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2:1-7) 성경적 역사관이 비난받는 진짜 이유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10)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1:1-7)
예수가 역사의 지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라고 시작해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21)으로 마칩니다. 흥미롭게도 그 두 말씀을 연결하면 신구약 성경 전체의 주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게 하려고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껏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구약의 역사를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흉계를 깨트리게 될 그 한 가지 사건을 향해서만 주도했습니다. 때가 차매 동정녀 탄생으로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의 약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역사를 마감하면서 구원을 완성할 것입니다. 요컨대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들이 아니고 예수님이며 하나님의 통치 방식도 세상에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만 능통한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저작한 바울은 그 진리를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마지막 때에 관한 주님의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기 최하 삼십 년 전에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만물이 그(예수)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역사를 시작해서 끝맺는 주역이요, 창조 자체의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경적 역사관은 기독교 밖에선 전혀 인정받지 못하며 나아가 기독교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해 줍니다. 예수가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다면 왜 갈수록 인간의 삶이 더 피폐해지느냐는 것입니다. 최소한 성자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다녀간 후로는 뭔가 나아지는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기독교를 믿을 이유도 전혀 없다고 반발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은 적도 없으니까 그렇다 쳐도, 신자가 그 비난에 제대로 반박 변증하지 못하니 더 문제입니다. 성경에 비추면, 즉 신자들이 배워온 바에 따르면 그런 비방이 틀린 줄 알면서도 자신의 현재 삶을 돌아보면 슬며시 그들에게 동조까지 해버립니다. 그렇다고 신자의 풀이 죽은 태도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현실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 통할 수 있는 차원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로만 역사를 이끈다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가장 먼저 시급하게 정확히 깨달아서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할,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용어로 바꾸면 자아실현의 과제가 바로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신자에겐 바울처럼 복음으로 변화된 자신이 이전과 비교해서 너무 좋고 귀하다고 절감되어야 합니다. 또 정말로 그렇다면 다른 모든 이의 삶도 자기처럼 되어야 한다고 당연히 소망할 것이고, 인류 역사도 반드시 그런 방향으로만 흘러가야 한다고 절감할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신자는 세상의 기독교에 대한 비방과, 특별히 하나님이 공의를 굽게 하거나 방치한다는 잘못된 주장에 얼마든지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너희에게 가장 좋고 귀한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왜 잘 알지 못하고 거부 반발하느냐고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은 너희가 그런 좋은 복음을 몰라서 세상이 이렇게 힘들어졌다고 본인이 깨달은 대로 설명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바울은 본문에서 신자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근거를 아주 명료하게 설명해 줍니다. 예수 믿기 전 죄인의 상태와(1-3절), 믿은 후 의롭게 된 상태를(4-6절) 정확하게 대조합니다. 먼저 예수 믿기 전의 상태를 단순히 이런저런 죄를 많이 지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녀였다고 선언합니다.
안타깝게도 유사 이래 지금까지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는 평균 이상으로 의롭다고 굳건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대도 통과할 수 있으니 굳이 미리부터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 아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 까닭에는 인간 세상의 공의가 굽어져 보이는 착시현상도 한몫했습니다. 온갖 사악한 악인들이 불법으로 치부하고 약자들을 권력과 재물과 폭력으로 핍박 착취하는 것을 매일 TV 뉴스로 보게 되니까 자기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의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저런 천하의 악당을 하나님은 왜 당장 따끔한 벌주지 않고 뭘 하고 계시는지 몰라라는 불평을 교회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입에 달고 다닙니다.
곰곰이 한 번 따져보십시오. 만약 모든 인간이 자신하듯이 평균 이상으로 의롭다면 세상이 지금처럼 악해져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의 공통적이고 아주 큰 착각은 대체로 사람은 선하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데 미꾸라지 몇 마리가 흙탕물을 일으키듯이 사악한 저놈들 때문에 큰 피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국가가 범죄 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면 사소한 교통 법규 위반이라도 법에 정해진 형벌을 가합니다. 말하자면 인간 세상에는 흉악한 죄악을 예방할 제도적 장치가 다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악이 설치는 원인을 다른 데서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 찾는 일은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선 한적한 새벽이나 한밤중에 교통신호를 제대로 지키고 있으면 뒤에서 빵빵거리고 심지어 욕을 퍼붓습니다. 그러면 다들 들통만 나지 않으면 그보다 더한 불법도 언제든지 주저 없이 저지르겠다는 너무나 시커먼 심보를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자기들은 하늘 우러러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큰소리칩니다. 남에게 직접 피해 끼친 적은 없고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간 적도 없다는 오직 한가지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미국에선 음주 운전을 한국보다 훨씬 엄중하게 처벌하는데 고의로 살인할 뻔한 죄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사고를 내서 제삼자를 억울한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도 술 마시고 운전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사소해 보이는 신호 위반도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는 큰 죄입니다.
