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3:16-19) 하나님은 신자에게만 공의를 굽게 만든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11)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합3:16-18)
공의를 따져야 신자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창조부터 종말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더 많은 이에게 전파 실현되는 방향으로만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역사 내내 그렇게 한다면 소망스럽지는 않아도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똑같은 현상들이 지속될 것입니다. 흉포한 악인은 계속 설치고 힘이 약한 소시민은 그들에게 착취당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신자는 그분을 거역 대적하는 세상으로부터 이런저런 핍박을 더 받을 것입니다. 결국 순전한 믿음을 가진 신자일수록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한 신자들은 죄악을 멀리하고 스스로 희생하며 불우한 이웃을 도우며 최선을 다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정작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멸시와 핍박이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개인적인 큰 고난도 겹칩니다. 갈수록 세상 죄악은 교묘하고 악랄해지고 최근에는 사이버 범죄까지 설쳐서 언제 눈 뜨고 코 베일지 모르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몇 안 되는 공산 독재자들의 횡포로 핵전쟁의 위협은 최고도로 달했고 지금도 굶어 죽는 사람들이 지구 곳곳에 넘쳐납니다. 개인적 고달픔은 믿음으로 견뎌낼 수 있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매일 접하는 뉴스에는 더 나빠질 조짐들뿐이라 하나님은 마냥 손을 놓고 계신 것 같습니다.
똑같은 처지에 빠진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이 하박국 선지자인데 하나님과 두 번의 담판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살펴야 하는 책이 하박국서인데, 늦은 감이 있지만 신자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이 난제를 그가 어떻게 해결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늦은 감이 있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세상을 다스리는 목적 계획 방식에 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만 하박국서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에 예습한 셈입니다.
본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몇 가지 확실히 해둘 사항들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의심 원망을 제기할 수 있는 자격은 신자만이 갖고 있습니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믿을 생각이 전혀 없고 성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아무 관계가 없기에 그런 불평을 제기해 봐야 하나님에게나 본인에게나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남의 집에 들어가서 잠자리와 식사를 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꼴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인지 진지하게 탐구할 목적이 아닌 이상에는 불신자는 그분의 공의를 논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반면에 신자라면 하나님과 끝까지 씨름하여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반드시 얻어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가 그분의 절대적 진리가 계시 된 성경은 제쳐두고 자신의 윤리관 종교관에만 기초하여 판단하려 듭니다. 간혹 하박국서를 필두로 성경에서 답을 얻으려는 신자도 앞뒤 문맥을 잘 살피지 않아서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는 멀어집니다.
본문도 17-19절만 따로 떼어서 해석합니다. 진술된 그대로 현재 내 삶이 과수원의 열매가 잘 맺히지 않듯이 궁핍하고 고난에 처해 있어도 여호와가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므로 그분을 즐거워할 것이라고만 적용합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세상 환경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도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면 그분이 바로 잡아 준다는 식입니다. 특별히 틀린 내용은 없으나 본문을 그렇게만 해석하고 치우면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자기 스스로 수행하는 마인드컨트롤과 같은 차원으로 낮아집니다.
환경이 어려워진 이유를 바로 앞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데도 그것은 살펴보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드는 말씀만 골라서 믿은 것입니다. 선지자는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두렵고 떨린다고 했습니다.(16절) 과수원의 소출이 없는 것이 농부가 경작 방법에서 실패했거나 제대로 일하지 않았거나 가뭄 병충해 전염병 같은 재앙 때문이 아닙니다. 대적이 침략해서 전부 착취 약탈해 가도 힘이 약해서 꼼짝없이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악인이 자기 재산을 모두 강탈해 가는데도 오히려 여호와를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마치 여호와에 완전히 미쳐서 모든 재산을 갖다 바치는 광신자처럼 보입니다.
