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면피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까닭
마태복음강해 (256)
http://youtu.be/EIg462NOo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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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마28:11-15)
하나님 아들이라는 확실한 표적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지진이 나고 천사가 내려와 입구의 돌을 굴리자 파숫군이 발견한 것은 텅 빈 무덤이었다. 보초를 서며 졸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은 부활하여 이미 사라진 후였다. 몇몇 파숫군이 천사가 떠나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부랴부랴 대제사장에게 가서 모든 된 일을 보고했다.
마태는 그들을 군병(軍兵)이라고 지칭했다(12,15절). 그래서 로마 군인이 빌라도 총독이 아니라 대제사장에게 먼저 보고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또 다시 부활 기사의 신빙성에 대해 꼬투리를 잡는 사람이 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에게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지키라고 허락했다.(마27:66) 대제사장 휘하에는 성전에 파견 나와 있는 로마 군병들과 자체 무장을 한 유대인 하속들이 있었기에 함께 보낸 것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체포할 때에도 로마 천부장과 군대와 유대인 하인들이 함께 왔다.(요18:3,12)
파숫군이 로마 병사들뿐이었다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무덤을 지키라는 명령의 최종 최고 책임자는 빌라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세사장 휘하에 있었고 그 명령을 먼저 직접 들은 것도 대제사장에게서였다. 이 문제에 관해 빌라도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곧바로 빌라도에게 보고했다간 문책부터 당할 것이 빤해 대제사장에게 중재를 부탁할 양으로도 그를 먼저 찾아간 것이다.(14절)
모든 된 일을 보고 받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파숫군을 문책은커녕 꾸중도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이 목숨이 붙어 있을 때에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겠다고 조롱했지만 100% 그런 의도만이 아니라 은근히 그러길 기대했을 수도 있다. 주님의 공사역 중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메시야의)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12:38)고 간청했다. 마지막 날 밤 재판 중에는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26:63)고 요구했다.
지금 주님의 목숨은 완전히 끊어졌고 무덤에 안치된 후에 큰 바위로 막았다. 군병들이 지켰기에 제자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사실만큼 주님이 인간이 아니라 신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도 없다.
예루살렘 성 중의 두 소문
그렇다면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8절) 무서움과 큰 기쁨을 갖고서 예수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그토록 바랐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함께 논의했어야 했다. 최소한 자기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정상이 아닌가? 그러나 정반대의 짓거리만 자행했다. 군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고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서 소생시킨 후에 부활했다고 선동하고 있다는 식의 거짓 소문을 내라고 시켰다.
거짓은 아무리 그럴싸한 변증과 핑계를 동원해도 반드시 엉성한 모순을 노출하게 마련이다. 거짓 자체가 거짓임을 증명하게 된다.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13절)는 말은 무슨 뜻인가? 보초 근무에 태만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시체를 훔쳐 갈 것을 대비해서 특별 보초를 섰는데 누워 잤다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된다.
설령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고 천사도 강림하지 않았으며 정말 군병들이 자고 있는 사이에 제자들이 시체를 훔치려 했다 해도 바위의 큰 돌을 굴려야 한다. 그 구르는 소리에 잠이 깨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무엇보다 보초들에게 큰 벌을 내려야 한다. 또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면 대대적인 제자들의 색출 체포 작전이 수행되어야 한다. 나사렛 예수와 그 일당들에게 현상금이 걸리고 포스터가 나붙여야 마땅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가만히 추측해보면 당시의 상황이 흥미롭지 않는가? 예루살렘 성 중에 두 가지의 은밀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예수가 실제로 부활해서 제자들을 만났다는 것과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서 부활했다고 거짓말하고 다닌다는 것 둘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 텅 비어진 것은 사실이니까 둘 중 하나는 진실이다.
처음에는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당혹되었을 것이다. 그 전개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니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데도 체포할 낌새가 없었다. 보초 선 군병들도 벌을 받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이 갑자기 돈이 생기며 활보치고 다녔다. 평균 수준의 판단력으로 어느 소문이 진실인지 쉽게 눈치 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얼토당토 않는 거짓 소문의 출처를 추적해보니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들이 누구인가? 유다 최고의 지성, 도덕성, 종교성을 갖춘 자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교회에서 장로 직분을 받았고 박사 학위도 있는 장관들이 국무회의로 모여 짜낸 비책이었다. 그런데도 삼척동자도 웃을 수준으로 자기 얼굴에 누워서 침을 뱉는 꼴이 되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는 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인간이 당장 눈앞에 떨어진 불똥만 끄려 급급해 하다보면 이만큼 어리석게 된다. 또 거짓을 감추려 하면 더 큰 거짓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아도 안 되는 것이다.
