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4:22-25) 식인종이 된 기독교 신자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4)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14:22-25)
주님의 섬뜩한 요구
예수님은 교회가 행할 예식으로 성찬과 침례 두 가지만 명하셨습니다. 예식이란 예배, 교육, 봉사, 전도, 교제 같은 교회 본연의 임무에 더욱 헌신 충성하기 위한 부차적인 행사입니다. 부차적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찬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또 침례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명했습니다. 인자로 오신 주님의 마지막 유언인 셈이므로 신자와 교회는 반드시 순전한 믿음과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신자들에겐 성찬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이 시공간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어서 절실하게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작고한 위인의 업적을 기리거나 선조의 제사를 모시는 것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을 떠올리며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성경해석의 첫째 목표는 당시 사건의 현장에서 화자(話者)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청자(聽者)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최대한 가까운 정답을 찾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찬식에 별다른 은혜를 받지 못하는 신자들은 이날 밤 열두 제자들이 주님의 당부를 어떻게 이해했을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와 제자들의 생각에 관해 성경은 침묵하지만, 전후 맥락을 잘 짚어보면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들로선 상징과 비유의 표현인 줄 알았어도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말씀은 매우 섬뜩하고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도 왕으로 삼으려고 쫓아온 무리에게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이미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말씀이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많은 제자가 물러가서 다시는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요6장)
지금 이 자리에 참여한 제자들은 전부 유대인들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동물의 피도 마시면 안 되고 그 고기조차 피를 빼지 않고는 먹어선 안 됩니다. 여성의 월경도 부정한 것이라 정결례를 치르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히브리인에게 생물의 피는 반드시 멀리 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도 예수님과는 같은 고향 출신의 동년배라 아주 친밀했을 것입니다. 마태와 누가와는 달리 마가만 제자들이 포도주를 마신 후에 주님이 그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어쨌든 제자들로선 그 포도주가 스승의 피라고 연상되면 절대로 선뜻 마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자 중 한 명이 당신을 배반하여 팔아넘길 것이라고 예고한 직후입니다.(17-21절) 요한에 따르면 주님이 힌트를 주었는데도 유다가 배반자인 줄 모르고 모두가 과연 누구일지 궁금해했습니다.(요13:21-30) 말하자면 제자들끼리 서로를 믿지 못하는 아주 어색한 상황이었고 혹시 주님이 자기를 의심하는지 전전긍긍하는 중입니다. 가뜩이나 머리가 혼란한데 이런 말씀까지 들으니까 도저히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포도주를 당신께서 “흘리는 피”라고 했으니까, 그동안 가르친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다시 강조한 것이라고는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스승이 핍박받아 죽을 수도 있겠다고만 여겼지, 오늘 밤이 바로 그날이 될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틀 전에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트려 당신께 부었을 때 분명히 당신의 장례를 기념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나(막14:8), 제자들은 여전히 별로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만찬을 마치고 평소처럼 감람산으로 찬양하며 올라갔고 주님이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는 동안에 태평치고 잠만 잤습니다. 스승이 이제 곧 십자가에 죽으리라고 각오했다면 아무리 어리석고 믿음이 연약해도 그렇게 무심할 리는 없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스승이 내일 유월절로 성전에 모일 수많은 동족에게 큰 이적을 베풀거나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일에 관해 가르치리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잔과 떡을 주저 없이 입으로 갖고 갈 강심장은 베드로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사 최초의 성찬식에 참여한 성도들도 오늘날의 일부 신자들처럼 당신의 피를 마시고 당신의 살을 먹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피부에 전혀 와닿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승을 모르는 제자들