성경이 그런 뜻을 말할 리가 없다고 보고 16절과 연결하지 않고 17-19절만 따로 해석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17절 앞에 내용이 달라진다는 어떤 언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서 스스로 생각한 바대로만 이해 적용하면 성경을 자기가 새로 저작하는 큰 잘못이 됩니다. 그렇게 읽다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생기지 않기에 기껏해야 신자 쪽에서 그분을 일방적으로 짝사랑만 하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공의를 하나님이 어떻게 세워나가는지에 대한 의문도 평생토록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첫째 질문
하박국이 너무 불합리해 보이는 그런 찬양을 하게 된 의미와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계속 강조하지만, 저자의 의도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찾아내어서 앞뒤 문맥에서 말하는 내용과 잘 연결해 봐야 합니다. 하박국서 전체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여유는 없으므로 요절 중심으로 책의 주제를 찾아서 본문의 의미를 추적해 봅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모든 세대 모든 신자의 불만을 질문 둘로 축약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1:4)라고 물었습니다. 의인을 괴롭히는 악인을 하나님이 막아주었더라면 세상 공의가 이렇게 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아주 놀랍습니다.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1:6)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굽어진 공의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다른 나라를 침공해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세워서 이스라엘도 점령케 할 것이라고 합니다. 바로 앞에서 너희가 열국을 보고 놀라고 또 놀라며 당신께서 행한 일인 줄 믿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 까닭입니다.(5절)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을 심판하신다고 하니까 하박국도 놀라서 황급히 두 번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13) 바벨론 사람들의 흉포함은 유대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데 왜 하필 그들을 세웠고 또 이스라엘을 맘껏 약탈하도록 “잠잠히 두고 보셔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박국의 첫째 질문에 그런 답변을 하신 이유는 그 첫째 질문 안에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1:3) 선지자가 죄악을 자기 눈으로 보았으므로 이스라엘의 죄악입니다. 아직은 갈대아 사람을 일으킨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듣기 전입니다. 유다의 탐욕스럽고 불의한 왕족, 재판관, 제사장들이 가난한 동족들을 착취 박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을 솔선해서 실천해야 할 사회 지도층이 오히려 거꾸로 악만 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데도 언제까지 하나님이 두고만 보실 것이냐고 따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의 굽어진 공의를 바로 세우려고 바벨론으로 침공하게 하는 최후의 극약 처방을 동원한 것입니다. 그 전에 많은 선지자를 보내어서 경고해도 제대로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악을 저지르고 심지어 우상숭배의 타락까지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의 둘째 질문
그런데 하박국의 두 번째 질문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심판하겠다고 했으므로 선지자라면 우리 스스로 회개하여서 유다의 굽어진 공의를 바로 세워볼 테니까 하나님 제발 그 계획만은 취소해달라고 간청해야 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갈대아가 자기들을 완전히 삼키지 못하도록 잠잠히 계시지만 말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모세가 자기를 생명책에서 지우더라도 당신의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과 맞짱 뜬 것에 비하면(출32:32) 선지자로서 너무 무력하고 비겁한 요구가 아닙니까?
하박국이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던 까닭은 크게 둘입니다. 우선 외부적 이유로는 느부갓네살 왕이 이끄는 갈대아 군대는 하나님의 설명대로 다른 나라를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후퇴를 모르고 흉악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내부적인데 이 심판의 예언으로 경고해도 유다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며, 특별히 공의를 어지럽히는 악인들은 콧방귀를 뀌며 거꾸로 조롱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서가 기록된 역사적 배경이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하박국이 사역한 시기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하고 그 앗수르도 바벨론에게 멸망한 이후인 BC 612-605 사이로 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애굽도 패퇴시키고 세계의 패자가 된 시기입니다. 말하자면 남 왕국 유다는 많은 선지자의 경고를 들은 위에, 형제 나라 북 왕국의 멸망을 보고도 여전히 전혀 회개치 않았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곧 침공해 오리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미리 방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갈대아를 심판의 도구로 삼아 이스라엘의 공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하박국이 하나님의 묵시를 받고서 약 이삼십 년이 지난 BC 587년에 그 묵시대로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두 아들을 아비가 보는 앞에서 죽였고, 시드기야 왕도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많은 유다의 부패한 유력자들과 함께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렘52장)
출애굽 직후 가데스바네야의 배역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광야 방황 40년이라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 심판은 완전히 확정되었는데도 이스라엘은 뒤늦게 가나안을 정복하려 들다가 무참히 패배했습니다.(민14:39-45) 하박국은 그 사건을 기억하고서 지금 하나님은 유다의 심판을 확정했고 그 단호한 어투에서 도저히 취소나 수정할 여지가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없어지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일만큼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생각해서라도 막아달라고 간절히 호소한 것입니다. 그는 비겁하거나 무력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선 최선을 다해서,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마음을 어떻게든 누그러뜨리려 한 것입니다.
