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창세기 강해 (54)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층으로 할찌니라.”(창6:15,16)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7:10-12)
보험회사가 망한다면?
최근에 캐나다 알버타 주에서 엄청나게 큰 산불이 발생했다. 주택이 일만 채 가량 소실되었다. 화재보험 회사에 한꺼번에 클레임을 청구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될 것이다. 그럼 보험회사가 혹시 망하지 않겠는가?
보험은 예상치 못한 사고와 재난에 대비하는 것인데 보험회사가 망해버리면 큰일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보험회사들도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보험을 드는데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영국의 로이드 보험회사가 바로 그런 보험을 취급한다.
낙찰계 같은 개인적 보험 말고 상업적인 보험은 대양을 항해하기 시작할 때에 본격적으로 발전되었다. 그 전에는 농업이 주산업이라 위험이라곤 이상 기후뿐이었고 하늘이 주관하니 따로 대책을 세워야 의미가 없었다. 신대륙과 여러 새로운 상품을 무역하여 큰 이익을 남겼는데 태풍으로 배가 파손되거나 해적에게 탈취 당하면 투자한 금액을 몽땅 날리게 된다. 선주들의 그런 위험부담을 덜어주려는 시도가 보험으로 발전한 것이다. 대양항해가 가장 활발해서 전 세계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만든 영국이 세계 최초 최고의 보험회사를 갖게 된 것이다.
노아 홍수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만약 당시에 로이드 보험회사가 있었어도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피해를 보상해줄 회사는 물론 손해보상을 청구할 사람들이 다 멸절되었다. 보험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전에서 지워져야 할 형편이다. 대신에 하나님께 보험을 든 노아만 생존했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어떤 이단처럼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 능력과 수단에 의지하는 보험을 들면 안 되고 불신앙이라고 정죄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피조세계도 하나님께 함께 벌을 받았다. 이 땅에 예측할 수 없는 사고와 재난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노아 홍수 후에 인간의 수명이 대폭 줄게 된 중요 원인 중에 하나가 무엇이겠는가? 모든 생물이 순식간에 산 채로 흙에 함몰되면 화석이 되는데 전부가 그러지 못했다. 시체가 물에 떠다녔다. 또 물이 많으면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 땅에 새로운 종류의 세균들이 엄청 많이 생기는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원죄로 타락한 인간 본성은 모든 인간을 오직 자기를 최고로 높이는 이기적 존재로 만들었다. 서로 순전한 사랑으로 돕는 관계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모두가 시기 질투 미움 저주하기 바빠 불법과 분쟁과 전쟁이 성행한다. 한국의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이 인간사회의 문제와 고난은 거의 천재(天災)이기보다 인재(人災)이다.
따라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만으로는 예상치 못한 위험을 다 이겨낼 수 없다. 인간 세상에서 발생하는 재난은 더 이상 가끔 일어나는 우연이나 변수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되다시피 필연적 상수가 되었다. 신자도 보험에 들어야 함은 필수다.
신자의 이중적 정체성
그런데 불신자와 달리 신자의 신분은 이중성을 지닌다. 불신자는 세상 안에서 살면서 세상에 속했다. 세상의 자녀라는 한 가지 신분뿐이다. 신자는 세상 안에서(within the world) 살아야 하되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not of the world) 하나님에게 속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같은 재앙을 심판의 목적으로 주도하셨다. 또 인간들의 인재도 묵인하신다.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모든 인간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그 중간과정도 당연히 포함해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신자는 반드시 노아처럼 여호와의 은혜를 입기를 소원하고 그분만 의지하려 기도해야 한다.
신자의 이런 이중적 신분 때문에 불신자에게 없고 알지도 못하는 딜레마가 크게 두 가지 발생한다. 첫째 어느 정도의 수단까지 세상에 의지해야 하고 어디서부터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해야 할지 곤혹스럽다. 둘째는 믿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간절히 오래 기도했는데도 고난에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믿음이 약한가, 기도가 잘못되었는지 의심한다. 교회 수십 년을 다녀도 제대로 정리 되지 못한 신자가 꽤 많다.
