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수호천사인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0-12)
천편일률적인 대표기도
주일 대예배의 대표기도에 반드시 들어가는 내용이 주로 무엇인가? 지난 한 주간에 지키고 보살펴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반면에 그 은혜에 걸맞지 않게 인간적 욕심으로 살았음을 회개하고 용서를 바란다는 것이다.
아주 좋은 기도이자 반드시 드려야 할 기도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심정을 대변한 그야말로 대표기도다. 그러나 문제는 매주 똑 같은 내용으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땅히 구해야 할 기도이긴 하지만 모든 신자의 신앙 상태가 항상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뜻일 수 있지 않는가?
그 기도 내용대로라면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다. 주일날 설교 말씀으로 은혜를 받아 세상에 나갔지만 금방 불신자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되었고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일(如一)했다는 것이다. 또 주일이 다가오니 신자로서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겠는지 불현듯 뉘우침이 생겼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큰 재앙과 환난 없이 평안하게 먹고 살게 해준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이다. 정말 솔직하게 따져서 대표 기도하는 자의 심정이 어떠하며 듣는 자가 느껴지는 뉘앙스 또한 어떠한가? 하나님이 신자 각자의 수호천사 역할을 잘 수행해주셨다는 정도 밖에 더 되는가? 그렇다면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는가?
물론 현시대는 정말 불안하기 짝이 없다.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가 남발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불신과 무관심을 넘어서 갈가리 나뉘어져 분노와 증오가 넘친다. 자연 재앙은 갈수록 예측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규모도 커지고 있다. 어떤 강력한 항생제라도 치료가 안 되는 새로운 질병들이 나타나고 아예 원인모를 질병은 그보다 더 많다. 교통과 통신망의 발달로 세계가 하나로 좁혀짐으로 편리한 점도 많지만 전혀 생소한 폐해가 전 세계적 규모로 나타난다. 그야말로 무병, 무사, 무탈한 것만으로도 아주 감사해야 할 세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자마저 그 정도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으로 그치면 그 신앙이 너무 가난한 것 아닌가? 또 그런 은혜에도 보답 못할 정도로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고서 매주 회개한다면 아예 거지같은(?) 신앙 아닌가? 나아가 신자야 아직 죄의 본성이 살아서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 포기 한다 쳐도 정작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너무 약소해지지 않는가 말이다.
사람이 삶을 영위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현재 생명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은가? 생명을 갖고 정상적 활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은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육신은 20대 후반부터 노화가 진행된다. 무덤을 향해 한 걸음씩, 사실은 출생할 때부터,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경제적 사회적 신분과 위치를 비롯해 내면으로는 정신적 도덕적 성장이 이뤄진다. 나이가 들수록 육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전보다 나아지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성장하지 않는다면 살아도 죽은 것과 방불하다. 삶을 살 의미와 가치조차 아예 없다.
일반인의 경우도 그러할진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분의 은총과 권능 안에 있기에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신자들이 주일마다 지난 한 주간에 별 탈이 없는 것만으로 감사해선 되겠는가? 생명이 정체 내지 퇴보하고 있음에도 감사하는 꼴이다. 유치원생이 계속 유치원생으로 남아 있는 것을 두고 진정으로 감사한다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유치원 다음에 초등학교 중학교 등 줄줄이 있는 것을 모르는 바보거나, 알고도 유치원에서 노는 것이 더 좋다는 두 가지 이유뿐이다.
천사는 부리는 영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後嗣)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1:13,14)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주되심을 천사에 비교해서 논증하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천사를 숭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천사 중에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의 보좌 우편에 앉으라고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지금 너희가 숭배하는 천사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신분과 권세를 지닌 분이라는 뜻이다. 비록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천사가 어떤 존재인가 하면 구원 얻을 후사 즉, 신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낸 영이라는 것이다. 보좌 우편에 앉으신 성자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솔하여서 신자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를 섬기는 존재인 천사마저 숭배한다면 신자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은 더더욱 온전한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와 천사의 관계는 어떠하다고 했는가?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히1:6,7)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을 하러 다시 오실 때에 천사들마저 그 앞에 경배할 것이며 예수님이 천사들을 바람으로 삼아서 최후 심판을 하신다고 한다. 결국 천사의 위치와 역할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자 하나님의 통솔을 받아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신자마다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주일 대표 기도에 하나님께 무사무탈(無事無頉) 한 것을 최우선적으로 감사하면 그분을 기껏 수호천사로 간주하는 셈이다. 그럼 하나님은 신자를 섬기며 부림을 당하는 영이 되어버린다. 천사란 신자를 위해 보냄을 받은 피조물에 불과한데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런 위치로 전락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지금 성경은 하나님은 신자가 무사무탈 하도록 지키는 일을 천사에게 맡겼다고 말한 셈이다. 그럼 하나님 당신이 신자에게 하시는 역할과 바라는 소원은 훨씬 다른 데에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모든 신자는 천사의 섬김을 이미 다 받고 있으니까 무사무탈 해지는 것에는 관심 둘 필요 없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일에 매진하라는 뜻이다.
