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뜻은?
출애굽기 강해 (49) – 십계명 (9)
“도둑질하지 말라”(출20:15)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신24:6)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뜻에 대해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거나 알아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이미 배운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열방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세운다는 언약을 맺었다.(출19:1-6) 그 후에 율법을 주셨기에 율법은 제사장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이다.
따라서 첫째 율법은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대상이고 출애굽 구원 후에 주셨다. 그대로 순종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는 처음부터 전혀 없다. 둘째 이스라엘이 대상이므로 율법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신정국가의 통치 운영체계이다. 셋째로 십계명은 그 법체계의 가장 기본으로 현대국가로 치면 헌법에 해당된다. 그래서 출애굽기 20장 이후,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민법 상법 형법 같은 하위의 법들이 추가 보충되었다.
지금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명인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이 참 싱겁고 이것 모르고 안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고 여기면 율법의 이런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한국에서 헌법을 어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는가?
헌법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 먼저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선언한다. 이를 거역하면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반역죄다. 또 국민의 사대 의무인 교육, 납세, 국방, 참정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자체를 거부하면 한국 국민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대신에 편법과 불법을 동원하여 탈세를 하면 하위법인 세법을 어긴 범법자가 된다.
믿는 자들의 영적 헌법인 십계명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접근해야 한다. 첫째에서 넷째까지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은 이스라엘은 신정국가 특별히 제사장 나라라고 선언한 것이다. 다섯째에서 열째까지 계명은 그 나라 국민의 6대 의무를 말한다. 십계명을 거부하는 것은 이스라엘 국민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제사장 나라라는 개념과 인식이 전혀 없다. 그 용어조차도 모른다. 대신에 이 땅에서의 자신의 안락과 형통만 추구하기에 그들은 십계명의 시시비비를 논한 자격이 없다. 마치 이슬람 국가 국민이 한국의 헌법에 대해 감 놓으라, 사과 놓으라, 참견하는 꼴이다.
제사장 나라 시민으로 접근하라.
반면에 신자들은 초등학교 학생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도둑질 하지 말라는 여덟 째 계명을 첫째로 반드시 제사장 나라 시민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적용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경제 윤리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실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소속원들로 신자를 닮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거나 최소한 영적인 찔림을 주어야 한다.
둘째는 또 그러기 위해서 도적질에 대한 율법의 구체적 규정, 헌법을 보완 설명하는 하위의 법들은 물론 신약의 가르침과 함께 살펴봐야 한다. 율법에서 도둑질은 출21:33부터 언급하기 시작한다. 당시 가장 귀한 재산인 소 도적질을 다룬다. 소를 훔치면 무려 다섯 마리를 변상해야 하고 양은 그보다 덜 중요해도 네 마리를 갚아야 했다.(출22:1) 당시에 가축은 어마어마한 재산이므로 아예 훔칠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었다.
심지어 도적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죽여도 정당방위로 인정해주었다. 당시의 가옥 구조는 흙벽돌로 짓거나 짚에다 흙을 엉기성기 얽혀서 만들었다. 중풍 병자를 친구 네 명이 침상에 메고 와서 지붕을 뚫고 방안에 계신 예수님 앞으로 내려 치유 받은 사건에서 보듯이 누구나 쉽게 손으로라도 뚫고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은행 같은 금융기관이 발달이 안 되어있어서 실제로 보물을 상자에 넣어서 밭에 묻었다. 주인이 미처 그 돈을 다 소비하지 못하고 죽으면 그 땅을 산 다음 주인이 밭을 갈다가 복권에 당첨되는 것 같은 일들도 일어났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이 이스라엘 국민의 6대 의무 중에 넷째를 차지한 것은 당시의 열악한 경제 사정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의 본을 가르치면서 유일하게 현세의 것을 구할 수 있게 허락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일용할 양식이었지 않는가? 하루하루 한 끼를 연명하는 것이 아주 심각한 과제였다.
실제로 신명기 6:4에서 돈을 빌려 줄 때에 맷돌과 위짝은, 위짝만 없어도 맷돌을 쓸 수 없으므로, 절대로 저당잡지 말라고 명했다. 밀가루를 빻아 매일 떡을 해먹어야 하는데 맷돌이 없으면 끼니를 굶게 된다. 그래서 맷돌을 전당 잡는 것은 생명을 전당잡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의 도적질은 일용할 생계를 위협하니까 바로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다. 율법은 도둑질을 살인과 같은 범주로 취급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일 센트도 깨끗하게 갚으라.
