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참 뜻(2)
마태복음강해 (258-完)
http://youtu.be/IiltnYNxU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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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7-20)
육신의 부모가 임종 직전에 자식에게 남기는 유언은 너무나 중요하다. 자식으로선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최우선적으로 준행해야 한다. 본문의 지상명령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다. 이 땅에 주님은 더 이상 실재(實在)하지 않으실 것이다. 제자들과의 직접적인 교통은 불가능하다.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사역을 승계 발전시켜야 했다. 제자들로선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일이다.
모든 족속을 제자 삼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이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해야 한다. 사도행전 1:8에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동일한 당부와 종합하면 세상 끝 날까지만 아니라 세상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이로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시켜야 한다. 예수 믿는 모든 신자의 필생의 과업이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아프리카 오지에 선교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자기 생업과 세속적 삶을 다 포기하고 언제든 목숨까지 바치라는 말씀이 아니다. 전쟁 치러 가면서 사생결단하라는 식의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일부 해외선교사들에게나 해당될 뿐이다. 모든 신자가 그렇게 할 이유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세상 끝 날과 땅 끝은?
세상 끝 날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이다. 이 땅을 마지막 심판하실 것이다. 그 이전의 신자에게 적용하면 죽어서 이 땅을 떠날 때다. 따라서 특별한 시기의 종말을 대비하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껏 신자답게 살아온 모습을 그대로 지속하면 된다.
땅 끝은 사도행전 1:8에서 복수로 표현되어 있다. 특정한 지역이 아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과 민족은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불신자들이다. 특별히 땅 끝의 성경적 용례에는 적국과 원수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평소의 친밀도와 비례하지 말고 미운 사람까지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며 복음으로 초대해야 한다.
모세가 죽은 후에 가나안 정복을 위한 새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희가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수1:3) 신자가 어디 가든 부동산 재벌처럼 형통시켜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전한 마음으로 기꺼이 순종하면 하나님의 크고 오묘한 역사는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구원이 특정 장소나 집단 별로 이뤄지지 않는다. 한 개인을 죄에서 건져주시는 일이다. 하나님과 죄에 찌든 인간 사이에 신비롭고도 온전한 영적 생명의 교류가 발생한다. 하나님이 한 죄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시켜 썩어질 옛 사람을 벗게 하신다. 또 주님의 부활과 연합시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신다. 사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꿔주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 구원이다.
“세상 끝 날까지”는 “신자의 한 평생”과 동의어다. 또 “세상 땅 끝까지”는 “신자가 만나는 모든 불신자들”과 동의어다. 접미사 ‘까지’는 항상 어떤 출발이 전제되어 있다. 또 지속적 행위를 수반한다.
그럼 언제부터인가? 공적으로는 예수님의 승천 직후부터다. 신자 개인으로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믿은 때부터이다. 또 어디서부터인가? 공적으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사마리아를 넘어 열방까지다. 개인적으로는 예수 믿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다. 지속적 행위를 요구하므로 재림까지, 죽을 때까지 쉼 없이 때를 얻든 못 얻든 이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제자 훈련을 마쳐야 제자인가?
작금 교회마다 초신자반, 제자반, 사역자반으로 나눠서 각각 몇 달씩 성경공부 프로그램으로 훈련하고 있다. 마지막 사역자반을 끝내야 교회의 직분을 맡기고 봉사토록 한다. 이는 필요한 일이자 좋은 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제자훈련은 본문의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제자반을 수료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또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은 본문을 잘못 해석 적용한 것이다.
복음서를 비롯해 신약성경은 예수님 사후 최소 20년 뒤부터 저작되었다. 그 동안에 전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대제사장이 조작한 시체도난설(마28:15)이 사실로 통용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거짓이라도 수십 년간 진짜 행세를 했다면 번복하기는 힘들다. 십자가 복음은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훨씬 전 예수님이 승천한 직후부터 전염병처럼 즉, 어떤 인위적 훼방도 막지 못할 정도로 불처럼 번져나갔다.
