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심판대의 네 가지 통과절차.
창세기 강해 (55)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0-22)
불공평한 하나님?
노아 홍수는 살펴본 대로 40일 간의 폭우는 시작에 불과했다. 바다가 산으로 융기되고 산은 바다에 함몰되었다. 그런 와중에 노아 일가족은 돛, 닻, 노, 키 배의 필수 4대 요소가 빠진 큰 네모 상자를 타고 물 위를 이리저리 계속 떠다니다 물이 빠지고 땅이 마를 때까지 1년 열흘, 375일 동안 선상난민생활을 했다.
다시 땅에 발을 디뎠을 때의 그들의 감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20절) 그러지 않을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순전한 마음으로 드린 제사 중의 하나일 것이다.
단순히 구원에 감사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정말로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답게 거룩하게 살 것이며, 세 아들과 자부로 믿음의 가문을 든든히 세워서, 성적으로 문란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죽이는 그런 세상이 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결단과 헌신의 제사였다.
하나님이 그 제사와 제물을 흠향(歆饗) 즉, 기쁘게 받아들인 것도 너무나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문제는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따지지 않으면 자칫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한다. 마치 노아 홍수 때는 사람 때문에 애꿎게 땅까지 저주 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인간에 대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땅에다 화풀이를 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공평성에 하자가 있는 것 아닌가?
홍수로 땅을 심판한 이유는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이라고 했다. 그런데 앞으로 땅을 심판하지 않을 이유도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21)고 했다. 문구만 조금 다를 뿐 인간의 상황은 같다. 그런데 홍수 때는 땅까지 심판했고 홍수 후는 땅을 심판에서 제외했다. 그럼 하나님의 심판의 원칙이 변경된 것인가? 사람처럼 상황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하나님이면 이상하지 않는가?
땅은 저주 받을 만했다.
성경을 해석할 때나 신앙생활을 함에 첫째가는 대원칙 즉, 헌법 같은 기준이 있다고 했다. 바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이다. 하나님에게 단 한 치의 오류도 없고 불공평은 더더욱 없다.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공의를 완벽하게 조화해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하자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면 일단 잘못된 생각이다.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춰서야 한다. 하나님에게 더 깊은 뜻이 반드시 있으니 차근차근 살펴봐야 한다. 아니면 또는 그와 동시에 우리 쪽에 잘못이 없는지도 따져야 한다.
말하자면 노아 홍수 때는 땅도 하나님께 저주 받을 만했기에 저주받은 것이다. 성경은 땅에 패괴와 강포가 충만했고 예쁜 여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살인을 밥 먹듯이 자행하여 그 흘린 피로 땅이 더렵혀졌다고 선언한다. 땅은 저주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죄에 찌든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언제나 죄악의 냄새가 코를 막아야 할 정도로 진동한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이 가장 깨인 21세기에, 그것도 세계 최대의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현재 타락상이 홍수 때에 못지않지 않는가? 그럼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뜻은 의외로 간단하다. 근 천년 가까이 살았던 인간 수명을 그 1/10 수준으로 격감하려면 그에 적절한 새로운 생존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노아 가족을 통해 시작될 새 인류에게 제2의 기회를 주어야 했기에 땅을 완전히 새롭고 깨끗하게 갈아엎은 것이다. 실제로 이어지는 창세기 9:2에선 아담에게 주신 생육, 번성, 충만, 정복하라는 문화명령(창1:28)을 확장 발전시켜서 노아에게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수명을 1/10로 줄긴 것은 너무 심한 벌이 아닌지 의아해하거나 반발할 계제는 아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한 가운데서 천년을 사는 것이 좋은가? 백 년을 사는 것이 좋은가?
죄악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쾌락을 즐기며 이 땅이 전부라고 믿는 자에겐 당연히 천년을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반면에 노아처럼 타락한 세상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물로 끌어안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말하자면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시어서 이 땅을 고쳐달라고 간구하는 자들은 백년을 사는 쪽을 택할 것이다.
최근에 돌아가는 모든 세태를 보고는 불신자들마저 이 세상이 뒤집어져야 한다고 탄식을 하지 않는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가치 있게 사느냐가 관건이다. 쉽게 말해 누구라도 치매로 천년을 사느니 건강하게 백년을 살 것 아닌가?
변함없는 하나님의 구원 원리
노아 홍수의 전과 후에 하나님의 심판 원칙에 수정은 한 치도 없었다. 본문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원리를 정확히 가르치고 있다. 먼저 본문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이 땅과 인간을 완전히 분리해서 땅은 그대로 둔다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조치는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부터 그랬듯이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대상은 오직 인간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인간과 교제 동행하기 위해서, 특별히 당신을 알고 믿고 따르는 당신의 자녀들에게서 경배와 찬양을 받기 위해 창조했다.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 이 땅을 만드신 것이다.