물론 오늘날 한국과 미국에 사는 우리로선 기본적인 생계는 걱정하지 않는다.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면 정부나 구호 단체에서 돌봐준다. 불신자들도 남에게 피해를 안 주고 경우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가 많다. 예수 믿은 신자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그래서 이 여덟째 계명이 실감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제사장 나라 시민으로 이해 적용해야 한다.
너무 거창하게 여길 것 없다. 투명 공정하게 하되 아예 도적질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형제간에 송사가 생기면 한 고드란트까지도 갚으라고 했다.(마5:25,26) 고드란트는 로마 시대의 가장 적은 화폐 단위 동전을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일 센트다. 마지막 1 센트도 깨끗하게 정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뜻 안에선 일 센트도 밀리언의 도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바늘 도둑과 소 도둑을 차별하여 벌을 주고 구약 성경도 현실적 처리방안으로는 소와 양의 도적질을 구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선 바늘 도둑과 소 도둑의 구별은 없고 다 같이 도둑일 뿐이다.
이 계명에서 도적질이란 경제 범죄를 총칭한다. 경제적 용어로 정의하자면 어떤 형태의 재화(財貨, Goods)든 그 소유권은 물론 운영권을 불법 내지 편법으로 탈취하는 것이다. 경제구조가 복잡해진 오늘날에는 옛날에 저울을 속이는 것 같은 교묘한 도적질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중계약서를 작성하는 것, 분식회계를 하여 적자인데도 이익이 난 것처럼 해서 주주를 속이는 것, 내부자 정보를 이용해 부당 이익을 취하는 것, 권력자 위치에서 도시계획 정보를 아니까 그대로 미리 투기하는 것, 등등이 다 도적질이다. 최근에는 비트코인을 해킹하는 것처럼 그 종류와 수법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신자는 단 하나의 원칙만 실현하면 된다. 예수님 말씀대로 단 일 센트라도 깨끗하게 행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의 회사에선 부서별로 회사 돈으로 회식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부원끼리 나눠가지는 일이 있다. 그 때에 나는 크리스천으로써 참여 못한다고 담대히 선언하는 것이다. 실제로 제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회원 중에 이런 문제로 지금까지도 저와 심각히 상담중인 분이 있다. 그것도 어린아이를 가르쳐야 하는 학교 선생님이다.
혹시라도 마누라 몰래 비상금 구좌를 갖고 있는가? 그것도 도적질이다. 지난주에 부부는 카톡이나 이메일이나 페이스북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공유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더 나아가 인터넷 뱅킹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도 공유하지 않으면 도적질이다. 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일 센트도 깨끗하라고 했고 창세기에서도 부부는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시간을 도적질 하지 말라.
도적질의 대상으로 경제적 용어로 재화라고 말씀드렸다. 제품 같은 물건만 뜻하는 재물이 아니다. 용역(service)처럼 눈에 안 보이는 가치와 의미까지 포함하는 넓은 범주다. 대표적인 예로 약속 시간에 늦으면 상대의 시간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그 시간에 상대는 돈을 벌 수 있고 여러 의미 있는 일도 할 수 있다.
제가 다녔던 미국 신학교 교수 한 분은 Term Paper 제출 마감 시간을 일초라도 어기면 무조건 한 Grrade 낫게 점수를 매겼다. 남들보다 시간을 더 많이 사용했으면 아무래도 더 내용이 좋아지고 인용도 더 많이 하게 되므로 불공평하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다. 둘째로, 사실은 더 중요한 이유로 예배 시간에 성도는 늦게 참석할 수 있어도 목사는 일초도 지각해선 안 되니 미리 연습 훈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제가 어른이 되어서 사회생활하면서 나름대로 철저히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다. 남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남을 기다려 주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고 실제로 지금껏 철저히 지켰다. 여러분들도 가능한 그렇게 되길 소원한다.
