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난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가?
2018 고난주간 설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36-46)
반장이 대표로 받는 벌
저희가 학교 다닐 때에는 간혹 학급 전체가 잘못한 일을 선생님이 반장 혼자에게 대표로 벌을 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잘못한 행위나 잘못한 학생의 숫자만큼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의 심정이 참 착잡했던 기억이 있다.
반장은 아무 잘못한 것이 없었고 오히려 선생님 지시대로 조용히 자습하자고 독려했다. 그런데도 억울하게 혼자 벌을 받으니 참 불쌍하고 또 우리 대신에 벌을 받으니 고맙다는 것이 물론 그 첫째 반응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벌을 안 받으니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또 반장이니까 당연히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여겼다. 내가 실력과 지도력이 모자라 반장 선거에서 떨어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고 여겨졌다. 심지어 다음에 잘못을 해도 반장이 또 대신 맞아줄 것이 예상되니까 잘못에 대해 반성도 심각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런 식으로 벌을 내리는 선생의 인격이 의심스러웠고 도무지 불합리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그날 아침에 부부싸움 한 화풀이를 그렇게 하나도 싶었다.
금주는 교회 절기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주간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는 밤새도록 한숨도 주무시지 못했다. 대제사장, 빌라도, 헤롯, 다시 빌라도의 법정에서 네 번이나 재판을 받았다. 유대관원들과 그 하속들 또 로마 군병들로부터 온갖 조롱 멸시를 받았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채찍으로 맞았다. 완전히 탈진하여서 통상적으로 사형수가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 나무를 구레네 시몬이 대신 져주었다. 결국 인간이 고안해낸 처형 방안 중에 고통이 최고로 극심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운명하셨다.
신자는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회상하며 이번 주를 경건하게 보내야 하는데 한 가지 우려되는 사항이 있다. 혹시라도 반장이 내 대신 벌을 받는 모습을 보는 불신자 시절의 저와 같은 심정으로 보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주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고 또 그와 동시에 내 대신 벌을 받아주어서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여기까진 괜찮다.
내가 하나님께 그런 참혹한 형벌을 받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치우는 것은 아닌가? 또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니까 당연히 내지는 어쩔 수 없이 그런 벌을 받아야지라고 여겨지지는 않는가? 나아가 내가 목사나 선교사가 되지 않고 일반 성도로 남아서 세상의 핍박을 받지 않고 내가 희생할 걱정이 없어 잘 됐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과거의 모든 죄는 물론 앞으로 지을 죄 값까지 다 감당하셨다고 한다. 천국입성은 보장되었다. 그래서 세속의 쾌락과 죄들을 아직은 더 즐겨도 되고 옛 습성을 구태여 버리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으며, 심지어 습관적으로 알게 모르게 짓는 죄의 회개도 천천히 미뤄도 되겠다고 여겨진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들이 고난주간에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도 하지 않을 만큼 나태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불경스러운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진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는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또 그렇게 하는 성경적 근거로 마지막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오늘의 본문을 든다.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셨다. 그러나 당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결국은 아버지 뜻대로 순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쉽게 판단하고선 고난주간에 십자가 처형의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근심으로 가득 찼다는 뜻은?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연약한 육신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님도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참혹한지 잘 아셨다. 메시아로 오신 주님으로서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염려했던 것은 분명하다. 또 일차적으로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큰 무리는 없지만 많이 부족한 면이 있다.
우선 38절을 다시 자세히 보라.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했다. 죽는 것이 너무 염려되어 크게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음의 고민이 너무 심해서 죽을 정도라는 것이다. “죽게 된 것”은 고민이 너무 크다고 그 세기를 최고조로 강조하는 수사법이지 죽음 자체나 그에 대한 고통을 의미하는 언급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실제로 고민했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물론 십자가 처형의 고통도 고민거리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죽음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는데 죽음이 너무 고민스러워 죽을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불합리한 진술이다. 바로 이 표현법 때문에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주님의 첫째 혹은 주된 고민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했다. 잠시이긴 하지만 성부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이 너무나 괴로웠을 수 있다. 그러나 곧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이기에 이 또한 이차적인 의미가 된다.
이 구절을 영어성경이 “sorrowful”이라고 번역했듯이 원어의 뜻은 슬픔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너무 슬퍼서 죽을 지경이었다. 영어 번역 그대로 painful(고통스럽다) 혹은 very anxious(매우 염려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제자들더러 머물러 있어 함께 깨어있으라고 했다. 혹시 기도하는데 방해되는 사람이나 동물이 나타나는지 또는 가룟 유다 일행이 잡으러오는지 불침번(不寢番) 서라는 뜻이 아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했다.(41절) 내 슬픔의 기도에 너희도 동참해 함께 기도하자, 쉽게 말해 함께 슬퍼하자는 뜻이었다.