그의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3,4) 신자들이라면 한두 번은 들어봤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유명한 말씀으로 결론을 내렸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곤혹스러워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신자에게 주시는 당신의 최종 해답이므로 그 뜻을 자세히 추적해 봐야 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고 종말이 속히 온다고 했는데 누구의 종말입니까? 이어서 “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4절)라고 했으므로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자의 종말입니다. 그다음 5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은 그 사람이 누구이며 왜 교만한지 또 어떻게 종말을 맞을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가 “여러 나라들을 노략하였다”라고 하므로(8절) 이스라엘의 교만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왕과 바벨론의 교만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세운 바벨론은 자기들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당신의 심판을 속히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침략 정복한 바벨론도 당신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더딜지라도 반드시 응하므로 기다리라고, 즉 그때까지 유다는 바벨론의 폭압적인 착취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잘 견뎌내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먼저 심판받는 이스라엘
이제 선지자가 행할 일은 바벨론의 멸망이 속히 이뤄지게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2장이 끝난 후에 3장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1,2) 제발 이스라엘에 긍휼을 베풀어 바벨론을 수년 내에 멸망시켜서 속히 해방되도록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은 수년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대로 70여 년 후에야 이뤄졌습니다. 하박국과 그의 이 계시를 듣고 혹시라도 회개하며 기도했을 하나님이 남겨 둔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일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하신 뜻과 계획 안에선 그 칠십 년은 절대 늦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약 900년 동안 하나님께 범했던 온갖 사악한 죄들에 비하면 오히려 아주 짧았습니다. 가데스바네야 배역 사건에선 가나안을 정탐했던 기간 40일을 하루에 1년씩 계산해서 40년간 광야를 방황하는 벌을 받았지 않습니까? (민14:34)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의인이라고 칭했습니다.(1:4) 이스라엘은 도덕적 종교적으로 전혀 의롭지 않았고 바벨론 못지않게, 구약성경 내내 강조한 대로 하나님 앞에 목이 굳은 교만한 백성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계속 회개를 촉구해도 죄악으로 치달았고,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우상숭배까지 했습니다.
그들을 의인이라고 칭해준 이유는 오직 하나로 당신의 제사장 나라로 따로 구별해서 세운 당신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당신의 때와 방식에 당신이 택한 백성을 기어이 의롭게 변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2:4) 대답하신 것입니다.
