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14:10-14) 고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찾지 말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2)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0-14)
기억력이 나쁜 이스라엘
구약, 아니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씀은 세부적인 표현은 조금씩 달라도 이스라엘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를 절대 잊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성경 기록을 보면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그 크신 권능의 하나님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쉽게 잊을 수 있었는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고난 중에 힘들어하는 신자더러 하나님께 받은 지난 은혜를 회상하고서 고난보다 더 크신 그분을 온전히 믿으면 담대히 승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씀은 전혀 아니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잊지 말라고 거듭거듭 당부하신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조금 부족한 권면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이유는 훨씬 다른 데에 있었다고 증명합니다. 머리 좋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이 바로 며칠 전에 목격한 하나님의 그 큰 권능을 잊었을 리 만무합니다. 아무리 위급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어야만 한다고 무조건 비난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의 진짜 잘못이 정확히 무엇인지 또 우리가 신앙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측면이 무엇인지 살펴서 우리 현실 삶에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애굽의 아홉 번까지 재앙은 히브리인이 거주했던 고센 지역에는 일어나지 않아서 간접적으로 소문만 들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모든 장자가 죽는 재앙도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었기에 문을 닫고 밤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애굽 사람이 곡하는 소리만 들었지 실제로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 밤에 미처 부풀지 않은 반죽을 들고나왔을 정도로 황망 중에 애굽을 벗어났으므로 여호와의 열 번의 기적이 이스라엘에게는 피부에 직접 와닿은 적이 없는 셈입니다. 나아가 지난 사백 년간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데다 지금 노인 부녀자 아이까지 함께 도보로 행군하고 있는 오합지졸의 상태입니다.
반면에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받은 애굽의 바로는 80살 된 노인 모세 한 명에게 자기들 신들이 힘 한번 못써보고 무참히 열 번을 패배해서 자존감이 심하게 상해있었습니다. 유대인 노예들로 그동안 평안하게 생활했고 나라를 부강하게 건설했는데 장정만 육십만 명인 노동력을 단번에 잃었으니 너무 큰 손해입니다. 마침 그들이 어리석게도 길이 없는 광야로 행군했고 그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에게 열 번이 혹독하게 패배했지만, 신속하게 기습하면 자기들 군대가 얼마든지 그들에게 복수하거나 다시 사로잡아 올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애굽 두 족속을 함께 통치하시고 그중에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해변 지름길에 포진한 애굽 군대를 보면 두려워서 애굽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므로 의도적으로 광야 길로 우회시켰습니다. 이스라엘로선 뒤로는 강력한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고 바로 앞은 시커먼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완전히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습니다. 기적을 간접적으로만 경험했기에 막상 그런 상황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을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장은 여호와께 부르짖기는 했지만, 성경은 그보다는 애굽에서 편안히 죽도록 놓아두지 왜 광야에서 헛된 죽음을 맞게 하느냐고 모세에게 불만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덧붙이길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12절)라고 했습니다. 요컨대 애굽을 떠나기 싫었는데 네가 자꾸 독려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따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게으른 존재입니다. 오랫동안 다른 민족의 노예로 지내다 보면 오히려 더 편안해집니다. 애굽이 노예로 맘껏 부려 먹으려고 먹고 입고 자는 것들은 평균 이상으로 보장해 주었을 것입니다. 매일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것이 조금 지루할 뿐이지, 삶을 자기 힘으로 개척해야 하는 자유인에 비하면 노예의 인생사 고난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애굽이 두려워할 정도로 육신이 강건해지고 숫자로도 창성해졌습니다. 출애굽의 첫 세대는 그런 노예근성이 몸에 완전히 베여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 주민이 겨우 70년밖에 지나지 않았어도 김씨 왕조에 항거할 꿈도 못 꾸는 것에 비추어 보면 사백 년이나 된 이스라엘의 잘못이라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 이스라엘도 북한 주민처럼 자기들을 지배하는 애굽 군대가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들의 채찍에 괴롭힘당했던 트라우마가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고센을 벗어난 적도 없으므로 생전 처음 보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데 배를 만들 능력도 시간도 없습니다. 그들을 인도해 온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아직은 안내자 역할만 했기에 어떤 능력으로 역사할지 미처 알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절망적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은 사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GPS
만약 당시에 오늘날의 구글(Google) 같은 길 안내가 있었다면 오직 시간과 거리로만 계산하므로 최단 거리인 해변 고속도로로 인도했을 것입니다. 운전자가 큰 교통사고를 당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길은 절대 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구글이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글은 완전히 다른 당신만의 방식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들을 그들보다 더 잘 아시므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상태와 장래에 일어날 일까지 종합적 통괄적으로 고려해 가장 최적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연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의 눈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아예 길도 없는 곳입니다. 시간과 거리로는 가장 멀 뿐 아니라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는 경로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결국 가장 안전하고 최고로 빠르 편안한 길이었습니다.
