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하루밖에 더 살지 못한다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기적 같은 출산
이전에 담임하던 교회 교인으로 멀리 보스턴에 살고 있는 자매로부터 둘째 딸을 순산했다는 전화가 왔다. “자매님 할렐루야! 기적입니다.”라고 축하했더니 “진짜로 하나님이 주신 딸”이라며 대답했다. 목사와 성도 간에 괜스레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나눈 것이 아니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녀가 예수를 믿기 전에 낳은 첫딸은 결혼하면 당연히 생기는 아이라 생각해 낳고 길렀다. 그러나 믿음을 갖고 나선 정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이를 낳고 기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40대 중반의 나이에다 첫 딸과는 15년 터울이었다. 거기다 이 아이를 갖기 전에 두 번이나 유산 경험이 있었다. 정말 처음부터 간절히 기도하여 잉태했고 임신 중에도 전교인이 계속해서 기도해 주었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신 아이였음을 실감했던 것이며 기적이라는 축하도 단순히 공치사가 아니었다.
전화 너머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그녀의 기쁨에 넘친 목소리를 들을 때에 처음 그녀와 만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박사과정 유학생인 남편을 따라온 그녀가 친구의 권유로 유학생 중심의 저희 교회에 생전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믿음을 심어주려 성경공부를 함께 했는데 하나님은 인정해도 예수님에 대해선 계속해서 믿기지 않는다고 실토했다.
어느 날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는 말씀을 보게 되었다. 남편이 잘못해도 무조건 순종해야 되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볼멘 목소리로 “접수할 수 없어요.”라고 반박해 웃느라 혼났다.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보다 동의 할 수 없다는 북한 말인 “접수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생경(生硬)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녀가 보스턴으로 이주한 후 얼마 안 되어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전에 성경 공부할 때 들었던 내용이 이젠 완전히 이해되고 또 믿음을 갖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며 감사의 말도 함께 전해 왔다. 도저히 믿음이 생길 것 같지 않았던 그녀도 하나님은 성령으로 간섭하셔서 한 순간에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게 하셨던 것이다.
목자가 할 일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만 전하면 된다.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 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4:5-7) 그녀의 첫 목사였던 저는 단지 복음의 씨앗만 뿌렸고 지금 다니는 보스턴 교회의 목사님은 물을 주었으나 자라서 열매가 맺게 하신 이는 오직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처음 씨를 뿌렸던 인연을 못 잊었는지 그녀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연락을 주고 연말이면 꼭 감사 카드를 보내온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녀의 믿음이 쑥쑥 자라는 사연을 읽는 기쁨이 적지 않다. 어떤 경우에도 남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접수치 못했던 그녀가 이제는 연약한 믿음이지만 함께 교회에 출석하는 남편을 인내와 온유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둘째를 갖기 수년 전에 다른 볼 일이 있어 보스턴에 간 기회에 그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박사를 마친 남편이 유수한 미국회사에 취직해 교외에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주택도 마련했다. 집이 제법 큰 데도 정말 생필품 외에는 아무 장식이 없었고, 꽤 넓은 뜰에도 잔디 말고는 볼거리가 전혀 없었다. 형편이 안 되거나 돈을 아끼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땅의 것은 다 썩어 없어지고 천국에는 오직 빈 몸으로 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발 믿음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는데 이젠 목사보다 더 앞선 믿음의 여종이 되었다. 정작 하나님이 이루신 기적은 오히려 이쪽이었다. 15년 만의 둘째 딸 출산은 응당 열려야할 그녀의 믿음의 열매였다. 능치 못할 하나님께서 믿음이 온전히 선 당신의 자녀에게 그야말로 능히 베풀지 못할 은혜란 없지 않겠는가?
웨슬레의 엉뚱한 답변
요한 웨슬레에게 하루는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다. “하나님이 내일 밤 12시에 목숨을 거두어간다면 선생님은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겠는가? 마지막으로 맛있는 것을 실컷 먹겠는가? 평소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구경하러 가겠는가? 아니면 죽기 싫다고 발버둥 치면서 병원이나 깊숙한 동굴로 숨을 것인가?
