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진짜 이유
창세기 강해 (21)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자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1-5)
죄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定意)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하면서 당신과 그 모든 권능과 은혜에서 동일하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강림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아주 충격적이고 주목해야 할 말씀을 하셨다.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할 것인데 죄란 바로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요16:9) 정의(定意)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선 창시자의 가르침대로 실행하라고 하고 그러지 않으면 죄라고 간주한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신 한 개인을 믿으라고 하고 그러지 않으면 죄라고 한다. 이는 기독교가 가장 기독교답고 타종교와 구별되는 사항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다.
또 그래서 비기독교인들의 극심한 반발을 산다. 아무런 선행과 공적은 물론 회개도 하지 않고 이천 년 전의 한 로마 사형수 인간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주다니 말도 안 된다고 한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알 수 없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어야만 예수를 믿는 것이 가능하다. 불신자들에게 그런 역사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초등학생이 삼차방정식은 말도 안 된다고 불평하는 셈인데 그런 초등학생을 꾸짖는 자가 도리어 잘못이다.
문제는 항상 지적해 왔듯이 교인이다. 교회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워낙 강조하기에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원리는 비교적 잘 알고 있고 전도할 때도 강조한다. 반면에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왜 죄이며 심판을 초래하는 첫째 아니 유일한 근거인지에 관해선 잘 알지 못한다. 불신자들의 반발에 대해 제대로 변증하지 못한다.
교회는 교인들로 구원을 얻게 하는데 즉, 교회의 외적성장에만 급급하여 구원의 방식은 잘 습득시킨다. 그러나 심판의 원리에 무지하면 반쪽 신앙에 불과해진다. 반쪽 신앙인지라 나중에 신앙생활 하는데 큰 부작용이 파생되는데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비유를 하자면 병이 들렸지만 의사에게 약만 받고 병의 원인과 증상과 삶에서 대응책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것과 같다. 그럼 약만 떨어지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진다.
마찬가지로 아무 공적과 선행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배운다. 자기가 어떤 상태에서 구원 받았는지, 또 그 후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니까 믿음의 효력이 떨어지는 상황이 닥치면 곧바로 당황해한다. 사소한 현실 고난만 닥쳐도 믿음이 떨어지고 하나님께 불평 의심한다. 구원의 확신마저 흔들린다. 그래서 믿음을 다시 강하게 세워보는데 여전히 눈앞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니 믿음이 강해졌는데도 왜 이러지 싶어 더 불안해진다. 억지로 믿습니다만 큰소리로 외친다. 기독교 신앙이 의지력과 담력 쌓기 시합과 동의어가 되어버린다.
성경의 사대 거대담론(Mega Narrative)
창세기 1,2장을 20번에 걸쳐서 살펴봤다. 충분히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성경은 4대 거대담론(巨大談論)을 진술하는 책이다. 거대담론이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절대적이고 궁극적 진리를 뜻한다.
성경이 말하는 4대 담론의 첫째는 인간의 기원을 밝히는 ‘창조’이다. 둘째는 인간의 현재 상태를 설명하는 ‘타락’이다. 셋째는 타락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계시한 십자가 ‘구원’이다. 마지막 넷째는 하나님이 성도와 이 세상의 역사를 어떻게 마감시킬지 예언한 ‘완성’이다.
겨우 20번의 설교로 사대 거대담론 중의 하나이자 첫째 시발인 창조를 어떻게 다 다룰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교만이다. 창조의 핵심 원리만 겨우 살려봤을 뿐이다. 그럼에도 창조에는 세상 특별히 인간을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내포되어 있고, 하나님은 또 그것을 기반으로 인류 역사를 진행시키신다.
그렇다면 창조 이후의 사태를 잘 살피어 그분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나가면 그분의 무궁무진하고 오묘하고 거룩한 창조경륜을 거슬러 추적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왜 죄이며 심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지를 사실상 창세기 1,2장의 창조 기사 안에 이미 밝혀 놓았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오늘의 본문에서부터 인간은 타락했다. 그럼 2장까진 타락 이전의 죄가 없는 상태의 인간을 말한다. 그럼 그 무죄함과 타락 후를 비교하면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도출할 수 있다. 창세기 3장에 와서 1,2장과 달라진 점이 무엇인가? 오직 하나다. 최초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다. 결국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라는 뜻이 된다.
불신자들로선 몸에 좋은 과일 하나 먹은 것으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심판으로 내몬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선악과 금령의 의미가 무엇인가? 다른 모든 과실은 먹을 수 있되 그것만 금했다. 인간에게 이 땅에서 임의로 무슨 일을 하던 다 허락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것은 이 땅의 운영권이었을 뿐 소유권은 아니었다. 이 땅과 인간의 궁극적 주인이자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따로 계심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그 사실을 거역하면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것은 몇 번 강조한대로 불순종한 행위의 측면만 보면 죄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사실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운 것이다.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사실까지 부인하지 않았어도 더 이상 그분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기가 자신을 높이 올려 자신과 이 땅의 주인으로 삼은 것이다.