육로로는 어떤 경로를 택해도 애굽에게 크게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많은 백성이 일사불란하게 행군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변변한 무기조차 없어서 철 병거를 앞세운 애굽 군대를 도무지 대적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인명과 가축과 재물에 단 하나의 손해도 없이 애굽의 추가 추격의 의지도 완전히 끊어버리는 방안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믿음과 지혜가 뛰어난 인간이라도 생각할 수 없는 모든 발생 가능한 요인들을 미리 다 고려하십니다. 공간적 시간적 범위에 전혀 속박받지 않으며, 무엇보다 세상 어떤 사안, 물건, 존재에게 단 한 치의 영향도 받지 않으므로 당신의 뜻에 가장 합당한 길을 미리 정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한 도주로는, 애굽 군대가 가로막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홍해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커서 더 좋은 루트를 인간보다 앞서서 발견했다는 단순한 뜻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이 볼 때는 너무나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계획이지만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에게는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운 일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리부터 홍해를 건너는 탈주 계획이 마련되었고 모든 여건과 사건과 사람들로 그렇게 되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붓자 곧바로 하나님은 구름 기둥을 이스라엘 후편으로 옮겨서 애굽 군대와의 사이에 흑암만 있게 했습니다.(19,20절) 애굽을 밤새도록 이스라엘 근처도 오지 못하게 모든 대비책이 미리 마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도피시키는 일은, 어폐가 있지만 그들을 택하셨던 하나님에겐 너무나 당연하고도 마땅한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참뜻은 가장 먼저 열 번이나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을 겪고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당신을 대적하는 애굽 군대를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은 열방 앞에 자랑하던 최강 정예 군대를 순식간에 다 잃었습니다. 실제로 애굽은 출애굽 이후에 중근동의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중요 역할을 하지 못했고 지금까지 그렇다고 세속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도주 계획의 백미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려는 애굽의 의욕을 뿌리부터 완전히 꺾어버렸습니다. 애굽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거의 없는 광야까지 또다시 추해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신이 자기들을 열한 번이나 패배시켰어도 어리석게도 자기 백성을 죽음의 땅으로 몰아넣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신묘한 역사는 이방인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아 각성하라.
결국 하나님의 더 중요한 목적은 당신의 백성더러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아넣은 당신의 뜻을 정확하게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는 애굽을 보지 못하니까 애굽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고 돌아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전쟁에서 후퇴할 수 있는 다리를 완전히 파괴하고서 앞으로만 진군하라고 독려한 셈입니다. 애굽을 재기불능으로 심판했으니 더 이상 그들에 대한 트라우마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3절)고 선포한 까닭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스라엘이 앞으로 마주칠 물과 먹을 것이 크게 부족한 광야에서 계속 애굽을 그리워할 것을 하나님은 이미 다 아셨던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홍해의 기적을 회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만 하나님께 단순히 삶이 고달프다는 이유로 열 번을 시험했습니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주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배불리 먹여 주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도 참지 못하고 애굽 황소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춤추며 음란하게 숭배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단순히 기억력이 나쁘거나 노예근성에 물들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음주 가무와 성적 쾌락이 따르는 우상숭배가 더 그리웠던 것입니다. 