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짓고 있는 교인을 어떻게 치리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강해 (#181)



http://youtu.be/Rny7ftJ9mJ4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證參)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석연치 않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를 믿은 후에는 아무래도 죄를 적게 짓게 된다. 매주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라는 설교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또 신자 개인적으로도 말씀을 읽고 묵상한 후에 자기 삶에 적용해서 기도한다. 무엇보다 진정으로 회심한 자라면 성령님이 내주하기에 죄를 지으면 영적으로 눌려서 회개하게 된다.

그런데 간혹 주위 사람들이 다 알고 교회에서 수군거릴 정도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자가 있다. 본인도 죄를 짓고 있다고 알고 있다. 조용히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려 한다. 교인들은 당혹되고 교회로서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교회가 그런 자를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대처하는 법에 대해 가르쳤다. 공정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하다. 먼저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나 은밀하게 해결하라고 했다. 그 일이 실패하면 둘째로 증인의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도록 두 사람 이상이 찾아가 회개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그마저도 실패하면 마지막으로 교회에 대고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같이 취급하라고 한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관습적 표현이다. 유대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것이다. 우리말로 ‘여기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이방인과 세리가 되게 하라는 명령어다. 이방인은 당연히 유대인이 아니며, 세리도 매국노 취급당했기에 예수님은 유대사회에 절대 들어올 수 없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이 둘을 예로 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는 조금 석연치 않은 측면이 생긴다. 우선 이런 정도의 원칙은 일반적인 세속단체에서도 채택하고 실천하고 있다. 잘못을 범한 자에게 배상시키고 회개의 기회를 여러 번 준다.

거기다 당장 21절 이하의 가르침과도 상충된다. 베드로는 잘못한 자를 몇 번 용서해야 하는지,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는지 물었다.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즉, 끝까지 용서하라고 답했다. 평소에도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며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 뺨도 대어주라고 하지 않았는가?

딱 세 번의 회개 기회를 주고 듣지 않으면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하면 당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번복하는 셈 아닌가? 어쩌면 베드로도 그런 점이 완전히 납득되지 않아서 일부러 스승의 평소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세 번은 너무 적으니 최소 일곱 번 즉, 완전한 숫자까지는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는가는 의미로 물었을 수 있다.

개인적 죄와 교회에 범한 죄?
    
예수님은 왜 그렇게 비정한 방식으로 치리하라고 말씀하셨을까? 베드로는 개인적 잘못을 의미했지만 예수님은 교회에 저지른 죄, 예컨대 교회 공금을 횡령한 것이나 성도 간의 음행한 죄이기에 가혹하게 대하라고 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일부 사본에는 15절의 “네 형제가”와 “죄를 범하거든” 사이에 “너에게”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개인적 죄라는 뜻이다. 또 지금 개역본처럼 그 말이 들어가 있지 않아도 본문만으로 충분히 그런 뜻이 된다. “네 형제가”는 단수의 개념을 포함하고, 또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는 분명히 그렇다. 그 죄를 일대일의 관계에서 은밀히 처리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만 하지 않는가?

또 다른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불신자가 신자에게 짓는 죄를 말했고, 본문은 신자가 신자에게 짓는 죄라서 엄격하게 처리하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러나 베드로도 “형제가”(21절)라고 본문의 “네 형제가”(15절)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다.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용서의 방식마저 달라야 한다는 법은 결코 없다. 둘 다 개인적이며 성도 간에 지은 죄다. 구태여 그 차이를 찾자면 베드로의 경우는 교회 밖에서 일어난 일로 개인적으로 용서해주라는 의미일 것이다. 반면에 본문은 교회마저 알게 된 경우로 공동체에 미칠 부작용과 영적 폐해를 줄이라는 의미일 수는 있다.  

그럼에도 어쨌든 교회 공동체에서 출교시키라는 말씀은 완전히 납득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기 직전에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라도 끝까지 찾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설명했지 않는가?

