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탐욕을 하나님도 용납하신다.
창세기 강해 (24)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6,7)
죄의 본질에 대한 상반된 견해
기독교는 예수 십자가 구원의 유일성, 절대성, 완전성, 영원성을 타종교와는 전혀 다른 존립의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최근에는 이 뿌리가 많이 흔들리고 심지어 뽑혀나간 교회들마저 등장했다.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는 성경이 선포하는 진리다.
십자가 구원이 타종교와 전혀 다른 이유는 죄의 본질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성경이 설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최초 인간의 타락사건을 통해 죄의 본질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계명을 살짝 비틀어 부정의문문으로 만들어 이브에게 질문했다. 그 계명의 진리성과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본심에 대해 의심을 불러일으킬 목적이었다.
사탄의 그 목적은 달성되었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고 또 인간이 당신처럼 되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이 먹지 못하게 했다는 생각이 이브에게 들었다. 이처럼 성경은 죄의 본질을 인간의 특정한 잘못된 행동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왜곡, 파괴, 분리된 관계라고 정의(定意)하고 있다.
이 정의가 타당하기 위해선 크게 보아 네 가지 절대적 진리가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으며, 셋째는 당신의 피조물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며,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당신을 대신해서 다스릴 직분을 맡겼다는 것이다. 바로 창세기 1,2장이 진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죄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이 전제들이 왜 필요한가? 역순으로 살펴보자. 넷째 인간의 위치가 하나님의 청지기가 아니라면 계명을 주실 필요가 없다. 인간은 단지 동물적 존재이므로 죄를 따질 이유도 없다. 동물의 왕국에는 규율만 있지 도덕은 없다. 셋째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기 기분대로 다스리는 폭군이다. 그런 분과 관계가 틀어진들 죄로 가책 받을 것은 없다. 경배는커녕 존경할 가치조차 없다.
둘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여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땅에 단순히 운행법칙만 부과해 손을 놓고 있거나 인간은 물질에서 우연히 생성된 존재다. 이 땅에서 물질적 삶의 풍요만이 최고의 목적이 된다. 인간 사회도 보존 유지만 하면 되는데 진화론이 득세하고 있는 현재의 실상이다. 첫째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이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 성경은 동화이며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는 시간과 돈만 낭비하는 셈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당연한 이치를 다시 정리한 이유가 있다. 타 종교에선 죄를 추하고 악한 잘못된 행동으로 보지만 기독교는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분리된 죄의 결과적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그럼 죄를 해결하는 방안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타 종교는 잘못된 행동을 죄라고 보면서 그 원인을 인간의 육신적 정욕이라고 가르친다. 죄에서 해방되려면 탐욕을 죽이는 것이 최선의 방도가 된다. 예컨대 과부가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밤새 바늘로 자기 허벅지를 찌르는 것이다. 또 인생의 108 번뇌를 다스리려고 스님은 세상을 등지고 벽만 보고 평생을 수양하는 까닭이다.
선악과는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까?
그 반대인 기독교의 죄의 본질과 그에 따른 구원 방안을 본문의 이브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자. 사탄의 꾐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은 너무나 지당했기에 그대로 순전히 지켰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보였으나 따먹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다 하나님에게 숨겨진 딴 마음이 있다고 오해하고 특별히 인간으로써 자기 자존심에 상처를 입자 그 즉시 계명을 꼭 지킬 이유가 없다고 보고 휴지통에 던져 넣어버렸다.
그 후 과일을 본즉(6절) 즉, 주목해서 요리조리 살폈더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지금 선악과의 객관적인 색깔이나 모양이 바뀐 것은 하나 없다. 이브의 하나님에 대한 감정과 태도가 변화되니까 과일에 대한 주관적 평가만 달라진 것이다.
성경에 명시적 묘사는 없지만 선악과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원리에 비추면 개연성 있는 추측이 가능하다. 가장 평범한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색깔이 화려해 눈에 잘 띄고 모양이 아름답고 풍성했다면 사탄의 유혹이 없어도 따먹고 싶지 않겠는가? 그럼 그 자체로 하나님도 유혹을 조장했다는 일말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색깔은 중간무채색으로 모양은 울퉁불퉁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이사야 선지자도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에 대해서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라고 묘사했지 않는가?