의인인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이제 앞뒤 문맥 안에서 분명해졌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자기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백성으로 세웠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도 결국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멸망시켜 준다는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의인이라는 표현이 바벨론의 교만과 대조되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반드시 겸손해야만 합니다. 모든 이방 족속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대신에 자기 민족만을 위하는 우상 신들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스스로 만들어서 음란하게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천하 만물을 만드시고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거룩하게 통치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알고 믿습니다. 나아가 제사장 나라로 세워졌기에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의로운 뜻에 겸손히 순종 헌신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상숭배 죄에 절대로 다시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당신의 종으로 세웠기에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하박국은 아니까 그분께 두 번이나 매달렸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고도 엄격하게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았기에, 즉 제사장 나라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범했기에 먼저 그들부터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이 꼭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기보다는 하나님의 관심은 온통 당신의 백성에게 먼저 쏠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때로 당신의 종에게 강압적인 형벌을 내려도 순순히 수용해야 하므로 이스라엘은 전혀 의인이 아닌데도 그분께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제사장 나라로 세워 줌으로써 율법에 따라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서 더 많은 이방 족속이 마음에 찔림이 생겨서 당신 앞에 나오게 하려는 한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서 바벨론을 먼저 심판하지 않았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신자들이 바라는 대로 세상 공의를 어지럽히는 악인을 일일이 먼저 벌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알려는 생각도 없으므로 하나님이 심판해도 회개치 않고 그 심판의 의미도 모릅니다. 이방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적이 한 번도 없으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맺고도 지키지 않아서 그 언약대로 하나님이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형벌을 받아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보장하는 권능과 은혜를 변함없이 누릴 수 있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묵시대로 먼저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 당하게 했고, 바벨론 또한 마대에게 망하게 하셨습니다. 마대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알렉산더는 부하들의 알력과 로마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역사상 최강의 세상 권력을 휘둘렀던 로마제국 때에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대한 하늘의 완전하신 은혜와 권능을 실현했습니다. 명목적이고 예표적인 의인이었던 이스라엘의 소명은 그 유효기간이 끝났습니다. 당신의 아들로 십자가에 모든 죄인을 대신해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 모든 민족으로 겸손히 엎드리고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원수였던 자도 그 은혜를 믿음으로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자는 의인이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
하나님이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만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가기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이런 원리는 신약 시대에는 당연히 신자에게 적용됩니다. 신자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서서 불신자들로 그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신자가 그 소명에 충성하지 못하면 먼저 신자를 징계하십니다. 세상 공의가 굽어지게 만든 세상 악인은 당신께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따로 심판하지만, 반드시 신자의 책임은 물으십니다.
따라서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신자가 제사장 나라 소임을 다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자기 주변에서부터 온전히 실현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내리는 형벌을 하박국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믿음으로 사는 일에 당연히 포함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기도가 자기 생전에 이뤄지지 않아도 그분의 약속은 반드시 그분의 때에 실현된다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가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막11:24)을 오해하고서 자기 소원과 계획에 관한 기도도 이미 받은 줄 믿고 기도합니다. 성경을 자기 생각대로 해석했듯이 하나님을 자기가 부려 먹으려는 아주 큰 잘못입니다. 하박국처럼 분명히 하나님께 받은 구체적인 계시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거나, 최소한 그분의 뜻에 제대로 부합되는 제목만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맥락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구절에 관한 해석이 설왕설래 많으나 그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 믿음의 정의 바로 앞에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7,38)
하박국에게 주신 묵시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주님의 재림 약속도 하박국이 받은 바벨론 멸망의 계시처럼 이미 확정되었으니까 그대로 이뤄지지 않을 리는 없으며 단지 그때와 방식만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확정된 약속을 붙드는 것이라고, 즉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믿음의 증거와 실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확정적으로 이미 받은 약속은 셋이었습니다. 첫째는 갈대아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먼저 심판하고, 둘째 그 심판의 도구로 쓰인 바벨론도 당신의 때에 반드시 심판하며, 셋째 이스라엘은 다시 당신의 제사장 나라로 세우려고 반드시 회복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깊은 뜻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해방되고도 또다시 당신을 거역 대적할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들을, 특별히 유다 지파의 다윗 가문을 유대 땅에 존속시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하박국이 본문에서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분의 구원을 기뻐한다는 의미도 분명해졌습니다. 단순히 바벨론이 침공해서 모든 것을 수탈해 가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갈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므로 찬양 경배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깊은 차원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여서라도 당신의 공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를 기뻐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아니 마땅히 자기와 유다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포악한 바벨론에게 침공당해 멸망 당할 것이 눈에 훤히 그려지니까 그 고통으로 뼈가 녹고 온몸이 떨린 것입니다. 땅에서 난 소출이 다 약탈당하므로 먹을 것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아서 많은 소시민이 굶어 죽을 것입니다. 그로선 포로 기간이 70년이 될 줄 전혀 몰랐기에 결과적으로는 언제 어디서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절대 손상되지 않을 것을, 비록 자기들이 죽을지라도 기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진짜 의미입니다.