물론 오늘날의 교회가 청교도 시절처럼 명확한 죄를 짓는데도 제대로 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그래서 사회로부터 지탄 받는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냉정하게만 치리하면 당장에 삐져서 교회 출석마저 중지할 것이다. 양떼를 양육해야 하는 교회와 목사의 입장에선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교회의 공적직분은 맡길 수 없어도 계속 출석케는 해야 하지 않는가?

교회 출석을 정지당한 자로선 나다니엘 호손이 지은 소설 “주홍 글씨”의 주인공처럼 한 번의 죄로 평생 사회에서 멸시를 받고 가슴의 멍에를 안고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보다는 부정한 여인이 목사에게 모든 누명을 덮어씌웠다는 자주 인용되는 예화처럼 행해야 하지 않는가? 간음한 상대로 목사를 지명했지만 목사는 그 여인을 보호하고 회개하길 기다리기 위해서 교인들이 다 떠나가도록 모든 비방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침묵을 지켜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과연 주홍글씨와 이런 목사 어느 쪽을 택해야 성경적으로 옳은가?

온전한 용서와 화해

그 답을 얻으려면 본문을 더 자세히 파고들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절대로 일구이언 하시는 분이 아니다. 분명히 뭔가 더 깊은 뜻이 있다. 본문은 단순히 죄인에게 세 번까지 즉, 몇 번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지 그 치리하는 절차에 초점이 있지 않다. 15절을 다시 보라. 우선 피해자와 가해자 단둘이 만나 은밀히 해결하라고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가해자의 자존심과 인권을 보호하라는 것이다.

또 은밀히 만나 회개시키라는 것은 절대로 두 사람만의 비밀로 삼으라는 것이다. 제 삼자의 잔소리나 개입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차단하라는 것이다. 가해자도 다른 사람의 눈치나 자기 체면을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회개가 빨라지고 관계회복도 쉬울 수 있다.

제 삼자에게 평생을 비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피해자는 가해자와 화해를 한 후에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화해했다는 사실조차 발설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구라고 이름은 안 밝혀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런저런 잘못을 했지만 알고 보니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아무 배상을 받지 않고 용서해주었다. 또 직접 만나 봤더니 형편이 너무 딱해 더 보태주고 왔다는 식으로 떠벌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는 것이 그저 자기 자랑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대를 회개는커녕 보상도 하지 않는 악한 자로, 최소한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낙인찍는 짓이다.  

예수님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라고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먼저 찾아가라는 것이다. 보통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먼저 찾아가 용서를 빌어야 옳은 순서다. 피해자가 먼저 찾아간다는 것은 사죄는 물론 배상도 하기 전이라는 뜻이다. 일반 단체와 교회의 치리 방식이 서로 다른 가장 첫째 모습이다.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상대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말하자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 복원이 배상이나 사죄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뜻이다. 어떤 이해타산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진심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워져야 한다. 지금처럼 서로 미워하거나, 최소한 불편한 관계로 지내고 싶지는 않다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완전한 화해란 그래서 가해자의 보상과 사죄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가해자보다 피해자 쪽의 진정어린 용서가 있어야 한다. 어떤 면에선 배상과 사죄는 사실상 없어도 된다. 배상과 사죄를 충분히 받고도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지만 네 잘못은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용서해준 것이 아니라 복수만 않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아주 쿨(cool)한 척 사죄는 흔쾌히 받아들여놓고는 돌아서선 험담을 하는 자도 많다.

형제를 얻어라.