인간 사회 특별히 신자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도 동일하다. 화려하고 풍성하지 않다. 흔히 대박이라고 말할 정도의 이적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없다. 대신에 이스라엘이 불순종한 형벌로 광야를 40년간 방황케 했어도 그 회막에 임재하여 함께 계셨다. 발이 부르트거나 옷이 헤지지 않게 모든 삶을 책임지셨다. 함께 행군하며 한시도 당신의 백성을 떠난 적이 없다. 선악과 또한 눈에 띄지 않는 가장 평범한 모습이지만 항상 동산 중앙에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 1초도 홀로 버려둔 적이 없다. 당신의 품 안에만 있으면 모든 것을 공급해주신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역사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비례해서 그분의 사랑의 질과 양도 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열성의 크기에 비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질과 양이 바뀌지 않는다. 복을 많이 받거나 벌을 적게 받는 것은 오직 반드시 순전한 마음으로 그분을 경배하느냐 즉,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성에 좌우된다. 하나님은 항상 신자의 일상적 삶에서 알게 모르게 역사하신다. 그러나 심지어 고난으로 힘들어도 그 또한 반드시 신자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이며 당신의 영광 또한 당신의 크기만큼 크게 내포되어 있다.
성경은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한다. 영어로는 ‘faithful’인데 직역하면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래야 하는데 왜 하나님에게 이 용어를 적용하는가?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만큼 신자를 믿는 것인가? 결과적으로 그런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정확한 의미는 처음과 끝이 한 치의 변함없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분에게 변개, 타협, 포기는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분의 자녀다. 그분의 신자를 향한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다. 증감이 전혀 없고 하나님 그분 크기만큼 그 사랑도 크다는 것이 선악과 금령의 뜻이다.
인간이 타락해가는 과정
선악과의 색깔과 모양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거부하자마자 이브에게 갑자기 먹음직해 보였다. 맛이 최고이고 영양만점일 것 같아 입에 군침이 돈 것이다 보암직해졌는데 다른 어떤 과일보다 최고로 아름답게 비춰진 것이다. 이것을 안 먹으면 다른 모든 것 다 먹어도 아무 의미가 없고, 역으로 이것만 먹으면 다른 전부는 안 먹어도 충분할 것 같아진 것이다. 이 과일을 먹고 남편은 물론 동산 모든 짐승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여겨졌다. 과일 안에 신성한 능력이 생기는 슈퍼 영양소가 듬뿍 들었을 것 같다. 지금보다 수 천 수 만 배의 지혜를 차지할 것 같다. 하나님과 경쟁할 아니 추월하는 궁극적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나님 없이도 혼자서 에덴동산을 정말로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꿔서 유토피아를 건설할 원대한 꿈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나님을 외면하자 이브의 마음속에 가장 먼저 생긴 것이 결국 무엇인가? 전혀 배고프지도 않았는데도 식욕이 생겼으니 그것은 탐욕이다. 남들 위에 자기를 높이고 치장하려 들었다. 최고로 똑똑한 지식을 갖고 싶어졌다.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버리고 인간이 홀로서기를 시작하려 한 것이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1:16에서 이 새로 생긴 세 가지 욕망이 세상 모든 것의 출처요 근거라고 설명했다. 먼저 먹음직한 식욕은 육신의 정욕이다. 둘째 보암직하게 겉으로 치장하려는 것을 안목의 정욕이라고 했다. 셋째 최고로 똑똑한 지혜자 혹은 초월자가 되겠다는 욕망을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다. 이 셋을 실감나게 간단히 바꾸면 재물, 권력, 명예다.
하나님이 부재하기에 이 땅이 전부라고 믿고서 인간이 통치하는 주권자가 된 불신 세상은 이 셋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누가 먼저 많이 좋은 것을 차지하느냐의 격렬한 싸움터다. 이 경쟁에 뒤처지면 인생의 실패다. 앞서면 성공으로 간주되어 모든 이의 부러움을 사게 된다. 이브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도 지혜롭게 탐스럽게 여겼던 죄로 인한 욕망의 잔재가 지금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탓이다.
요한은 그 세 가지 세상의 자랑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지하고 그분의 실존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 셋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재물, 권력, 명예 자체가 나쁘거나 죄는 아니다. 인간 세상이 굴러가려면 필요한 요소다.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 인생의 우선적이고도 최고의 가치와 목표를 그 셋에 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자기 삶의 안전, 만족,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결국 그 셋이 자신의 주인인 셈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실종되고 그분을 부인한 결과인데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이다. 또 사탄의 농간 아래 있다는 뜻이다.