죄의 본질
죄의 본질은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스스로 빠져나간 것이다. 한 개인의 추악한 개별적 행위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한 개인 전체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자기는 창조주 하나님 없이 물질에서 우연히 생성되어 아무런 목적과 계획도 없이 이 땅에 버려진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백성 되는 위치와 신분을 스스로 기꺼이 고의적으로 끝까지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과 물질 수준으로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죄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며, 그전에 하나님 대신에 자기를 높인 것이며, 또 그 이전에 하나님을 부인한 것이라고는 지금껏 잘 배워왔다. 거기에 반드시 정확히 깨달아서 보태져야할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죄란 자신의 전부를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 밖에 위치시키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한 인간 인격체 전부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바꿔 말해 죄란 어떤 사람의 사회성, 도덕성, 종교성의 우열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뜻이다. 치사, 비겁, 위선, 음란, 포악한 행동과 말과 생각은 죄의 본질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죄란 자신이란 존재가 지금 어느 영역에 속했느냐의 문제다. 하나님이 없다, 있어도 못 믿겠다, 나와 전혀 무관하다, 내 인생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등등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죄다. 또 그런 가치관에 따라 이뤄지는 모든 행위가 죄악 된 행동이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죄의 본질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는 굉장히 심각한 의미다. 하나님 밖에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은 사탄에 속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사탄의 통치 영역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불신자들로선 이런 영적 원리를 알고서도 혹은 사탄이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아니 하나님이 선포한 것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죄 가운에 행하는 불신자의 상태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고 하므로 언뜻 추악한 행위를 죄라고 정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2절에선 분명히 사탄의 영이 조종 농간 했기에 그렇게 행한다고 한다. 죄 중에 행한 것이 바로 사탄을 따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 결국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이 죄가 된다.
따라서 3절 끝에 불신자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선포하고 있다. 영어 성경에 “by nature”라고 번역되어 있듯이 원어의 뜻은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이다. 한글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도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라고 번역했다. 즉 후천적인 교육, 도덕, 종교를 비롯한 환경 탓으로 잘못된 행동을 한 것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의미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듯이 최초의 인간 부부는 사탄에게 넘어가 그 영이 타락했고 그 후손 모두가 타락한 영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 인성이 포학하고 음란하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하나님 밖에 위치시키고 자기를 최고로 올리며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려는 끝까지 변하지 않는 완악하고 견고한 태생적 고집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없고 인간만의 세상이라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서 나눠먹은 것만큼 선한 행위는 없다. 절대 죄가 될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절대적 진리라면 그분이 구원자이자 심판주가 됨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또 그런 하나님의 입장에서 당신을 완전히 거역하고 무시하는 것만큼 큰 죄는 없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그럼에도 하나님께 끝까지 경배, 감사하지 않고 관심조차 두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 밖에 있겠다고 고집하고 그것이 더 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재하는 한에는 그분과 아무 관계없이 죽게 되면 죽어서도 그 상태가 유지되어서 사탄과 함께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게 될 수밖에 없다.
쉽고도 가벼운 구원의 길
불신자들에겐 구원의 소망도 없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그들의 생각이 어떠하든 구원주요 심판주인 하나님이 실재함은 엄연한 사실이다. 성경은 그래서 어떤 사전 설명이나 전제 없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와 인간을 창조했다고 선언한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 인간이 가장 먼저 반드시 첫째로 알고 붙들어야 할 거대담론이다.
하나님은 인간더러 억지로 강제로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 하지 않는다. 당신을 부인하며 당신 밖으로 뛰쳐나가도 절대 말리지 않는다. 성경의 사대담론은 쉽게 말해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즉 인간의 출발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말하고 있다.
불신자들은 창조부터 믿지 않는다. 이 땅에서의 자신의 출발부터 바로 세우지 않았다. 현재 그들은 과거의 타락 아래에서만 살고 있다. 또 그 상태에서 평생토록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해도 갈급하고 허망할 뿐이다. 바로 그런 상태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답게 겸비하게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기를 소원하는 자는 그분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신자는 바로 그런 사랑을 받는 자가 된 것이다. 그분의 구원을 얻는데 도덕적 의로움과 종교적 경건함이 전혀 필요 없다. 너무나 단순하고 쉽고도 명확한 생명의 길이 활짝 열려 있다. 내 자신이 절대로 물질이나 짐승 수준으로 비하될 존재가 아님과 그래서 이 땅에 아무 목적과 뜻 없이 버려진 존재가 아님을 깨달으면 된다. 대신에 하나님의 완전하신 진선미에 따라 그분이 만드신 걸작품임을 알면 된다. 그분의 사랑의 품 안으로 자신의 위치를 되돌려 놓아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럼 이런 죄의 본질과 구원의 원리를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에 대입하면 어떻게 되는가?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선악과 금령을 제정한 창조주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1:1대로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직접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다. 그래서 당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며, 당신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만큼 하나님께 불경하고도 미친 소리는 없다.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여겼다. 주님도 사람들이 당신과 그런 선포에 대해 사람들이 의심하고 곤혹해하며 비방할 것도 미리 아셨다. 실제로 그렇게 따지는 경우를 많이 겪었다.
