 발굴해보니 성벽이 폭삭 내려앉았는데 지진으로는 도무지 생길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방향이 모두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죄로 타락한 가나안 족을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본문은 그 반대다. 바위가 안에서 밖으로 터져 나왔다. 중국 무술 영화처럼 시신이 일어나 강시가 되어서 장풍으로 깨트린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이 부활하자마자 그 부활의 새 생명의 기운과 활력이 성도들의 무덤 안에까지 가득 차게 된 것이다. 바위는 물론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엄청난 예수 새 생명이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에 흑암으로 가득 찬 것은 단 몇 시간뿐이었다. 예수님의 부활과 동시에 온천지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권세와 영광으로 뒤덮였다. 세상 어떤 것도 그 예수 부활의 참 생명을 방해하거나 거역할 수 없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기록은 실제 일어난 그대로 적은 것이다.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보라. 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지 도무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이 골고다 언덕에 강력히 임재했다. 아마 그 현장에 있었다면 제대로 숨도 못 쉬었을 것이다. 그저 예수님, 오 예수님만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을 것이다. 이는 경외감으로 가득 찬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골고다 현장에서 실제로 그 영광을 볼 수 있었던 자는 극히 일부였다. 자기를 전부 내어드리는 겸손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자 하는 갈망이 있던 자들이었다. 로마군병과 여인네들은 사실은 그런 갈망과 겸손보다는 기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여 예수님과 그 십자가에 연결시켰을 뿐이다. 오늘날로 치면 성경을 순전히 그 기록대로 믿는 자다.
그런데 십자가 영광을 보았다고 현실에서 형통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심한 조롱, 고통, 억울함으로 고달파질 수 있다. 심지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 거룩한 성에 들어가게 된다. 무덤 속에 자고 있던 육신도 주님이 재림할 때에 영광스런 부활육체를 입고 무덤을 터뜨리고 걸어 나오게 된다. 그런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하고 염려한다는 말인가? 본문이 말하는 바는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면 세상에 대한 어떤 공포심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1/18/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