그래서 예수님은 네 형제를 얻으라고 권하고 있다. 용서란 잘못된 일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인 상대를 사랑하는 것, 최소한 긍휼히 여기는 것이라는 뜻이다. 평소에 용서가 힘든 이유가 무엇인가? 상대가 저지른 잘못과 그 결과를 생각해보니 이해도 안 되고 아예 말도 안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소에 좋아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더 그렇다.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이 저지른 잘못은 그냥 무심코 넘어갈 수 있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억울하고 상처가 깊으며 밤새 끙끙 앓으며 괴로워한다. 현실적 손해배상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사죄부터 받고 싶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지 않는 한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여긴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다른 말로 죽기 전에는 용서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당한 그대로 앙갚음을 꼭 해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그 사람이 저지른 행동과 그로 인한 부작용에 모든 생각이 붙들려 있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모든 일은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담아서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평생을 두고 잊을 수도 없다. 다른 말로 그 일 즉, 상대의 잘못과 그 여파에 생각이 묶여 있어선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용서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어도 그 사람은 바꿀 수 있다. 그 일 대신에 그 사람을 먼저 봐야 한다. 상대의 입장에서 관심을 갖고 찬찬히 살펴보면 차츰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처지와 상황이 아주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 사람을 얻고 싶은, 최소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발전한다. 고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살피고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은 뒤로 던져야 한다. 잘못이 먼저이고 사람이 뒤면 용서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지금 형제의 배상이나 사죄를 받으라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형제의 마음을 얻으라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형제를 얻으라고 한다.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라도 끝까지 찾아가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15절)하라고만 했지, 한 번만 찾아가라고 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에 온전한 관계로 회복하려는 열망으로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찾아가야 한다. 끝까지 일대일로만 만나고 절대 비밀로 붙이면서 말이다.  

가해자도 억울하지 않아야 한다.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증참(證參)케 하라”(16절)는 말씀도 단순히 증인의 숫자를 채우는 법적 조치가 아니다. 그 단계까지도 교회의 다른 모든 이에게는 여전히 비밀로 하라는 것이다. 피해자는 물론 교회의 책임자들도 그 죄를 범한 형제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또 그 진심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마저 실패할 때에 비로소 교회에 말하라고 했다. 여기서 교회는 목사, 당회, 제직회 같은 공적조직이 아니라 교인들 전체의 모임이다. 그 잘못을 모두에게 완전히 까발리라는 것이 아니다. 정확하고도 객관적으로 모든 실상을 알림으로써 개인적 감정, 편견, 선입관, 이해타산 등에 휩쓸려 정죄하는 일을 피하라는 것이다. 인민재판이나 마녀 사냥하듯이 하지 말고, 또 파당을 지어 편파적 판정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엄정하고 공평하게 판단을 하여 그 형제로 억울하게 당한다는 마음이 들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행한 잘못에 비하면 마땅한 벌이라고 수긍할 수 있게끔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것이다. 만약 시시비비를 따졌더니 잘못이 반반(半半)이거나, 가해자에게 정상을 참작해 줄만한 사정이 있는 그런 종류가 아니어야 한다. 어린아이마저도 분명히 인정할만한 죄이며 또 공정하다고 여길 판결이어야 한다. 교회에서 출교를 시켜야 할 정도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공정히 처리하는 이유가 교회공동체의 전체 유익을 위해서 냉정할 때는 냉정해야 하며 교인들도 “No 라고 말할 줄 아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미 말한 대로 가해자의 인권과 자존심을 배려하는 차원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피해자와 교회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스캔들이 난무하고 교인들끼리 루머를 옮기기 시작하면 그 옮기는 자들마저, 아무리 공정하게 전한다 해도,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제가 범한 죄의 종류는?

그럼에도 교회에서 추방하는 조치가 정말로 필수적인지, 너무 비정한 것은 아닌지 의아심을 완전히 떨칠 수 없다. 성경을 해석하는 절대적이고도 최우선적인 원칙이 하나 있다. 문맥 안에서 핵심 주제와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죽 이어서 말씀하고 있는 중이지, 몇 절 씩 나눠서 주제를 바꿔가며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본문처럼 언뜻 조금 다른 사안처럼 보이는 것도 일관된 맥락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말하자면 지금 형제가 저지른 죄의 종류도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연결된 죄라는 뜻이다. 단순히 도덕적 잘못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한 가지 죄다. 바로 10절에서 이미 강조했던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죄”를 말한다. 교회 안에서마저 세상에서 갖고 있는 재물, 지위, 계급, 권력 등에 따라 우대하거나 천대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의미를 갖는다.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묵상해야 한다. 특별히 예수님이 피해자가 먼저 가해자를 찾아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가해자의 인권과 자존심을  보호하는 차원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정반대의 경우가 발생한다.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 질병이나 재물과 권력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에게 상처와 멸시와 비방을 받는 것이 가장 괴롭다. 자신의 자존심과 인권이 훼손 되는 것이다. 지금 피해자는 그런 업신여김을 받은 자다. 그런데도 자기를 그렇게 멸시한 자를 먼저 찾아가라고 한다. 완전히 자존심을 다 버리라는 것이다. 이미 죽은 자더러 완전히 더 죽으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를 그렇게 만든 가해자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또 그 자의 인권과 자존심을 되살려 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가 당한 죄가 업신여김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문맥 안에 또 있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나서서 가해자를 치리할 때에는 자기 죄에 합당한 벌을 주어서 절대로 불공평하고 억울하게 당한다는 생각이 들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구약성경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라는 동해보수법(同害報酬法)을 규정한 취지 또한 그것이다.

