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정과 신앙의 관계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법)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편 요단 언덕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편에 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수22:11,12)
감정과 이성은 신앙의 대적인가?
흔히 감정과 이성 둘 다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지만 구태여 더 위험한 것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감정이라는 데에 거의 의견 일치를 보입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성이 더 장애가 될 때도 많습니다. 이성과 감정 둘 다 장애가 된다면 결국 그 자체에는 아무 잘못이 없고 그것들을 잘못 적용하는 신자에게 탓을 돌려야 합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고급한 지성(이성), 감정, 의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당연히 아주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최초 인간 아담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것이 문제이자 죄였지 그 의지와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에게 허물이 돌아갈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지정의 모두가 쓰는 사람에 따라 신앙에 득과 실을 다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가 완료되자 원래 모세와 약속한 대로 르우벤, 갓 지파와 므낫세의 반 지파는 요단 동편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주하자마자 요단 언덕 가에 큰 단을 쌓았는데 나머지 지파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여호와를 배반했다고 보고 곧바로 전쟁준비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이 감정에 치우쳐 성급히 내린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고대에 큰 단을 쌓는다면 당연히 신을 섬기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마땅히 한 곳에만 단을 쌓아야 함에도 일부 지파가 자기 영지에 그렇게 한 것은 다른 신을 섬기려거나, 아무런 사전 합의도 거치지 않고 자기 땅에 단을 쌓고 관리하겠다는 두 가지 뜻 밖에 없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수조차 없기에 충분히 앞뒤 사정을 감안한 이성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또 이처럼 결론을 빨리 내린다고 무조건 쉽게 흥분하는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분별력, 판단력, 결단력이 뛰어나기에 더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신하니까 자기 체험, 지식, 철학에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세밀하게 끝까지 감안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감성이 풍부한 자들이 상대를 더 잘 챙겨줄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은 그렇게 내린 결론에 따라 격분해서 성급히 전쟁준비부터 한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껏 가나안 전쟁을 함께 고생하며 치른 동족인지라 혹시라도 자기들이 모르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결과 다행히 더 깊은 신앙적 사정이 있음을 알고 열두 지파가 이구동성으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31절)라고 고백하며 화해했습니다.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단 쌓기를 예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 번제와 우리 다른 제사와 우리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뿐으로서 너희 자손으로 후일에 우리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다 못하게 하려 함이로라.”(26,27절)
유다 땅에 사는 열 지파 후손들이 혹시라도 요단 동편에 살아서 잦은 왕래를 하지 못하는 자기들 후손더러 여호와의 분깃과 관계없다고 멀리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단 모형을 보라 이는 번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다른 제사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와 너희 사이에 증거만 되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제사를 드릴 수 없는 일종의 기념비 같은 단만 쌓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정미한지 살펴보십시오. “가나안 땅의 맨 앞편 요단 언덕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편에 단을 쌓았다 하는지라.”(11절) 요단 동편의 자기들 영지가 아니라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 쪽에 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단을 차지하고 관리할 뜻이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강 동편에 단을 쌓았다면 거리가 멀어서 당시 성지 역할을 한 실로까지 가기 귀찮아서 자기 땅에서 제사를 지내려는 의도를 지닌 것입니다.
또 요단 강 건너자마자 있는 언덕 가에 세웠습니다. 요단강도 보이고 멀리 장차 성전이 세워질 유다 땅도 굽어볼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요단강은 심심찮게 범람하는 곳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할 때도 홍해 같은 이적을 통해서만 도강할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범람을 자주 하는 강을 건너 단을 쌓았기에 자기들이 여호와를 기념하고 종족간의 우애를 쌓는 일에는 그런 강도 결코 장애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요단 도하의 기적을 회상하며 항상 실로의 성막을 바라보고자 하는 소망을 키울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열 지파 대표들이 그 귀한 뜻을 전해 듣고는 어쩌면 부끄러워 고개도 못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내린 성급한 판단이 상대 입장은 아예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이었는지 한탄했을 것입니다. 또 나름대로 올바른 판단이라 믿고 곧바로 전쟁준비를 한 잘못도 회개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자 종국에는 서로의 오해를 완전히 씻고 비온 뒤땅이 더 굳어진다는 속담대로 여호와 앞에 이전보다도 더 온전한 하나가 되었습니다.
결국 남은 열 지파들이 거기까지 이른 데는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어떤 때는 올바르게, 다른 때는 잘못된 방향으로 교차적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요단 동편의 지파가 여호와를 배반했다고 판단한 것은 주로 이성이, 전쟁을 준비한 것은 감정이, 조사단을 파견한 것은 이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실제 단을 눈으로 보고 분별한 것도 이성이었고, 마지막으로 하나가 되어 일치된 신앙고백을 하게 된 데는 이성과 감정이 함께 작용한 것입니다. 성급한 전쟁 결정을 내려서 민족상잔의 큰 죄를 범할 뻔했던 탓을 감정에만 돌릴 수 없습니다.
