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평생토록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
출애굽기 강해 (52)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출24:1-11)
기괴한 피 뿌림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계시한 후에 살펴보지 않았지만 20:18에서 23장까지 각 계명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안들도 지시했다. 오늘의 본문은 그 계명들을 모세로부터 전해들은 백성들이 순종을 다짐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상상해보면 뭔가 기괴한 느낌이 든다. 각 지파별로 돌기둥을 세운 것(4절)은 빠짐없이 모두가 순종을 맹세하는 표식이요, 이 뜻깊은 날을 기념하겠다는 의미이므로 이상할 것 없다.
그러나 제물로 바쳐질 동물들의 피를 다 뽑아서 양푼에 담았다가 반은 제단에, 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렸다.(6,8절) 방금 많은 짐승을 도축했다, 번제물로 완전히 태웠다. 그럼 그 현장에는 고기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을 것이다. 거기다 백성들의 머리 위로 피가 방울져서 흘러내렸다.
이런 절차를 마치자 비로소 모세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실 수 있었다. 번제를 필한 후에야 화목제를 드리도록 허락했다는 뜻이다.(5절) 율법이 피의 제사를 요구하는 이유는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피 흘림은 죽음을 뜻하고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불가능함을 이미 배워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은 출애굽 구원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전 약 오백 년 전의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신다는 언약에 함께 참여된 믿음의 후손이다. 출애굽 후에 이곳에 이르도록 이스라엘이 당신에 대해 온갖 불평을 하고 거역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어도 다 용서하신 것이 그 증거다. 그런데 다시 백성들의 머리에 꼭 피를 뿌리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의아스럽다.
제사장 나라의 특권
이 절차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그 동안의 경과를 전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출애굽 후에 우여곡절 끝에 만 2개월 만에 이스라엘을 신 광야로 이끌었다. 시내 산에 강림하신 여호와가 모세 혼자만 불러 올려서 이스라엘에게 첫 약속을 주셨다. 무엇인지 기억하는가?
“애굽에서 독수리 날개에 업어 내듯이 이스라엘을 구원해낼 때 너희가 이미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보고 체험했지 않느냐? 애굽이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당신의 통치 아래 있듯이 세계가 다 당신께 속했음을 알 것이다. 특별히 너희가 내 말과 언약을 준행하면 당신의 소유로 삼고 열국 앞에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주겠다”라고 약속하셨다.(출19:4-6)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확장하여 재확인한 것이다.
모세더러 그 언약에 동참할 것인지 백성에게 물어보라고 했고 이스라엘로선 ‘No’할 이유가 전무했다. 먼저 어떤 민족도 겪지도 알지도 못하는 큰 기적들을 체험했으니 자기들이 여호와의 소유임에 의심할 여지라곤 없었다.
둘째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미처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우상 숭배의 나라이긴 해도 애굽에 있을 때에 제사장의 신분과 특권을 익히 보아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문제와 고통에 대해서 신탁을 받아서 위로 해결해준다. 신들의 뜻을 계시 받아서 왕의 통치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아주 고귀한 신분으로 때로는 왕보다 더 높여지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자기들로 다른 나라를 지도하여 여호와를 따르게 하는 일을 맡기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겠다고 했는데 착하게 사는 것을 마다할 리는 없다. 타민족의 노예로 살 때에는 생존에 급급해서 거룩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하나님이 제사장 나라로 세워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테니까 거룩은 쉽게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흔쾌히 동의하자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산위로 불러올렸다. 나머지 모든 백성들은 산 밑에 경계선을 치고 그 선을 넘지 말라고 명했다. 선을 넘으면 모두 죽는다고 경고했다. 대신에 각자가 옷을 빨고 3일 간 성결 의식을 거행하라고 명령했다. 바로 그 3일 간 모세에게 십계명과 관련 규정들을 계시해주셨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도 모세더러 십계명과 관련규정 그대로 백성들이 순종할 것인지 다시 확인하라고 했다. 이스라엘로선 크게 어려울 것 없을 것 같았을 것이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첫 네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최소한의 규정이다. 안식일 지키고 우상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 욕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등은 문제 될 것 없었다.
