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 불가능한 은혜 가운데 거하는가?
창세기 강해 (1)
http://youtu.be/eCSGTueOyA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창조적 진화론?
저는 서른세 살에 완전 무신론자 집안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었다. 그 전에는 기독교와 소위 예수쟁이에 대해 굉장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교회 출석하여 성경과 교리를 배워나가면서 차츰 기독교가 밖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임을 알게 되었다. 제가 예수를 미워했던 것이 순전히 제 쪽의 어리석음과 영적 타락 때문이었지 기독교는 전혀 하자가 없는 절대적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한 편 기존의 교인들이 왜 진작 기독교 고유의 다른 점들을 제대로 소개하고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일말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생겼다. 물론 인간이 스스로 깨우쳐서 믿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영안을 열어주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불신자들에게 그런 영적진리는 금시초문이며 가르쳐 주어도 전혀 인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서 십자가 복음을 소개하고 변증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맨 첫 구절인 본문부터가 그러하다. 불신자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권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불신자 시절에 제가 했던 반응은 이러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또 태초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는데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 땅에 인간이 실존하게 된 근거가 진화라고 배워왔는데 그럼 그 교과서 전부가 엉터리란 말인가? 창조를 믿으라는 기독교가 도리어 엉터리가 아닌가?”
최근의 젊은이들은 한술 더 뜰 것이다. “인간 유전자 지도인 게놈이 완성되었고, 머리카락 하나로 인간을 복제할 시대가 곧 올 것인데 무슨 뚱딴지 소리냐? 우주는 하나님 할아버지가 지은 것이 아니라 빅뱅으로 생긴 것 아니냐?”
이젠 교회 안에서조차 진화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창조도 완전히 긍정하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자들이 꽤 많아졌다. 말하자면 창조적진화론이다. 하나님이 진화의 바탕이 되는 기본적 물질만 창조했고, 인간은 진화의 방식으로 태어나도록 계획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창세기 1,2장의 기록과 지금까지의 과학적 발견 사이에 상충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는(창2:7) 기록과 딱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흙의 원어가 진흙 점토 같은 것이 아니라 티끌이라는 의미이기에 물질의 기본단위 원소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적 진화야말로 아주 타당하고 합리적인 성경 해석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창조를 선택해야만 하는가?
창조와 진화는 둘 다 수학의 피타고라스 정리처럼 모두가 인정하는 공리(公理, axiom)는 아니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가설(假說, theory)일 뿐이다. 그래서 그 중에 하나를 믿음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상 잘못된 말이다. 창세기 1:1의 진술은 신자가, 아니 불신자도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주제가 결코 아니다.
절대적 믿음이 요구되는 것은 타락한 영혼이 성령의 역사로 거듭날 때 한 번뿐이다. 그 외의 신앙의 모든 측면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깊이 묵상 탐구하여 절대적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여 그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180도 유턴하는 구체적 과정은 모른다.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것을 확신한 후에는 그렇게 이해가 안 되던 십자가 구원의 진리도 어떤 의심도 없이 명료하게 이해하고 남들에게 설명까지 해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구체적으로 진술한 바울의 회심 체험은 아주 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논술가였는데 에베소서 3장에선 자기 믿음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어떤 지식보다 가장 소중하고 귀하다고 선포했다. 믿음이 감정적 초자연적 흥분과 감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창조와 진화의 두 가설은 끝까지 가설로만 남지 않는다. 또 둘 다 거짓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하나는 절대적 진리이며 다른 하나는 절대적 거짓이다. 그 둘이 조종 타협될 여지는 티끌만큼도 없다. 따라서 지금껏 불신자에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사실을 믿으라고 권했지만 창조가 확실하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도 확실하지 않느냐고 그 접근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
간혹 인간이 이 땅에 실존케 된 근거를 외계인에게서 찾는 무리가 있다. 언젠가는 사상, 도덕, 과학이 최고로 발달한 외계인이 와서 지구상의 모든 모순, 고난,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는 종교까지 생겼다. 그러나 그 외계인이 온 행성으로 돌아가면 그들 또한 존재케 된 근거는 창조와 진화 둘 뿐이다. 이는 인간 실존의 근거로 고려해볼 일말의 의미와 가치가 없는 공상에 불과하다.
창조와 진화 둘 중에 하나는 진리라는 사실 그 자체는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진리다. 문제는 어느 쪽이 진리인지 증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이 진리인지 알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바로 솔로몬의 그 유명한 재판이다.(왕상3:11-28)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이 생모라고 주장했다. 유전자 검사가 없던 당시로선 난감했을 것이다. 둘 다 엄마라고 하니까 그럼 아이를 둘로 나눠서 반씩 가지라고 판결했다. 그러자 가짜 엄마는 그러겠다고 했고 진짜 엄마는 아이를 양보하겠다고 했다. 솔로몬은 진짜를 고르기 힘드니까 가짜를 먼저 골라내는 방법을 사용해 자연히 남는 한 쪽이 진짜임을 증명했다.