시한부 생명을 살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할 것인가라는 유사한 질문을 갖고 실제로 조사했더니 가족에게 평소 못했던 사랑을 베풀겠다는 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아마 신자의 십중팔구도 가족과 함께 예배를 보는 등 마지막 석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혹은 교회에 가서 기도하며 순순히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웨슬레의 대답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대로 계속 할 것이다.” 이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땅 끝에서 복음의 열매 가득 안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겠다.”는 어떤 복음성가 가사와 같다고는 볼 수 없다. 전도, 선행, 구제, 예배 등 특정한 일을 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뜻도 당연히 아니다. 평소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던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계속하겠다는 뜻이었을 뿐이다.
신자의 삶이, 나아가 삶의 마지막은, 그래야 한다. 매일 매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꼭 특정한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지 않아도 된다. 단순히 예수 믿었으니 이제 구원 받았다고 안심하고 있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된 이후로는 이제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고 있던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어야 한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것이 되어도 괜찮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불쌍한 이웃을 도와주거나, 병든 성도를 찾아가 기도하며 위로해 주거나, 가족들과 진정한 사랑으로 섬기든지, 세상 사람과 교제를 나누든지 관계없다. 인생의 목표와 의미와 가치가 불신자 시절과는 완전히 바뀐 방식으로 살아만 가면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예수는 벌써 믿었기에 지금은 그분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좁고 협착한 길을 머리 둘 곳이 없더라도 그분의 손을 잡고, 사실은 그분이 우리 손을 잡고 있지만, 함께 걷고 있어야 한다.
사람들과는 완전히 등을 진채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가는 길이 아예 서로 달라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본인보다 오히려 예수님이 절대 허락지 않으신다. 종교적 의무로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과 열성이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구렁텅이로 다시 빠지는 것을 절대 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과 손을 잡고 가고 있는데 아무리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아니 지금 당장 죽음이 닥친다고 해도 무엇이 두려우며 이 땅에 더 이상 아쉬움이 남을 것 또한 무엇 있겠는가? 물론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갖는 인간적인 정과 의리마저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평소에도 진정 주님의 사랑으로 가족을 섬기고 있었다면 특별한 고별행사가 구태여 따로 필요 없지 않겠는가?
인생의 마지막 날이 닥치면, 개인적인 죽음이든 전체적인 종말이든, 반드시 어떤 특정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불신자에게나 해당되는 문제다. 잘못된 길을 택해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다는 후회가 생기는 경우도 간혹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 인식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이 땅에서 못했던 일을 마지막 순간에라도 해야 한다. 불신자로선 이 땅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많아 그 정을 떼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종말에 대한 신자의 태도
반면에 웨슬레의 경우에 비춰보면 신자의 마지막은 어떻게 다른가? 구태여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뜻이다. 가장 하고 싶었고 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항상 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자기가 평생을 바쳐서, 말하자면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을 이미 발견했고 또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자가 신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내일 당장 마지막이 와도 구태여 따로 할 일이 없으며 평소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 된다. 아무리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소명을 실천하는 삶을 능가하는 다른 어떤 소원, 목표, 가치, 의미, 보람, 기쁨이 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신자가 지금 당장 구체적 일을 실행하고 있지 않아도 된다. 그분이 이끄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라도 따르겠다고 온전히 헌신되어 있다면, 그래서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이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고 있다면 그분이 당신의 일에 신자를 동원하고 열매도 그분이 맺게 해주신다. 예컨대 전도, 구제 같은 열매가 없어도 가정에서부터 주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셔도 된다. 아니 그런 가정 자체가 벌써 너무나 훌륭한 주님의 일이자 복음의 열매다.
예의 자매도 마찬가지다. 천국을 소망하기에 소유를 가능한 갖지 않겠다고 했다. 종교적 계명을 의무로 지키려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현실적으로 풍요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천국이 더 좋았고 이 땅은 그에 비해 별다른 의미나 가치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중국 교포로 어려서부터 힘든 환경에서 자랐던 체험이 도가 넘치는 미국의 소비문화에 대해 애착 내지 동경보다는 오히려 미련을 버리는 데에 일조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적 분별력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다.