또 모든 피조세계를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풍성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그 모든 자연은 인간의 다스림을 받을 대상이다. 인간의 책임 하에 맡겨져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따로 땅을 심판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두 번째 구원의 원리는 당신과 인간 간의 일대일의 관계로만 구원하고 심판한다는 것이다. 노아는 여호와께 개인적으로 은혜를 입었다.(창6:8) 노아의 세 아들과 자부는 그런 아버지로부터 여호와 신앙교육을 엄격히 받았다. 또 아버지를 도와 구원사역을 감당할 종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받았다.
반면에 노아 일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멸절 당했지만 결코 하나님의 분풀이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따졌을 때에 구원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성경이 지금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구원의 가장 중요한 원리
본문이 말하는 구원의 세 번째 원리는 가장 중요한데도 많은 신자들이 모르거나 알아도 경시(輕視)하는 경향이 있다. 본문의 의미는 한마디로 하나님이 인간의 영적 실상을 판단하여 성적표를 매겼더니 그 결과는 항상 동일했다는 것이다.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빵점이고 단 한 명도 1점이라도 받은 자가 없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은(21절) 그 의미의 흐름 상 그 뒤에 어떤 말이 생략되어 있는가? “늙어 죽을 때까지”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무작위로 뽑아서 점수를 매기면, 저를 필두로 세상의 어떤 의인이라도 단 플러스 일점을 받을 자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조건에서 부족함이 전혀 없고 오히려 차고도 넘친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노아 홍수처럼 땅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차원마저 넘어서 지구 자체를 폭발시키든,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게 해서 소멸시키든 하나님에겐 하자가 아니 불공평마저 아예 없다. 심지어 그분의 영광에 단 한 치의 흠도 가지 않으며 인간이 불평은커녕 의아심마저 가질 수 없다. 인간에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든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 창조할 수 있다. 제가 과장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진술하는 바를 그대로 다시 풀어서 전하고 있다.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구체적인 방식과 상황은 모르지만 그렇게 한다고 성경이 선언하고 있지 않는가? 원죄 하에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구원해줄 만한 자격과 조건은 눈곱만큼도 없다. 정상을 참작할 여지조차 없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구원과 심판의 때와 방식은 물론 누구를 구원해줄 것인지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렸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자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만드는 첫 번째 영적 진리다. 다른 종교와 가장 크게 구분이 되는 점이자 기독교 신앙의 출발이 되는 본질이자 핵심이다.
문제는 그 원리가 단순히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교리로만 남아있어선 아무 의미가 없다. 구원은 정말로 하나님과의 일대일 개인적 관계에 의해 이뤄지기에 저를 비롯한 우리 각자는 이 진리에 완전히 항복했던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쉽게 말해서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마음의 계획한 바가 악한 것이 감옥에 갇혀 있는, 그것도 사형수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에게 경건하게 예배드리러 나와 있는 여러분과 거룩하게 설교하고 있는 저에게 해당된다는 점을 절감해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악하다는 뜻은?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악하다고 해서 사람이 외뿔 달린 악마나 살인마 들라큐라 같다는 뜻은 아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이 나이 되도록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어려선 부모에게 순종했고 그런대로 공부도 열심히 했다. 가난하고 힘든 친구들 남 몰래 도와준 적도 꽤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모습은 남들이 저를 판단한 점수일 따름이었다. 저는 저 자신을 알았다. 엄밀히 말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정확히 깨달았지만, 어쨌든 저의 자존심과 교만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심심찮게 죄에 빠졌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잠시 그 때뿐이었다. 무엇이든 누구든 제 마음에 정해 놓은 규칙과 취향의 한계를 벗어나면 아예 상대조차 않고 다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는 갈 수 없다고 도도하게 따로 놀았다. 저의 너무나 교만한 속마음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여전이 의로운 명성을 유지하려고 겉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부드럽게 굴면서 그랬다. 저는 그러는 저 자신이 똑똑하고 잘났고 의롭다고 여겼다. 남들보다 몇 배나 착하고 언제든 선행을 베풀 자신이 있었다.
어떤 이가 꿈에 자신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다. 이 땅에서 지었던 모든 죄를 기록한 명부가 하나님 앞에 놓여 있었다. 첫 페이지를 열자 큰 글씨로 적어놓았는데 상당수가 기억할 수 있는 행동으로 지은 죄였다. 둘째 페이지는 돋보기로 봐야 겨우 보일 정도의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놓았는데 기억나는 것보다 나지 않는 것이 훨씬 많았다. 말로 지은 죄들이었다.
