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1,12)
기드온은 흔히 아주 용맹한 사사, 본문 표현대로 큰 용사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만큼 잘못된 평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모든 성경의 인물 중에 가장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믿음조차 제대로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우선 믿음의 측면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그에게 소명을 주려 하자 당장에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6:13)라고 반발부터 했습니다. 자기들이 우상 숭배한 죄를 회개하려고는 않고 현실의 고난을 하나님 탓으로 돌렸고 심지어 하나님의 함께 하심조차 의심했습니다. 미디안에게 승리한 후에는 탈취한 금을 모아 에봇을 만들어 우상처럼 섬겼고, 말년에는 처첩을 많이 두어 아들이 칠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결국 자녀 교육에 실패하였고 아들들끼리 처참하게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결코 담대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추수는 바람이 많이 부는 높은 곳 평지의 타작 마당에서 합니다. 그러면 미디안에게 당장에 들킬 것 같으니까 땅을 웅덩이처럼 판 포도주 짜는 틀에 숨어 들어가 했습니다. 아무도 그가 타작하는지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그가 천하의 겁쟁이였다는 증거는 많습니다. 우선 여호와의 사자를 직접 대면하고서 죽지 않은 은혜를 입고도 또 바알의 단을 헐라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는데도 그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백주에 하지 못하고 밤에 도둑질 하듯이 살짝 해치웠습니다. 그것도 종 열명을 데리고 갔고 심지어 “아비의 가족”도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 사령관으로 부름 받고선 표징부터 구했습니다. 그것도 자연 현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기적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을 보고서야 그 소명에 응할 결심을 했습니다. 또 실제 전투에 앞서선 하나님이 직접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었습니다.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7:10) 하나님은 미디안에게 자기들이 패하는 꿈을 꾸게 했고 또 그 이야기를 기드온더러 숨어서 듣게 했습니다. 부하 부라와 동행케 한 이유도 혼자 가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며,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계속 기드온이 소심하게 전투를 주저할까 해서 옆에서 증인을 서도록 붙여주셨는지도 모릅니다.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모습으로 300명의 정예군을 뽑는 그 유명한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사회에선 항상 대적들과 야생 맹수들이 사방에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그런 것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는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며 대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후자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자요 전자가 오히려 담대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겁쟁이 300명을 뽑은 셈입니다.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고 전체 모인 백성 중에 2/3를 돌려 보냈으니까 뽑힌 300명도 당연히 담대한 자라고 착각합니다. 겁쟁이 중에는 주위 사람으로부터 겁쟁이라는 평가를 듣기를 겁내는 겁쟁이도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물 마시는 모습에서 분명히 소심한 자를 뽑았고 대범한 자는 돌려 보냈습니다. 그야말로 겁쟁이 사령관에 소심한 부하 300명으로 당신의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기드온이 성경의 대표적인 용사로 거론되는 이유는 중간에 몇몇 족속들의 도움도 받았지만(7:23,24) 겨우 삼백 명으로 그 수많은 대적들을 상대해 승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인데 하나님이 처음 모인 자 중에 두려워 떠는 자를 돌려 보낸 이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自矜)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7:2)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 후에 만 명이 남았는데도 하나님은 ‘아직도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미디안 대적의 숫자는 무려 13만5천명이었습니다. 만 명이 남았을 때에도 하나님이 많다고 한 이유는 기습이나 매복 작전을 잘 세우면 1:13의 비율로도 승리할 가능성은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만 명으로 전투하여 승리하면 여전히 이스라엘이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교만에 빠질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300대 135,000은 1:450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닙니다. 그것도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만으로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미디안의 전투는 기드온과 삼백 용사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이 책임지고 수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드온은 성경에서 가장 믿음이 적고 최고로 소심한 겁쟁이였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담대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큰 용사가 되기에는 거리가 너무 먼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를 큰 용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당신의 일에 사용하면 다 큰 용사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니 그보다는 하나님의 일은 어떤 것이라도 다 큰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성실히 하고 있으면 당연히 큰 용사가 되는 법입니다.
기드온의 기사는 너무나도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이 억지로라도 끌고 나가서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주관하셔서 당신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보여 주셨다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면 하나님이 큰 기적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기사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주제가 두려움이라는 것을 놓쳐선 안 됩니다. 요컨대 기드온과 이스라엘더러 너가 전적으로 여호와만 의지하면 포도주 틀에 숨어서 추수하는 일이 안 생길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힘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라는 의심과 불만도 없어질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신자의 대적을 혼자서 물리쳐 주실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테스트를 통과한 삼백 명도 사실은 그분에게는 여전히 많은 숫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동원한 것은 겁쟁이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직접 맛보게 하기 위한 뜻이었습니다. 또 당신의 일은 당신의 백성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삼백 명이 담대하거나 믿음이 출중해서 동원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현재 사방의 대적이 비록 1:450 혹은 그 이상으로 도저히 계산조차 안 되는 중과부적(衆寡不敵)처럼 보일지라도 포도주 틀에 숨어 들어가 있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 또한 기드온만큼 소심하고 겁이 많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이미 큰 용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높은 곳에 위치한 넓은 타작 마당에서 사방 대적을 당당하게 대면하면서 추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어도 우리 속에는 지극히 크신 능력의 보배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당신은 여전히 세상 속의 겁쟁이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비록 하나님 앞에는 겁쟁이지만 세상 앞에는 큰 용사로 그분과 함께 서 있습니까?
3/21/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