목사가 된 후에는 이 원칙이 더 발전되었다. 우리 중에 예수님의 긍휼이 한 시라도 필요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저부터 그렇다. 그래서 어떤 불신자라도, 특별히 성도는 현재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결코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대신에 과거에 어떤 상처와 시련과 아픔이 있었는지 읽어내려 애를 쓴다. 또 현재도 그 사람만의 특유한 사정과 입장이 있다고 보고 매사를 판단하려 한다.
나아가 앞으로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 가운데 어떻게 변화될지 기대한다. 그래서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여러분보다 유일하게 잘하는 것인 성경 말씀을 가르쳐서 거룩하게, 최소한 그렇게 될 힘을 얻게 하는데 아주 조금이나마 쓰임 받거나 그런 통로라도 되는 일에 매진한다. 어떤 이들은 목사로서 이렇게 저렇게 명하고 앞장서서 시켜야 한다고 저에게 권한다. 그러나 저는 누구라도 성령으로 변화되어서 자발적으로 헌신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을 지금껏 목회 원칙으로 삼고 실천하고 있다.
도적질을 하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타인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탈취하는 것이 도적질이므로 내 것과 남의 것을 정확히 구분하면 된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은 만남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즐겁게 교제하거나 큰 거래가 성사됨으로 시간에 여유를 가지면 좋긴 하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예컨대 빌게이츠 같은 이에겐 일 분이 엄청난 돈이 된다.
그런데 실은 이런 의미로는 불신자들도 잘 알고 실천도 잘 한다. 센트는 물론 시간처럼 보이지 않는 가치도 도적질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면 윤리적 계명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최고급 수준을 실행한 것뿐이다. 신자는 하나님 뜻 안에서 도적질의 정의를 재정립해야만 한다.
문제는 하나님 뜻이라고 하면 일단 자기 생각에 도덕적으로 가장 선하고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한 쪽으로만 헤아리려 든다. 잘 들으셔야 한다. 자기 생각에 최고를 꼽으니까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죄에 찌들고 불완전하며 오류투성이인 인간의 생각으로 어떻게 하나님 뜻을 함부로 판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뜻은 당신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계시인 성경 말씀 안에서만 찾아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통치하시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제사장 나라, 신정 국가의 국민으로써 가장 먼저 알아야 것을 정확히 구분하여 적용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속이지 말라.
제사장 나라 시민의 경제윤리인 여덟 번째 계명을 실천하는 것도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을 정확히 구분하여 그분의 것을 도적질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면 지금껏 주로 십일조나 작정헌금을 속이지 말라는 뜻으로만 가르쳐져 왔다.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로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들었다.
그 부부는 땅을 판 돈을 얼마 감추고 일부만 헌금함으로써 하나님께 벌을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물론 하나님을 속였으니 너무나 큰 죄이고 당연히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정작 알아야 할 내용이 또 있다.
베드로가 이 돈이 전부냐고 질문했을 때에 순순히 잘못을 고백 회개하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만 속인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즉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제사장 나라를 기만하고 우습게 안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들은 제사장 나라 시민이 되려는 헌신은 물론 그런 인식조차 없었다. 대신에 오직 자기 이름만 높이려 들었기에 벌을 받은 것이다. 자기 이름을 하나님보다 높이는 것이 바로 타락한 죄이지 않는가? 또 여전히 그 상태에 있으니까 구원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런 기사를 보고 두려워서라도 감히 하나님을 속이지 못한다. 솔직히 각자 헌금하는 원칙을 낮게 측정해 놓는 것이 문제이긴 해도 말이다. 교회 즉, 제사장 나라를 섬기라고 해서 재산 팔아 교회에 바치고 또 목사를 최대한 섬기라는 의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는 전혀 없다.
열방 중의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재물관을 갖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 중에 단 일 센트라도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 나의 삶, 내 인생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게 입술로는 다들 고백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한다. 흔히들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 이것만 해결해주시면 감사 헌금 얼마 하겠다고 작정한다. 얼마나 힘들면 그렇게 하겠는가? 그 의도는 순진하고 착하고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그렇게 해결 받아 얻는 유익이 자칫 내가 교회에서 헌금과 봉사와 기도를 많이 했고 심지어 선행을 많이 한 것에 조금이라도 기인한다고 여기면 그것은 내 공로가 된다. 그 일도 내 것이다. 그럼 헌금이 마치 하나님이 해결사로 수고했으니 수고비조로 보상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또 하나님과 그렇게 해결한 후에 즉, 수고비로 감사 헌금 한 후의 모든 것은 내 것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럴 수는 절대로 없다.