증권가 찌라시보다 못한 인간 최고 지성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면 우리 같으면 두려워서라도 이런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생전에 예수가 많은 이적을 일으킨 점을 감안하면 이제 부활까지 했으니까 당장 자기들에게 큰 벌을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그들이 그렇게까지 어리석지는 않았다. 오히려 훨씬 더 영악했다. 예수의 생전의 행적을 가만히 따져보니 자기들에게 복수할 사람은 아니라고 예측했던 것이다. 그들의 어리석은 측면은 영적 진리에 소경이었다는 것뿐이다. 반면에 영악했던 측면은 자기들 앞가림하는 데는 십자가 처형에서 보듯이 능수능란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생전에 주로 소외되고 비천하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교제하며 위로하고 치유했다. 단 한 번도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성전을 청소할 때에 채찍을 휘두른 적이 있지만 그 대상은 제물 장사치와 환전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상을 엎고 제물로 바칠 동물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이 일으킨 기적을 산헤드린이 일일이 보고 받았을 텐데 전부 사람을 치료하거나 살리는 목적이었다. 부정적인 기적은 딱 한 번 있었는데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상대로 했다. 철 이르게 나뭇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었던 무화과나무를 말씀 한마디로 말라 죽게 했다.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유대 종교의 종말을 상징하며 제자들을 가르칠 의도였다. 제자들만 있는데서 기적과 가르침이 있었기에 이에 대해선 그나마도 몰랐을 것이다.
무력으로 전 유럽을 지배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엘바 섬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일 년 만에 섬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은 전 유럽을 다시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만약 주님이 제자들을 군병으로 훈련시켰거나 가공할 능력으로 뭔가를 파괴하는 이적을 보였다면 대제사장이 지금 한국의 증권가 찌라시보다 못한 이 어처구니없는 헛소문을 꾸며낼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로 제자들이 대로를 활보하며 이스라엘 독립군을 모집했을 것이다.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문을 잠그고 숨었을 것이다. 그들이 이런 거짓을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같은 세상 영웅과는 다르며 모든 것을 본인이 희생 감수한다는 점까지 익히 알고 계산에 넣은 것이다.
머리가 뛰어난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예측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전혀 문책 추궁하지 않았다. 아니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음부터 당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줄을 당신께서 더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 직분과 권력을 이용해 재물을 쌓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하나님마저 그런 종교 장사에 동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진멸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따라 일일이 처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인자와 긍휼에 풍성하여 끝까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리시려는 것이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구원을 얻을 절호의 마지막 기회였다. 역사상 최고의 엉터리 재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의 최고로 억울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제 주님이 부활했으니 찾아가 그 잘못을 직접 빌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의미이지 않는가?
그러나 주님 부활 후에도 역사상 최고의 거짓말을 꾸며내어 하나님의 아들임을 끝까지 부인했다. 정작 하나님께 부인당할 자는 자기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며 영원한 멸망의 길로 스스로 걸어간 것이다.
부활 예수를 부인한 더 깊은 이유
그들이 이 수준 낮은 거짓을 조작할 정도로 예수를 싫어하고 미워한 데는 또 다른 더 깊은 이유가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말로 얼굴에 철판을 깔았고 영혼이 시커멓게 썩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거짓을 조작하고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남아 있는 인간이 죄를 지으면 생래적으로 수치심과 공포심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들이 모여서 계책을 궁리하고 있을 때에 틀림없이 그 속은 찜찜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양심의 가책이 전혀 작동되지 않을 만큼 더 큰 힘이 그들을 묶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치사하고 더럽고 포악한 죄를 즐기며 탐닉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 잘못을 스스로는 절대 시인하지 않는 너무나 끈질긴 고집과 성향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조차 용서를 구하지 않는 완악함이다. 아담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 영혼이 타락된 것과 동일한 모습이다.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는 본성이다. 바로 죄의 본질이자 핵심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자 스스로는 전혀 의도 예상치 못한 수치와 공포가 순간적으로 엄습했다. 이브와 함께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 몸을 가리고 동산 깊숙이 숨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누가 네게 벗었음을 고했느냐, 왜 내가 먹지 말라고 명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담과 이브는 서로 상대에게 잘못과 책임을 전가했다. 그 전에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순전하게 사랑했던 사이였는데도 말이다. 그 순간만은 서로 미워하는 원수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때문이라고 변명했다(창3:12). 궁극적인 잘못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브를 주지 않고 자기 혼자만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에 이브를 돕는 배필로 붙여주었을 때에는 감격하여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하나님께 감사하더니 거꾸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책임이라고 몰아세웠다.
