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1,12)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족을 구원할 자로 세우심을 받자마자 대뜸 “내가 누구입니까?”라고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너는 모세로 구원자로서 충분한 재능과 자질을 갖추었다”라고 해야 문답의 흐름이 제대로 맞습니다. 그런데 모세에 대해 누구라고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함께 할 것이며 또 출애굽 후에 이 산에서 당신을 섬길 것인데 그것이 너를 세운 증거가 된다고 하십니다. 모세가 동문(東門) 했는데 하나님은 서답(西答)한 셈입니다.
모세의 질문은 사실은 그 소명을 거절코자 갖다 댄 변명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선 살인범으로 도망자였습니다. 그 후 40 년간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이나 쳤던 인생의 실패자이며 입이 둔한 노인이었습니다. 자기의 현재 신세와 형편을 고려한다면 그런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데 그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왜 그런 무리한 말씀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객관적 상황에 비추어보면 그의 불평은 아주 타당한 것으로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아니라 어떤 믿음이 좋은 자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또 그런 염려를 하는 것 자체는 크게 잘못된 것 없습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정답은 이렇게 되어야 하고 또 그것이 실질적인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모세 너는 내가 이 일을 위해 나기 전부터 선택하여 예비했다. 갓 태어난 남자 아이가 다 죽어야 하는데도 너를 강에서 건졌고 바로의 궁정에서 왕자로 양육되게 했다. 바로와 애굽에 대해 너 만큼 잘 아는 자도 없다. 바로와 대결하여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내가 너를 준비시킨 것이다. 또 광야에서 너를 양치기로 낮추고 온갖 고난도 맛보게 했다. 출애굽한 후에 내 백성을 광야 길로 인도해 낼 때 너의 그 경험과 지식들이 뒷받침 될 것이다. 이 일에 너 만한 적임자가 없다. 너야 말로 이 일에 최고 적임자다. 너만큼 이스라엘 백성 중에 많이 배우고 똑똑한 자가 없지 않느냐? 단지 하나 흠은 나이가 좀 많다는 것이지만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솔하려면 그 정도 나이는 되어야 하지 않겠니?”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뜻은 일절 내색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모세가 교만해져 자신의 능력에 의지할 수 있을까 염려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군대와 애굽 체제를 너무나 잘 알기에 노예 신세에 불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해도 도저히 대적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대적할 상대방에 대해 무식하면 용감해지지만 아주 잘 알면 오히려 더 신중해지는 법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만 했습니다. 단순히 그를 바로의 군대에서 보호하고 어떤 일을 할지 인도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출애굽 구원의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 당신께서 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다 계획해 놓으셨고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심지어 모세 없이 혼자서라도 언제든지 구원해 내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사용한 것은 아무리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과 구름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구원했지만, 그 일들은 여전히 현실 세계에서 인간들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또 그런 기적들 외에는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이뤄집니다. 따라서 모세가 갖춘 재질과 능력과 경험들이 반드시 필요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런 자격을 갖추었기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계획해 놓으신 일에 가장 적합하도록 당신께서 그를 준비, 연단, 훈련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여러 번에 걸친 사양과 핑계는 하나님 쪽에서 보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이었겠습니까? 비유컨대 사관학교에 수석으로 졸업을 시켜서 이제 장교로 임관해 임지로 부임시키려는데 막상 당사자는 “내가 누구관대 장교가 되며 또 그 많은 부하들을 통솔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사양하고 거절한 셈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모든 것을 예비(여호와이레)하셔서 신자가 현재 처한 그 자리에까지 이르게(에벤에셀의 하나님) 했습니다. 당연히 현재와 장래에 일어날 새로운 사건들도 그 계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가 어떤 처지에 있던 자신의 죄로 인한 배역이 아닌 이상에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장래 계획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또 설령 신자가 자신의 전적 잘못으로 엉뚱한 자리에 처해 있다 해도 하나님은 결국 합력해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과 선으로 이끄십니다. 시간적 현실적으로 우회는 하지만 종착점은 변함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그 분의 신실하고도 온전한 섭리와 계획만 바라보며 겸비하고도 담대하게 현재의 일들을, 본인에게 형통 혹은 난관으로 여겨지든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처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지나온 삶이 실패였기에 현재와 앞으로 닥칠 일들을 이겨낼 자질과 능력이 없다고 지레 두려움과 염려부터 가집니다. 그럼 자신의 과거를 만드신 하나님이 실패했다는 말입니까? 또 앞으로도 그분이 실패로 이끌 분입니까?