당장 도덕적 종교적 의무에 충실 하라는 뜻이 아니다. 먼저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분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천사들을 보내시고 부리는 분이 성자 예수님이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고난을 감당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지 않는가? 그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친 백성이자 자녀로 이미 삼아주셨지 않는가?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6,7)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그분의 것을 전부 물러 받을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고 한다.
히브리서도 그래서 ‘후사’(後嗣)라고 표현했다. 또 후사이기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면서 물러 받을 그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는 권세까지 주셨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엇인들 요구하지 못하며 아버지 또한 아들이 요구하는 것이 악하지 않는 한, 나아가 구하지 않는 것까지 아들에게 좋은 것이라면 다 주실 것 아닌가?
한마디로 무사무탈 해지는 것에 대해선 천사가 책임지니 구태여 빌 것도 없고 그 외에 영원하고도 거룩한 유업들을 위해 빌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사무탈 또한 당연히 보장된다는 것이다. 무사무탈 해질 것만 빌고 있으면 오히려 천사의 역할을 빼앗는 것이며 아직도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해 죽으신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셈이다.
예수님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지 않는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대신에 무사무탈 즉,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 혹은 먼저 염려하면 아직도 십자가 밖에 있는 이방인과 같다고도 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을 신자라면 주일마다 조금씩 나아진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매번 무사무탈 한 것만 두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면 사실은 이방인의 믿음을 기독교적 용어로 살짝 포장한 것밖에 더 되는가? 아주 잘 봐주어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말로 그분께 물려 받아서 생명을 유지하며 자라날 것이라곤 단지 그것뿐이라고 착각하고 있든지 말이다.
왜 성장하지 않는가?
왜 신자가 자신에게 자란 것이 전무해 보이는가? 이번 주에 특별히 어려운 일 없이 지난주와 같은 수준만 되어도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쪼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파트 월세 내기도 바쁘고 가끔 병이 들어 힘들고 가족과 주위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끊일 날이 없다. 정서적으로 상처도 많이 받고 신앙적으로 성숙된 면도 없다. 아무리 따져 봐도 현실적, 인간적, 정신적, 영적 모든 면에서 진보된 것이 없는 것 같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6,7)
대부분의 신자들이 정작 자신에게서 자라야 할 본질을 잘 모르고 있다. 신자의 성장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아는 빛을 신자의 마음에 보배로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얻는 은혜를 입었다. 그래서 예수 죽인 것을 신자들 몸에 짊어지고 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신자들 속에 와 계신다. 그분이 보배이며 신자는 질그릇일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자더러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게 한 까닭은 그분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10절) 신자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에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 예수로부터 새 생명을 부여 받았다. 그럼 신자가 아니라 신자 속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자라야 한다. 따라서 신자의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되 점차 많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신자가 자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 예수의 생명이 자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그릇 속에 감춰진 보배가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야 한다. 그 방법은 질그릇이 깨어지는 것뿐이다. 질그릇이 깨어지지 않고는 보배가 있다 해도 감추어져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질그릇이 많이 깨어지면 많이 깨어질수록 그 보배의 빛이 겉으로 더 많이 드러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보라.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망은 신자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신자 밖에서 역사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신자의 성장은 자신의 질그릇이 많이 깨어짐으로써 드러나는 예수의 빛의 양도 함께 늘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현실의 삶에선 신자가 자신은 죽더라도 주위 성도나 불신자 이웃이 살아나는 모습으로 비춰져야 한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현실적 인간적으로 성숙되는 것과 신자의 성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불신자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일이다. 또 도덕적으로 선해지고 기도와 말씀에 능해지는 것과도 직접적 연관은 없다. 물론 신자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자라면 당연히 선해지고 경건해진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선해지고 종교적으로 경건해졌다고 반드시 예수의 생명이 자란 표시는 아니다.
그렇다고 신자더러 무조건 먼저 수고하고 희생하여서 고난만 겪으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의 새 생명은 현실의 형편과는 상관이 없다. 먹고 마시는 것에 집착하던 불신자 시절과 달리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기에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이제 삶의 목표가 아니라 단지 새 목표를 실현하는 수많은 도구 중의 하나일 뿐이다.
예수의 빛을 비추는 법은 신자의 질그릇이 깨어지는 것 말고는 없다. 자칫 질그릇은 깨지 않고 예수의 빛부터 비추려고 덤비면 종교적 행위로 치장하는 무리수만 발동될 뿐이다. 반드시 깨어져야 할 것들이 반드시 깨어지는 것이 신자의 성장이다.