진화의 결정적 하자 두 가지
진화는 진짜라는 것보다 가짜라는 증거가 너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종에서 종으로 진화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면 반은 원숭이 반은 인간인 존재가 있어야 함에도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면 인간과 원숭이의 성적교섭으로 그 2세가 기형으로라도 태어나야 하나 전혀 불가능하다.
이 실종된 연결 고리(Missing Link)는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발간할 때부터 알고 있었고 진화의 전제로 내세웠다. 만약 이 연결고리만 발견되면 창조는 설 자리가 없다고 했으나 그의 바람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고 있다. 진화를 고수하는 자는 언젠가는 그런 화석이 발견되리라는 실오라기 같은 기대만 붙들고 있다.
진화에는 이보다 더 치명적인 하자가 있다. 동물과 인간의 장기들은 슈퍼컴퓨터 이상으로 정교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 체계에 조금이라도 하자가 생기면 기능을 아예 하지 못한다. 이해하기 쉬운 예로 인간의 눈을 들 수 있다. 인간의 눈에는 수십만 개의 모세혈관과 시신경이 복잡하고도 정교하게 얽혀 있다. 그 중 시신경 하나만 손상을 입어도 실명하게 된다. 눈으로서의 전체 작동이 멈춰진다.
진화란 미숙하고 원시적이고 간단한 차원에서 고급하고 복잡하며 정교한 단계로 발전해 가는 것이 기본 핵심 원리다. 만약 눈이 극히 일부 큰 것들만 볼 수 있는 시력 마이너스 2에서 수백만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서 조금씩 가시범위와 인식능력을 넓혀 나가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플러스 2의 수준에 다다랐다고 가정해보자.
그 중간 과정에서의 인간은 아예 생존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큰 바위에 부딪혀 죽었을 것이다. 큰 바다 거북이의 알에서 부화된 새끼들이 죽을힘을 다해 본능적으로 바다로 걸어가지만 거의 모두 갈매기에 다 잡아먹힌다. 마찬가지로 소경이나 다름없는 인간은 그 전에 시력이 많이 진화된 공룡에게 너무나 좋은 먹이 감이 될 것이다.
눈을 비롯한 인간 신체의 모든 장기는 처음부터 반드시 지금과 같이 복잡하고 정교한 상태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생존조차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진화가 전혀 필요 없는 존재였다. 이를 전문용어로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이라고 한다. 진화론자들이 좋아하는 식으로 과학적으로 따져 이 것 만큼 진화가 엉터리라는 증거는 없다.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휠체어 탄 불구자
이런 실종된 종간의 연결고리나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같은 결정적 하자를 제시해도 진화론자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옳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호킹 박사 같은 불구자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 것을 눈앞에 보고도 동력이나 기계장치나 다른 사람의 도움 하나 없이 스스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일 년에 10미터씩 오르다 보면 비록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오를 수도 있으니까 함부로 부정할 수는 절대 없다고 한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장구한 세월이 지나면 아메바에서 인간으로 전환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 함부로 부인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는가?
만약에 휠체어 탄 호킹 박사가 혼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가 미쳤다고 코웃음 칠 것이다. 진화론에는 불구자가 휠체어 탄 것 같은 모습이 수도 없이 많은데도 끝까지 옳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엄밀히 말해 맹신을 넘어서 미친 짓이다. 그런데도 그런 자를 아무도 비방하지 않고 창조를 믿는 자를 이상한 자로 취급한다. 외눈 원숭이 동네에선 두 눈 원숭이가 불구자일 수밖에 없다.
불신자들을 비방하고 멸시하려는 뜻이 아니다. 이전의 제부터 그랬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모든 사람은 영적인 봉사다.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거기다 이처럼 사고의 흐름도 조삼모사 뒤죽박죽 식으로 스스로 불합리함을 드러내는데도 자기만은 그런 줄 모른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모든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그 이유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기 때문이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진화의 결정적 하자에 대해서 세계적인 무신론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밈(mneme)으로 대변되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반박 이론을 발표했다. 진화를 사람들이 수용하는 첫째 이유는 과학적 사실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데이터, 실험, 증거물 등을 창조는 제시할 수 없지만 진화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킨스의 최근 저작 “만들어진 신” 같은 책을 보면 완전히 철학과 사상이다. 우연 위에 비약에 비약을 보탠 가설뿐이다. 그 책을 읽어봤지만 도무지 밑도 끝도 없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인가? 창조는 입증이 안 되었기에 가설일 뿐이나, 진화는 거짓에 기반을 둔 가설이라는 것이다. 그 거짓 가설을 입증하려니 더 큰 거짓 가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불신자들을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이라고 선포했다. 이상하고 기괴한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미워하고 싫어하니까 하나님의 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까지도 생물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진화의 증거들은 증거로서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님에도 일부 의식 있는 생물학자 과학자들은 그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그런 증거 중에는 심지어 처음부터 허위로 조작된 것도 있다. 중국에선 가짜 화석을 만들어서 과학자들에게 파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연구실적과 박사학위에 눈먼 자와 돈에 눈먼 자들의 합작이다.