인간관계에 관한 여섯 계명들도 오늘날의 불신자들조차 얼마든지 잘 지킨다고 큰소리치듯이 그리 까다로운 명령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썼다면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적 사항이다. 흔히 천륜(天倫)이라고 말하는 것들이다. 제사장 나라의 특권을 누리려면 그 정도 수고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피 제사와 물 제사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둘째 서약 후에는 물 제사 대신에 피 제사를 드리라고 명했다. 그렇다면 본문의 피 뿌림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순히 죄 사함을 받는, 말하자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자기 죄를 씻는 절차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 열 번째 재앙을 겪을 때에 애굽 사람과 함께 마땅히 죽었어야 할 죄인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애굽의 우상숭배 제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문에 가로 세로로 바르고 자기들은 집 안에 있음으로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건너뜀으로써 구원을 받았다.
출애굽 후에 여러 번 거역했지만 하나님은 다 용서하고 품어주셨다. 또 지난 3일 간 성결의식을 거치면서 그런 지난 잘못에 대해 참회 회개했을 것이다. 나아가 십계명을 전수 받는 본문의 현장에서 따로 지은 죄들은 없었을 것이다. 구태여 속죄제를 또 드릴 필요가 없다.
주목할 것은 이것이다. 십계명을 전수 받기 전에는 물로 성결의식을 거행했다. 십계명을 받은 후에는 피의 제사를 드렸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고 서약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제사장으로 사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들 머리에 피를 뿌렸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에 출석하여 예수 믿는 신자가 되는 것은 비교적 쉬울 수 있으나, 정말로 신자답게 사는 것은 저를 비롯해 여러분 모두가 지금껏 실감하듯이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다.
예수를 믿는 일은 정말 살고 죽는 생명에 관련된 문제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대신에 우리의 모든 죄 값을 감당하신 대속의 은혜를 이미 입었다. 성령으로 진정으로 거듭나서 주님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여 새 생명으로 거듭났다.
우리가 얻은 이 영원한 생명의 수정 축소 취소는 절대로 없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꿔서 구원해 주셨는데 하나님으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지 못하는 일이다.
대신에 우리가 천국 가기까지 이 땅에서의 삶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의 참 생명의 역사가 풍성이 임한다. 반대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잠간이라도 흑암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파묻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필요가 꼭 있을 때는 순교의 자리에까지 이끌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도 목숨 걸고 실천하라고 명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목숨을 걸며 순종하라고 가르쳤다. 구약의 하나님보다 조금 부드럽고도 알기 쉽게 표현했다 뿐이지 그 내용은 완전히 똑 같다. 간단하게 말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지 않는가? 소금이 되려면 썩어 없어질 세상에 뛰어 들어가 소금 자체는 녹아 없어지면서 세상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또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자기는 죽되 다른 많은 이들로 예수 새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빛을 비추는 등경은 의자 밑에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매달아 모두에게 비춰야 한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다른 이로 알게 해야 한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제사장 나라의 소명을 다시 쉽게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예수님의 신자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오직 하나다. 너희가 죽어서 다른 이를 살려라. 너희 속에는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온다. 너희 자신의 것으로는 절대 남을 살릴 수 없다. 너희 것을 완전히 죽이면 하나님이 당신의 선한 것으로 채워주시고 그 선한 것으로 남을 살릴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시겠다고 언약하신 것도 사실은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복이 지나가는 통로였을 뿐이다. 그를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오늘날의 신자도 불신자에게 예수 십자가 구원을 알게 함으로써 믿음과 구원이라는 선물은 불신자들이 받는다.