더 위험한 이성
어떤 면에선 논리적 결정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흥분되어 분별력이 없어지는 것은 순간적입니다. 초기의 격동기가 지나면 “아차 내가 이러다 실수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여지가 생깁니다.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선 매사가 금방 뒤죽박죽되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분별력이 없어도 감정에 치우치다간 큰일 나겠다 싶은 마음이 필연적으로 들게 됩니다.
알기 쉬운 예로 물건을 던지고 피차 폭력을 사용하며 부부싸움 했다고 칩시다. 아내의 얼굴에 멍이 들고 코피가 나면 더 분노가 치미는 경우도 드물게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 순간 멈칫하게 됩니다. 집어던진 텔레비전이 박살이 나면 금전적으로 큰 손해라고 느낍니다. 잘못된 결과가 금방 드러나니까 잠시 멈추고 진정할 여지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밤새도록 감정에 격앙되어 어쩔 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무지 분을 이기지 못해 잠을 못 이루며 골수가 마르는 것 같고 화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잠을 못 이루는 것, 가슴이 답답한 것, 아니 감정이 격앙된 것 그 자체가 벌써 이미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은 염려가 자연스레 듭니다.
그래서 성경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고 경고하고 있지 않습니까? 해가 지도록 분을 품는 것이 처음에 격앙되었던 감정이 아무 가감 없이 그 상태대로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가 자기에게 행했던 이런 저런 잘못과 감정에 거슬렸던 점들을 이성적으로 떠올려서 계속 곱씹기 때문에 분노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감정의 독단적 힘이 사람을 붙들어 얽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성과 의지도 동시에 작동된 것입니다.
특별히 밤새 골수가 마르도록 치를 떨게 되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상한 것 때문인데, 단순히 감정이 상한 것만으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이르게 된 지난 모든 상황을 이성을 동원해 스스로 열심히 분석한 결과입니다. 문제는 지정의가 작동이 올바르지 못하고 왜곡되었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연약하고 어리석은 죄인이기에 생기는 필연적 결과입니다.
감정의 왜곡은 그 결과가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반면에 이성이 잘못 작용되면 어떻습니까? 자기 스스로 똑똑하게 분별하여서 내린 결론이므로 아무리 잘못되었어도 고치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시일이 지나면 자신의 신념, 철학, 사상으로 변질됩니다. 심지어 자신의 분신처럼 굳어지기에 외부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선입관, 편견, 아집, 독단의 형태로 표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또한 성경이 아주 엄중하게 경고하는 잘못이지 않습니까?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畢竟)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이스라엘이 먼저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전쟁치를 준비부터 한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보기에 바른 것으로 판단해서 가다가 사망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 내린 결론이므로 절대 변경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잠19:3) 합니다.
이성이 왜곡되게 작용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컨대 자신의 난처한 위치나 입장을 벗어나려고 잘못된 판단을 내립니다. 중간회색분자로 보이기 싫어서 양쪽 다 싫지만 어느 한 쪽을 할 수 없이 택하거나, 왕따 취급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소수의 정당한 의견보다 다수의 오류에 가담하기 너무 쉽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우유부단하지 않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성급한 판단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요리저리 따져 보는 것은 분명 이성입니다.
어쨌든 재차 강조하지만 문제는 감정이나 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잘못 적용하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감정과 이성의 한 쪽에만 사로잡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시간과 여유가 아직 있어서 구태여 빨리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뒤에서 쫓기듯이 결론을 내리면 어김없이 재앙을 부르게 마련입니다. 가뜩이나 불완전하며 죄와 욕심에 찌든 인간이, 신자라도 여전히 죄의 본성은 생생하게 살아 있기에 예외가 아님,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 온전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본문의 경우도 구태여 전쟁을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대적이 쳐들어와 가만히 있으면 당장 죽을 경우라면 몰라도 동족간의 전쟁을 성마르게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분노는 일단 삭히고 봐야 합니다. 해질 때까지 지니고 곱씹어서 키우다 보면 반드시 사단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잘잘못을 이성적으로 분별하기 이전에 무조건 분노를 죽이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잘잘못을 분석해봐야 모든 인간이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기에 정말로 완벽하게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분별과 판단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만능이 아니다.
그럼 성급한 결론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도를 하긴 하되 흔히 이해하는 식의 기도와는 그 내용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지라고 묻기 일쑤이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이것도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응답을 하시긴 하되 우리가 바라는 식의 대답은 해주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선택방안이나 행동지침을 명료하게 알려주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기도만 줄곧 하고 있습니다. 또 모든 수단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법, 그분의 음성을 듣는 법에 관한 기술이나 정보를 수집하려 다닙니다.