그 정답은 노아 홍수 사건에 나와 있다. 먼저 어디까지 세상에 의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 반대로 이런 사소하고 경미한 일까지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하는가라는 의문도 똑같이 잘못이다. 신자의 신분이 세상 안에 살되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이중성을 알지 못하거나 잊고 있는 것이다.
사안이나 사고의 중대함 혹은 경미함에 따라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로 나눠지지 않는다. 그 전부가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던 신자의 삶 전부가 세상과 하나님에게 항상 그리고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신자는 항상 세상 수단에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땅 안에 살게 한 것 자체가 그런 의미를 이미 내포하는 것이다. 아담더러 이마에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했다. 세상과 단절된 수도원에서 자기 수양만 하는 것은 기독교의 영성도 믿음도 아니다. 부부싸움도 하고 자식들과 아웅다웅 하며 부딪혀서 현실과 싸워나가야 한다.
노아를 홍수에서 구원하는 방식이 휴거처럼 하나님이 공중으로 잠시 피신시켰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준 것이 아니지 않는가? 방주를 스스로 짓게 했다. 세상 사람들의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아가며 120년간이나 말이다.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기면 생존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은 큰 배뿐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신자에게 문제와 고난이 생기면 무조건 교회로 뛰어가서 기도하기 이전에 자기 지혜와 경험과 상식으로 먼저 점검해야 한다. 주변 사람의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하고 전문가와 상담해야 한다. 최근에는 인터넷 서취가 가장 효과적이다. 이 모두가 결코 불신앙적인 행위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발견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통용 인정되는 원리와 방식을 따르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면 세상 안에서 살면서 세상에 속한 불신자의 단일 정체성과 같아진다.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께 일반은총만 받고 끝난다. 모든 이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동일하게 내리는 하나님이시다. 신자는 세상에 속한 자로만 남는 것이며 또 그것이 바로 불신앙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 당장에 그런 불신앙을 야단 정죄하지는 않는다. 신자가 그분께서 신자에게만 부어주기로 예비하신 특별한 은총을 받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한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그것이 신앙이다. 신자는 항상 현실 수단을 택하여 시행하되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거룩하고 완전한 통치를 받아야 한다.
가장 쉬운 예로 금성맹장염이 걸리면 교회로 가서 기도부터 혹은 기도만 하는 신자는 없다. 병원으로 바로 가서 빨리 수술부터 받아야 한다. 최근에 의술이 발달되어 간단히 절제하면 쉽게 낫는다. 그러나 무심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의사도 사람인지라 실수할 수 있다. 수술 중 부주의로 다른 병균에 오염되거나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심지어 메스를 둔 채 꿰매기도 한다. 신자는 그래서 시작부터 끝까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도 도끼로 나무를 자르고, 톱으로 썰고, 못을 하나하나 박을 때마다 기도했다는 뜻이다.
정말로 정욕으로 구해서 얻지 못하는가?
두 번째 딜레마인 아무리 오래 기도해도 고난이 그치지 않는 까닭은 따져볼 요소가 아주 많다. 노아 홍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측면만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딜레마와 정반대의 차원인데 기도만 하고선 현실 수단에 전혀 의지하지 않는 자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목사님들의 설교에 자주 인용되는 예화가 하나 있다. 어떤 사람이 홍수가 나서 집 지붕으로 피신하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웃 사람들이 세 번이나 보트를 타고 와서 빨리 내려오라고 소리 질렀는데도 나는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거야 하면서 버티고 앉아 있다가 결국 익사했다지 않는가? 이는 종교적 광신을 넘어서 아예 바보다.