인생은 버리는 싸움
인생은 결국은 버리고 비우는 싸움이다. 이는 불신자나 신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아주 큰 차이가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불신자도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됨을 잘 안다. 그래서 버킷 리스트도 실천하고 욜로(YOLO-You only live once.) 인생으로도 살아보지만 자아 충족이 절대 안 된다. 한 결 같이 인생이 허무하다고 엔딩 자막을 찍는다.
신자에게도 온갖 고난이 닥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생이 단순히 헛되고 헛되어서 버리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까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비우고 버리는 것이다. 신자의 인생은 바로 그런 훈련의 과정이고 그럼으로써 나중에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된다.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의 것을 버리면 버릴수록 하늘의 신령하고 거룩하고 가치 있는 것들로 대신 채워주신다. 그런 참 기쁨과 감사가 절로 넘치는 체험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이 신자의 인생이다.
요한계시록 4:10절에는 천국의 24 장로가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심지어 자기들이 받은 면류관을 보좌 앞으로 던지며 돌려드린다고 했다. 흔히 천국에 받을 상급을 소망하며 살라고 가르친다. 이는 절대적으로 옳은 영적 진리다.
그러나 막상 천국에선 이미 그 상급마저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오직 어린 양 예수만이 알파요 오메가, 처음이자 끝이다. 신자에겐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분이 상급이자 그 전부다. 상급조차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천국 시민의식이다. 그것을 이 땅에서부터 지향하여 내 것 전부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훈련을 하는 것이 제사장 나라인 것이다..
이런 원리를 예수님은 마태복음 6:19-24에서 아주 간단하고도 쉽게 설명하셨다. 무엇인가?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무엇이 너의 주인인지 분명히 하라고 했다. 땅에 쌓는 보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것을 모르는 자는 불신자다. 또 조금 깨인 불신자는 재물 대신에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지만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께로 온다는 진리를 모른다. 죄로 타락한 자기 의로 의미를 추구하니까 실패할 수밖에 없다.
대신에 예수님은 신자는 보물을 천국에 쌓아야 한다고 했다. 천국 상급을 구하라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바로 면류관마저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늘의 진짜 보물이다.
불신자는 세상에 재물을 가능한 많이 쌓는 인생을 성공했다고 여긴다. 신자는 하늘에 더 많이 쌓아야 즉, 하나님께 더 많이 돌려드리는 인생이 성공한 것이다. 또 불신자는 어쩔 수 없이 버리는 싸움이 그 인생의 결말이지만 신자는 기꺼이 감사하며 비워나가는 과정이 그 인생이다.
하나님의 것을 훔친다는 뜻은?
예수님 가르침의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포인트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데에 모인다. 그럼 두 주인을 함께 섬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셈이다. 교회에 모여 출세 형통만을 목적으로 열심히 뜨겁게 기도하여 얻으려 한다. 하늘의 하나님의 것을 그 기도로 더 많이 받아내고 그러는 것이 더 좋은 믿음이라고 여기지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신자는 내 인생에 발생하는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것임을 믿는 자다. 그분만이 그 소유권을 지닌다. 나아가 그 모든 일들이 그분에 의해 계획 통치 결말지어짐도 인정한다. 그 운영권도 그분이 가졌다.
그런데 재물이 내 인생을 좌우하게 하고 재물이 내 인생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운영권을 재물에게 내어준 것이다. 내 인생이 전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그 전부나 일부를 재물이 소유권 내지 운영권을 차지했다. 내 인생의 운영권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다면 그것도 그분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다.
목사가 이런 예까지 들어야 하니 참으로 죄송하고 불행하다. 한국 서울의 가장 큰 교회는 지하차도를 편법으로 그 운영권을 차지했다고 말썽이 났다. 그 운영권은 서울시 즉, 서울시민의 몫이다. 물론 그 사용료는 내겠지만 실제로 운영권을 얻는데 불법이나 편법이 동원되었다면 분명히 도적질 한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삶을 사셨다. 하나님이 시키는 일만 하셨다. 아버지가 일하니 당신도 일한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님은 이 땅에서부터 당신의 마음을 오직 하늘에만 두었다. 신자도 예수님이 주관해야 할 인생을 내 생각으로 내 계획대로만 운영하면 주님의 운영권을 그 교회처럼 도적질하는 것이다.