재물, 권력, 명예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을 주시면서 에덴동산의 다른 모든 과실을 임의로 먹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무슨 뜻인가? 사실상 하나님도 인간사회에서 인간이 스스로 재물,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허락한 셈이다. 단 선악과만은 먼지 말라고 했다. 이는 또 무슨 뜻인가? 그 모든 것들을 추구한다고 그것들이 네 안전과 만족과 행복은 결코 보장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사실 하나만은 절대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세상에선 그것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비교 평가하고 대우가 달라진다. 하나님은 절대 그렇지 않다. 외모를 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소유한 재물 권력 명예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가 있다.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직접 나눠주거나 간접적으로 허용한 것이다. 이미 다 알고 있고 계획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으로 즉, 당신의 계획에 점수를 매길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당신께서 당신의 뜻을 비교 평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대신에 인간은 그런 사실을 알고 그분께 겸손히 감사하고 경배하면 된다. 반면에 그 사실도 모르고 자기 혼자서 이룬 것인 양 자랑하고 하나님을 본체만체 하는 자가 있다. 그분을 거역하고 없다고 주장하는 자에 대해선 하나님도 본체만체 하신다.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 그대로 당신의 품을 떠나느냐 남아 있느냐 그것만이 인간을 가르는 그분의 유일한 기준이다.
그분의 품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자는 각기 한 사람씩 세상에 그 단 한명이 있는 것처럼 당신에겐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다. 천하에 단 한 명으로써의 사랑을 받는 자녀다. 실제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와 십자가에서 일대일로 맞교환했다. 그 은혜를 깨닫도록 성령이 간섭하셨다. 또 당신의 품안에 끝까지 남아 있도록 말하자면, 세상에서 겉모습이 아무리 후패해도 하나님 안에 있기에 실패는커녕 그분이 주신 성공임을 절감하도록 성령을 영원히 내주케 해주셨다.
요한도 하나님 없는 인간 정욕 셋으로 이루는 세상의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고 했다.(17절) 인간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성취한 모든 것들은 헛되고 헛되며 반드시 시들고 썩어서 떨어진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행한 일만이 영원하다. 하나님 그분이 영원하고 신실하다. 그분 안에 있어야 영생을 얻는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영원한 가치가 창출된다.
모든 인간의 헛된 꿈
모든 불신자들의 꿈의 정점에는 재물로는 재벌회장, 권력으로는 대통령, 명예로는 대학총장이 자리한다. 그 정상에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가 인생의 관건이다. 또 그 정상에 가까울수록 세상 갈등과 고민도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실상은 한국의 재벌회장은 다 감옥에 한번 이상씩 갔고 대통령의 말년이 좋은 자 아무도 없다. 오바마도 대통령 되고난 후에 죄송하지만 폭삭 늙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성공했다고 부러워도 막상 본인들은 빨리 은퇴하여 시골에 조용히 안락과 평화를 누리고 싶다고 실토한다.
아담과 이브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것 같은 선악과를 먹으면 자기들이 전지전능해지고 정말로 에덴을 잘 가꿀 자신이 생겼다. 수고하고 노동하지 않아도 풍성하게 먹고 사는데 전혀 걱정이 없는 세상이 될 꿈을 꾼 셈이다.
그러나 막상 따먹자마자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옷을 안 입고 나체인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당시 동산은 온도 습도가 적절해서 옷이 사실상 필요 없었다. 그런 개념조차 없었다. 자기들의 무가치함, 연약함, 무능함, 불완전함 등을 절감한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생전 처음으로 갖는 느낌과 인식이 든 것이다. 불현 듯 삶의 허무와 갈증이 밀려들어온 것이다. 그런 자기들의 상태가 전혀 생경하고 엉뚱해 이해가 안 되었다. 차츰 자기들 모습이 싫어지고 부끄럽기 시작했다.