하나님만 믿고 모든 것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절대 그런 뜻이 아니다. 기도를 그렇게 오래 하고 교회에 봉사 헌금 많이 했는데도 하나님이 왜 아직 구해주지 않고 이 꼴로 버려두는지 의심 내지 불평은 심정적으로 이해는 되도 성경적 진리를 너무 모르는 짓이다.
너무나 간단히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입증이 된다. 그것은 바로 기도만 하면 다 응답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럼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 자체가 문제 해결 능력을 갖는다. 기도 잘하고 오래 간절히 많이 하는 신자에겐 어떤 고난도 없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에 이른다. 불신자가 들어도 어리석다고 비아냥거릴 것이다. 그런데도 작금 기도만 뜨겁게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런 자를 믿음이 좋다고 칭찬한다. 불신자도 분명히 틀린 생각인 줄 아는데 신자만 옳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전도마저 안 된다. 하늘의 하나님마저 안타깝다 못해 웃을 지경이다.
그래서 믿음이 조금 자란 신자들은 어떻게 하는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한 탓이고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했다는(약4:2,3) 말씀만 붙든다. 말하자면 내 욕심이 들어가서 응답이 안 되나보다 여기고 의도적으로 선하고 검소한 기도를 하려 노력한다. 도덕적 영적인 기도를 많이 하면 현실적 고난이 없어지리라 기대도 한다. 하나님은 제사를 보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는 분이다. 평소에 하나님과 순전한 관계로 동행하면서 회개는 삶의 방식이 되어야지 기도 응답 받으려 회개하고 간구하는 내용을 질적 양적으로 낮춘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속을 수는 없다. 우리 심령의 맨 밑바닥까지 꿰뚫어 아신다. 기도란 당장 발등에 떨어진 것을 끄기 위한 목적이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요구하는 정도를 낮추거나 기도 자체의 품격을 높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기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울부짖는 간절함과 진정성이 필수다. 만약 이 둘이 없다면 종교적 가식일 뿐이다. 응답되지 않는 이유로는 욕심보다는 그 중심을 드리지 않고 제사했기 때문이 더 크다.
소용돌이를 피해 가는 노아 방주
본문은 큰 깊은 샘들이 터졌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말한다.(창7:11) 홍수전에는 땅에 증기만 올라오고 있었다.(창2:5) 하늘에 엄청난 수분이 함유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또 물과 물을 나눠서 궁창 아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눴다.(창1:6,7) 지표면의 물을 땅 속 지하수가 되게 했고, 바다 속에서 땅을 융기케 하여 육지와 바다로 나눴다.
큰 깊은 샘들이 터졌다는 것은 땅 밑의 지하수들이 솟아났다는 뜻이다. 바다가 산으로 솟고 산이 바다에 함몰되는 엄청난 지각변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높은 산에서 바다 생물이, 바다 속에서 육지 생물이 화석으로 변한 것이다. 또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는 것은 여러 궁창들로 나뉜 물들이, 말하자면 지구 전체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수분이 비로 변해 한꺼번에 지상에 다 쏟아 부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 지구를 덮을 정도로 40일 간이나 폭우가 내린 것이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홍수 전과 후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또 그 엄청난 양의 물이 다시 지하수로 땅에 묻혀야만 물이 빠질 수 있다.
로이드선급협회가 공인할 정도로 노아의 방주는 파도를 견디는 최상의 구조였다.(창6:15) 그럼에도 물이 다시 땅속의 지하수로 빨려 들어가는 거대한 소용돌이에선 벗어날 수 없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까마귀가 방주 주변의 동물 시체를 먹었는데 방주 주변에는 소용돌이가 없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였다. 그 전에 노아는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자로 세웠다. 하나님께 소명 받은 자는 천지가 개벽하는 와중에도 반드시 지켜 보호하신다.