성급한 결론을 피하려면 기도보다는 오히려 지정의를 사용하여 사안의 전후 사정부터 잘 조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고급한 지정의를 주신 뜻이 무엇인지 잘 헤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의지를 동원해 자칫 사단에 틈을 주려는 감정을 절제한 후에 모든 상황을 이성적으로 세밀하게 이해 분석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내린 논리적 결론이 사실 관계와 정확히 부합하는지 여부도 역으로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기도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자기 지정의에 따라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시행해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계명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쳐야 합니다. 정말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조금 잘못된 시각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단순히 따로 시간을 내어 무릎 꿇고 당면한 이런 저런 문제를 아뢰어서 빨리 해결해달라거나 아니면 구체적인 해결책을 달라는 것만 기도라고 이해하는 너무나 제한된 생각에서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런 식의 기도만 해선 쉬지 말고 기도할 수는 도무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극심한 환난 중에 있어도 24시간 염려에 묶여있을 수는 없습니다. 분노를 해질 때까지 품지 않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염려도 그렇게 하면 사단에게 틈을 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다윗은 말과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신자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말과 묵상도 기도라는 것입니다. 또 여호와가 반석이자 구속자라고 합니다. 구속자는 문제를 해결하고 환난에서 구원해주는 분입니다. 반석은 신자의 일상적인 삶의 근거이자 능력의 원천이 되는 분입니다. 평소의 말과 생각까지도 그분의 관점에서 행하는 자가 신자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또 다른 고백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하나님은 멀리서도 신자의 행동이나 말뿐 아니라 생각까지 다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런 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그분께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정말로 주님이 바로 자기 앞에 임재해 있다는 확신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하게 행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의 은총과 권능이 단 일초도 자신을 떠날 리가 없다는 온전한 확신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자신을 향한 거룩한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기에 그분의 영광이 자신을 통해 구현되기를 항상 갈망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문제 해결에만 국한시키면 하나님 그분도 문제 해결사로 제한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단지 급할 때 도움을 주는 도우미 내지 진통제 수준으로 전락됩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반석입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신자가 한 시도 올바르고 거룩하게 생존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진짜로 언제 어디서나 그분과 동행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면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는 언뜻 불합리해 보이는 성경의 권고도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말과 생각까지 통촉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방식으로 기도하지 않은 일들까지 그분은 다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우리 믿음의 솔직한 수준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뜨겁게 열심히 기도해도 구원 내지 응답해주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귀머거리인지 의심 내지 불신하는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멀리서 생각까지, 그 안에는 온갖 불신앙적인 추한 것도 포함되어 있을 텐데도, 감찰하시는 분더러 귀머거리인가 의심하면서도 단지 뜨겁게 기도했다는 이유로 믿음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아무리 해도 응답해주지 않아서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와 방식으로 응답해 주지 않는다는 억지일 뿐입니다.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해서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잠시 한적한 곳으로 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아침 큐티 시간 30분만으로는 모든 기도 제목들을 일일이 기도하지 못했으니까 일하면서도 나머지를 생각해내어 속으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고 따르는 자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도 그분의 거룩한 통치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는 절대로 없다는 너무나 놀라운 은혜를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매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분별하고 판단하고 결단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알아야 한다고 즉, 자꾸 A와 B의 대체 방안 중에 정답 하나만 알려고 덤비는 기도는 사실은 아주 게으르고 불신앙적인 기도일 수 있습니다. 우선 자신에게 이미 은사로 주신 지정의를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에서 게으른 것입니다. 성경을 항상 묵상하며 매사를 성경원리에 비추어 분별하는 실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은사를 발휘하고 청산유수처럼 기도해도 성경 말씀에 비추어 모든 사안을 판단하는 통찰력이 없으면 혼자서 종교 놀음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아무리 암송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의 삶에 실제로 적용해서, 말씀 그대로 행하기 이전에, 그 원리대로 해석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는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구체적인 행동지침들이 요즘 같은 복잡한 현대 생활에 갖다 붙이기는 턱도 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성경의 근본 원리를 알아서 활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신자가 그저 성경대로 행하려고만 덤비는 것도 자칫 오리무중의 혼돈에 빠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성숙이란 도덕적 종교적 실력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과 사람과 특별히 신자를 다스리는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실력입니다. 먼저 사물을 실상대로 정확히 분석하는 분별력, 그것을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원리에 접목시켜서 판단하는 통찰력, 또 그 원리를 실제로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방안을 찾아낼 수 있는 적응력, 그리고 어떤 예상되는 위험과 방해에도 믿음으로 실천에 옮기는 실행력을 늘려야 합니다.
