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小子)를 실족(失足)케 하는 죄란?
마태복음강해 (179)



http://youtu.be/NjTfDgsrE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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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18:5-11)

신자는 갱단이 아니다.

교회 안에 어린이들이 시끄럽게 뛰어다니고 때로는 강단 위에서 장난치기도 한다. 그럼 근엄하신 장로님이 교회는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이니 조용히 얌전히 있으라고 꾸중한다. 또 그러면 부모님들은 본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잘 영접하라고 했는데 야단치지 말라고 반발한다.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 적용한다고 해서 꼭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바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물론 예수님이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사이에 세우고 가리키며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라고 했다. 당시의 어린이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어른들의 잘못된 인식과 나쁜 관습을 고치려는 의도가 예수님께 없었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 즉, 치유를 바라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나오자 제자들이 아이들은 데리고 오지 말라고 꾸짖은 적이 있었다.(막10:13)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이가 당신께 나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지적하셨다. 이때는 분명히 어린이를 사랑하라는 직접적인 가르침이었으나 본문의 경우는 그와는 다르다.

예수님은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를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물에 빠지거나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 단순히 징계를 받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구원을 받지 못하는 심각하고도 두려운 심판을 뜻한다. 그럼 어린이를 야단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좀 더 확장해서 불쌍한 이웃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다. 또 구원을 얻은 후에 신자가 짓는 모든 죄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실족(失足)의 의미

실족(失足)이라는 한자말은 문자 그대로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이 단어는 다른 이로 가던 길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 악한 길로 들어서게 만드는 것, 죄를 짓게 하는 것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럼 원칙적으로 따져서 신자에게 해당되는 죄는 아니다. 예수 믿은 신자 스스로는 실족하고 또 회개하는 일들을 반복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의도적으로 죄로 이끌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사실은 신자가 아니다. 불신자라도 갱단이 아닌 이상 그렇게 하는 이는 거의 없지 않는가?

예수님은 먼저 소자를 영접하라고 권면하셨다(5절). 이어서 그 정반대에 해당하는 실족케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셨다. 그 둘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한다. 즉 영접하지 않는 것이 실족케 하는 것이며, 실족케 하지 않으면 영접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족과 영접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면 먼저 소자(小子)가 누구인지부터 확실해져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5절)하라고 했다. “이런”이라는 지시형용사로 수식했기에 어떤 특정한 사람을 뜻한다. 또 “하나”라는 것은 불특정 다수 중의 한 명을 뜻한다. 예수님이 불러 세운 그 아이는 아니다. 앞의 설명과 연결시켜야 한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져 천국에 입성하기에 합당한 소자(小子)다.

“나를 믿는 이 소자”(6절)에선 뜻이 더 분명해진다. 예수 믿어서 구원을 얻은 신자다. 본문의 결론(12-14절)도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로 끝난다. 결국 소자란 단순히 어린아이나 세상에서 소외된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의 이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신자다.  

문제는 세상이 신자로 억지로 죄를 짓게끔 강요하지는 않는다. 시험과 유혹은 하지만 신자 스스로 절제하고 이겨내면서 선하고 의롭게 살면 된다. 실족은 문자 그대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신자로 신자답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핍박하고 훼방하는 것이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봐도 하나님이 신자에게 상과 벌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다. 신자를 영접하는 자가 복을 받고, 신자를 실족케 하는 자가 벌을 받는다고 한다. 신자가 아닌 신자 주위의 제 삼자가 받을 상벌이다. 거기다 예수님은 상보다는 벌에 대해서 길고도 무시무시하게 강조했다.  

복음의 놀라운 비밀

본문은 바로 앞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가르침들에 드러나는 일관된 주제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자 본격적으로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할 것을 가르쳤다.

그 가르침을 받을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중에 부활 생명을 자기들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큰 권능으로 역사할지, 그래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선 실감은커녕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스승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을 것만 심히 근심했다. 예수님으로선 그들도 죄인인지라 죄에서 구원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깨닫게 해주고 영생을 선물로 주려고 십자가 복음을 가르친 것이다.

거기다 당신께서 더 이상 지상에 계시지 않을 것에 대비하신 것이다. 앞으로 분명히 신자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을 것인데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길도 오직 당신의 십자가 복음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가르침 안에 복음의 구체적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인가? 바로 5절의 예수 믿는 자를 영접하는 자는 바로 당신을 영접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신자를 당신과 완전히 동격화 시켰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가?

회심하기 전의 바울이 신자를 잔해하려고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향하던 도중에 하늘의 빛 가운데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 때에도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본체로 더 이상 이 땅에 실체가 존재하지 않고 천국 보좌에 앉아계셨다. 그런 하나님이 베드로 같은 사도도 아닌 당시로선 정말 이름도 없는 다메섹의 이방인 신자들을 바로 당신이라고 지칭하셨다.