원죄의 특성
아담의 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댄 것이 범죄한 후에 생기는 수치심과 공포심을 없애려고 심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식으로 자기 방어 기제로 마누라와 하나님 탓했다고 이해하고 그쳐선 안 된다. 그 전에 아담은 이미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기 싫어했다.
사탄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 하나님이 나를 시기한다고 판단했다. “하나님이 내가 당신처럼 되는 것을 싫어한다고! 그럼 나도 하나님을 싫어해주지. 나만 순종하고 섬기며 손해 볼 수는 없지”라고 마음먹은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도 사실 별것 아니잖아.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가 있어.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다 경작했는데. 이곳의 주인은 바로 나야.”라고 작정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분과 등을 진 것이다. 내가 최고다, 나만이 옳고 의롭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최소한 내겐 잘못한 일이 없다, 내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도 포함하여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모든 인간의 본성에 깊숙이 심어진 것이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벌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던 유대인들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님의 말을 듣고는 모두 물러갔다. 그 후에 죄를 사해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그 때에 주님은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아버지가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증명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세상을 구원하고 심판하러 보낸 그분의 아들이라고 선포했던 것이다.(요한복음8장)
유대인들이 끝까지 주님의 그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죄로 책을 잡힐 일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지 않느냐? 그리고 진리를 말하는데도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미워한다.”고 질책했다. 그래서 “너희는 마귀의 자식으로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닮아 거짓말을 한다”(요8:44)고 예리하게 지적했었다.
이처럼 본문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죄한 예수님을 살인한 것도 모자라 부활을 했음에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끝까지 부인했지 않는가? 또 진리를 감추려 말도 안 되는 거짓을 동원했다. 자기 잘못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원죄가 작동한 것이다. 그들은 그 영혼이 사탄에 미혹된 마귀의 자식들이었던 것이다.
성격차이 이혼은 엉터리 거짓말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했던 이천 년 전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오늘날 그분의 정체성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문제 삼으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신자들도 이런 본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경의 다윗 왕이다.
다윗은 충성된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다. 불륜의 자식이 잉태되자 그 아비를 속이려 했다. 전쟁터에 있는 우리야를 불러내려 일부러 포상 휴가를 주었다. 자기 아들을 우리야의 자식으로 둔갑시키려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우리야는 한가히 아내와 즐길 수 없다고 거절하자 실패했다. 결국 가장 격렬한 싸움의 최고 일선으로 내몰아 적군의 손을 빌려 죽게 만들었다.
세상에 이런 철면피가 없다. 본문의 대제사장 이상이다. 우리야가 죽은 뒤 밧세바를 후처로 들이고 그 자식을 태연히 왕자로 삼으려 했고 죽을병에 걸릴 때까지 단 한 번도 자기 잘못을 회개하기는커녕 시인도 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이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왕이 행한 일이라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었다.
예수의 시체가 제자들에게 도난당했다는 소문이 너무나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대제사장이 행한 일이라 모두 꿀 먹은 벙어리 시늉을 한 것과 같다. 그러니까 마태는 “오늘날까지”(15절) 그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마태가 이 복음서를 AD 50-70년 사이에 저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최소 20년 최장 40년간 거짓이 진리처럼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왕인데다 당시 후처가 용인되었기에 오늘날 신자와 관계없다고 발뺌할 문제가 아니다. 이혼할 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유는 성격 차이일 것이다 이 또한 너무나 말이 안 되는 핑계, 아니 거짓말이다. 결혼 전에 없었던 성격 차이가 결혼으로 생긴 것이 아니지 않는가? 연애할 때부터 있었고 바로 그 성격차이 때문에 즉, 자기와 다른 점이 매력으로 여겨져서 결혼했지 않는가? 상대 배우자와 외적 여건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데 결혼을 꼭하고 싶었던 중요 이유를 이혼의 첫째 이유로 둔갑시키는 것이 인간이다.