부활한다고 큰소리친 예수님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 처형에서 겪을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불안하니까 너희도 기도해서 처형을 면하게 해달라, 어쩔 수 없이 처형당하게 되더라도 성령이 역사하여 그 고통을 못 느끼게 혹은 약하게 겪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할 리는 없지 않는가?
죄송한 표현이지만 주님은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여러 번 큰소리치셨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가 닥치자 제자들에게 아주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
또 예수님이 그 동안 사역할 때 보여주었던 모습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갈릴리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치자 어부로 잔뼈가 굵은 제자들조차 죽게 되었다고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주님은 뱃머리에서 아무 일 없는 양 평안하게 주무셨지 않는가?
누가복음의 본문과 평행기사인 22:41에는 돌을 던질만한 거리만큼 제자들과 떨어져서 기도하셨다고 한다. 약 10-20 미터 정도일 것이다. 평소에는 다른 이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고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던 주님이 바로 제자들 곁에서 기도하셨다는 뜻이다. 거기다 한 밤중이라 스승이 기도하는 소리를 제자들이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너무 불안하고 걱정됩니다.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잔인하고 처참하고 고통스러운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발 십자가만 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과연 기도했을까? 또 그런 내용을 제자들이 다 들었다면 메시아로서는 물론 스승의 권위가, 말하자면 삼년 동안 쌓은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지 않겠는가?
정말로 십자가 처형만이 걱정되었다면 세 번이나 제자들이 깨어서 기도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오실 마음의 여유는 없다고 봐야 한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하느라 골고다 언덕에서 당하신 모멸, 조롱, 고통의 크기를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예수님이 정말로 걱정하고 슬퍼했던 이유와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만 우리도 이 한 주간을 진정으로 경건하고 신령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그 의미는 아주 간단하다. 주님은 제자들과 육신적으로 이별하는 것이 너무 슬펐던 것이다. 지금 어떤 상황인가? 요한복음에 따르면 방금 전에 제자들에게 고별 설교를 했고 또 그들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다. 그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너희 중에 한 명이 배반할 것을 예고하셨다.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가룟 유다를 향해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고 유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식사 중에 제 갈 길을 찾아서 가버렸다.
그 전에도 몇 번이나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럼 제자들로선 오늘 밤이 바로 그날임을 알 수 있고 최소한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지 않는가? 그럼 함께 이별을 슬퍼하며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제자들이 부활을 확신하기에 마음을 턱 놓았을 리는 만무하다. 십자가 죽음의 의미도 모르는데 부활은 더더욱 그냥 그런가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예수님이 세 번이나 다시 와서 확인할 정도로 잠에 골아 떨어진 제자들이다.
말기 암으로 죽게 된 엄마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이 땅에 두고 차마 지금 하늘로 올라갈 수 없었다. 십자가에 오르겠다는 자발적인 헌신과 각오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부활은 하지만 곧 승천해야 한다. 또 부활 후에는 신성과 그 권능이 완전히 회복되어 하나님 본체로 돌아갈 것이다. 제자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만남은 오늘밤이 마지막이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렇게나 나태하고 어리석고 당신에 대한 믿음조차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다. 영원한 생명의 본질에 대해선 감도 못 잡고 있다. 제자들을 볼 때 얼마나 근심이 앞서겠는가? 이런 측면에선 우리말 성경이 ‘슬픔’보다 ‘고민’이라고 번역한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비유를 하자면 서너 살짜리 아이를 두고 말기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의 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 동안에 많이 극복했을 것이다. 반면에 어린 자식을 볼 때마다 어떤 심정이 들겠는가?
아이는 엄마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모르고 죽는다는 것조차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앞으로 고아가 되어 혼자 겪을 온갖 고생과 삶의 무게는 짐작도 안될 만큼 크다. 엄마로선 아이를 쳐다볼 때마다 가슴은 찢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바로 내일이 의사가 말한 시한부 D- Day라면 그 전날 밤에 아이의 얼굴을 보고 또 보면서 완전히 머리에 각인시키려 들 것이다. 지금 주님은 그런 심정으로 세 번이나 기도 중에 오셔서 제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피셨다.