노아 홍수 사건에서 모든 신자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 홍수나 방주의 규모가 아니다. 믿음으로 핍박을 이겨내고 감수했다는 것도 아니다. 그 큰 배에 운행에 필요한 조타와 동력 장치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배에도 필수인 돛, 노, 닻, 키라는 4대 장치 중에 하나도 없었다. 유선형이었다는 설명도 없다. 오히려 성경은 네모 상자라는 뜻의 방주(方舟, ark)라고 표현했다.
아라랏 산에 배가 걸렸지 노아가 닻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내릴 닻 자체가 없었다. 그 전에 5달 150일 동안 그저 이리저리 떠다니다 암초에 걸려 멈춘 것뿐이다. 그 후에도 225일 지나야 상륙이 가능했다. 노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뿐이었다. 모든 처분을 하나님께 맡겼다. 두 손 과 두 발을 다 드는 것 말고는 노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물론 그는 바다의 요새라 불리는 미국항공모함 만큼이나 크고 안전한 세계 최고의 배, 그 안에서도 가장 안전한 선장실에서 기거했다. 거기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까지 받았고 그 스스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절대 잃지 않았다. 자기 가족에 대한 영광스런 계획에 정말로 겸손히 순종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로 충만했다.
그럼에도 40일간 사방은 칠흑 같이 캄캄했다. 산들이 솟아나고 또 산들이 꺼졌다. 번개 천둥이 소리까지 겹쳐서 온 천지가 진동했다.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항공모함이 아니라 나뭇잎 한조각도 못한 신세가 되었다. 구해달라고, 아님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으니 최소한 이 불안감을 없애고 평강을 달라고, 나아가 홍수 후의 세상을 위해 기도했다.
불신자는 한 가지 정체성뿐이다. 세상 안에 살며 세상에 속했다. 그래서 인생의 큰 실패를 맞으면 숙명으로 간주하고 치운다. 조금 영적으로 깨인 사람은 신들의 장난이나 훼방으로 여기고 스스로 최선을 다한 후에는 신의 처분에 맡긴다. 가끔 기도 비슷한 간구도 한다.
신자가 세상 수단에 항상 의지해도 된다고 해서 모든 일을 다 마친 후에나, 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해선 안 된다. 처음에 그 일을 계획할 때부터 아니 그전에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뜻에 맞는 올바른 생각을 품게 해달라고, 또 일하는 중에도 마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오묘한 보호와 인도가 있도록, 나아가 완전히 일이 끝난 후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영광을 볼 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하는 것은 경미한 일은 나와 세상의 일이고, 크고 위험한 일만 하나님에 속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큰 능력에만 의지해서 자기 주변 여건만 풍부하게, 최소한 평안하게 만들 욕심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는 불신자의 생각과 정확히 같다. 또 그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정욕으로 잘못 구한다는 참 뜻이다. 신자는 천만 불, 일억 불이라도 정당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면 기도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금액의 많음이 절대 정욕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이 정욕이다.
방주의 인생을 산 자들
모세의 생모와 미리암은 남자 아이는 출생하자마자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최선을 다해 숨겼다.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어지자 네모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웠다. 하나님의 처분에 맡긴 것이다.
아무리 파도가 없이 잔잔한 강일지라도 바위에 부딪히면 상자는 뒤집어진다. 또 악어의 먹이가 될 수도 있다. 애굽 사람이 발견하면 신고하여 포상을 받고 모세는 죽게 된다. 미리암은 그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죽으면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어떻게 되든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도 믿고 그분에게 완전히 맡겼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애굽 사람 중의 가장 애굽 사람인 바로의 공주가 그 상자를 발견했다. 상식적으로는 살아날 수가 없다. 공주가 아버지인 왕을 거역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심성을 가졌든지, 어쩜 결혼은 했는데 아기를 못 가진 공주를 만나게 했다. 바로 그 시간 바로 그 장소에 악어에게 먹히기 전에 하나님은 예비해 놓으셨다.