심판이 두려운 이유
누차 비유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말은 물론 혼자 있을 때 심령의 깊은 생각까지 평생을 빠트리지 않고 녹화한 영상을 가정해 봅시다. 하나님과 단둘이서 그 영상을 단 1-2분이라도 자신 있게 볼 수 있는 뻔뻔한 강심장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만 아니라 그 특정한 생각을 하게 된 의도와 목적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이는 괜히 겁주려고 신학적으로 지어낸 가설이 아닙니다. 사이코패스나 정신질환자가 아닌 다음에는 누구나 죽기 직전에 절대자가 자기를 용납해 주실지 도무지 자신이 없어지는 모습들을 주변에서 많이 접하지 않습니까? 평생을 두고 하늘 우러러 부끄러운 점 하나 없다고 큰소리쳤고 실제로 다른 이로부터 착하다는 칭찬을 많이 받은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훨씬 의롭게 살았다면 하나님이 나를 천국 문에서 영접해 주실 것이라는 자신감 내지는 안도감을 표현해야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생 결론인데도 거꾸로 큰 두려움으로 떱니다.
그 이유도 한결같이 남들 앞에서는 의롭게 살았으나 자기는 자신이 전혀 의롭지 않고 오히려 아주 치사하고 비겁한 사람인 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돈과 쾌락을 밝히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이제 곧 절대자와 일대일로 만나게 될 마지막 순간에는 절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래전에 평생을 수양하며 모든 죄악은 물론이고 세상에 대한 미련까지 다 없애려 했던 한국의 큰 스님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자신은 지옥으로 간다고 고백했던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바로 그런 본성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허물과 죄로 이미 죽어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누구나 평생을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어도 결국에는 한 명의 예외 없이 실패했다고 솔직히 인정하니까 그 본성이 악한 것입니다. 또 그런 본성이므로 자신의 의로움만으로는 스스로 절제하기 힘들어서 수시로 죄와 허물로 범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모든 인간에게서 참 생명은 눈을 닦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으니까 그 인생에 소망도 눈을 닦고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대로 두면 기다리는 것이라곤 영원한 지옥 불 하나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를 바울이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탄의 영에 사로잡혀서 사탄의 미혹에 놀아남으로써 필연적으로 육체의 욕심에 따르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본능과 욕정에 사로잡혀서 사악한 죄악만 계속 저질렀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육체는 인간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생각해야 합니다. 지옥의 주인인 사탄은 어떻게든 인간을 최대한 많이 지옥으로 끌어넣으려는 한 가지 목표만으로 역사합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이 인간더러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바대로 행하도록 가만히 놓아두는 것입니다. 스스로 충분하게 의롭다고 여기면 하나님은 필요 없어지니까 사탄으로선 굳이 따로 행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알게 되자 사탄이 도덕과 종교마저도 사람을 타락시키는 아주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도덕적으로 누구보다 선했고 종교적으로도 최고로 경건했기에 자신은 물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다른 각도나 차원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얼마든지 설 자신이 있으니까 어떤 죄라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준다는 예수 십자가 복음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그것은 이단 중의 이단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대면하고 삼 일간 봉사가 되자, 즉 죽은 후 심판대 앞에 선 것 같은 체험을 하자 비로소 그동안 남들 앞에 가면으로 가려왔던 자신의 숨겨둔 본성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세 단계
그런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서 예수님만이 허물과 죄로 죽어야 할 죄인을 다시 살려줄 수 있다고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지라 스스로는 도무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자기가 걸어가는 인생길이 아주 옳고 의롭다고 믿기에 목적지가 지옥행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어 사탄의 흉계를 깨트려 주시는 것입니다. 큰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문으로 걸어가는 자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180도 유턴시켜서 천국 문으로 향하게 하신 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바울은 그 구원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 살리셨고 둘째 일으키셨고 셋째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셋 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과 연결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죽은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신성을 지닌 구세주로 일으켜 세워졌고, 성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려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육신의 죽음과 별도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시체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기뻐하는 자에게 성령으로 간섭하여 십자가 예수를 알게 함으로써 영적으로 죽음에서 일으켜서 부활시킵니다. 신자가 예수를 믿는 순간 그분의 영이 내주 임재하면서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이 이뤄집니다. 그분의 영원한 생명이 신자에게도 영원한 생명으로 임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선언했고, 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를 알아서 순전한 믿음으로 구주로 영접해 믿는 순간 신자는 영생을 이미 확보한 것입니다. 그 후의 여생은 천국 문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이 되고 그 종착지에는 삼위 하나님의 따뜻하고 영광스러운 영접이 기다립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에 주님처럼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부활 신체로 홀연히 변할 것도 이미 확정된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죄인을 살려서 일으키고 하늘에 앉히었다고 과거 시제로 선포한 것입니다.