한 죄인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어린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철저히 낮아져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며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는 순간,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신자 안에 성령으로 내주하신다. 세상 끝 날까지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주님은 단 한시도 떠나지 않고 신자와 영원토록 동행하신다.

구원 후에도 신자가 세상을 살아갈 근거, 목적, 소망, 능력은 물론 그 생명까지도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문자적으로 따져도 그렇지 않은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준다는 교리를 동의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예수님만이 신자의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의 숨은 의도

베드로의 그 유명한 고백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변화산에서 천국 영광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성전세를 내는 사건에서도 목회자나 신자의 납세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신자의 신분이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었다고 가르쳤다. 천국에서 누가 큰지 물은 질문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낮아지는 자가 천국에 입성할 수 있으며 또 그런 자가 큰 자라고 했다. 결국 천국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들만 있는 곳이며, 그래서 제자들더러 천국에선 너희가 침례 요한보다 더 크다고 선언한 것이다. 급기야 본문에 이르러선 신자들을 바로 당신과 동격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무슨 뜻인가? 장차 있을 박해를 이기는 길이 굳센 믿음, 간절한 기도, 뜨거운 찬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더러 너희의 정체성을 깨달으라고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 사랑 안에서 새롭게 얻게 될 신분과 특권을 정확히 알라는 것이다. 예수 믿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아야만 제대로 핍박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신자를 당신과 동격화 한다는 말씀은 한 죄인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은 그를 예수님처럼 영접하신다는 것이다. 뒤집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대우하고 있으며 어떤 사랑으로 보호 인도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또 그런 확신의 바탕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믿음이다.

단순히 간절히 기도하고 성실히 말씀을 보았다고 세상의 핍박이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달라진, 지금까지의 자신과는 정반대가 되어 있는 위치에서 말씀 읽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핍박이나 고난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연약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면 신자에게 내주하신 보배이자 능력되시는 예수님이 반드시 그렇게 바꿔주신다는 것이다.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한다는 것이 초자연적 능력이 은사의 형태로 발휘된다는 것 이전에, 하나님은 신자를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 처해도 포기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신자는 또 그것을 확신하는 정도를 넘어서 체험하며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곧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혼자 십자가를 지신 후에 승천하실 것이다. 이 땅에 남겨진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자의 신분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만약에 세상을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아무래 세상의 것으로 괴롭고 아프고, 최대한 양보해도 아쉬움은 생긴다. 신자들의 영원한 처소는 천국에 이미 마련되어 있다. 이 땅에선 천국 시민권자로 살면서 다른 이들을 천국으로 영접해야 한다. 정말로 천국 복음을 소개하는 소명을 실현하며 산다면 세상에서 몸만 죽이는 세상과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도들처럼 세상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는 물론 고난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부활 생명을 증거하지 말라고 산헤드린에 두 번이나 붙들려 갔다. 또 채찍으로 맞은 후에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행4:41) 복음 전하는 일에 충성했기에 천국의 상급을 예상하며 기뻐했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을 천국 시민으로 알아주었기에, 그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자기들 안에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있음을 발견했기에 크게 기뻐한 것이다.

더 이상 받을 상벌이 없다.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는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12:3) 아브라함에게 상벌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 주위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서 제 삼자를 상이나 벌을 주신다는 것이다.  

신자를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 인도하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신자로선 그분의 상벌과는 무관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상벌은 이제는 신자가 아닌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신자는 그 진리를 불신자로 알게 하는 일을 예수님 이후에 이 땅에서 대행할 자로 부름 받은 것이다.

예수님과 동격으로 대우 받고, 천국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으며,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신분이 되었는데 더 이상 받을 복이 어디 있는가? 인간으로서 그야말로 최고, 최대의 위치에 올랐지 않는가? 바로 그래서 십자가 구원이 정말로 Good News -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 때문에 다른 이를 상벌(賞罰)하는 것이 신자를 더 편애(偏愛)하는 까닭이 아니다. 신자의 삶의 목적이 결국 다른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상을 받거나 벌을 받거나 둘 중 하나로 결말짓게 만드는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 사라는 것이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예수님의 빛과 냄새를 드러내어야 한다.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냄새를, 어떤 이에게는 사망의 냄새를 맡게 해야 한다. 예수를 믿게 혹은 관심을 갖게 하든지, 아니면 아예 예수를 싫어하게끔 그 삶의 방식이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같이 세상 사람들의 방식과는 확연히 달라야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나님께 돌이켜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천국에 입성하기 합당한 자로 초대하는 것이다. 또 그러려면 당연히 신자부터 철저히 낮아져야 하고 천국 가는  그날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골고다에서 가슴이 터진 예수님