또 매번 구체적 대책을 알아야겠다고 덤비는 기도가 불신앙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속내가 사실은 어느 쪽이 더 성공가능성이 높은지만 알아보려는 작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세상에서도 전혀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려는 속셈입니다. 어느 쪽이 하나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는지 알고 싶다고 해도 그 일이 현실적으로도 성공해야 그분의 영광도 늘어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은 그분이 하시는 일이라면 아무 가감 없이 그분이 드러내실 뿐입니다. 신자로 세상에선 실패하여 죽음까지 이르게 하더라도 그분의 영광이 더 드러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는 내용은 사실은 자신의 지정의가 당신의 뜻대로 올바르게 작동되기 위한 기도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드러난 그분의 원리에 대한 자신의 분별력과 통찰력과 적응력과 실행력을 더 갖추기 위한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인도를 반드시 구해야 할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하나님 쪽에선 오히려 인간에게 이미 주어놓으신 고급한 지정의를 스스로 사용하여 판단하고 실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그 분별과 판단과 적응과 실행을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현 상황과 문제에 대한 실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조사를 할 때에 덤벙대며 실수하지 않도록, 자신의 편견 선입관 아집 독단 등이 작용되지 않도록, 미처 신경이 쓰이지 않아 지나칠 수 있는 측면도 세밀히 볼 수 있도록, 상대의 입장도 먼저 혹은 동시에 온전히 감안할 수 있도록, 그래서 쌍방이 최소의 희생과 손해를 보도록, 나아가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낳되 하나님의 선하며 아름다운 뜻이 드러나는 방안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그 방안이 성경원리에 부합한지 따져보기 위해서 말씀보고 묵상하는 동시에 기도도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지정의를 잘 사용하게 해달라는 기도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지혜와 현실적 능력을 다 동원해서 사물을 분석 판단해야 합니다. 또 이런 내용의 기도를 간절히 한 후에는 자신의 지정의에 따른 판단대로 실행하면 됩니다.
성경적 이해에 바탕을 둔 분별이 잘 안 되어서 어떤 대책을 도출하기 힘들면 그런 부분을 붙들고 주위에 권면과 도움을 줄 분을 만나도록 또 자신에게 새로운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스스로 모색한 여러 대체 방안이 다 좋아 보일 수 있으면 어느 쪽이 좋을지 환경 가운데 인도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인도가 없다면 다시 인내할 여유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아무리 기다려도 명확한 징조가 없다면 어떤 방안이라도 시행할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마저 잘 안 생긴다면 자기가 가장 솔깃해지는 대로 실행하면 됩니다.
이렇게 기도해 나가다 보면 한 가지 문제를 두고 단지 해결만 해달라는 기도에 비해 얼마나 기도할 내용이 많으며 또 그 기도가 쉬지 말고 이어져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실제 상황에서 발생하는 요소들은 위에 언급한 것들보다 훨씬 복잡 다양해집니다. 그야말로 순간순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생깁니다. 정식 기도의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계속 그런 문제들을 묵상하면서 현실적이고도 성경적인 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기도는 자신의 부족한 이성과 감정에만 의지하여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을 방지하려고 한 칸 잠시 뒤로 물러서는 행위입니다. 지정의를 사용하는 것이 기도라고 해놓고 또 무슨 말인지 의아할 것 없습니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 지정의를 올바르게 사용하려는 것이 기도라는 뜻이니까 말입니다. 요컨대 기도로 정작 구해야 할 것은 직접적인 대책보다는 하나님의 원리를 제대로 아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분별력, 통찰력, 적응력, 실행력을 키우려고 쉬지 말고 성경 말씀을 붙들고 현실과 비교하며 묵상하는 것이 바로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쉬지 말고 기도하고 있어야만 깨어서 경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항상 깨어서 경성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지정의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생각을 자신의 지정의를 동원해서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그분의 생각과 일치시키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매사를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전에는 이성과 감정이 신앙에 대부분 왜곡되게만 작용되었지만, 언젠가는 오히려 더 높은 차원의 신앙으로 이끄는 첩경이 됨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는 것이 경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경성하여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11/6/2009
흔히 쉬지않고 기도하고 있음을 자신은 경성하고 있다라 여길 수 있고, 그저 기도라는 객관적 사고 속에서 행하는 것으로만 만족해 버리기 십상임을 깨닫습니다. 기도란 경성하기 위해, 즉 자신의 지정의가 하나님의 맘에 합당하도록, 덤벙이는 습성, 감정에 휩싸이기 쉬운 기질, 이성과 감정의 교류속에서 오판하기 쉬운 성격들을, 자~~알 들여다보고 한걸음씩 고쳐 주십사 온전히 매어 달리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함임을 자세히, 넘 자세히 알려주셔서 감~~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