신자의 신분과 권능.
이는 정말로 엄청난 신분이자 권능입니다. 모든 신자에게 천국의 그리스도 앞에 앉을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며 이것보다 더 좋은 축복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최고로 좋은 축복을 모든 세대에서 최대한 많은 인간이 누리게 하려는 그 한 가지 목적만으로 역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역사를 이끌게 되면 구원에서 누락 된 사람은 억울한 죽음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세상 악인이 설치는 데도 그냥 두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구약시대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부터 수시로 심판하면서 당신을 거역한 죄에서 제발 돌이키라고 간절히 호소했으나, 겉으로 종교적인 시늉만 하고는 자기들 육체의 본성만 따르기 바빴던 것입니다.
지금도 아무리 십자가 진리를 설명해 주어도 나는 평균 이상으로 착하니까 얼마든지 천국 갈 자신이 있다고 아예 거부합니다. 사탄에 미혹되어서 자기가 얼마나 큰 착각에 빠져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를 완전히 고쳐주기 전에는 사탄의 종으로 죄악 가운데 아니 죄를 즐기면서 사는 것이 너무 신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예수 믿는 신자만 구원해 주고 세상에 만연한 악을 외면하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불공평하고 공의를 굽게 만든다고 비난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뭐라고 말합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8-10)
십자가 복음 안에 한 명이라도 더 들어오게끔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다고 합니다. 당신의 공의대로 하자면 모두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므로 지금 당장 다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알게 해주려고 참고 또 참으시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그 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바울도 본문의 결론에서 똑같이 말합니다. 진노의 자녀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해 준 까닭을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7절)고 말합니다. 오는 세대이므로 종말까지 이어지는 모든 세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은혜가 너무나 귀해서 대대로 누릴 수 있게끔 신약 이후의 역사를 이끌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세상 불법을 오래 참으시고 그 전체적 장기적인 방향만 예수를 믿도록 하고 또 그래서 그분의 재림으로 향하게 하실 뿐입니다. 예수의 풍성한 은혜를 대대로 전하는 일은 그 은혜를 제대로 아는 신자 각자가 해야 합니다. 정말로 자신이 예수 믿은 의미와 내용이 너무나 귀하고 감사하다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복음을 세상 끝 날까지 땅끝까지 전하라고 마지막 유언으로 제자들에게 명하신 까닭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이제 예수님이 목적이자 주체라는 기독교의 역사관에 대한 외부의 비방에 대해 신자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서두에서 간단히 언급한 대로 자신의 완전히 뒤바뀐 신분과 새롭게 소지한 권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온전히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울은 지금 너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어졌다고 선언합니다. 신자의 일생은 예수 믿자마자 영생 안에 들어와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안에서 하늘 시민이 되어서 천국을 미리 맛보고 훈련하고 나아가 그 너무나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가치와 의미를 주변에 알게 해주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집안에서부터 그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풍겨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은혜 안에 붙잡혀 살면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됩니다. 바울은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혹시 연약해서 그러기에 힘들면 쉬지 말고 기도하면 내주하신 성령님을 통해 하늘의 위로와 평안이 세상과는 다르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고 나니까 다른 것들은 전부 배설물로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예수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도 실제로 부활 예수를 만났고 또 천국에까지 이끌려 올라가 얼마나 고귀하고 좋은 곳인지 생생하게 보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로선 예수를 믿고 이 땅에서 사는 것이 바로 그 영광스러운 부활 생명을 미리 앞당겨서 살아가는 셈입니다. 부활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 안에 있으니까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르게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이야말로 스스로 얼마든지 천국 갈 자신이 있으므로 예수가 전혀 필요 없다고 최고로 큰소리쳤고 또 실제로 당대 최고의 의인이자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과거의 자기는 완전히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두 눈으로 부활하신 그분을 보았습니다. 천국에 올라가서 모세와 엘리야 같은 구약 성도를 보고 그 영광스러운 부활이 바로 자기 것이 되었다고 실감 체험했습니다. 아마 천국에 자기 이름으로 마련된 장막도 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고 확신에 차서 가르친 것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그 사실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탄에 미혹되었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자기도 동참하여서 한 명이라도 더 예수 믿게 하는 일을 하다가 결국 순교했습니다. 부활이 진리를 넘어서 생생한 자신의 사실로 체험되지 않았다면 그 자신만의 의지로는 할 수 없는 사역이었습니다. 베드로도 스승을 세 번 배반했으나 성령을 받자 곧바로 하루에 삼천 명을 전도하는 설교를 했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 당했습니다. 그도 부활하신 주님과 40일을 교제하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자기에게도 강력히 역사하는 것을 체험했고, 성령으로 충만해져 그 참 생명으로 모든 사역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 신자의 치명적 약점