조금 표현이 이상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씹을수록 맛이 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 제국은 부모를 살해했거나 사회의 도덕 질서를 현저하게 문란케 만든 자들, 말하자면 천하의 패륜아들을 실제로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트리는 형벌로 처형했다. 로마 제국에 반역하는 자들을 최고 극형을 다스린 십자가 다음의 극형이다. 반역은 엄격히 말해 정치적 죄로 윤리와는 무관하기에 연자 맷돌의 죄는 도덕적으로 최고로 질이 나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지금 신자를 핍박하는 죄를 그보다 못지않다고 했다. 최고의 극형인 지옥불로 다스린다고 했다. 스스로 예수를 거역하여 믿지 않는 자도 지옥에 가는데, 남을 예수 믿지 못하게 훼방하고 핍박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로마는 신자들을 원형경기장에서 조롱하며 산 채로 맹수 밥이 되게 했다. 비유이긴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연자 맷돌의 형벌을 가한다고 말한다. 로마를 오히려 부모 죽인 죄인으로 취급하시겠다는 것이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한탄하신 그대로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절대 그들을 미워하신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아직도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가 되지 못했음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신 것이다. 본문에서도 그들 중에 한 명이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지 않는가? 신자들더러도 당신과 똑 같은 심정을 갖고  불신자를 불쌍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신자를 핍박하는 자들은 십자가 구원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자를 미워하거나 야단칠 수는 없다. 비유컨대 장님이 바로 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 그 길이 옳다고 우기면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심정이다. 앞을 못 봐 다른 길로 가는 자를 미워하거나 야단 칠 수는 없다. 그저 안타깝고 불쌍해서 어서 그 길에서 돌이키라고 고함칠 따름이다. 그런데도 그 길이 옳다고 계속 우기며 오히려 말리는 자들이 잘못되었다고 큰소리친다면 진짜로 불쌍하고 답답해 미칠 것이다.

부모는 삶을 살아온 경험과 지혜에 따라 사랑하는 자식에게 가장 유익하며 성공이 보장되는 길을 알고 있다. 너무 거창하게 표현할 필요는 없고 그래서 자식에게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충고하지만 아랑곳 않고 거리 갱단에 들어간 것이 바로 불신자인 셈이다. 부모가 아무리 타이르고 달래고 야단쳐도 전혀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부모에게 대든다. 나중에는 부모가 돈을 주지 않는다고 두들겨 패기까지 한다면 부모로선 속이 터져 죽을 수밖에 없다. 자식은 부모를 팰 수 있어도 부모는 절대로 그러지 못한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기에 가슴이 터져 자기가 죽는 한이 있어도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가슴이 터져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골고다 언덕이다.  

신자도 크게 나을 바 없다. 형제들이랑 똑 같은 갱 짓을 하고 있었는데 부모가 자기들 때문에 죽는 모습을 보고 뉘우치고 갱단에서 손을 씻은 것뿐이다. 그러니 형제들에게 이제는 갱 짓을 그만 두자고 간절히 권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애절한 심령이 된다. 설령 형제들이 왜 혼자만 배반하느냐고 미워하고 핍박한다고 해도 결코 맞서 싸울 수는 없다. 비방할 수조차 없다. 마냥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해서 자기도 부모처럼 형제들을 위해서 죽는 한이 있어도 그들을 돌이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있을 핍박에 바로 그렇게 대처하라는 것이다. 당장에 세상 체계와 관습을 전복해서 이기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세상의 시험과 유혹과 죄악에 물들지 말고 정말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모습을 담담히 그들 앞에 보이라는 것이다. 사랑으로 이기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자 예수님의 형제가 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자에게 주는 무시무시한 경고

문제는 본문의 마지막 10절이다. 9절까진 제자가 아닌 제 삼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었으나, 10절에선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동일한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자가 신자로 예수 믿지 못하게 훼방하거나 믿는다고 박해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7절에선 “실족케”라는 단어를 썼으나 10절에선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다. 경멸하고 멸시하거나 보잘 것 없이 여기는 것을 뜻한다.  

신자는 생전 처음 보는 자라도 예수 믿는다고만 하면 아주 반갑게 대한다.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오래된 친구처럼 여겨지고 예수 이야기를 나누기에 바쁘다. 모두가 예수님을 보배로 모시고 있는 그 정체성이 동일한 까닭이다. 예수 믿는 소자는 누가 권하지 않아도 예수 믿는 소자를 자연스레 영접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같은 교회에서 자주 만나는 성도들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이전의 습성과 죄의 본성이 살아나온다.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재산과 권력과 명예가 많은 사람들을 우대하려 들고 반대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는 무시한다. 예수님은 지금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한다. 구원을 취소시키진 않지만 불신자들에게 행하는 그 무시무시한 벌을 줄만큼 하나님이 너무나 싫어하시고 분노한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을 받은 베드로마저 실제로 그런 잘못을 범했다.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과 식사교제를 하다가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유대인들이 오자 그 자리에서 슬쩍 피해버렸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던 것이다. 아직도 구약의 율법적인 인식과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방인이 업신여김을 받은 것이다. 그 일을 당한 이방인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틀림없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나 예수님이 그 모든 죄 값을 십자가에 담당하셨기에,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는 모두가 예수 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되었고 그래서 성도들끼리는 절대로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고 배웠을 것이다.