본문을 다시 자세히 보라. 제자들이 가장 먼저 행해야 할 일이 뭣인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이다.(19절) 그 다음으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문법적으로도 주동사는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며, 나머지 셋은 그것을 부연 설명하는 보조동사로 분사구문을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제자 훈련을 마쳐야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바로 그분의 제자다. 제자와 신자 간에 어떤 형태의 수준, 연륜, 실력의 차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신약 서신서들의 수신자가 지역교회이듯이 신약성경과 교리가 체계화되기 훨씬 전에 초대교회들은 먼저 설립되었다.
혹시 초대교회의 사정은 지금과 달랐기에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여 직접 교사가 되어 가르치고 영감을 주었다고 반발할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또 온갖 이단을 분별하고 대응하려면 바르게 배운 후에 전도해야 한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작금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이 외치는 모토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본받아 그 당시의 믿음과 열정으로 되돌아가자는 것 아닌가? 또 성령의 권능이 지금 약해진 것은 전혀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우리 개인의 구원 경험을 회상해보면 성경을 깊이 알고 난 후에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었다. 주는 것 없이 싫던 예수가 어느 날인가부터 별다른 이유 없이 좋아졌다. 성령이 역사하여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었고 내속의 썩어빠진 시커먼 실체를 똑똑히 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지난 삶이 완전한 실패와 절망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듬뿍 부어졌고 그 인생의 방향과 목적과 소망이 이전과는 정반대로 전환되었다. 어찌하여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시는지 오로지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 일생의 회심을 한 후에 성경을 통해 십자가 구원의 은혜와 권능을 온전히 알게 되고 그 믿음이 견고하게 된다. 간혹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회심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영적인 중생의 절차는 동일하다. 신학과 교리에 감격하여 회심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거역할 수 없는 은혜가 그 영혼에 먼저 작용하여서 그 존재 전체를 뒤집어 준 것이다.
신약성경을 저술한 사도들도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자 성령이 역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안식과 자유를 충만하게 체험했다. 또 그런 자기들의 구원의 체험을 통해 깨달은 영적 진리를 훨씬 후에 글로 저작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 전도함이 지혜의 전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는 능력에 의한다고 선포했던 것이다.(고전2:4) 만약에 교리를 배우고 깨달아서 구원을 얻는 것이면 제자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 한다. 그럼 예수님도 제자를 삼아 가르치라고 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쳐 제자로 세우라고 말했을 것이다.
과연 명령에 불과한가?
유감스럽게도 지상명령이라는 별칭이 주는 드센 어감 때문에 예수님의 진의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명령은 반드시 의무와 병행된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므로 모든 것을 바치는 절대적 순종만 요구되는 것 같다. 다른 모든 일은 못해도 이 일만은 해야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원칙적으로 틀린 접근은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은 명령이기 이전에 당신의 간절한 소원이다. 그 소원을 못 이루고 눈을 감으려니까 너무 아쉬워 마음이 편치 않는 것이다. 자식이 유언을 성취하는 것도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십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저승에서라도 마음이 편해지시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지상명령도 예수님의 심정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교도들과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긴 해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이 땅에 두고 떠나려니 계속 마음이 무거우셨던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이 땅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며 돈을 주인으로 삼고 있다. 여호와를 아는 자들조차 현실의 형통만 소원하며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에 매달려 참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평강조차 얻지 못하는 너무나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다.
예수님은 기독교를 세계에서 으뜸가는 종교로 만들고 거창한 대형교회들을 세울 의사가 없었다. 하나님이 최초인간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인 “너희가 내 품을 떠나면 정녕 죽음뿐임”을 제발 깨닫게 해주려고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이유도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이 땅을 아름답고 거룩하며 활기차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을 더 위에 두자 필연적으로 시기와 미움과 분쟁이 끊일 새가 없었고 이 땅은 황폐해졌다. 각 개인의 마음에도 갈급함과 허망함으로 가득 찼다.