현재 교회의 실상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과 그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의 실상은 어떠한가? 하나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모습이 있는가? 없는가? 예수를 따르면서 순교까지 감당할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리기는커녕 하나님의 힘을 빌려 자기를 풍요하게 치장하는 것이 믿음이 갖는 첫째 목적이요 용도라고 가르치고 있는 교회와 또 그렇게 믿는 신자들이 절대 다수다. 그런 교회가 과연 기독교 교회인지, 그 안에 과연 예수님이 계실까? 물론 예수님이 그들 안에도 계실 것이다. 단 그들이 너무나도 어리석고 안타까워서 슬픔을 가득 안고서 말이다.
또 아무 공로 자격 선행 필요 없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교리를 너무 강조했다. 중세 교회들이 교회가 요구하는 사항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하나님 대신에 교회가 구원을 수여하게 되었고 그런 절대 권력을 지니다보니 자연히 절대 부패했다.
그래서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 은혜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강조한 것은 너무 잘한 일이며 필연적인 개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독교 교리를 입술로만 시인하면 되는 가벼운 믿음이 성행하고 또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교회가 세례 내지 침례 증서를 남발하는 값싼 구원이 번창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교회와 목사가 구원을 주관하고 있는 셈이다. 개혁 대상이 되었던 종교개혁 전의 구태로 돌아갔다. 심지어 면죄부를 판매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교회와 목사를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헌금 봉사를 많이 하라고 한다. 돈과 축복을 맞바꾸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놓고 말하기가 너무 뻔뻔스러워 보이니까 예수님과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거룩하게 포장해서 속이고 있다.
신자는 세상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있어야 하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 뜻대로 준행해야 한다는 말은 교회에서 듣기 힘든 정도도 아니다.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고 교회 성장에 방해가 되니까 아예 해서는 안 되는 말, 금기어 리스트에 올랐다.
예수님께선 당신을 섬기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섬기려 이 땅으로 찾아오셔서 사랑을 베푸셨다. 우리가 죄 중에 있을 때에 우리가 그분을 믿고 따를 생각이 전혀 없을 때에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런 사랑을 계속 받고 있다면 그 은혜 안에 거하고 있다면 그분을 따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는가?
주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사랑이 신자 주변을 풍성하고도 사치스럽게 바꿔주는 모습이 아니다. 신자 자신을 거룩하게 세우고 그 영혼의 내면에서 샘솟듯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솟아나게 하신다. 또 세상과 전혀 다른 길로 걸어가게 만드신다. 예수님 당신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신다.
과장된 종교적 의무가 아니다.
예수 믿은 후에 신앙생활이 살고 죽음의 문제라는 것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종교적인 의무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본문 6절에서 피의 반을 제단에 뿌렸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이 당장 지은 죄는 없었다.
물론 모든 인간이 항상 죄에 찌든 본성에 사로 잡혀 있기에 그런 점을 두고 다시 성결의식을 거행할 수도 있을 것이나 이미 3일 간 물로 그런 의식을 거쳤다. 또 십계명을 전수 받는 시점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성과 믿음을 바치는 상징적 절차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둘 다 본문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고대의 언약을 체결하는 의식은 피 뿌림의 절차가 반드시 있었다. 동물을 죽여서 둘로 쪼개 양쪽으로 나눈 다음에 그 사이를 두 언약 당사자가 지나갔다. 어느 쪽이라도 위반하면 죽음의 벌을 달게 받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목숨을 걸고 이 언약을 지키겠다는 서약이다.
지금 피의 반은 제단에 또 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려졌다. 모세는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 피는 “언약의 피”라고 선언했다.(8절) 이미 살펴본 대로 백성들더러 목숨을 걸고 언약을 지키라는 것이고 백성들도 그에 동의했다.
제단에 뿌린 것은 하나님께 뿌린 것을 의미하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도 언약의 피라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이 언약을 안 지킬 리도 없고 똑 죽을 리도 없다. 대신에 하나님 쪽에서 이 언약을 죽기까지 생명을 걸고 지켜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반드시 세우시고야 만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지만 피를 뿌렸다는 것은 어쨌든 죽음을 의미한다. 이보다 약 1,500년 후에 예수님이 그 약속의 상징대로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셨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죄 사함의 구원의 차원을 넘어서 그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온 너희들을 반드시 거룩하게 변화시키겠다는 뜻도 된다. 기필코 모든 신자를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시키겠다는 하나님 쪽에서의 언약을 이행하겠다는 맹세의 절차가 십자가였다.