주님께 삼 년이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영적 분별력이 너무 열등하다고 탓해선 안 됩니다. 눈앞에 스승을 마주한 자리에서 십자가 죽음을 생각하며 포도주를 마시면 자기들도 그 살인에 동참하는 듯한 씁쓸한 죄책감이 들 것 아닙니까?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버린 유다가 최초의 성찬식에 참여했는지 그전에 나갔는지 불명합니다. 마가와 마태는 “그들이 먹을 때에”(막14:22, 마26:26) 성찬을 나눴다고 했으므로 유다도 참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예수님이 성찬과 무관하게 제자들에게 배반자가 누구인지 힌트를 주려고 떡을 주자 받아먹고선 바로 나갔다고 기록합니다.(요13:30) 유다가 성찬에 참여했던, 하지 않았던 주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뜻을 전혀 모른 채 주님의 손을 뿌리쳤으므로 제 발로 구원 밖으로 걸어 나간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지면 살과 피는 신체 전부를 대변하므로 당신께서 완전히 죽어서 당신의 육신 전부를 제자들에게 온전히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도 주님이 주시는 당신의 전부를 온전하게 전부 받아들여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당신께서 죽고서 이 땅에 없어도 제자들 각자와 항상 함께할 것이므로 절대로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당신의 제자답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들의 목숨이 걸리게 되자 주님이 당부하신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나절도 안 지나서 다들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제자들이 몇 번이나 들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예고의 문자적인 의미를 못 알아먹었을 리는 없습니다. 단지 스승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린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해서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짐짓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마지막 당부임에도 그들은 주님의 전부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성찬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과 성찬에 참여해야 할 최초의 성도의 기본 인식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인생사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관점은 오직 현실 삶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주님이 제자들에게 바라는 관점은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얻을 참된 평안과 자유에 쏠려있었습니다. 당시로선 가장 의롭고 하나님께 헌신적이었던 제자들마저도 주님이 성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까지도 그 반대편 예루살렘 성안에 평안하게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큰 죄는 살인입니다. 이제 주님은 아무 죄 없이 역사상 가장 불공평하고 조작된 재판을 통해서 가장 억울한 살인을 당할 것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마저 유대 지도자들이 종교적 시기와 경제적 탐욕과 자존심이 상한 앙갚음으로 주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쉽게 알아챘습니다. 자기 직권으로 예수를 살리고 진짜 살인범인 바라바를 처형하려 시도했으나 유대 대중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쳤습니다.
대중들은 왜 예수를 꼭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지 합리적 판단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리라 크게 기대했는데 주님이 그 반대로만 사역하니까 큰 반발심이 생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로선 너무나 사랑했기에 거꾸로 증오하게 되었다고 핑계 댈지 모르나, 주님이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준다고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 메시아의 사역을 자기들 욕심과 감정에 묶어서 제멋대로 상상한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다가 제대로 안 되니까 변심했다고 정죄하고 살인한 것입니다.
양심에 찔린 빌라도가 손을 물에 씻으면서 이 무죄한 피에 자기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으나(마27:24) 십자가 처형 혹은 무죄 방면을 판결할 권리는 오직 그의 소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황제에게 이 사건을 직접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까 가뜩이나 황제에게 밉게 보인 탓에 자기 총독 직위가 흔들릴까 염려해 혼자만 살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결국 유대와 로마 사회의 최고 지성인과 의인과 종교인들이, 지금으로 치면 신자와 불신자가 일치단결해서 재판을 조작했습니다. 죄 하나 없고 오히려 너무나 의로운 일을 많이 한 주님을 눈도 깜박 않고 살인했습니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한결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진리를 이 십자가만큼 확실하게 드러내는 증거도 없습니다. 나아가 이 재판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더 멀다는 사실도 입증했습니다.
무력한 도덕과 종교
거기다 구약시대의 이방 종교에선 자기들 신에게 대놓고 산 사람을 죽여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무리 이방 족속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흔적이 양심으로 남아 있기에 그들에게도 살인은 아주 중한 죄였고, 자기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살리려고 부모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습니다.
그런데도 신께 자기 아들을 바치는 목적은 오직 하나로 인간으로서 최고의 치성과 열성을 신에게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주로 국가적인 위기에 왕이 맏아들 왕자를 바치는데 그런 위기가 신이 자기들에게 화가 나서 일어나게 했다고 간주하고 가진 것 전부를 드리니 그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어서 빨리 구해달라는 간구입니다. 평상시에도 다산과 풍요를 주어서 다른 나라보다 더 강력해지게 해달라는 뜻으로 사람을 산 채로 제단에 올립니다.