사탄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는데 도리어 하나님 안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감지하지 못한 불한 초조 염려가 생기고 평강과 기쁨과 만족은 사라졌다. 선악과 금령을 지키고 있을 때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 갈등한 적 없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였었다. 이젠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는 단절 되었고 자기들은 너무 보잘 것 없는 버러지 같은 존재로 버려진 것 같았다. 갑자기 공포가 밀려오고 으스스 추워지는 한기마저 느껴져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옷을 지어 입은 것이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인간만이 이 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분의 창조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우연히 물질에 생성되었고 짐승에서 진화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이 버러지처럼 여겨지는 것은 타락에서 너무나 당연한 순서와 결과다. 반면에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거꾸로 하나님 안에서 이런 철두철미 자신의 깨어짐을 즉, 자신이 버러지처럼 인식되는 절차를 거치게 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죄를 처음 지었을 때와 죄에서 구원 받을 때의 영적 상태가 똑같은 이유는 죄의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탐욕의 성경적 의미
타종교에선 추하고 악한 행동이 죄이며 그 원인을 탐욕에 두었다. 탐욕은 허망하며 죄로 이어지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사자성어도 있고, 성경도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약1:15)고 선언한다.
그래서 많은 불신자들이 큰 욕심을 내지 않고 검소한 삶을 미덕으로 여긴다. 어린이마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님을 안다. 재물 권력 명예가 인간 행복의 필수요소가 아님을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기부하고 봉사하며 무소유를 실천하는 자도 많다. 그러나 여전히 성경적으로 따지면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탐욕이란 요구하고 소망하는 것들의 질과 양이 과다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에덴에서 선악과 외에 모든 것을 전부 다 먹어도 된다고 했지 않는가? 참 탐욕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 스스로 최고가 되려는 것이다. 그분을 깔고 뭉개려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절대 품어선 안 되는 최고로 크고 첫째가는 욕심이다. 또 그 욕심에서 다른 모든 현실적 욕심이 생긴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다.
야고보 사도가 욕심에서 죄가 잉태한다는 선언했지만 그 앞 구절(12-14절)에선 하나님의 시험에 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본문의 선악과 금령을 어긴 것이다.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것이 욕심보다 먼저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미혹되어서 욕심이 생긴다고 했다. 요한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세상을 사랑하니까 세 가지 탐욕이 생긴다고 했듯이 말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의 삶과 인생은 죽을 때까지 허망하고 갈급하다. 평생을 욕심을 죽이려 했던 고승도 죄송하지만 마지막에 깨달음은 허무다. 욕심 자체를 줄이거나 없앤다고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처음부터 인생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보존 유지 발전시키는 하나님 그분을 등졌다. 인류역사는 물론 개인의 일생을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은혜를 거부했다. 그러니 그 삶이 허망하고 갈급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인간 스스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지만 지난 역사와 현재의 실정을 보라. 갈수록 피폐해지고 인간관계에 따뜻함은 실종되었다. 죄악의 타락상이 인간의 지혜가 늘수록 함께 늘어서 인간 지혜가 최고로 높아졌을 때 죄악도 역사상 최고가 되었다. 하나님을 몰라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그런 인식조차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모든 죄악과 문제의 시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은 그렇게 하나님과 원수 되어 완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 그분의 사정을 알고 그분과 화목 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게 되면 인간의 실상도 알게 된다. 인간사회의 근본문제와 자신의 죄에서 해방되는 방안을 주님 십자가에서 찾게 된다. 화목된 하나님과 손잡고 그분이 주시는 참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된다.
그런데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작금 십자가 구원의 절대성 유일성을 부인하는 교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창조마저 퇴색되고 부인된다. 기독교의 뿌리가 흔들리다 못해 통째로 뽑아버리는 처사다. 이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문제와 개인의 죄를 해결할 방도가 없어지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소망이 사라지고 다시 암흑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지금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너무 거창하게 따질 것도 없다. 그런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인간의 지혜를 높이겠다는 자랑에 불과하다. 성경적인 탐욕이다. 기독교가 약해지는 것은 부차적 문제이고 그 본인들은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된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
반면에 신자가 되었단 뜻은 아주 간단하다. 서두에 말한 네 가지 절대 전제의 사실성과 진리성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지어시고 지금도 너무나 사랑하시며 당신 대신에 이 땅을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너무나 고귀한 사명을 주셨다. 이 얼마나 감사하며 기쁨으로 따라야 할 일이 아닌가? 인간이라면 평생을 두고 소망해야 할 진정한 욕심이지 않는가?
9/6/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