주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한 번뿐인 이 짧은 인생을 정말로 참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가, 최소한 가정에서 부부 부모자식 간부터 순전한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그 길은 지금껏 최고의 위치에 두었던 자기를 완전히 죽이고 그 자리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채우면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생수처럼 샘솟게 해주신다. 그럼 정말로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주님은 이 말씀을 전도하라는 종교적 명령으로 주셨기보다는 당신의 죄인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토로한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동행하시는 이유
왜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신자가 죽을 때까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동행해주시는가? 세상의 질병과 실패와 환난 등 모든 어려움에서 신자를 지켜 주시는 수호천사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인가? 결코 아니다. 본문 말씀 그대로 신자가 예수님의 심정을 다른 이로 잘 알게 만드는 그 일을 차질 없이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담대히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고백하자(마16:16), 주님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제자들이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바로 그 천국 열쇠를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동행해주시는 것이다.
쉽게 말해 복음을 전해 듣는 자들의 영혼에 찔림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 열쇠로 불신자의 마음을 열어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데 예수님의 권세가 작동하는 것이다. 예컨대 선교사들은 바울처럼 독사에 물려도 멀쩡하게 살려 주신다. 아프리카 원시 부족의 주술사가 급사하고 그 마을의 족장부터 예수 믿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요한 사도도 예수님이 이적을 일으키는 목적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고 그 이름에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요20:31) 예수님조차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아는가? “내가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만에 하나 예수님도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를 혼자 버려둔다는 것이다.
우린 과연 평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가? 아니 그분이 싫어하는 일을 온전히 하지 않은 적이 있는가? 그러지 않고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아무리 구해봐야 허사다. 단순히 교회 봉사 조금 한 것과 본문의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미 예수를 믿어서 우리 편이 된 신자들만 조금 사랑해놓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달라고 떼만 쓰고 있다.
음부의 권세를 자기 스스로 이겨본 적도 없으니 남을 위해 천국 열쇠를 쓸 틈도 없고 시도조차 않는다. 새벽기도에서 외치는 내용이 기껏 “왜 내가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입니까?” 뿐이다. 예수님이 거들떠나 보겠는가?
예수를 온전히 믿는 순간 성령이 내주 임재하신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권능으로 역사하는 것과 임재는 별개다. 거의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이 하시는 일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대신 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작금의 교회와 기독교가 힘이 빠질 수밖에 더 있는가?
유언과 다른 점은?
주님의 지상 명령은 제자들과 육신적으로 완전한 이별을 하면서 주신 말씀이라 유언과 다름없다. 그런데 부모 유언과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 그 내용이 아니다. 부모의 유언은 자식의 소원과 무관할 수 있다. 자식 된 도리로서 행할 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닐 수 있다. 또 부모 소원을 대신 이루어주는 것이기에 반드시 어떤 결실을 맺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이 말씀을 신자 된 도리로서 순종해야 할 의무로 이해하면 가시적 실적을 맺는데 초점이 쏠리게 마련이다. 미전도 종족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복음이 지구를 한 바퀴 되돌아서 유대인 전도로 끝나야 하고 그곳에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주님의 뜻은 다시 강조하지만 성삼위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애끓는 심정을 제발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분의 소원이 실제로 신자의 필생의 애끓는 소원이 된다는 점에서 부모의 유언과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불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죄에 찌들어 당신을 대적하는 원수와 당신의 아들을 맞교환하셨다. 그만큼 그들을 소중히 여기신 것이다. 신자의 마음에도 동일한 소원이 있어야 한다.
전도하다 보면 “왜 예수님만 옳다고 하느냐? 이왕이면 우리 고유의 종교를 믿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발하는 자들을 자주 만난다. 과연 그들을 하나님처럼 나와 맞바꿀 정도로 사랑하는가? 최소한 소중히 여기는가? 아니면 “자기를 생각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예수 믿으라고 했는데 자기 복을 자기가 차고 있다”고 여기고 그것으로 그치는가?
정말로 예수로 인해 자신이 완전히 뒤집어진 체험이 있는 자는 그러지 않는다. 예수를 몰랐던 자신의 지난 인생이 너무나 헛되고 헛되며 처참한 실패였음을 절감했다. 거기다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살고 있는 지금은 너무나 기쁘고 신나고 행복하다. 불신자가 자신을 아무리 멸시하고 비방해도 끝까지 섬기며 전도한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는 쉬지 않는다.