에스더도 왕의 허락 없이 나아가면 사형이었는데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면담 신청 없이 나아가 동족의 구원을 간청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신자를 하나님이 당연히 극렬한 풀무 불에서 건져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었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상에게 절할 수 없었다. 그 처분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더니 머리털 한 올도 그을리지 않았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노아처럼 방주의 삶을 산 자들이었다.
신자는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또 그렇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면 놀라운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성경의 진리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모습으로 기쁘게 받으신다. 그러나 문제는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포기하는 것 즉,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노아도 배 안에서 기도만 한 것이 절대 아니다. 방주는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와중에 그는 동물들 먹이를 주어야 했다. 혹시라도 배에 물이 샐까 매일 점검해야 했다. 체력 보강을 위해서 맨손체조도 했을 것이다. 그 전에 120년간이나 최선을 다해 방주를 지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도 이방에서 총리가 될 만큼 최고의 실력을 쌓으며 현실에 충실했다.
뭘 내려놓아야 하는가? 아무 것도 안 하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수단과 방법이 아니다. 정말 우리 존재 전부를 내어드려야 한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이 바로 그 뜻이지 않는가? 세상의 수단과 인간의 능력에 비해 하나님의 수단과 능력이 비교가 안 될 만큼 좋고 빠르고 완전하고 강력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내려놓는 것은 자기 주변만 풍성하게 바꾸려고 하나님의 능력만 찾는 것이다. 그래서 급할 때만 기도하는 것이다. 자기 전부를 내려놓는 것은 자기를 거룩하게 바꾸려고 하나님 그분을 소망하는 것이다. 자연히 항상 그분과 교제 동행하게 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항상 묻는 질문 하나
엘에이에 있을 때에 정말로 속에 분노가 차오르는 때가 있다. 거의 모든 한국식당에 성경구절 액자가 걸려있다. 꼭 나쁠 것은 없다. 그런데 맛도 서비스도 엉망이면 정말 너무 화가 난다. 현실적으로 어떻게 살든 잘만 믿으면 하나님이 시작은 미약해도 나중은 창대케 해준다는 식인데 믿음이 아니라 교회에서 종교 놀이 한 것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짓이다. 그러다 차츰 그 식당 주인보다 그렇게 가르친 목회자에게 화가 더 치솟는다.
노아만 구원 받은 까닭을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기도 하며 핍박을 오래 견딘 것 때문인가? 그것은 구원 받고 난 이후에 행한 일이다. 홍수 심판 이전에 벌써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그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서 자신의 존재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자신의 더럽고 추한 영적 실체에 대해서 철두철미 실망하고 아니 분노하고 저주하여서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간 자만 하나님은 구원한다. 모든 인간이 자기 주변을 풍성하게 꾸미려 할 때에 노아 혼자 자기를 거룩하게 바꾸려 한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원했고 또 그분의 은혜를 받는 자리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평생토록 기도하며 그분과 동행한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항상 묻는 오직 하나의 질문이 있다. 봉사 많이 했느냐, 헌금 많이 했느냐, 기도 많이 했느냐 등이 아니다. “지금 정말로 너의 주인이 누구냐? 네냐? 나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당당하게 하나님이라고 대답하는 자가 신자다.
하나님이 정말로 주인인 신자라면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현실에서 항상 성실히 최선을 다해 실력을 쌓아야 한다. 그와 동시에 자기 삶에 어떤 예측 불능의 위험이 닥칠지라도 또 자기 인생이 흘러가는 큰 방향은 모를지라도 자신의 모두를 하나님의 방주 안에 태우고 그분의 주권과 섭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그럼 원수 중에 최고의 원수인 바로의 공주의 장막 안에서 모세를, 또 배의 사대요소가 빠진 나무상자에 태우고도 땅의 깊은 샘들과 하늘의 모든 창들이 열리는 격변 속에서도 노아를 보호하셨던 바로 그 오묘하고도 신기한 은혜를 우리도 얼마든지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 여러분은 정말로 방주의 삶을 살고 있는가?
5/29/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