둘째 아기를 기적적으로 낳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합심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보상으로 주신 것이라고만 여기면 안 된다. 이미 말했듯이 그 이전에 그녀가 날마다 주님의 손을 놓지 않고 동행하며, 특별히 불신자 시절과는 정반대의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기에 그 열매로 나타난 것이다. 기적을 이루려고 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니까 자연히 기적 같은 은혜를 맛본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 가운데 이미 완전히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다시는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받아 누림에 있어서 신자 쪽에 부족한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격만으로 따지면 모든 인간의 모든 면이 결격사유에 해당된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이 그 어떤 결점과 허물도 얼마든지 능가할 수 있을 만큼 크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혈연관계로 이미 바뀌었기에 그분 쪽에서 그 관계를 폐기는커녕 절대로 수정가감도 안하신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해주듯이 모든 것을 베푸신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신자의 현실적 만사형통을 보장한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의 죽음과 맞바꾸어서 주신 새 생명인데 죽거나 자라지 않게 버려둘 리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를 따라 감에 생기는 어떤 방해라도 다 막아주신다는 것이다.
결국 신자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가? 천국을 향해 그분의 손을 붙들고 앞만 보고 따라 가느냐는 것이다. 구태여 뒤에 있는 일들에 미련을 가질 필요나 이유라곤 전혀 없다. 요한 웨슬레처럼 내일 당장 종말이 와도 지금껏 해왔던 그대로 그분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면 된다. 가족과의 마지막 상봉도, 어떤 호의호식도, 심지어 종교적 행사도 필요 없다. 새롭게 믿음을 가다듬어 경건하고도 신령하게 대비할 이유는 없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굳건한 신자라도 아직 연약한 육체 가운데 있다. 속에는 죄의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으며 밖에선 세상과 사람과 사탄이 쉴 새 없이 유혹하고 있다. 수시로 넘어지고 쓰러진다. 심지어 구체적인 소명을 실현하고 있는 주의 종들도 그 정도와 빈도에선 달라도 간혹 넘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라면 주님의 은혜와 권능 안에 여전히 또 영원토록 속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걸어가고 있는 방향은, 정확히 말하면 방향은 간혹 뒤로 바뀌어도 걷고 있는 길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전혀 다르다. 아무리 그 길 위에서 반대 방향으로 쓰러져 있어도 처음 예수 믿었을 때부터 그분과 함께 걷고 있는 바로 그 길이다. 신자가 뒤를 향해 엎드려져 있어도 예수님은 그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는다.
그럼 그렇게 넘어져 즉, 환난과 시험을 당하고 있는 신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믿음을 새롭게 키워서 스스로 이겨내는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과 그 뜻이 자기에게 미친 결과가 무엇인지 다시 상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나 같은 자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죽이셨다는 너무나 엄연한 진리를 재확인해야 한다.
신자가 짓는 가장 큰 죄
반면에 신자가 되고 난 후에 짓는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 술 담배를 아직도 못 끊고 있는 것인가? 불신자 시절의 나쁜 습성을 못 고치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세상사람 같은 죄를 수시로 짓는 것인가? 주일 성수를 지키지 않는 것인가? 전도, 선행, 구제, 기도, 봉사, 헌금, 성경공부 등에 등한히 하는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자신은 이미 주님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주님이 자신의 손을 잡고 하나님의 부르신 상급을 위해서 앞으로 끌고 가고 있는데도 전혀 감지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좁고 협착한 길에 이미 들어섰기에 다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천국의 소망이 가장 귀한 것을 모르고 이 땅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서있는 푯대가 너무나 영광스럽고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세상의 푯대들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의 신자로 부르심이 무엇인지 모르며 자신이 일생을 걸고 살 구체적 목표를 찾지 못한 것이다. 단순히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니까 믿은 것뿐이다. 그래서 만약 하루밖에 더 살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처리할 일이 아직 몇 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뒤를 자꾸 돌아보는 잘못이다. 앞으로 가기는 가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어떤 연유에서건 고개가 뒤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직도 온전한 천국 소망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종말이 임박했으니까 전도와 선행에 열심을 내겠다는 것도 그런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너무 게을렀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아주 잘 봐줘야 자신의 소명을 찾느라 분주했거나 말이다.