당장 베드로가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로 여겨질 것 아닌가? 본문 식으로 말하면 신자는 예수님과 동격인데, 베드로가 그러면 예수마저도 그렇다고 간주하게 될 것이다. 구태여 예수에게서 배울 것도 따를 것도 없다고 결심할 수도 있다.

물론 베드로는 무심결에 습관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런 점을 아시니까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7절)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 영혼이 예수를 믿어 구원의 자리로 들어서려는 찰나에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트리는 엄청난 결과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같은 사도, 아니 후배 사도인 바울이 베드로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야단쳤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갈2:14) 제대로 유대인답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바울도 예수님처럼 역설적이면서 예리하고도 심각하게 풍자한 것이다. 오늘날의 신자에게 적용하면 바로 이런 뜻이다. “네가 하늘의 시민권자답게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불신자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려고 하느냐?”

바울을 본받으라.

베드로와 달리 바울은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에겐 유대인답게, 헬라인에겐 헬라인답게 접근했다. 기독교인을 늘리려 줏대 없이 유대 민족을 배반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상처나 시험 받지 않도록 그들에게 익숙하고도 다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했던 것이다.

나아가 우상에 바쳐진 제물에 관해서도 혹시라도 믿음이 연약한 자가 실족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면 평생을 두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자신으로 상처 받아 실망하고 더 이상 출석하지 않게 할 만한 말이나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본문은 어린이를 사랑하라는 간단한 도덕적 가르침이 결코 아니다. 제자들로 바울처럼 살라는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은 베드로가 세 번 당신을 부인하는 것뿐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사건도 미리 아셨던 것 같다.

신자는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아무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자들을 무시해선 절대 안 된다. 하나님은 당신께 낮아진 소자 각자에게 천사를 붙여주시어 보호할 뿐 아니라 천국에서 당신께 중보 기도하도록 했다(10절). 그만큼 신자 한 사람을 다 사랑하시고 천하보다 귀하에 여기신다.

하나님이 절대로 업신여기지 않는 소자를 신자가 그런다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만 비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목에 연자 맷돌을 달아 바다에 떨어트리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시는 죄이기에 하나님은 바로 그런 신자에게 분노하실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런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질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한 그분의 은혜를 받으려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불신자들도 인간을 차별하는 것을 아주 중한, 아니 최고로 큰 죄로 여긴다. 최근에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것이 바로 인권 자유 등을 최고로 삼는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인간만 최고로 높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만 중시하니까 인간의 권리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최고의 나쁜 죄가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인간 세상에선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최고의 덕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외 한 채로는 최고의 선이 오히려 너무나 엄청나고 추악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그분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자들도 절대로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며 십자가 예수님의 긍휼을 맛보지 못한 탓이다. 그들만큼 불쌍한 자가 없고, 그들만큼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자가 없다. 주님은 소자를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 없고 또 그로 인해 세상에 화가 있다고 했다(7절). 신자 불신자 모두 인간은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서 역사하는 사악한 흑암의 세력에 대해선 신자는 철두철미 저주하고 당당히 싸워 이겨야 한다.  

작금 교회 안에 세상의 것들이 들어와서 행세하고 있고 세상 식으로 자리다툼을 벌리고 있다. 그럼 누가 예수를 믿으려 들겠는가? 실제로 불신 세상이 거꾸로 기독교, 교회, 신자들을 조롱하고 있지 않는가? 신자 스스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막고 훼방하는 꼴이다.

본문의 소자를 실족케 하지 말라는 말씀은 초대 교회 당시에는 불신 세상 로마의 박해에 대한 강력한 경고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교회와 신자를 향한 경고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 주님은 또 세상의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십자가 복음뿐이라고 가르쳤다. 정말로 초대교회 신자들은 복음 안에서 완전히 바뀐 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삶으로써 그 심한 박해와 고난도 이겨낼 수 있었다. 반면에 오늘날의 신자들은 세상에서 으뜸이 되려고 하나님의 힘을 빌리고 있고 또 그러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칭송 받고 있다.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부터 철저하게 회개해야 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지 않고 계속 지금과 같은 모습이 이어진다면 정말로 하나님이 본문의 경고처럼 연자 맷돌을 교회와 신자들에게 걸고 바다에 빠트리는 벌을 주시지 않을까 두렵고 떨릴 뿐이다.  

8/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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