그 죄를 범한 형제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대우하라는 벌을 내렸다. 그럼 그가 지은 죄도 그와 똑 같다는 뜻이다. 즉 가해자는 피해자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유대사회의 일원으로 참여도 못할 자로 취급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런 죄인을 단순히 교회 안에 남겨두느냐 쫓아내느냐를 규정하는 차원이 아니다.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정확하게 알고, 또 자신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다고 깨닫게 해주라는 것이다. 설령 출교를 시켜도 절대로 그 형제를 얻을 목적으로 하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서 공개적으로 음행한 자를 물리치고 심지어 사탄에게 내어주라고 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 사람의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5)고 했다. 교회에서 범죄자를 처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나 피해자를 살리는 차원을 넘어 죄를 범한 바로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존재 목적
      
결국 본문에서 예수님이 강조하는 내용은 교회가 도덕적 잘못을 범한 교인을 치리하는 절차가 아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자 꼭 감당해야 할 역할을 말씀하신 것이다.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이다. 죄를 범한 형제를 얻는 것이다.

그 형제를 어떤 방식으로 얻으라고 하는가? 세 번 이상의 회개할 기회를 단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절차다. 교회는 불신 세상도 잘 알고 시행하고 있는 일반 윤리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그분의 말씀이 성경을 풀어 가르치고 실천하는 곳이다.

예수님은 지금 교회의 모든 소속원이 절대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형제를 구원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교회 안에선 가진 것이 조금 모자란다고 절대 천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방인과 세리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데 제한을 가하는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미 7절에서 세상에선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일로 인해 세상은 화를 당한다고 했다. 사람끼리 서로 업신여기고 정죄하는 일로 인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정죄 받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6:9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고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세상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하지 않아 정죄 받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7절과 같은 뜻이다. 사람끼리는 절대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사람으로 그 뜻을 알게 하는데 있었다. 그럼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 뜻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을 업신여겨 실족케 함으로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방인, 세리, 죄인, 불구자, 창녀, 귀신들린 자들을 주로 만나 당신만의 사랑으로 치유하고 가르치며 교제했다. 세상에서 지치고 소외 받아 절망한 자들이다. 유대사회의 일원이 결코 될 수 없었던 자들이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은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뿐이었다.  

지금 예수님은 교회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어떤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마지막 소망을 안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어떤 인간도 겪지 못할 억울함, 상처, 비방, 멸시를 다 안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간의 가진 것으로 절대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교회와 신자는 주님의 바로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한다.

서로 업신여기라고 조장하는 교회들

아무래도 교회에 나오면 모두가 경건한 척(?) 할 수밖에 없다. 공개적이고도 직접적인 업신여김은 일어나지 않거나 드물다. 그럼에도 작금 업신여김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 권력, 명예 등을 가져야만 남들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는다고 믿고 그것들을 많이 가지려 노력한다. 교인들마저 세상의 업신여김을 이겨내려면 그것들이 필수적이라고 여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것들을 가지려 노력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교인들 사이에 인격적 직접적 업신여김은 하지 않았어도 그런 업신여김을 간접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조장 내지 방임하는 꼴이지 않는가? 정말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교회부터 먼저 심판하지 않을지 두려울 따름이다.  