반면에 모세 율법은 인신 제물을 엄격히 금지합니다.(출34:20, 신18:10) 이스라엘의 형통은 이미 수여 받은 율법대로 거룩하게 살면 보장됩니다. 혹시라도 외적이 침공해도 당신의 백성답게 살고 있다면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무엇보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어려도 당신의 형상대로 닮게 당신께서 지으신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아버지인데, 그 아들을 죽여서 아버지에게 바치는 꼴인 인신 제물보다 더 큰 죄악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다 왕 아하스는 아람과 이스라엘이 침공하자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습니다.(왕하16:3) 우상숭배에 찌든 므낫세 왕은 국가적으로 위급한 처지에 빠지지도 않았는데도 왕자들을 번제로 바쳤습니다.(왕하 21:6) 오직 현실 형통만, 최소한 무사 무탈을 바라는 이방의 우상숭배 개념과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심지어 므낫세는 아람의 화려하고 웅장한 우상 제단의 복사본을 예루살렘에 짓고서 대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호와는 아무 형상도 없고 그 이름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고 평범하게 생긴 제단에서 짐승 제물을 바치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는 너무 무미건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안치되어 있어서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일 년에 한 번만 대제사장이 전 백성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기묘하고 장대한 신상에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바쳐지는 이방의 제사 절차가 아주 신령해 보였고 또 함께 따라오는 음주 가무와 성적으로 음란한 잔치가 매우 매력적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의 택함을 받은 족속 유대인들조차 그분의 율법을 따르며 의롭게 사는 것보다 세속적 향락을 즐기는 편이 훨씬 더 좋았던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신의 이름은 달라도 사실상 우상만 숭배했는데, 현실 삶에서의 풍요와 쾌락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아담의 원죄로 타락한 결과 언제 어디서나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 혼자만의 평안을 추구하는 본성적인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거나 두려워하는 자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람 왕 벤하닷에게 포위되어 사마리아 성안에 식량이 바닥나게 되자,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젊은 엄마 둘이 서로 자녀를 잡아먹는 다툼까지 벌렸습니다.(왕하 6:24-33) 지금은 사탄 숭배 같은 일부 광신자 집단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신께 바치는 미개한 종교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비록 하마스의 테러가 계기가 되었지만, 현재 가자 지구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장기 구금으로 굶어 죽을 판국입니다. 또 율법에 과도한 복수를 금지하는 동해보복법이 있음에도 이스라엘은 수백 배로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살인죄가 노골적이고 원시적이었다면 이제는 의로운 명분으로 포장하고 더 큰 규모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직면하는 모든 비극적인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한 죄로 인한 자업자득입니다. 인간 스스로 개선해 보려고 인간이 고안한 도덕과 종교들도 역사가 증명하듯이 아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것들로 인한 죄악상이 더 음흉하고 교묘했으며 그 피해도 가공할 정도였습니다. 유대인 육백만 명을 학살한 나치 제국을 독일 교회들이 적극 지지했고, 며칠 전에도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변호했습니다.
인간이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가 가난, 범죄, 전쟁 같은 현실 고난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한 명의 예외 없이 죄에 찌들어서 스스로 아무런 선한 일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양심에 따라 선하고 의로운 일들을 해도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상대적입니다. 그 실제적인 내용도 자기 민족, 집단, 가족, 개인의 평안과 형통을 높이려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 자체가 하나님과 단절된 근본적 죄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피
성찬식에 순전하게 참여하려면 주님이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를 마시라고(24절a) 말한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를 높여서 세상의 주관자가 되려고 시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찾아와 짐승을 잡아서 그 피로 그의 죄를 대속하고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힘으로써 당신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을 타락시킨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고 저주했습니다. 이는 또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될 아담의 후손을 장차 여자의 후손이 와서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자 가장 먼저 사탄이 하나님의 그 언약이 말하는 여자의 후손임을 알아보고서 광야에서 시험 유혹했고 귀신들도 멸망 당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핍박받는 자들을 주로 만나서 위로하고 치유해 주면서 사탄과 그 졸개들을 심판할 의사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그 흑암의 영적 세력은 마지막 날에 완전히 멸하실 것이므로 일단 유보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탄은 불안해져서 사람들을 배후에서 음흉하게 조종 선동해서 기어이 주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사역 내내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는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고, 지금도 언약의 피를 마시라고 명합니다.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갚을 제물로 당신을 하나님에게 스스로 바치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가장 불공평한 재판에 따라 가장 억울하게 죽었지만, 사실은 자발적 능동적으로 기꺼이 당신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신 것입니다. 그때까지의 모든 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주관했습니다.