창조가 그 특성상 증거물 자체가 있을 수 없지만 가짜라는 증거도 전혀 없다. 창조가 거짓이라는 것은 진화가 옳다는 증거로 밖에 증명이 안 된다. 그런데 진화 자체의 증거가 전부 성립이 안 되니 더더욱 창조가 거짓임은 도무지 입증할 길이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화론자들을 비방하려는 뜻이 아니다. 창조를 믿는 우리가 정말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하는가? 불신자들이 진화를 믿는 만큼이라도 확고하게 창조를 믿고 있는지, 또 그래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창조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IS 대원으로 자원한 한국 고교생
최근 한국의 한 고등학생이 IS 대원으로 합류해 부모는 물론 전 국민이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IS는 누가 봐도 거짓이며 잘못된 것인 줄 안다. 너무 잔인하고 극단적인 광신자 그룹이다. 그런데 과연 그 청년이 그런 점을 몰랐거나 선한 천사인줄 착각하고 가입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봐야 한다. 거짓인 줄 알고도 참여한 것이다.
그럼 그런 거짓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더 중요한 의미를 찾았다는 뜻이다. 너무 따분한 일상과 입시지옥을 탈출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화끈하고도 쿨(cool)하게 살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일 수 있다.
아니면 영국이나 미국의 하나 부족한 것 없는 모범생들이 가입한 동기처럼 사회적 정의 차원일 수 있다. 정치가들은 개인의 치부하기에 급급하고, 악인은 형통하며, 부조리와 부정부패와 빈부격차가 격심해지는 세태에 크게 실망했을 수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성공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 같은 구조적 위화감과 열등감을 도무지 해소할 수 없다. IS가 나쁜 것은 확실하지만 그보다 더 치사하고 교묘하게 악한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IS 같은 과격한 방식으로라도 사회에 경종을 올리는 것이 필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그 구체적 동기는 알 수 없다. 어떤 동기가 되었던 그 배후에는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자기 전부를 바칠 수 있을 만큼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믿을만한 근거와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생의 향방이 정해지지 않았고 인생의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IS 대원들을 보니까 자기 믿는 바에 아무 주저와 아낌없이 자기 목숨을 건다. 뭔가 절대적 권위에 의탁하는 것 같다. 종교적 광신이라도 상관이 없다. 자기도 그런 절대적 진리를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붙들고 싶다. 본인이 의식을 했던 안 했던 절대적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난 것이다.
아직 고등학생이라 그 사상과 가치관이 미숙하다고 무시해선 안 된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기 실존에 대한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씨름하는 존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진실이다. 흔히 말하듯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아를 발견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일상 세상에서 상식과 이성이 통하는 방식으로는 아무리 시도를 해봐도 평강과 안식을 결코 얻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 쪽으로는 끝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기에 결국은 극단적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믿음이 갖는 의미와 가치
문제는 불신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들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절대적 진리다. 성경의 첫 머리에 기록된 까닭은 그 진리가 믿음의 출발과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믿음만은 단순히 종교적 사상 체계와 계명으로 따져선 안 된다. 사람이 사유, 비교, 판단, 선택, 결정, 시행, 평가, 수정하는 모든 것을 주관하는 근본 바탕이 믿음이다.
솔로몬의 재판처럼 진화가 가짜임을 밝혀내었기에 창조는 절대적 진리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것도 절대적 진리다. 그분이 창조했다면 당신의 완전한 의지와 능력과 은혜로 지금도 우릴 보호하고 인도하고 있다. 천지를 질서 있게 운행할 뿐 아니라 한 개인 개인에게도 당신의 100% 완벽한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이 역사하고 있다.
그런 절대자 하나님에게 인간이 보일 반응이라곤 절대적 순종, 감사, 찬양, 경배뿐이다. 어떤 조건과 전제도 달 수 없으며, 조금이라도 그분께 영향을 주거나 수정시키려 해선 안 된다. 불복종, 외면, 거역은 시도조차 해선 절대로 안 된다. 그런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불경이며 그분으로선 용납할 수 없다. 당신께서 절대적 독재자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당신의 은혜와 사랑이 완벽하다는 뜻이다.