셋째 페이지를 열자 현미경으로 봐도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빽빽이 적혀 있었는데 기억나는 것이라곤 거의 없었는데 생각으로 지은 죄였다. 이제는 끝났나보다 하고 안심하고 있는데 한 페이지가 더 남았다. 마지막 장은 글씨라곤 없고 그냥 온통 시커먼 먹지 그 자체였다. 하나님 이게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그게 바로 네 마음이고 네 영혼이고 네 자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요즘 TV에는 다른 사람들의 실상을 관찰하는 Reality Program이 대세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만약에 행동과 말은 물론 생각까지 녹화할 수 있는 비디오카메라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저에게 하루 종일 부착해서 찍는다면 그 영상을 남들과 함께 5분 이상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지금 거룩하게 설교하고 있는 저인데 제 혼자서도 도무지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카메라보다 못할 리는 없지 않는가? 우리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어시는 분이다. 그런 기록을 하나님과 함께 단 일 분이라도 함께 볼 수 있는 자는 우리 중에 단 한 명도 없다.
다윗이 시편 139편에서 어떻게 고백했는가?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2절)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4절) 놀랍게도 5절에선 그런 하나님이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라고 고백했다. 하루 24시간 밀착 카메라가 붙어 있듯이 주님이 살피신다고 했다. 내 모든 것을 내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다.
선한 행동과 선한 존재는 다르다.
행동과 말은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은 평소에 특정한 방향과 규칙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제하는 마음에 따라 가게 되어 있다. 우리 모두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따져보자. 선행은 억지로 쥐어짜듯이 해야 가뭄에 콩 나듯이 겨우 한두 번 행할까 말까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도시락을 못 사오는 가난한 급우가 불쌍해서 도시락 두 개를 싸달라고 엄마에게 부탁해서 아무도 모르게 갖다 준 경험은 다들 한두 번씩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몇 번의 선행을 했다는 것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선하다는 보장은 되지 못한다.
죄는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교육 훈련 받지 않아도, 사전에 모의 계획 연습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에 배여서 행하지 않는가? 더 큰 문제는 때로 자기가 행하는 일이 분명히 나빠서 해선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한다는 것이다. 자기 머리로는 하지 말라고 말리고 있는데도 아무 것도 아닌 양 행하면서 멀쩡하게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기가 볼 수 있다. 그런 자신이 싫고 미웠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것으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반성과 회개는 찰나뿐이다. 금방 잊어먹는다. 다시 똑같은 경우와 상황이 되면 동일한 패턴을 양심의 가책 없이 그냥 반복한다. 나중에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양 착각한다. 분명히 잘못인 줄 알고 있고 남들이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지푸라기 같은 핑계나 변명거리를 붙들면 자기 합리화를 한다. 나중에는 정당화를 강변하고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정죄하고 매도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그럼 행동과 말과 생각의 잘못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한 것이 바로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성경의 선언은 너무나 정확한 진리이다.
그 진리 됨을 입증할 수 있는 아주 확실한 증거가 있다. 최근에 가장 뜨는 비즈니스가 인터넷에서의 자신의 옛날 기록과 행적을 지워주는 일이다. 또 내 자신의 생각까지 찍은 비디오는 남들은 물론 나 자신부터 도무지 보지 못한다. 무조건 다 찾아내어 불 태워 없앨 것이다. 반면에 만약 남의 영상을 TV에 방영한다면 장담컨대 시청률 100%가 나올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경위
제가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으러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경위가 무엇이겠는가? 제 마음을 바꿔서 생각과 말과 행동의 잘못을 회개할 의도였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그냥 쫄딱 망해서 교회 나간 것뿐이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절대자에게 기도라도 하면 돈이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이 99%의 이유였다.
그런데 그런 생각과 행동은 저에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로선 너무 부끄럽고 모순되고 비합리적인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전에 예수 믿는 자들만 보면 “그런다고 쌀이 나오느냐? 밥이 생기느냐? 차라리 네 주먹을 믿어라!”고 비아냥거렸다. 종교란 의지력이 약해 현실에서 실패한 Loser들이 스스로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는 헛된 짓이라고 아주 심하게 반발했다.