애굽은 틀림없이 노예들을 더 강건하게 부려 먹고 자기들에게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도록 수시로 풍요로운 음식과 육체적 쾌락이 따르는 유흥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구름 기둥의 인도대로 광야에서 흙먼지 날리며 도보 여행만 하고 모든 세속적 재미는 다 끊겼으니 절로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 기적 같은 여호와의 그 큰 권능과 은혜를 쉽게 잊어버려서 불신앙에 빠진 것이 아니라, 애굽의 세속적 쾌락이 너무 그리워서 자꾸만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시는 애굽을 보지 않게 해주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선 금송아지 배역 사건 전에 이스라엘이 당신의 제사장 나라로 서겠다고 피로 언약한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애끓는 중보기도로 그들을 또다시 용서해 주고 오히려 당신에게 잘못한 모세는 광야에서 죽게 했습니다. 모세는 죽기 직전까지도 계속해서 애굽에서 큰 권능으로 인도해 낸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거듭거듭 당부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숭배를 따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마음은 제사보다 제삿밥에 쏠렸던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현실 삶을 보니까 더 풍요롭고 형통하고, 무엇보다 맘껏 쾌락을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우상 신전에서의 방탕하고 음란한 제사는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제2계명으로 너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예사로 여겼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스스로 위로하려고 멋대로 부려 먹을 수 있게 만들었기에 전혀 실존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명색이 하나님을 따르고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로서 스스로 우상을 만들 수는 없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이방의 우상 신들을 슬그머니 추종한 것입니다. 현실 삶의 어려움만 없게 해주면 여호와를 더 잘 믿을 텐데 그러지 않으므로 우상을 숭배해도 하나님의 잘못이지 우리 책임이 아니라는 식의 핑계를 대고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두 속성
지금 이스라엘을 탓하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신자에게도 때로 사방이 완전히 막혀 전혀 출구가 보이지 않고 돈과 권력과 지혜가 아무리 많아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장벽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장 자주 당부하신 그 권면처럼 지금껏 하나님께 받아 누렸던 은혜를 헤아려 보고 현재 겪는 고난과 비교할 수조차 없이 크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 보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더 큰 고난이 겹치니까 앞으로 한 발도 전진할 수 없고 주저앉아 있다가 인생이 끝날까 두렵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진리는 모든 종교가 다 가르칩니다. 예수님도 "이방인들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을 자기들 신에게 구한다"고 했습니다.(마6:32) 만약 신자가 고난 중 고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치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만 구하는 셈인데, 엄격히 말해 현실 형통만 추구하는 이방인 수준의 믿음이 됩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빨리 해결해 주지 않는지 의심과 원망만 솟아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특별히 사방이 막힌 고난 중에는 이방인과 다른 차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시공간적 차원에서 간단하게 따지면 둘로 구분되는데 초월성과 내재성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초월은 이 땅이 아니라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하늘 보좌에서 세상만사를 다스리는 분이고, 내재는 언제 어디서나 신자의 바로 곁에서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으로 이 고난에서 빨리 건져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늘 보좌에 좌정하여 초월하신 하나님만 찾고 또 찾는 셈입니다. “왜 이 기도에 침묵하십니까? 왜 이 사정을 모르고 계십니까? 어서 빨리 이곳으로 오셔서 나를 이 어려움에서 구해주세요!.”라는 기도로 그치면 마치 멀리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불러 내리려는 그런 의도이지 않습니까?
모든 세상 종교는 사실상 초월의 하나님만 믿습니다. 영계에 좌정해 있어서 죽은 후에나 만날 수 있는 신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는 그 초월의 신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잘못 보이면 큰 불행을 당한다고 믿습니다. 어떻게든 치성, 열정, 선행, 공적을 많이 쌓아서 복을 받으려고, 최소한 예상치 못한 큰 재앙은 안 당하려고 헌신합니다. 죽은 후에도 살아서 신에게 얼마나 많이 바쳤는지, 대표적으로 선행을 바친 정도에 따라 구원과 심판으로 나눠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에겐 내재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그 신의 이름도 하늘에만 계신 ‘하느님’입니다.