하나님 것을 훔치지 않고 있다면?
십계명의 이 여덟째 계명은 신자에게 정말로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네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여건과 주변에 맺어준 모든 사람과 발생하는 사건과 심지어 시간처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보이지 않는 가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인지 묻고 있다. 또 그 운영권도 하나님께 있는 것을 즉, 그분의 완벽한 계획과 주권과 섭리 아래에서 그분이 당신의 뜻대로 통치하고 있음을 확신하는지 그래서 그분께 내어드리고 있는지 묻고 있다. 입술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지 말이다.
정말로 그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고난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신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가 없다. 하나님과 예수 십자가 안에서 화평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으며,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에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게 된 자가 신자다. 물론 우리의 체질이 연약하고 아직 죄로 타락한 흔적이 본성에 남아 있기에 참으로 초라하다. 그럼에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즉, 하나님께 모든 소유권은 물론 운영권마저 넘겨드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 기분, 생각, 믿음, 소망마저도 죄로 타락한 나의 본성에 내어주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를 삼키려 눈앞에 웅크리고 있는 사탄에게 빼앗기게 할 수 있다. 성령의 은혜로 충만해져야 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하나님의 것을, 빛 가운데 있는 것을 흑암에 다시 밀어 넣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자 최소한 도적질을 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꼴이다. 구약 율법조차 도적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죽여도 살인죄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말이다.
신자의 인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맞바꾼 것이다.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넘친다. 그분의 소유이자 그분의 전적 운영권에 맡겨져 있기에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생이다. 모든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것임을 실감하고 내어드리는가? 내어드릴수록 그분이 채워주는 은혜로 기쁨과 감사가 넘침을 체험하고 있는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전부 그분께 돌려드려야 한다.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남편, 아내, 자식, 직장, 집, 자동차, 은행통장 등등을 말이다. 내 것은 그분께 드려야 하지만 남의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남들과 그들의 소유도 전부 하나님의 것이지만 내가 그분께 돌려줄 수는 없다. 대신에 남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면 된다.
지난주에 우리 교회를 방문해주신 젊은 부부에게 모두 큰 도전을 받았지 않는가? 겨우 열 명 남짓한 교인들을 섬기며 강원도 시골에서 삼십년 가량을 한 곳에서 성실히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의 아들이었다. 그 아버님 목사님도 대단하지만 그처럼 가난한 목사님이라 미국 유학 올 경비를 도무지 댈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Post-Doc. 과정까지 마쳤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직장이나 거처나 가진 소유가 하나도 확정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시골로 들어가 두 아들을 집에서 정규학교과정을 가르치는 홈스쿨링(Home Schooling)도 아니고 완전히 놀리면서 스스로 진로를 찾아가도록 하는 노스쿨링(No Schooling)으로 양육하려고 결단했다.
우리도 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같으면 모든 재산을 팔아서라도 아이들을 위해서 좋은 것으로 다 마련해주려 할 텐데 너무나 다른 삶의 모습이다.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 아들들의 장래마저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겨버렸다. 지금껏 그들의 삶에서 그분의 완전하시고 미리 예비해주시는 은혜를 매 순간 체험했던 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와 온전한 헌신을 본받아야 한다. 목사인 저도 너무나 큰 도전을 받았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할 것을 꿈도 꾸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고 오묘하고 완벽하시다. 그분의 그 광대하심을 조금이라도 제한해선 안 된다. 믿음이란 그 광대함 안에 자기를 얼마나 많이 내어맡기느냐의 싸움이다. 너무 거창하게 따질 것 없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이 한 시라도 없으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그분에게 전부를 내어드리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그럴 수 없으면 쉬지 말고 기도하면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내 인생의 소유권 운영권을 내어주게 됨을 잊지 말라는 것이 바로 오늘 여덟 번째 계명의 온전한 뜻이다.
3/11/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