신자의 속에는 십자가 진리를 세상 속에 확연히 드러나지 못하도록 자꾸 막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마디로 자기가 보배가 되려는 욕심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자신을 보배로 만들어 주는 심부름꾼으로 부려먹으려는 심보다. 자신을 보배로 삼는 까닭도 세상 속에 예수의 빛 대신 자기를 들어내려는 것이다. 결국 세상 것들로 자기를 치장해 달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자신의 완전한 주인으로 삼고 있지 않다.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자존심과 교만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아직도 자기가 얼마나 연약 무능 무지하며 더럽고 추한지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준다고 하니까 그저 그렇게 믿고 있는 것뿐이다. 자기 속에 반드시 깨어져야 할 질그릇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있다. 아니 자기 속에 예수의 빛이 있다는 것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다른 말로 세상에서 밝게 빛나는 쾌락과 죄악을 여전히 추구하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먹고 마시는 것들이 자신의 안전, 만족, 행복, 평안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나님은 그 일을 도와주는 도우미 즉, 자기가 부리는 영일뿐이다. 한 마디로 자기가 질그릇인 줄 모르는 것을 넘어서 아예 보배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꾸 재물, 권세, 명예, 지성, 건강, 미모 등으로 그 보배에 덧붙여 더 화력하게 치장하려 든다. 사실은 곳곳에 구멍이 나고 찌그러진 질그릇에다 진흙도 아닌 금과 은을 붙여서 버티겠다는 뜻이다. 한 번 상상을 해보라. 곧 부스러질 토기에 금은보화를 누덕누덕 붙인 모습을 말이다. 바로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딛고 있는 이상한 모습의 신자다.
천사를 부리지 못하는 부끄러운 신자
작금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천사를 전혀 부릴 줄 모른다. 초자연적 은사를 받지 못해 신령한 능력을 구사할 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그 의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주신다고 예수님이 약속했지 않는가? 먹고 마시는 것이 채워져 무사무탈 해지면 즉, 천사가 수호신 역할을 잘하게 된 것 아닌가? 또 그러려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기만 하면 되지 않는가 말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우리가 질그릇인 줄 몰랐다. 그저 보배인 줄 알고 더 풍성하고 화려하게만 꾸미려 했다. 우리 속에 빛이 들어오지 못해서 어두운 가운데 있다 보니 질그릇도 보배로 보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빛이 비추이지 못하도록 사단이 그 심령에 자리 잡고는 사방을 가렸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봉사요 시체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모든 막혔던 것이 뚫렸다. 십자가 안에서 새롭게 바뀐 신분과 권세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았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아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 사람, 죄악, 사단, 죽음 앞에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
기독교는 항상 역설적인 종교다. 흔히 우리가 성장이라고 믿고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후퇴와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성장하려면 성장 자체를 목표로 해선 안 된다. 신자는 죽고. 예수가 드러나는 것이 참 성장이다. 얼마나 자기가 질그릇인지부터 깨달아야 한다.
단순히 인간은 연약하고 무능하고 불완전해서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이라고 깨닫는 것으로 많이 부족하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려면 쳇바퀴를 깨트리는 길 밖에 없다. 신자에게 쳇바퀴는 바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질그릇이다.
아직도 자기를 높이려는 욕심이 앞서서 예수님보다 사단에 넘어가기 쉬운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 자아가 반드시 깨트려야만 할 질그릇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심지어 그것으로 그쳐서도 안 된다. 깨어진 자기 속에다 예수님의 빛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너무나 풍성하심, 광대하심, 거룩하심, 신령하심, 완전하심, 선하심, 의로우심, 아름다우심, 진실하심 등에만 모든 관심을 쏟고 그것들이 자신의 삶의 세밀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열매가 열리도록 절실하게 구해야 한다. 하늘의 보배를 땅에 옮겨 심어야 한다. 그래서 정말 질그릇은 완전히 다 깨어지고 오직 예수의 향기와 빛만 드러나는 영광스런 자신의 모습을 소망해야 한다.
알기 쉽게 말해 어떤 신자라도 예수님의 공생애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그분 가신 길을 따라가겠다는 뜻이지 않는가? 교회 안에 예수님의 참 제자가 늘어나야 한다. 주일 대표 기도도 그런 제자들이 하늘에서 사단이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승리의 보고가 있어야 한다. 모든 회중들도 그 놀라운 은혜와 권능에 대해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
구멍 나고 찌그러진 질그릇에 어떻게든 테이프라도 붙여서 끝까지 버텨보려는 신자의 인생은 설령 예수님의 보배가 그 속에 있다 해도 너무나 가난한 신앙이지 않는가? 나중에 그 쌓은 모든 공력이 불에 타고 나면 너무나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겠는가? 아니 불에 타기도 전에 현실에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그 테이프가 너덜너덜 떨어져 달아날 것이다. 또 나중에 불에 타면 누구에게 부끄러워지겠는가? 바로 자기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아니겠는가?
5/1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