오늘날 신자의 믿음에서 가장 부족한 요소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서 천국 시민이 되고 싶다는 소원은 모두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대신에 어떻게든 하나님 능력만 빌려서 당장 고난만 해결하려는 것이, 죄송하지만 거의 모든 신자의 예수 믿는 거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당장의 사건과 여건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가 굽었다는 불평밖에 못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힘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다른 종교와 하나 다를 바 없어졌습니다. 정말로 예수가 최고요 없으면 죽음이라는 진리를 자기 삶에서 인식 체험한다면, 또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복음만으로 역사를 이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그 일에 기꺼이 동참하여서 그분의 오래 참으시는 공의를 자기 주변에서부터 자신도 오래 참으면서 세워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면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사실은 이미 왔으니까 침탈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했습니다. 당신께서 곧 부활 생명을 제자들에게 나눠줄 것이며, 또 그럼으로써 마지막 날에 신자가 얻을 영광이 이미 이 땅에 예수 믿는 신자에게 실재하는 현실로 시작되고 보장되었다는 뜻입니다.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역사 안에 실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차지하라고 예수님이 선포한 것입니다.
기껏 기도 열심히 해서 자기 고난 해결 받는 일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절대 아닙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가 이 땅을 넘어서 영원까지, 이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과 체험에 따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최소한 한두 가지 축복이나 고난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기 인생 전체를 두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만이 인생의 최고 기쁨이어야 합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 믿은 후에 자신의 인생은 물론 세상의 공의에 대해 의심하고 원망했을 리는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예수님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일이 최고로 감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다 순교해도 천국 자기 집이 예비되어 있으니 어떤 핍박도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1:23) 복음을 전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서 주님이 부르시기 전까지는 이 땅에서 성도와 교회에 충성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이런 일이 사도나 목회자만의 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신자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 십자가가 신자들에 의해서 더 많이 전해는 방식으로만 세워질 뿐이며 그것도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모습으로, 즉 그분의 때와 방식으로 실현될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극도로 타락한 이 세대를 보면서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의로운 신자일수록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죄송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분과 권능이 얼마나 풍성하고 엄청난지 제대로 실감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에서 신자로 바뀐 자기 상태가 극명한 정반대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영원한 저주의 죽음에서 영원한 축복의 생명으로 바뀌었다고 실감하지 못하고 그저 도덕과 종교로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만사를 분별 판단 적용하는 방식은 둘 뿐입니다. 인간에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난다고 믿거나 하나님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자는 후자인데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창조에서 마지막 날까지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만 이 세상과 인간이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성경을 마감한 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자입니다.
부활 생명을 지닌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바울의 이런 고백이 절로 나와야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단순히 전능하신 하나님이 신자를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주신다는 뜻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 그분의 사랑이 끊이지 않고 계속 신자에게 부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 세상에 어떤 권력자도 영계의 천사들까지도 절대로 자신과 하나님의 그 사랑하는 관계를 한 치도 훼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언제 어디서나 신자의 삶과 인생의 모든 차원에서 그 전부를, 한 사건 한 여건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완벽하게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고난, 실패, 질병은 물론 상처, 눌림, 염려, 짜증, 분노, 증오 등에도 하나님이 절대로 신자를 실패하지 않게 하고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살려서, 일으켜 세워서, 하늘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보좌에 앉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온전한 참사랑으로 교제할 대상에 합당하도록 당신께서 우리의 평생을 거룩하게 다듬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정말로 예수 부활 생명을 지니고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우리 믿음을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오래 참으시는 공의를 역사 안에 실현하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습니까? 이전의 자기는 완전히 죽었고 완전히 뒤바뀐 새사람으로 살기에 바울처럼 세상과 죄악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맞서서 살고 있습니까? 최소한 세상에 그분의 공의가 굽었다는 의심과 원망은 없고 오히려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서 너무 안타깝습니까?
(2/4/2024)
하나님의 공의와 죄의 경중을 나의 저울(자기 의)에 올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