기독교는 그와 완전히 다릅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바로 곁에서 항상 함께하고 계신다는 종교입니다. 초월의 하나님을 내재하는 하나님과 함께, 더 정확히는 내재의 하나님을 우선해서 믿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지금 홍해의 시커먼 파도 앞에서 열 가지 기적을 베푸셨던 하나님의 권능을 잊은 것이 이스라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이 그 진퇴양난의 위급한 상황에서도 바로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기적을 베푼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려고 이 땅에 강림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센 땅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았고,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른 이스라엘은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어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아니 아브라함 때부터 더 나아가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세상 안에서 인간의 바로 곁에 내재하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백성들 곁을 단 한 시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바울도 그래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고정적인 바위가 그들을 따른다고 함),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고 가르쳤습니다. 아무 소망 없이 황량했던 광야 길에서도 주님이 항상 함께 따라다니셨고 위급할 때마다 생명수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으려 하자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삼하7:6) 하나님은 화려하고 장엄한 성전에서 편안하게 초월해 계실 수만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의 장막 안에 항상 함께했으며 앞으로도 그러겠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모든 백성을 단번에 함께 만나는 장소이지만 그곳에만 계시지 않고 각 백성의 장막 안에 일일이 내주하여서 친밀하게 개인적으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공포에 질려서 어쩔 줄 모르는 까닭은 하나님이 멀리 초월해서 하늘에 계시므로, 이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아무 대책 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절망한 것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어떻게 깨우쳤습니까?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절) 오늘 이 자리 이 시간에 이전과 똑같은 능력으로 함께하고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 잠잠히 앉아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보면 된다고 선포했습니다. 초월의 하나님이 지금 바로 곁에 내재하고 계심을 믿으라, 아니 제대로 알라고 권면한 것이며, 더 정확하게는 이제 곧 직접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신 예수
기독교가 세상 종교와 다른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구약에선 역사 속에 간섭하여 가시적 사건들을 통해서 당신의 내재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다 이천 년 전에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처절하게 실패했던 유대 땅에 하나님이 직접 오셨습니다. 이는 너무나 엄청난 은혜이자 대단한 사건입니다. 인간의 오랜 숙제를 단번에 완전히 해결해 주려는 목적이 아니고는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오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체험적인 확신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선언했습니다. 쉽게 말해 세상 모든 이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마저도 초월의 하나님만 붙들고 있기에 그와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이고 그것이 더 우선이라는 진리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현실 삶의 고난, 상처, 눌림, 죄악 등으로 괴로워하는 인간들의 바로 곁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똑같이 한숨 쉬고 눈물 흘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제 그런 내가 직접 너희들 눈앞에 이렇게 왔으니 인류 역사 내내 단 한 번도 하늘에 멀리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믿는 신의 이름이 하나님인데 세상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스스로 자존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 그 첫째가는 뜻이지만, 하늘에만 있는 초월의 ‘하느님’과 전혀 다른 분이라는 뜻도 됩니다.
초월의 신인 하느님만 믿는 자 중에 기독교 신자보다 훨씬 더 착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과 신자의 유일한 차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나뿐입니다. 인간들더러 제발 자기 현실 문제만 해결 받아 형통하려고 큰 능력만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신자가 많이 바친다고 많이 주시고, 적게 바친다고 적게 주시는 분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선 구조적으로 생존의 능력도 없는 고아, 과부, 불구자, 불치 병자는 물론이고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만 믿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런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서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이렇게 죽기까지 너희 모두를 사랑하고 있다고 애끓는 심정으로 간절히 호소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 중에 죽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이므로 당신께서 대신 죽어서 그 죗값을 감당하고 용서해 줄 테니까 그 은혜를 순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대일로 개인적으로 세상에 그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끝까지 사랑과 공의로 보호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 나는 이미 의인이 되었기에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 아무리 큰 고난이든 아니 죄악 중에 있어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고난 중에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찾는 것은 불신자와는 의도가 다릅니다. 하나님께 많이 바쳐서 그와 비례해서 복을 받으려는, 즉 일종의 거래를 하는 식으로 그분을 찾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체질이 진토 같고 당장에 가로막힌 장벽만 보이니까 크신 하나님을 잊거나, 고통이 너무 심해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전지전능하신 초월의 하나님이 자기 바로 곁에 함께하신다는 내재의 하나님도 잘 믿고 있습니다.
능력보다 계획을,
그런데 그런 순전한 믿음에도 딱 한 가지 부족한 요소가 있습니다. 내 곁에서 큰 능력을 행사할 하나님에 앞서서 이전부터 지금까지 내 일생에 관한 가장 완벽하고 유익한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목적부터 창세 전에 세워진 인류 구원의 계획을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죄로 타락한 최초 인간 아담에게 약속하신 대로 “때가 차매 여자의 후손으로 율법 아래 나신”(갈4:4,5) 것입니다. 죄 중에 당신을 거역 대적한 원수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태초부터 마련해 놓으신 계획 십자가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실현하며 확증하셨습니다.
