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20:4)
주전 1세기에 활동한 마커스 테렌시우스(BC 116-27)는 다양한 주제로 6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해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로 꼽힙니다. 그런 그가 “신의 형상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들은 두려움은 제거하였지만 잘못을 첨가하였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뜻은 인간들이 세상만사에 대한 염려와 까닭 모를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온갖 신들을 만들었고 또 그 만든 형상들 앞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소기했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람들로 신이 이 세상의 사물들과 동일한 모습일 것이라고 연상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그런 것들에게 경배를 드리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있는 시점이 너무 절묘하지 않습니까? 산 아래에선 지금 당신의 백성들이 금붙이를 모아다가, 그것도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서 탈취하게 된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첫째 말씀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였고, 이어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과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산 밑에서 배교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장 적용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영원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분은 또한 당신의 말씀 속에 영원토록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는 테렌시우스가 지적한 바로 그대로 두려움을 제거하고 어딘가 의지할 대상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 모세가 잠시 사라진 사이에 그것도 하나님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는데도 이제 누가 우리를 이끌고 보호해줄지 당장 불안해진 것입니다. 어쩌면 모세보다 여러 이적을 일으켰던 그의 지팡이마저 사라진 것이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지팡이를 두고 올라갔더라면 금송아지는 안 만들고 대신에 지팡이에다 대고 경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있던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시내 산 밑입니다.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섰더니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여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 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19:16-19)
하나님의 너무나도 크신 위엄을 모든 백성이 보고 들어 두려움에 떨었던 장소입니다. 비록 모세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다 쳐도 산만 바라보면 그 두려움에 떨었던 추억이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금붙이를 모아 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서 제사 드리고 춤추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그들이 배역한 시기는 모세가 올라간 지 기껏 20-30일 후밖에 더 되었겠습니까? 채 한 달도 안 되어 그렇게도 신령했던 초자연적 체험마저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물론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인간이 구실만 있으면 그저 하나님을 배역하려는 성향을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적으로는 모세가 산으로 올라 간 후에 우뢰, 번개, 구름, 나팔 소리, 연기가 다 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그 산의 위용만 보아도 하나님이 떠올라 두려웠을 텐데?”라고 의아해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는 존재입니다.
물고기들이 낚시 바늘에 잡히는 이유가 기억력이 3초밖에 안 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끼에 걸려들 뻔 했던 경험을 한 번만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또 다시 낚시에 걸려든다는 것입니다.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은 단지 그 기억력을 유지하는 기간만 붕어보다 조금 더 길뿐입니다. 동물과 삶의 기준, 방향, 목표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호렙 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 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신4:15) 모세와 함께 모든 백성들이 두려워 떨 때에 사실은 그들이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과 연기 중에 강림했기에 그분의 실체를 본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보인 것은 구름, 번개, 연기, 불꽃이었고 들린 것은 나팔 소리와 우뢰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본 것은 자연 현상 중의 하나로 치부했고 들린 말씀은 곧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당신을 보여주기 보다는 말씀으로 들려주기를 원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원죄가 빚은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모순과 갈등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으면 그것도 항상 눈앞에 있지 않으면 그저 불안해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더 깊이 삼가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인간은 보여 달라고만 하고 하나님은 들려만 주겠다고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의미입니다.
좋게 해석하면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 항상 보였던 선악과를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게, 아니 정확하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를 싫어하고 가시적 결과로 드러나는 축복과 은혜만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아니했고 사단의 꾐에 홀딱 넘어가 눈에 보이는 열매는 기어이 따 먹었던 바로 그 죄가 모든 인간에게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이지 않습니까?
주후 4세기가 되도록 로마제국에는 참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최고의 경지에 다다랐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는 온갖 형상을 한 우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테렌시우스의 예에서 보듯이 사실은 인간이 정말 이성적으로만 잘 판단해도 신은 인간의 접근과 이해를 초월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인간도 눈으로 보이는 것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서입니다. 불안을 없애는 심리적 요인에서부터 시작해 온갖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는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이유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만든 그 신을 진정으로 위하는 뜻조차 하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에게 취해야 할 근본적인 태도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보이는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들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또 보여주지도 않는 이유는 인간더러 당신과 영과 영으로 인격적 교제를 하기 원하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당신의 말씀대로 따라 살기만 하면 그 말씀이 역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신 영광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만들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형상대로 혹은 이 땅의 어떤 형상으로든 만들거나 견주어서도 안 됩니다. 혹시라도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가시적 결과를 빨리 보고 싶습니까? 엄격히 말해 당신을 위해 당신 스스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우상을 깎아 만들고 있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우상은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말하십니다. 우상은 보입니다. 하나님은 일부러라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고 말씀만 하시는 하나님이 더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 감사함으로 순종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7/12/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