요컨대 십자가는 태초부터 마련되었고 그래서 창세기에 기록된 인류 구원 계획이었습니다. 그 구원을 완성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성찬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성찬도 태초부터 제정된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유지를 기념 상기하는 제사 같은 의식이 결단코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구원받은 신자도 태초에 이미 자신이 택함을 받았고 성찬에 참여토록 정해진 것입니다. 주님은 그 언약의 피를 많은(many) 이를 위해 흘리지, 모든(all) 이를 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24절b) 그 언약에 순전한 믿음으로 동참하는 신자에게만 유효한 피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자신이 태초부터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있었다는 그 놀랍고도 엄청난 은혜를 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왕국이 올 때까지 포도주를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신자들도 당신을 따라서 금주하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사탄의 최종 심판을 당신의 재림 때까지 유보했으므로 그때까지는 이 땅에 세워질 당신의 나라는 미완성 상태입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면 당신의 나라는 아름답고도 영광스럽게 완성되고 주님과 함께 천상의 새로운 포도주를 즐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신자만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소름이 끼치는 은혜
성찬식의 포도주를 당신이 흘릴 언약의 피라고 칭한 주님의 뜻에는 정말로 소름 돋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 더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더러는 자식을 신에게 절대로 바치지 말라고 엄격히 금했습니다. 정작 당신께선 당신의 아들을 인신 제물로 받으려고 태초부터 계획했고 적극적으로 주도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사탄과 인간의 음모로 십자가 처형이 이뤄졌어도,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모순이자, 기독교 최대의 역설이며, 나아가 자신이 제정한 거룩한 율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창조의 최종 목적으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으로선 절대로 인간 제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죄송하지만, 십자가로 성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삶아 먹은 사마리아 젊은 엄마 꼴이 되었고, 성자 하나님은 자살한 유다 꼴이 되었으며, 성령 하나님은 그렇게 되도록 모든 인생사를 주관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그런 끔찍한 죄인의 자리에까지 스스로 비하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평생토록 노력해도 절대로 스스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똑같이 죄로 타락한 인간끼리는 다른 인간의 죗값을 감당해 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보낸 당신의 아들을 완전히 죽여서 인간의 죗값을 감당하는 제물로 받았습니다. 당신과 원수 된 인간의 본성적인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지 않고선 인간과 온전한 영적 교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죄인인 인간을 근본적으로 새 사람으로 바꿔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영혼의 통로를 당신께서 다시 열어주어서 참사랑으로 교제 동행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십자가는 하나님 쪽에서 당신의 최고 열정과 정성을 인간에게 바치며 인간더러 제발 당신께 진심으로 겸손히 무릎 꿇고 엎드리라는 애끓는 호소입니다. 죄에 찌든 인간은 최고의 열정과 정성으로 인신 제물을 우상 신에게 바쳐서 형통만 간구했으나, 하나님은 정반대로 인간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인신 제물로 당신께서 받으며 제발 당신이 지은 고귀한 인간으로 살아 달라고 간구한 셈입니다. 마지막까지 육신의 평안만 추구하며 태평치고 잠들어서 스승과 반대편에 머무르던 열두 제자들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전부 바쳐서 그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할 제 자리로 되돌려 세운 것입니다.