신자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분의 택함을 받아서 그 믿음이 온전하게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때와 방식에 따라서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은혜를 입습니다. 단순히 구원만 주시려는 뜻이라면 죽은 후에 그렇게 행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생전에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나머지 일생을 당신께 바치라는 뜻이며, 더 나아가 각자에게 가장 합당한 일생의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고 나머지 인생을 그대로 당신께서 이끌어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도 애굽의 열 재앙부터 홍해까지 그분이 그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그 자리까지 이끌고 왔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몰랐던 일이 가장 큰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서 신자가 큰 고난 중에 회상해야 할 하나님께 받은 지난 은혜의 첫째도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경위와 과정과 의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예수 십자가 앞에 완전히 꿇어 엎드리도록 모든 여건, 사건, 사람들을 주관하셨다고 재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모든 과정에 일일이 세밀하게 간섭하셔서, 말하자 완전히 쫄딱 망하게 해서 사방이 막히니까 하나님께 울부짖게 해서라도 당신을 직접 드러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 그랬다면 믿은 후에도 이런저런 고난을 겪을 때마다 그런 완벽하고도 거룩한 계획 가운데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고난을 인내로 이겨내고 나면 “하나님이 바로 이런 거룩하신 뜻을 이런 방식으로 실현했구나!”라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감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스라엘이 홍해가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 줄 확신했기에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어떤 식으로든 자기들을 지켜 보호해 주실 것을 알았다면 본문의 기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원망 불평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일사불란하게 줄을 지어 행진하면서 여호와를 찬양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럼 기세등등하게 쫓아오던 애굽 군대는 이전에 팔십 넘은 노인 한 명에게 열 번이나 무참하게 패배했던 트라우마가 남아 있어서 그 모습만 보고도 오히려 그들이 먼저 공포에 질려서 도망갔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굳이 구름 기둥으로 뒤를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그와 같은 일이 본문 사건 40년 후에 실현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리고 성을 함락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확신했기에 찬양과 기도의 침묵 행진을 7일간 이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애굽과 광야에서 행했던 권능을 이미 전해 들은 가나안 족속들이 먼저 간이 녹아져 내려서 무방비 상태의 이스라엘을 공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이방 족속도 초월하신 여호와의 전지전능하심은 익히 알았으며, 이스라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내주하신 하나님이 가나안 정복 계획을 완벽히 세워놓았다는 사실도 알았던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출애굽 직후의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여호와의 능력조차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홍해를 건너자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생기고 자기들 선조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계획대로 이뤄졌음을 깨닫고는 미리암이 주도하여 사상 최대의 찬양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도 지나지 않아서 가데스 바네야에서 또다시 초월하신 능력의 하나님만 찾다가 오히려 그분을 거역 대적하는 큰 죄를 범했고 광야에서 그 세대가 모두 죽는 심판을 받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그때도 사실은 애굽이 더 그리워서, 즉 세상의 풍요와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에 ‘초월하신 그분의 능력’만 구했던 것입니다. 부모 세대의 처참한 실패를 목격한 다음 세대가 그나마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기에 가나안 정복을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성경이 애굽에서 구원해 준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잊지 말라고 가장 많이 권면하는 뜻이 완전히 밝혀졌습니다. 첫째로 고난 중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찾으려 하지 말고 완벽하게 선하신 계획을 갖고서 이미 바로 곁에 내주하고 계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신자가 그 간단한 진리도 제대로 믿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너희 마음이 제사보다 제삿밥에 가 있기 때문이라고 엄숙히 경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단순히 수호천사의 의미가 절대 아니며,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처럼 일생을 무사 무탈로 지내려고 새벽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외치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진실하고 의롭고 아름답게 살도록 완벽한 계획대로 인도해 주고 계시는 주님의 손을 잡고 평생을 담담하게 매일매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출애굽의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최초로 경고한 것도 십계명을 주시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출20:2) 그리고 이어지는 첫 계명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찌니라”고 명합니다. 당신의 이름이 ‘하느님’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고난이 닥치면 당연히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을 봐야 하지만, 그보다는 십자가 예수님을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앞뒤 꽉 막힌 고난 아니 죽음도 신자를 절대 끊어낼 수 없으므로 안심하고 당신이 가신 길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고난 중에 절대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없고 지금까지 계속 실패했던 것처럼 고난만 닥치면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부터 생길 것입니다.
(3/17/2024)
쇼생크 탈출(https://whyjesusonly.com/QTok/5691)이 생각납니다. 날마다 죽고 주야로 즐거이 묵상해야 하는 이유 ㅎ,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