지금 평소에 가장 사랑했던 제자 셋을 데리고 갔지 않는가? 예수님으로선 이 땅에서 진짜로 마지막 드리는 기도다. “하나님 아버지 저들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으면 안 됩니까?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 있게 더 가르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수제자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이고, 나머지 모두는 도망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베드로는 나중에 철저히 회개하고 십자가에 바로 달리는 것도 자기에게 과분하다고 여겨서 거꾸로 매달려 예수님 당신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을 것도 알고 있었다. 도망갔던 다른 제자들도 모두 십자가에 달려 순교할 것이고, 의심 많던 도마도 전승이 사실이라면 사지(四肢)가 말에 끌려서 산 채로 찢어져 죽을 것이다. 제자들 모두 어떤 핍박을 받을 줄을 알고 있었다. 스승으로 슬픔으로 죽을 지경이 안 될 수 없다. 그래서 뭔가 다른 길은 없는지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보라. 주님으로서 이 땅에서 마지막 기도인데, 말하자면 어린 자식을 두고 가는 엄마인데 그 마지막 날 밤에 어차피 죽을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겠는가, 두고 가는 자식을 위해 기도하겠는가?
슬픔과 분노에 가득 찼던 예수
예수님이 이처럼 슬픔으로 가득 찼던 때가 또 있었다. 예루살렘 입성하기 직전, 고난주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영어로는 단어 둘로 된 문장, “Jesus wept.”인데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다. 속으로 흐느끼셨다는 뜻이다. 슬픔이 당신의 가슴에 가득 찼다.
친구 나사로가 죽은 탓만은 아니다. 당신께서 그를 죽음에서 곧 소생시킬 것이다. 꼭 그렇게 슬퍼해야 할 이유로는 부족하다. 주변의 모든 인간들 즉, 누이들과 초상집에 문상 온 유대인들과 당신의 제자들이 진짜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영적 생명의 살고 죽음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이 너무나 슬펐던 것이다. 이 땅이 전부인양 육신의 호사와 풍요와 안락만을 모든 인생들이 목표로 삼아 허덕거리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유대인들도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는 부활이 있으리라는 신앙을 어렴풋이 가지고 있긴 했다. 그때가 이를 동안에는 아무 의식도 없이 ‘스올’(음부)에서 잠자며 대기하는 것으로 여겼다. 바꿔 말해 마지막 날이 언제 이를지 모르니 실질적으로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그 인생은 끝났다고 본 것이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11:25,26)는 말씀도 제자들에게마저 소귀에 경 읽기였을 뿐이다.
이 때 주님은 슬퍼하시면서 동시에 크게 분노하셨다. 사탄이 최초의 인간더러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로 타락시키는 바람에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과 권능을 등지게 된 사실에 말이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들조차 그분께 선택된 민족으로 거룩한 율법을 소지하고 있기에 구원은 확보되었다고 과신하는 대신에 자기들은 구제, 기도, 십일조, 선행에 열심인지라 그에 상응하는 현실적 보상만 바라고 있었다. 또 율법을 잘 아는 유대인들일수록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민족 반역자 세리들과 음란한 창녀와 귀신 들린 자 불치병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치부하고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다. 또 그러는 것이 거룩한 백성이 행해야 할 거룩한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또 그런 자들이 종교 정치 지도자가 되어서 백성들을 오도했다. 종교 장사로 자기들 배만 채우고 있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들 수입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주님을 박해하려 드니 얼마나 화가 치밀었겠는가? 또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의 흑암의 세력에 대해 주님은 극도로 분노하셨다.
바로 그 자리 즉, 부활 소망이 전무한 유대인들과 사탄의 종이 된 줄도 모르고 외식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하여 다시 살려내었다. 부활이 궁극적인 마지막 날의 일이 아니라 하늘에선 이미 확정된 미래로 이제 곧 당신의 부활을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된 과거로 바꿀 것이다. 그 영원한 생명의 생생한 예표로 나사로를 미리 다시 살린 것이다.
표정 관리가 너무 힘드셨던 예수님
예수님의 이 땅에서 마지막 일 주간은 나사로 무덤 앞에서 품었던 인간들에 대한 슬픔과 사탄에 대한 분노의 심정으로 지내셨다. 그러다 십자가를 지셔야 할 전날 밤에 그 감정이 폭발할 지경이 되어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그 주간의 첫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마 21:9)라고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표정을 관리하기에 너무 힘이 들으셨을 것이다.
이제 나를 메시아로 알아보니 너무 기쁜데 마냥 좋아하자니 경망하게 보일까봐 걱정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루살렘 백성들이 열렬히 환영했다는 기록뿐이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선 모두 침묵하고 있다.