교회는 범죄자에게 주홍글씨를 붙이는 곳이 절대 아니다. 사람을 얻는 곳이다. 서두의 예화에서 부정한 여인을 위해 침묵으로 일관한 그 목사처럼 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교회로, 모든 교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에 완전히 들어오게 해야 한다. 복음을 깊은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그 진리가 실제 삶에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쉽게 말해 모두가, 당장 나부터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죄인임을 절감해야 한다. 목사가 교인을 불쌍히 여겨야 할 뿐 아니라, 신자들도 목사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절대로 나는 잘나고 너는 못났다고 여겨선 안 된다.  

형제끼리 서로 업신여기는 자를 출교시키라는 말씀은 너무나 심각하고 두렵게 받아 들여야 한다. 어지간한 죄로 교회에서 추방은 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말로 심각하고 중하게 여기는 가장 큰 죄라는 뜻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바로 그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누구라도 절대 업신여기지 않음을 모두가 알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을 받은 자라도 마지막으로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정말로 예수님, 십자가 복음, 그 구원의 진리만 선포되고 가르쳐지고 실현되어야 한다. 진짜로 예수님민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정죄는 하나님의 몫이므로 사람들끼리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만 하는 것이다. 형제를 얻는다는 것이 바로 사람끼리 정죄하지 말라는 뜻이지 않는가? 서로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도 단순히 자존심과 인권을 건드리는 도덕적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업신여김이 바로 정죄의 출발이자 본질이지 않는가?

지금처럼 교회 안에서조차 직접적으로 업신여기거나, 또는 세상에서 인간적인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게 하는 일에만 집중토록 한다면 하나님이 도리어 교회를 업신여기지 않을까 정말 심각하가도 두렵게 생각해야 한다.  

8/18/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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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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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는가?(출애굽기강해#59-출33:18-23)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는가? 출애굽기 강해 (59)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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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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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제사로 한해를 마무리하라.(민수기강해#5-민9:9-14)

(민 9:9-14) 유월절 제사로 한해를 마무리하라. 구약성경강해 (15) / 민수기강해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다 할지라도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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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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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7:11–19) 평생 처음 드리는 성경적 추수감사절 [1]

(눅17:11–19) 평생 처음 드리는 성경적 추수감사절 2020추수 감사절 설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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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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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주민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수2:8-11 & 23,24)

(수2:8-11 & 23,24) 여리고 주민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성경 바로 알기 시리즈 (6) / 여리고성 함락에 숨겨진 비밀 (3)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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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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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7:5-10) 마땅한 신자와 못마땅한 신자.

(눅17:5-10) 마땅한 신자와 못마땅한 신자. 돌아온 탕자 시리즈 (19)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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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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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번거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민수기강해#35-민22:17-30) [2]

(민22:17-30) 너무나 번거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구약성경강해 (45) / 민수기강해 (35)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발람이 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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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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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가?(출애굽기강해#39-출19:1-8)

정말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가? 출애굽기 강해 (39)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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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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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인생의 결산서(민수기강해#44-민27:12-17)

(민27:12-17) 모세 인생의 결산서 구약성경강해 (54) / 민수기강해 (44) / 2019년 송년예배설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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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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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1]

(요6:51-59) 완전한 의인으로 구원받았다. 오병이어 기적 시리즈 (12)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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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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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4:1-3)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6/완)

(엡4:1-3)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6/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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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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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수3:7-13)

(수3:7-13) 제사장들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성경 바로 알기 시리즈 (8) / 여리고성 함락에 숨겨진 비밀 (5)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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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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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3-7)성화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11)

(빌1:3-7) 성화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1)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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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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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3:1-5) 단답형 믿음인가? 논술형 믿음인가? [1]

(욘3:1-5) 단답형 믿음인가? 논술형 믿음인가? 요나서 강해 (7)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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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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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3:11, 잠31:10) 성경이 말하는 페미니즘

(룻3:11, 잠31:10) 성경이 말하는 페미니즘 룻기 강해 (14-완)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3:11)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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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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