그랬던 제가 이젠 혹시 쌀이 생기게 될까 기대하며, 실제로 먹을 쌀도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빌고 있었다. 제 자존심과 이성으로는 전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악한 것이 낫지 이제는 치사하고 비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교회에 출석하고 난 이후에 저에게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꿈도 꾸지 못했던 변화였다. 예수님 그분의 이야기는 아주 특이했었다. 그렇다고 아직은 심오하고 경건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 의롭게 헌신하겠다고 결단한 것도 아니었다. 기대했던 대로 돈이 팍팍 생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예수님은 저 같이 겉으로는 의로움을 실천하며 까마귀 노는 골에 가지 않는 백로인 척하는 자들은 일절 상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어떤 면으로 따져도 인간 중에는 역사상 유일하게 완전한 백로였던 그분이 까마귀 동네에 스스로 찾아가시어 까마귀들을 까마귀로는 대우하지 않고 마치 백로인양 대접하고 사랑하셨다.
인간사회에선 민족의 반역자요 매국노로 아예 상대도 않던 세리 삭개오의 집에 일부러 숙식하면서 교제했다. 사람들이 부정하여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여기며 아예 곁에도 가지 않는 문둥병자의 얼굴에, 고름과 진물이 질질 흐르는데도 손을 갖다 대고서 치유해주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를 잡아와서 율법으로 사형감이라고 매도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말함으로써 모두가 물러가고 막상 죄를 지은 현행범만 그 자리에 남아서 구원받게 하셨다. 남편 다섯을 두고도 모자라 새로운 남자랑 동거하는 세상에선 남편 잡아먹는 박복하고도 음란한 여자라고 손가락질 도맡아 받는 여인과 생수 한 그릇을 나눠 먹음으로써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다.
이런 등등의 그분이 행하시는 사역과 말씀을 기록한 성경 말씀 앞에 저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완전히 고꾸라졌다. 제 잘못들을 당장 회개했다기보다는 그 이전에 저라는 존재 전체가 새까만 먹지 자체임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예수 믿어서 세상을 이길 힘을 얻은 것도 아니요, 최소한 평강을 얻는 비결을 터득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을 뿐이다. 너무나 썩고 부패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은 한 치도 없음을 철두철미 깨달은 것이다.
이는 저에게는 노아 홍수로 천지가 개벽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제 존재 전체가 완전히 Upside-down이 되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는 역사였다. 그렇다고 이천 년 전에 죽은 로마 사형수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라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이야기를 통해 분명히 성령이 역사하여서 저의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어 완전히 까뒤집어 발가벗겨서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했다. 그분의 무조건적인 긍휼만 바라고 그분 앞에 완전히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제가 백로라고 믿고 그런 양 행동했지만 까만색도 아주 까맣게 되면 윤기가 반질반질 나서 빛이 나니까 백로라고 착각한 것뿐이었다.
예수를 믿었다는 의미는?
그리고 그런 깨어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제가 분명히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그 실존 여부마저 부인하고 거역했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 바로 절망 아니 죽음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나아가 그런 죽음에 빠진 나를 하나님이 먼저 용납하시고 저를 당신의 사랑의 품에 안아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분의 자녀가 되어서 그분이 주시는 새 생명과 새 소망으로 충만하게 채워졌음도 실감나게 느꼈다.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새 사람이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만은 놓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마음의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은 그 영혼, 즉 존재 자체가 바로 시커먼 먹지라는 뜻이다. 바꿔 말해 스스로는 절대로 선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자력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인간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던 하나님이 새로운 영을 채워줘야만 새롭게 된다.
인간의 조건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에 언제 어디서나 단 한 치의 부족함이 없고 도리어 차고도 넘친다는 것이 절대적 절망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절대적 절망은 오히려 절대적 소망으로 바뀐다. 인간 스스로는 절대 구원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구원해주시지 않는가?
이 땅은 언제든 하나님의 심판 받아 마땅한데도 당장 심판하지 않는 것이 그분의 어쩔 수 없이 참고 또 참아주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그 모든 추하고 더러운 타락상을 덮고도 남을 만큼 그분의 긍휼과 인자로 이 땅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오늘도 은혜를 주고자 하는 당신의 백성은 일대일로 구원을 베풀고 계신다.
예수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간단하다. 내 자신의 마음이 썩고 또 썩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본문 식으로 말하면 어려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내 마음의 생각의 계획하는 바가 항상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로는 물론 그 빈도와 세기에선 현저히 줄긴 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런 존재임을 알게 된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로 절망이 아니라 더 큰 소망이자 생명이 된다. 세상 사람은 그 점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바꿔 말해 자신의 문제에 대한 원인도 모른다. 원인을 전혀 모르니 그 해결책도 절대 가질 수는 없다. 반면에 신자는 예수 믿은 후에도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악해지면 곧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새롭게 되는 소망과 은혜와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세상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신자만의 권능이자 축복인 것이다.
6/5/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