모세는 자신의 과거가 실패였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도 실패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에게 대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대답이 이제까지는 너를 혼자 내버려 두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함께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네가 어떻게 강에서 건져져 바로의 공주에게서 양육되었는가 생각해보라. 네가 살인하고도 무사하게 도망칠 수 있었지 않는가? 또 이방 족속 가운데 네가 아무 불편 없이 지낸 것을 따져 보아라. 과연 내가 너를 떠나고 네가 누구인지를 내가 잊은 적이 있었겠는가?”
자신의 과거가 실패였다고 생각하는 신자는 미래에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에게 항상 자신의 현재의 능력과 자질을 올려 달라고 합니다. “내가 누구관대”라는 말은 내가 그 일에 현재 도저히 합당하지 않으니 나에게 제대로 능력과 자질을 주고난 후에 그 일을 시켜야 될 것 아닌가라는 뜻입니다. 그 일을 자기가 계획해 자기 힘으로 행하려는 것입니다.
너무나 어리석게도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의 현실 문제에 매달려서 빨리 그 문제를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역으로 말해 현실의 문제를 보면 가장 먼저 신자에게 떠오르는 갈등은 내가 누구관대 뿐입니다. 나는 이 일을 해결할 수가 없으니 그럴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바로 모세가 한 질문 “내가 누구관대”를 “하나님이 누구관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입니다. 현실을 하나님과 대체하여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자기에게 시키고 그 모든 상황을 마련해 놓은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과거가 전혀 실패가 아니었듯이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는 더더욱 그럴 것이라는 것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온갖 문제로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침묵하거나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모든 일을 사실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미리 다 계획해 놓으셔서 거기까지 신자를 이끌고 왔고 또 앞으로도 당신이 이끌고 갈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데도 신자는 자꾸 엉뚱한 말만 늘어놓거나 모세처럼 꽁무니만 빼려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평생을 두고 하나님에게 “내(신자)가 누구관대?”라는 우문(愚問)만 던집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반응도 “내(하나님)가 누구관대?”라는 현답(賢答)입니다. 모든 선한 것과 완전한 것은 오직 그분의 지혜 안에만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평생 동안 탐구해 가는 작업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 백가지 우문을 던지는 것보다 그분께 현답 하나를 듣는 것이 믿음이 좋아진 증거입니다. 그러면 신자 쪽에서 할 일이라고는 헌신, 인내, 충성, 순종, 감사, 경배뿐입니다.
오늘도 혹시 하나님과 동문서답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우문만 던지고는 아무 답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당신의 과거와 현재가 실패라고 착각하고 있는 한 평생을 동문서답만 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과거와 현재가 실패가 아니므로 미래도 절대로 실패가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하나님은 현답을 주십니다.
6/28/2006
근데, 한편으로는 하다못해 "내가 누구관대"라는 우문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해야겠지만 특히 지도자들께서는 더 자주 그 질문을 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아멘넷에서 교회개혁 관련 토의가 진행 중이던데
내노라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께서 내어 놓는 진단과 처방들을 보면서 왜그리 마음이 착찹하던지요.
진정으로 한국교회의 위기를 생각한다면
저는 가장 먼저 지도자들께 민11:10-15절까지의 모세의 절규 기도를 묵상해 보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조직이든 지도자의 중요성은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진대,
지도자가 제대로 현실 파악을 못하면 조직이 당하는 고통은 비례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깨달아
현재의 기독교 위기 타개에 지도자들의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 일을 위해,
목사님의 글들이 크게 쓰임 받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