본문에서 피의 반을 제단에 뿌린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장로 70명이, 그 숫자가 의미하듯이 모든 백성을 대표함, 즉 머리에 피를 뿌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서약한 이들은 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도 죽지 않았고 그분을 대면할 수 있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고 성경은 선언한다.(11절) 존귀한 자란 제사장 장로 같이 일차적으로 그 직분을 의미한다. 그러나 70이 전체를 대표하듯이 피 뿌림의 제사로 언약 이행을 맹세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하나님은 존귀하다고 여겨준 것이다. 아직 그 언약을 전혀 실행도 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말이다.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존귀하게 대우해 주겠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성전의 지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하나님이 직접 찢으셨다. 그래서 십자가 구원 언약에 동참한 신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신분이 되었다.
실제로 예수님이 내를 대신해 죽으신 그 은혜 안에 산다면 어떻게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울이 나를 대신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평생에 걸쳐 목숨을 걸고 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를 믿으면 나와 나 주변을 풍성하고 형통하게 해준다는 약속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아브라함의 언약, 예수 십자가, 요한계시록까지 동일하다. 예수 믿는 것이 인간의 치성과 정성을 드리는 씨름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여 사랑을 베풀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바로 하늘의 참 생명을 이 땅에서 나와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주변 사람이 보아 알 수 있도록 실제로 구현해 내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신자가 평생 자문(自問)해야 할 질문
이제 정말로 솔직하고도 겸허하게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할 질문이 하나 있다. 매일 아침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평생을 물어야할 질문이다. 너는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존귀한 자가 되어 있는가? 그분의 소유이자,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인가?
종교적 의무감을 고취시키려는 뜻이 아니다. 심지어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도록 권면하는 의미도 사실상 아니다. 예수님 그분이 세상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네 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네 대신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느냐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믿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 한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체험으로 그 은혜를 누려야 한다.
바꿔 말해 예수 십자가에서 썩어질 옛 사람이 완전히 깨어져 죽고 새 사람으로 진정 거듭났는지 물어야 한다. 그래서 정말로 예수님의 긍휼 없이는 한 시라도 살지 못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잘 들으시고 오해가 없어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이 갑자기 뜬금없이 아무에게나 목숨을 걸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본문 출애굽의 언약이행 절차를 거치라고 하지 않는다. 신자가 예수 믿겠다고 입술로 동의했다고 무조건 죽기까지 따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신구약 모두에서 절대로 무례, 강요, 협박, 독선, 율법적이지 않다.
정말로 예수 십자가에 철저히 깨어져서 옛 자아가 죽었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에게만 죽기까지 따를 수 있는지, 십자가를 질 수 있는지 물으신다. 나를 따르는 것이 정말로 외롭고 힘들지만 그래도 따르겠느냐? 그러나 그 안에 하늘의 신령한 복이 다 들어 있다고 말하신다.
그리고 그에 기꺼이 화답하는 신자 본인도 사실은 이미 세상에서 주님 없는 삶이 헛되고 헛되어 죽음뿐이었음을 절감했다. 그런 자라야 이사야 선지자처럼 주님 저를 보내달라고 저절로 고백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영혼임을 자신의 지난 체험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고 싶은 소원은 있어도 실천하기는 너무 힘들다. 주님은 그것 까지 다 알고 계신다. 우리 속에 죄와 욕심이 남아 있고 우리의 육신은 너무 연약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태여 피의 제사를 받으시겠다는,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선교사 목사가 되어 순교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세상에 육십억 명이 있다면 육십억 가지의 방법이 있다. 각자가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를 찾거나 부여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정말로 목숨을 걸만큼 가치와 의미가 있는 삶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방법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살아내었고 또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인생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목숨 걸고 따를만한 유일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십계명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서원하는 피 뿌림의 제사를 드린 뜻이다.
4/15/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