간혹 자기는 이미 다 얻었다고 착각하는 신자가 있는데 이 또한 하나님 앞에 아주 큰 잘못이다. 잘 믿었으니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이제부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내는 일 뿐이라는 것이다. 혹은 구원의 취소는 절대 없으니까 적당하고도 편안하게 신앙생활만 하고 살겠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자가, 아니 그런 자일수록, 정말 구원을 얻었는지는 본인조차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면 평생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것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꼭 해야 하는 일을 한 결 같이 하고 있다면 언제 죽음이 닥쳐도 아무 걱정이 없다. 재차 강조하지만 그 일이 결코 종교적 행위만은 아니다. 주님의 은혜와 권능 가운데 잠겨만 있으면 된다. 그분이 나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들어내고 있음을 확신하면 된다.
열매를 언제 어떻게 얼마나 맺느냐는 그분의 책임이지 신자가 괘념 할 바가 아니다. 신자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수시로 물을 주기만 하면 된다. 이제 막 복음 안에 살기로 시작하자마자 종말이 와도 된다. 단 하루라도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비어드리면 응당 작은 일에서부터 충성하게 된다.
요컨대 예수를 믿은 후의 삶의 요체는 오직 성실성과 일관성의 문제다. 효율성과 생산성은 전혀 따질 필요가 없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했고 많은 초대 교회를 세웠고 로마의 왕족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런 목표를 갖고 사역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 있으리라고 예상, 기대, 추측, 상상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지금까지 했던 일은 아예 잊고 앞만 바라보고 걸어간다고 했어도 임무, 책임, 실적, 성과를 염두에 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오직 앞에 있는 푯대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생전에 그는 그 푯대를 바라만 보았지 붙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 푯대는 바로 예수님이요 천국이었다. 위대한 사도라는 칭호가 절대 아니었다. 평생의 목표는 앞만 보고 주님만 따라간다는 것이었지, 초대교회 설립이나 성경저작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주님의 일에 열매가 문제 되지 않는 까닭은 어떤 적은 일을 하고 있더라도 너무나 큰 은혜와 권능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시 그러고 있으면 큰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기대부터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 그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이미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주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그 자체가 가장 큰 은혜이기 때문이다.
평소 꾸준히 주의 일을 하고 있는 신자는, 최소한 주의 은혜와 권능 안에 붙잡혀 있다는 확신으로 사는 신자는 언제 죽음이 닥쳐도 담담할 수 있다. 바꿔 말해 구태여 종말이 안 닥쳐도 그 전에 이미 세상의 어떤 핍박, 환난, 죄악, 흑암의 세력 앞에서도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다. 죽음 앞에 담담한데 다른 것이야 무슨 문제가 되랴. 바울이 바로 그랬지 않은가?
우리 모두 지금 자신을 향해 정말 진지하게 다시 질문해보자. “내일 밤에 하나님이 나를 데리고 가신다면 그 동안에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웨슬레 같은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단 하루라도 단 하나라도 주님을 위해 사는 것만큼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하고 고귀하고 영광스런 일은 없다. 거기다 가장 기쁘고, 즐겁고, 보람찬데다, 평강과 자유까지 함께 맛볼 수 있다.
재차 다짐하지만 종교적 행위를 독려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인간이 걸어가야 할 두 가지 길 중에 지금 내가 어느 쪽 길을 어떻게 가고 있는지만 제대로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가고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자연히 바울처럼 푯대가 보이고 앞만 보고 걷게 된다는 뜻이다.
6/2/2009
나무십자가교회 2003/5/9 금요찬양예배 설교를 보완정리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