부부관계 갈등은 혼외부정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정도의 차이는 조금 있어도 그 원인과 잘못은 남편과 아내에게 거의 반반이다. 그럼에도 모든 잘못을 상대에게 덮어씌우고 내 잘못은 아예 없거나 무시해도 될 정도로 미약하다고 서로가 고집 피우다가 결국 파탄에 이른다.
성격 차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했지만 사실은 우리 부부는 죽었으면 죽었지 각자 자기 잘못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세상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꼴이다. 그것도 자식들이 바로 그런 아빠 엄마 때문에 상처 받고 비뚤어져 그 인생이 실패할 확률이 아주 높은데도 말이다.
성경은 이런 현상을 두고 자기를 최고로 높인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내가 최고니까 나를 대적하는 자는 물론 찬성하지 않는 모든 이가 나의 대적이 된다. 그 영혼이 철두철미 타락한 증상이다. 마귀의 자식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들 사이에도 성격 차이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
주님이 배우자가 간음하지 않는 한 이혼하지 말라고 명한 까닭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와 명령을 어겼다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부인하기 전에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 즉 상대에 대한 비방을 전혀 하지 않았다. 죄에 찌들기 시작하자 모든 잘못을 상대 탓으로 돌렸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를 높였던 죄에서 뉘우쳤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자기중심의 최고 위치에 두고서 자기는 최고로 낮아졌다. 자기가 가장 큰 죄인이므로 남에게 책임 전가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상대에게 전적 잘못이 있는 간음 외에 그 잘못의 원인이 반반인 성격차이로는 즉, 남만 탓하는 이혼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철면피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이유는?
그런데 누가 봐도 본문의 대제사장만큼 철면피였던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자기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인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단 선지자의 견책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하나님께만”(시51:4) 너무나 큰 죄를 범했다고 실토했다. 그로선 우리야, 밧세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큰 죄를 범했다. 하나님부터 챙겼다고 그분 마음에 든 것은 아니다.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하고 있는데 왕은 한가롭게 하나님을 잠시 잊고 옥상을 노닐다 유혹에 못 이겨 간음이라는 죄를 범했다는 차원의 회개를 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잠시 잊으면 간음이라는 죄에 빠지며 그래서 죄에 지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자기를 높였기 때문이다. 나를 최고로 높이려는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면 나에게는 잘못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증상이 반드시 되살아난다. 다윗은 내가 내 죄를 보지 못했던 그 죄가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탄의 꾐에 넘어간 원죄에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의 타락상이 그렇게까지 교묘하고도 끈질기게 깊숙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고 처절하게 자각한 것이다. 자신의 보이지 않는 내면 전부를 끄집어내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긍휼에 붙들어 맨 것이다. 내면의 전부 즉, 자기 존재 전부를 하나님더러 새롭게 깨끗이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범죄했다”는 처절한 고백을 한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저를 필두로 다윗 왕, 예수님 시대의 유대 종교지도자들, 바울 같은 사도들, 오늘날 성격 차이로 이혼하는 신자들 등등 모든 인간의 본성에는 자기 잘못을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눈의 티끌은 끄집어내는 달인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두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 여인보다 더 음란하다는 사실을 자기는 몰라도 하나님만은 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진토 같은 우리 체질과 썩어빠진 바로 그 영혼 때문에 더더욱 예수 십자가의 은혜만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분의 긍휼과 사랑만이 내 영혼이 살아서 활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고백하게 된다. 고백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로 인해서 언제 어디서나 부활 소망에 힘입어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당부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같은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을 죽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훈련으로 가능한 것이다. 영혼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려는 고집과 성향을 깨트리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 고집 때문에 모든 잘못과 죄가 야기되는데도 그렇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영적인 어리석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기 눈에 들보가 없다는 천하가 웃을 거짓말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은 예수 십자가의 은혜가 없는 인간이 얼마나 영적으로 어리석고 무지하다 못해 쉽게 철면피가 될 수 있음을 너무나 정확하고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본문의 대제사장이요, 회개하기 전의 다윗 왕 같은 철면피였다. 예수님 앞에 일대일로 서서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의 십자가 사랑에 비춰서보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 잘못을 죽어도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영혼이 썩었다는 것을 자백하게 된 것이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된 것이다.
역으로 말해 예수님을 나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실 때에 진정한 인간답게 회복되고 하나님의 참 생명이 나를 통해 세상에 증거 됨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일에 온전히 충성하는 것만이 최고의 기쁨이요 보람이 되어 있는 자가 신자다. 그런 신자에게 하나님이 온전한 승리를 주지 않을 리는 없지 않는가?
2/8/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