세상에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형통하고 출세한 자라도 예수를 모른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최고로 불쌍하고 안타깝게만 여겨진다. 역으로 말해 자신은 세상에서 갖춘 것 하나 없어도 예수님과 매일 말씀과 기도로 교제 동행함으로써 그분의 신기하고 완벽한 은혜를 삶의 세밀한 구석구석에서 누리고 있다.
예수 믿는 것이 절대적 행복과 만족과 기쁨이자 생명인 반면에 예수 믿지 않는 것은 절대적인 절망과 슬픔과 갈급함과 허망함을 넘어 죽음이라고 확신하는 자는 어떤 멸시를 받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빛을 세상에 비추려 최선을 다하게 마련이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태복음 강해를 마치면서...
예수님이 지금 신자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 네 자신의 삶부터 정말로 충만한지 묻고 있는 것이다. 너 혼자 소지하기엔 너무 귀하고 아까운 충만 속에 거하고 있는지 질문한 것이다.
교회들이 작금 시행하고 있는 제자훈련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자칫 본질을 놓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신자들로 예수 믿는 것이 정말로 신나고 즐겁고 자유로워져야 하며 실제로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최소한 요동치 않는 믿음 위에 세워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살고 있어야만 하는 방향과 목적과 소망은 물론 그 방법을 알게 하고 그렇게 실현시켜야 한다.
그런데 사실상 그 일은 훈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간섭하여야만 예수 십자가 앞에서 한 죄인의 존재가 완전히 뒤집어지고 인생이 이전과 정반대로 유턴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어떤 피해를 보더라도 다시는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결단과 실천이 따른다. 그럼 여전히 불안과 허망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이 그런 신자를 볼 때에 기이하고 부럽고 시기가 생기게 된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대놓고 전도를 하지 못했다. 암호로 접선하며 지하공동묘지에 숨어서 예배를 보았다. 그럼에도 온 백성의 칭송을 받는 모습으로 살아서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늘어났다.(행2:37-47) 당시 이교도들의 눈에는 크리스천들이 사는 모습이야말로 참 인간의 삶이라고 인식된 것이다. 그들이 평소에 소망하던 인생이었기에 신자들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오늘날 불신자가 교회와 교인을 볼 때에 닮고 싶다는 소망이 과연 생기겠는가? 거꾸로 이대로 살다 죽어도 하나님 앞에 저들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지상 명령과 함께 오늘로써 마태복음 강해를 마치게 된다. 마태가 말하는바 핵심은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를 믿는 자에게 음부를 이기는 천국 열쇠를 주러 이 땅에 오셨다. 또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와 언제 어디서나 동행해주신다. 신자 개인의 현실적 형통을 위한 것이 절대 아니다. 땅에서부터 죄와 흑암의 세력을 묶음으로써 예수를 모르는 이를 풀어주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신자가 자신이 실제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어야 한다. 그분의 빛이 자신을 통해서 세상에 비춰나가야 한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 그분의 은혜는 넘치도록 채워진다. 어떤 고난 중에라도, 고난이 끝이 나서가 아니라. 기쁨과 행복과 자유와 평강 가운데 승리할 수 있다.
그럼 불신자들이 당신이 믿는 예수에 대해 알고 싶다고 먼저 접근해 올 것이다. 최소한 그런 고난 가운데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비결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정말 빠른 시일 안에 모든 족속으로 예수의 제자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2/22/2015
설교는 끝내고 나면 항상 부족한 점, 아쉬운 점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 강해 또한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종반에는 조금 서둘러서 끝내느라 생략한 부분도 있어서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나중에 다시 정리하면서 수정 보완할 기회가 생기길 소원합니다.
끝까지 부족한 강해를 은혜로 읽고 들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내주부터는 창세기 강해를 할 작정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배우느라 전구절을 다 살펴본 마태복음강해와는 달리
중요한 구문, 사건, 인물 위주로만 성경 순서대로 알아보려 합니다.
창세기 강해 또한 성령의 조명과 은혜 가운데 잘 준비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마태복음강해와 함께 주위에 널리 소개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