진화가 옳고 창조주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인간 세상에선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이만큼 그분에게 엄청난 죄는 없다. 구원 밖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다. 창조주 그분을 믿지 않는 불신자에겐 이런 인식 자체가 없다. 반대로 따져 신자에겐 이 사실만큼 절대적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할 일도 없다.
창조주에 대한 선언이 성경의 첫 구절이다. 이후의 모든 성경말씀을 그 절대적 진리의 바탕에서 진술해 나가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제일 먼저 이 주제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세우라는 것이다. 신자라면 그 믿음 위에 자기 삶과 인생을 계획하고 수행하라는 것이다.
본문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은 사실상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물질이 우연히 발전된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심오하고 경건한 사상, 도덕, 종교를 내세워도 원숭이에게 헐리우드 최신 유행의 옷을 입혀 놓은 우스꽝스런 꼴밖에 안 된다. 실제로 불신자들은 무생물인 큰 바위에도 금실, 은실로 장식해놓고 경배하고 있지 않는가?
기독교 부흥의 유일의 길
최근 세계 최대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크리스천 인구가 줄지 않은 지역이 한군데도 없다. 반대로 이슬람교도가 늘지 않는 지역도 한군데도 없다. 미국인들은 코란에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없으며, 알라를 반대하면 성전을 해도 되고, 아직도 남녀차별이 심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더 중요하게는 911 테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도 미국 청년들이 회교로 개종하고 있다. 일본 비행기가 롯데 백화점과 63 빌딩을 폭파해서 수천 명을 죽였는데도 한국 대학생들이 일본의 남묘호렌교를 믿는 꼴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멀쩡한 청년들이 IS에 가입한 이유와 같다. 뭔가 절대적 진리가 갈급해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약해지고 신자 수는 줄어들어 온갖 부흥 대책이 제시되고 있다. 그 모든 대책들은 사실상 지역적 표면적 일시적 방안에 불과하다. 현재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는 절대적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절대적 진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1에 대해서마저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절대적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신자와 목회자와 교회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펴보시고 입술의 말과 마음의 생각과 영혼의 깊은 내면까지 꿰뚫어 보고 있다고 믿는다면 지금과 같은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교회 안에 세상보다 더 추한 스캔들이 난무하고 목사와 교인간의 분쟁을 세상법정에서 해결하려 들고 온갖 거짓 복음들이 성행할 수는 없다. 그분이 두려워서라도 그러지 못한다. 현대의 신자들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완전히 달랐다. 절대적 구원 진리와 부활 생명을 믿었다. 아니 알았고, 체험했고, 소지했고, 나아가 세상 앞에 실현했다. 산 채로 맹수 밥이 되어 죽어갈 때에 불신자들은 예수 믿는 저들이야말로 절대 진리를 발견했나보다 알 수 있었다. 자기 생명까지 바칠만한 완전한 권위를 붙들었다고 확인할 수 있었다. 종교적 사상과 행위에만 감동받은 것이 아니다. 신자들의 사는 모습이 당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지금은 그 삶으로 칭송 받고 불신자에게 롤 모델이 될 만한 신자들이 눈을 닦고도 찾기 힘들다. 절대적 생명을 지닌 신자도 없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엉뚱하게 IS 같은 극단에서 절대 진리를 찾아보려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때와는 정반대로 절대 거짓이 절대 생명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신자와 교회에 예수님의 절대 생명이 회복이 되지 않으면 어떤 부흥 대책도 참된 부흥으로 이끌지 못한다.
하나님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으로 인간을 만드셨다. 환원 불가능하다는 것은 두 번 다시 수정 보완이 필요 없이 처음부터 완벽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처음부터 끝이 똑 같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권능과 은혜를 당신 앞에 겸비하게 나오는 모든 자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부어주신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절대적 진리이라면 바로 이런 환원 불가능한 은혜와 권능으로 당신의 자녀를 붙들고 계시고 또 앞으로도 인도하신다는 것도 절대적 진리다. 바로 그 절대적 진리 위에서 자신의 전부를 붙들어 매고 살고 있다면 절대로 실패가 없다는 것도 절대적 진리다. 모든 신자에게 성령님이 실제로 내주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신자를 끊을 것은 이 우주에 단 하나도 없다.
요컨대 이 진리만 확신해도 지금처럼 기독교가 신자가 교회가 이렇게 나약하고 부끄럽고 심지어 신자끼리 다투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금주부터 창세기를 강해하려 한다. 우리의 우리 된 모습을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 위에서 다시 찾고 새롭게 출발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저부터도 초대 교회의 그 순전하고도 절대적인 믿음을 다시 회복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3/1/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