그래서 당신의 말씀을 믿지 못하겠거든 당신께서 하신 일을 보고 판단해보라고 도전했다.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죽은 자가 살아났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그분이 하나님임을 부인하려야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당시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이적을 일으킨다고 비방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도 그 모든 이적을 제자들의 지어낸 이야기라고 코웃음을 친다. 그들이 모르는 사실, 미처 간과해버린 사실이 하나 있다. 예수님 당신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선포가 세계 사대 종교를 창시한 한 위대한 인간의 입장에서 한 말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불신자들은 예수가 인간이라고 믿으니 그 말이 너무 불합리한 것이다. 하나님부터 안 믿어지니 예수도 못 믿는 것이며, 결국 예수를 못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주님이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정의한 뜻은 모든 세대 모든 인간들 앞에 계속해서 사탄의 종으로 머물러 있을 것인지, 그 자리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올 것인지 인생에서 첫째로 결정할 과제로 던져 준 셈이다.
완전한 용서를 받은 죄인
불신자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은 자기 존재 자체를 하나님 나라 밖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럼 구원은 당연히 그 사람 실체 전부를 당신의 나라 안으로 옮겨준 것이다. 이 일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왜 그런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그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차원 더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제 2의 아담으로 100%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 타락 이후의 모든 인간을 대표한다. 그분이 당신 인격체 전부를 죄인의 자리에까지 비하시켰다. 당신의 인격 전부를 우리의 인격 전부와 맞바꾸었다. 당신께서 죽으심으로 죄에서 죽은, 본질상 진노였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 이 진리를 깨달아 확신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자,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뜻이 된다.
우리에게 죄의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용서 받은 죄인이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해주신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로 제2의 창조를 일으켜주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기에 반드시 새로운 존재로 다시 창조되어야만 한다. 그 거듭남으로 예수의 보혈의 공로에만 의존하는 본질상 은혜의 자녀로 바뀐 것이다. 불신자는 단지 아직 그런 용서를 받지 못한 죄인일 뿐이다.
이는 너무나 중요한 진리이자, 엄청난 은혜이며, 놀라운 특권이자 신비다. 한 인간이 자기 전부 생명까지 바치며 붙들어야 할 진리이다. 인간이라면 그 안에서만 살고 있어야할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하고 완전한 근거다. 아니 실제로 나의 전부와 바꾸어 예수의 참 생명을 얻게 되었지 않는가? 그리고 그분의 생명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들을 점수를 매겨서 당신의 좋고 싫음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그런 점수에 따라 인간의 대우를 달리하겠다는 뜻은 추호도 없다. 그냥 우리가 “하나님 당신께 돌아가길 소원합니다. 당신 밖에 있었던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라는 한 마디 진심어린 고백만 하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시고 당신의 모든 좋은 것으로 베풀어주신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보라. 둘째 아들이 잘한 짓은 단 하나도 없다. 아버지 입장에선 베풀 것 다 베풀었기에 의절을 선언해도 아무 반발을 하지 못한다. 그 아들 스스로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집의 종으로만 받아주어도 감사하다고 각오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항상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먼발치에서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너무나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었다. 남아 있던 큰 아들이 시기하고 화를 낼 정도로 좋아했지 않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 조건 없이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물론 믿은 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부자관계는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자녀가 잘못한다고 의절하자고 덤비는 인간 부모는 없다. 오히려 그런 자녀가 더 애처롭고 정이 많이 간다. 한두 잘못으로 의절하겠다면 부모로서 자격조차 없다. 하물며 독생자 하나님과 맞바꾸어 그분과 같은 자녀의 위치로 우리를 받아준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다.
작금 구원이 내 전부가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확신 아니 인식조차 없으니 조금만 잘못하면 벌 받는가, 또 고난이 닥치면 종교적 열성이 모자랐는지 곤혹스러워 한다. 하나님을 의심 불평하고 구원의 확신마저 흔들린다. 심지어 믿은 후에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완전한 자녀로 받아주었는데 어찌 다시 내칠 수 있다는 말인가? 행위 구원의 반대가 은혜 구원만이 아니다. 내 존재 전부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또 다른 반대어가 되어야 한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광대하고 오묘하고 풍성하며 아름답고 완벽한 사랑의 바다 안에 자기 전부를 잠기게 해서 그분의 사랑으로만 살아가는 실력이다. 현실적인 쓰러짐, 넘어짐, 고난의 경우도 당연히 그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다. 믿음이 좋다는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는 그분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사실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어떤 것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해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수 믿은 신자의 새롭게 바뀐 신분이자 특권인 것이다.
8/16/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