하박국과 우리의 차이
하박국의 믿음이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잘 따져보면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은 당신의 광대하시며 완벽한 계획대로만 인류 역사와 신자 인생을 한 치의 차질 없이 이끈다는 확신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믿는 바 그대로입니다. 그와 우리 사이에 작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여호와 그분을 찬양했습니다. 그분이 역사를 풍성하게 이끄시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만 이끄시는 그분을 기뻐한 것입니다. 우리 또한 현재 어떤 고난에 처해 있든 세상의 공의가 아무리 굽어 보여도,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시고 예수 십자가의 사랑으로 평생토록 붙들고 계신 바로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 사랑 안에 때로 세상에서 억울하게 당하는 핍박과, 나아가 우리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가해지는 가혹한 징계도 포함됩니다. 또 그렇게 신자부터 바로 세우는 것이 바로 세상의 공의를 세우려는 그분만의 길임을 정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형벌을 담담히 기뻐하며 받아내는 것이 참믿음입니다. 성경이 침묵하지만, 하박국 선지자의 말년은 틀림없이 유다 멸망 때에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 고생했을 것입니다. 그는 조국 회복 약속의 실현은 보지 못했으나, 그 약속을 완전히 받았고 약속을 주신 이가 바로 여호와이므로 즐거워한 것입니다.
모세도 우리가 보기엔 사소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120년간 필생의 소원이었던 약속의 땅에 한 걸음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느보산 꼭대기의 먼발치서 가나안을 바라만 보고선 쓸쓸히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기 선조와의 약속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때 완전히 이뤄져서 자기 후손과 동족들이 이제 곧 그 땅에 들어갈 것을 그려보며 여호와 그분을 기뻐하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모세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았고 자신의 고난 중에도, 아니 그 고난으로 인해서 여호와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온전히 확신해야만 아무리 하나님이 세상 죄악을 방치하고 있는 것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공의에 대해서도 당장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아도 최소한 의심과 원망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이라는 인간에게 최고 좋은 축복을 주기 위해서 이 땅과 인간을 창조하였고 그 뜻대로 인류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줄 알기에 그대로 순응하는 것을 넘어 그 역사에 신자가 적극적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 공의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죄악으로 망가질 수밖에 없지만 신자마저 그렇게 망가지는 일에 힘을 보태선 절대로 안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가 증명하듯이 신자가 십자가 복음대로 살지 않아 주위에 예수가 전파되지 않으면 세상의 공의는 굽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신자를 희생해서라도 세상의 공의를 세우십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먼저 그분의 공의를 의심하면 본말이 완전히 전도된 것입니다.
신자들이 볼 때 이스라엘은 지금껏 불행한 역사만 겪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 나아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억울하게 여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하박국을 통한 하나님의 이 결정적인 경고도 콧방귀만 뀌다가 결국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현대 유대인들도 비록 신약을 인정하지 않아도 구약성경만 제대로 알아도 아브라함과 모세와 맺은 언약을 제대로 지킬 것입니다. 그 언약대로 지금이라도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서면 하나님이 그들의 안전을 책임져 주며 택하신 족속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진작에 그러지 않아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물론 모든 인간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므로 예수님이 오셨고 또 신약 신자들마저도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므로 다시 또 당신의 때에 주님은 속히 오실 것입니다.
몇몇 요절 중심으로 살펴봤지만 사실상 하박국서 전체를 훑어본 셈인데, 그 내용은 한마디로 주님을 따르는 경건한 신자들은 계속해서 억울한 고난을 많이 겪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고통으로 온몸이 떨릴지라도 세상으로 예수님의 참사랑을 더 알게 해주시려는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과연 그러한지 자문해 봅시다. 먼저 자신이 하나님이 따로 구별해 준 의인이라고 확신합니까? 예수 십자가로 세상 공의를 완벽히 세워나가는 그분의 사역에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겸손히 감당하고 있습니까?
(2/11/2024)
신자의 역할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새삼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