주님은 이제 곧 사흘만 지나면 저들이 표변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들이 열렬히 바랐던 육신의 생명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을 당신께선 하나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들은 또 다시 사탄의 농간에 조종당해 당신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을 다 아셨다.
그렇다고 구태여 그런 근심어린 내색을 하여 지금의 열렬한 환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지 않는가?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내심 참으로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입성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내심에 슬픔이 가득 차서 일주일 내내 그런 심정으로 지내시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그럼 신자가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크고 참혹했을까 연민의 정으로 보내는 것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것 아닌가? 지금 천국 보좌에 좌정하신 주님에게 슬픔을 가중시키고 걱정을 더 끼쳐드리는 짓밖에 더 되는가?
주님의 고난보다 그 슬픔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도 주님처럼 죽을 만큼 슬퍼해야 한다. 무엇에 대해서 슬퍼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다. 인간들의 비참한 영적 상황에 대해서다. 또 이 세대의 영적으로 사악해진 흐름에 대해 죽기까지 저주하며 분노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고난주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지금껏 사실상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내 자신의 영적인 무지와 가난하고 초라한 영성에 대해 애통해야 한다. 십자가 구원 진리 외에 인간 구원의 길이 없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그 은혜 안에 있는 내 새로운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지 체험적인 확신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은혜 안에 붙잡혀 있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 앞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고 있는지 재점검해봐야 한다.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가 주님에 대해 슬퍼하고 연민을 갖는다는 것, 하나님이신 그분을 인간 주제에 마치 염려해주는 것 같이 여기고 행하는 것이 너무나 말도 안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십자가 구원이 너무 귀해서 일 년 중에 일 주일을 따로 떼어 주님의 십자가에 당하신 고통에 대해서 감사 회상하는 것은 순진하고도 선한 의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혼자 남겨진 서너 살짜리 아이가 암으로 돌아가신 엄마가 유서로 남겨둔 편지를 발견하고 읽었다 치자. 신자에겐 그게 바로 성경 그 중에도 사복음서인데 두고 갈 제자들에게 “너희가 곧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엄마의 유서에도 혼자서 담대하게 살라 하늘에서 내가 너를 지켜보겠다는 유서를 남길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가 계속해서 엄마는 “왜 나를 이 모양으로 혼자 남겨두고 먼저 죽어서 나를 죽도록 고생만 시키는가? 유산을 많이 남겨 두지는 못해도 최소한 먹고 마실 것 걱정하지 않을 정도만 남겼어도 내가 생활고에 부대끼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해서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엄마가 너무 원망스럽고 밉기까지 하다.” 계속해서 불평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을 위해 헌신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말은 쉬워도 그 실천은 저부터도 제대로 못한다. 우리는 그런 실력이 못 된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하늘 보좌에서 365일 24시간 7일 내내 우리를 염려하여 보호하고 인도해서 하늘의 모든 귀하고 참된 생명으로 채워주신다.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영광에 동참시키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셨고 또 끝까지 전혀 변함없이 사랑해주신다. 고난주간에는 그 사랑을 진짜로 실감해야 한다. 겉으로 입술로만 주여, 주여 외치며 심각하고도 경건한 표정만 지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고 즐겁게 보내야 한다.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서 당신의 영광으로 인도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주님은 세 번이나 제자들의 상태를 확인하러 오셨다. 아직도 주님의 사랑을 누리지도, 알지도, 아니 받을 수도 없는 불신자들을 바로 그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서 그들을 향해 진심으로 눈물 흘려야 한다. 불신자를 가장 먼저 도와야 할 측면이 현실적 어려움이 아니다. 그들의 영적 가난 피폐함을 보고 눈물이 나지 않고 최소한 가슴이 메어지지 않는다면 솔직히 신자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고난주간에 대해서 처음에 들었던 반장의 비유에 비추어 설명해보자. 주님이 내 대신 죄 값을 감당하고 죽으심으로 얻게 된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최소한 미안해하는 것까지는 아주 좋은 반응이다. 그런데 일반 신자로 남아 있어서 핍박이나 손해를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거나 앞으로 죄를 지어도 용서하는 은혜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신자가 절대로 가져선 안 되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예수 믿는 모든 신자는 불신자들 앞에서 반장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주님의 사랑만이 모든 인간에게 알파요 오메가임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벌을 받아야 한다. 자신의 외적 현실이 궁핍해질지라도 이웃의 내적 영혼이 충만해지게 하는 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 목적을 다시 확립하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야만 신자가 고난주간을 정말로 주님 뜻에 맞게 올바르게 보내는 것이다.
3/25/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