구원이 단순히 우리를 위해서 그 극심한 십자가 고통을 감내하며 죽은 은혜에 감동해서 예수님을 믿기로 해선 이뤄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메울 수 없던 틈새를 주님이 십자가로 완전히 메어주어야 합니다. 요컨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올라가 살이 찢기고 피를 흘려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체험적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올라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직접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에 마시는 포도주도 사실상 자신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을 때 흘린 자기 피라고 여겨져야 합니다.
최초의 성찬은 불행하게도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아주 어색하고 암울한 분위기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예고하고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기적은 간혹 인간 선지자들도 일으켰으나 자신이 죽고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그대로 스스로 실현한 자는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바로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라고 완전히 드러냈고, 비로소 제자들도 스승의 그런 정체성을 온전히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다시 세 번이나 사랑을 베풀며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태초부터 계획하신 은혜였습니다. 용서해 줄 계획이 없다면 미리 그 부인을 예고해 줄 이유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 용서를 받기 전에 이미 세 번 부인할 때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전부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절감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때 그로선 대제사장의 재판 법정에서 스승 대신에 자기가 고난을 받아야만 했었고, 나중에 십자가를 보고는 자기를 대신해서 주님이 죽었다고 절감했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자신의 옛사람이 전부 죽었기에 비로소 베드로는 주님이 주시는 당신의 전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이나, 고난에서 구출이나, 무사 무탈이 아니라, 주님 그분과의 인격 대 인격으로 교제 동행하는 것이 삶의 최고 기쁨과 인생의 첫째 목적이 된 것입니다.
신자의 자격 두 가지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에 제자들은 주님이 생전에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생전에 주님이 가르치신 천국 복음은 물론 마지막 만찬 때의 피와 살에 관한 가르침도 온전히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안에 가득 채우지 않고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예 헛되고 헛되며 기다리는 것은 지옥 심판임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목격한 5백 명이 넘는 증인들이 사도들과 함께 유대 안식일이 아닌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모여 예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또 예배마다 성찬을 거행했는데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에게 주님의 살과 피가 정말로 자기 살과 피가 되는 은혜로 임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 외부에서 성찬식을 오해하고서 기독교는 사람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 식인종 종교라는 루머가 퍼졌고 로마로부터 더 멸시 핍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바쁜 이방 족속에게 십자가 구원 진리를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알아먹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이방인들도 의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 현실 축복을 받아 자기를 남들 앞에 한껏 높이고 싶어 합니다. 이 둘은 절대 양립될 수 없고 동시에 실현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닙니다. 원죄로 타락한 인간의 영적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서 일종의 분열 상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의 형벌을 공의롭게 처리하려면 모두가 당장 죽어야 합니다. 죄를 완전히 깨끗이 처리하면서 죄인은 죽지 않는 방안은 인간 종교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인신 제물을 바치며 발버둥을 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한 인간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그 둘을 동시에 완전하게 만족시켰습니다.
바꿔 말해서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다는 것은 가장 먼저 자신의 옛 자아가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십자가의 예수님과 일대일 인격적인 대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럴 때 사실상 신자에겐 주님의 살과 피를 받는 최초의 영적인 성찬을 행한 것이며, 그것이 없으면 구원도 믿음도 없습니다.
그런 후에는 누가 강요 권면하지 않아도 당연히 주님을 주인으로 삼아서 살아가게 됩니다. 누가 뭐래도 주님의 자녀답게 그 믿음을 지키고 반드시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 안에서 살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시민으로 세상 사람과는 다른 인생 목표 생활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데, 비유로 말해서 신자의 몸에 예수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성찬을 가르치신 주님의 어려운 말씀을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 뜻입니다. 신자는 베드로처럼 자신이 “대속함을 받은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는 체험적인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신자로서 소명을 실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찬의 포도주와 떡을 나눌 때 주님보다는 십자가에 달린 자신의 피와 살로 연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명하셨는데(마16:24), 그 당시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뜻은 실제로 순교를 당할 테니까 각오하라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4/14/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