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쫓아낼 그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절하시고 너로 그 땅을 얻어 거기 거하게 하실 때에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는 네가 그와 같이 행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여호와의 꺼리시며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그 신들에게 행하여 심지어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느니라”(신12:29-31)
신자가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아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나아가 본문은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는 모습조차 흉내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서도 이교도들의 방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으로 그 대표적 예로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행위를 들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신들을 섬기는 모습 중에 가장 큰 잘못은 자녀를 산 제물로 바치는 것과 신전에서 문란한 성행위를 벌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사탄을 숭배하거나 Sex를 구원의 방도로 가르치는 종교가 아닌 이상 그런 경배 방식을 요구 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경배하지 않는 신자는 불교의 삼보일배(三步一拜) 같은 의식을 흉내 내지 않고, 교황을 경배하는 가톨릭 식으로 한 개인을 떠 받들지도 않습니다. 개신교는 성찬과 세례 외는 특별한 의식이 없고 오직 말씀과 기도가 중심인 종교입니다. 그럼 과연 이 말씀이 현대의 신자에게는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말씀일까요?
외적 의식은 항상 어떤 현실적 목적이나 종교적 신념을 함의(含意)하고 있지 형식 자체만 별도로 존재하는 법은 없습니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있을 수 있지만 내용 없는 형식은 없는 법입니다. 형식을 문제 삼기 전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언뜻 이해가 안 되는 형식이라도 내용을 잘 알고 보면 그 형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도리어 더 빛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불신자의 눈에는 개신교의 성찬과 세례(침례)도 이상하게 비췰 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와 변화가 되면 그 의식들에 얼마나 은혜가 넘치게 됩니까?
가나안 족속들이 신전에서 난교 파티를 벌리고 자녀를 산 채로 불로 태워 제물로 바친 목적과 신념이 무엇이었습니까? 전자는 자기들 기업에 풍요한 산출이 이뤄주기를 바라기에 난교(亂交) 행위를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삼은 것입니다. 후자는 신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들이 가진 것 중에 최고 좋은 것을 바친 셈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전재산을 잃는 한이 있어도 자기 자녀는 포기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들의 목적을 하나씩 따져선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현실적인 축복을 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업이 번창하고 육신이 건강하고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에게는 신자가 가진 가장 귀한 것, 최고로 좋은 것으로 바쳐야 합니다. 심지어 자녀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당신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이는 당신의 제자로 합당하지 않다고 명시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문제는 이 두 목적을 연결시킬 때에 발생합니다. 현실적 축복을 받기 위해서 좋은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종교적 신념이 더 문제입니다. 좋은 것을 바치면 좋은 것으로 주신다. 나아가 바치는 것에 비례해서 주신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을 바치면 그만큼 더 좋은 것으로 받을 수 있다라는 신념입니다.
성경 말씀은 너무나 정미합니다. “그들의 경배 의식을 탐구하여”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난교와 인간 제물 의식 자체를 보고 “뭔가 신비하다. 경건하다.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한번 해볼까”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도 아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 가나안 신들이 풍작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비춰져 “아! 우리도 저렇게 여호와께 경배하면 풍작을 주시겠구나”라고 생각할까 염려한 것입니다. 사백 년간 건축 공사판에 막노동만 하여 농경 산업의 경험이 전무한 민족들이라 이미 그 쪽의 전문가가 되어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보고 자칫 잘못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금지 시킨 것은 현실의 풍요 만을 위해서 당신을 찾는 것입니다. 나아가 더 많이 바치면 더 많이 받으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목적과 신념을 심지어 가증히 여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좋은 것으로 바치려는 열심과 정성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과 정성이 이런 신념과 목적에서 근거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찾습니다. 기독교는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그분이 인간을 찾아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온 종교입니다. 인간의 외적 여건을 풍요롭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를 죄에서 깨끗케 하여 거룩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룩해진 백성들로 진정한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를 세우고 확장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지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거룩해지기를 원하면 그분이 먼저 제거해 주십니다. 육신의 병이나 경제적 궁핍이 영혼마저 병들게 한다면 그것에서 건져 주십니다. 반면에 병이나 궁핍으로 인하여 우리 영혼이 거룩하게 될 수 있다면 오히려 그런 것을 허용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에게 좋은 것으로 바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을 그분의 마음에 합하도록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대와 다르게 구별된 신자 자신을 산 제사로 받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당신과 신자와의 거룩한 관계가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다른 모든 것, 자녀마저 포기할 수 있는 자입니다. 복을 받으려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자녀마저 바친 아브라함처럼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분은 인생의 유일한 목적인 세상에서의 형통을 위해 모둔 수단을 다 동원하고도 당신마저 그 위에 더 보태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이 둘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그 중간은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나 그 일에 바쳐진 시간과 재물의 질과 양 자체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교인을 목사, 선교사, 성가대, 집사, 교사로도 구분 짓지 않습니다. 그분은 오직 교인의 심중에 자리잡고 있는 믿음의 목적과 신념에만 관심을 두십니다. 지금 당신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인입니까? 아니면 그분이 아주 가증스럽게 여기는 교인입니까? 다른 말로 혹시라도 자녀를 불에 태워 바치는 죄를 범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3/2/2006
신자 모두가 경계하고 점검해야 하는 말씀이네요. 특히나 잘못 가르치고 그리 배워 기복신앙으로 점철된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고도 중요한 권면의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