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
마태복음강해 (186)
http://youtu.be/tvC7-Wi1c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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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마19:13-15)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구원을 주러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있게 하느니라”(딤후3:15)고 성경 스스로 자증(自證)하는 대로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66권 전부가 그렇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라고 정의(定意)하셨다. 성경을 통해서 구세주 예수를 알아감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생기게 된다.
본문은 아주 짧고 간단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그 안에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풍부히 담겨있다.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자 제자들이 막았지만 예수님은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면서 안수해주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걷거나, 오병이어 같은 큰 이적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늘날 목사가 신자가 아이를 출산하거나 헌아례 때에 아이에게 안수기도해주는 것처럼 아주 평범한 모습이었다.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13절)라고 했다. 중병이 걸렸거나 불구자 아이를 치유해달라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특별한 병명이나, 예수님이 말씀으로 혹은 아픈 곳에 손을 대고 낫게 했다는 구체적 설명이 있어야 했다. 당시에는 랍비나 장로에게서 아이를 축복하는 안수기도를 받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님을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랍비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15절에 따르면 안수만 해주었지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간혹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복을 베풀기만 하면 되지 또 다른 존재에게 복을 빌 필요가 없다고 한다. 즉 안수만 하고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일리가 없는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수하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을 수 있다. 또 여러 어린이들에게 당시 랍비처럼 일반적 내용으로 기도했기에 저자 마태가 구태여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 본체시나 당신을 낮추어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성부 하나님께 무시(無時)로 기도하셨다. 새벽 미명에 기도했고 머리 둘 곳 없이 바쁜 와중에도 홀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보인 모습도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었지 않는가? 안수만 하고 기도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약한 증거다.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따로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증거
본문은 “그 때에”(13절)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 때는 언제인가?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제자들과 모세의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버리는 것이 가(可)한지 논쟁을 마친 직후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여자를 인간 취급을 하지 않고 아예 재산이나 노예나 성적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반하는 너무나 큰 죄라고 가르쳤다. 또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가는 것을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죄라고 선포했다. 그런 후에 지금 아이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다.
당시의 아이들은 특별한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꼬투리 잡혀 쫓겨나가는 여자들보다 더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자기 몸에서 난 친 자식마저 노예로 팔았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이들을 가나안의 몰렉 신에게 산 채로 불에 태우는 제물로 바쳤다.
열왕기하 6:28,29 두 절에 마치 삽입구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성경 전체에서 가장 잔혹한 이야기도 아이에 관한 것이다.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가 아람왕 벤 하닷에 포위 공격을 받아 성중에 식량이 바닥났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두 어머니가 자기 아이들을 순서대로 삶아 먹기로 약정했다. 첫날은 그렇게 했는데 둘째 날에 다른 엄마가 약속을 어기고 아이를 내놓지 않았다고 왕에게 와서 불평을 했다. 엄마가 자기 몸을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위해 내주어야 하지 않는가?
이 얼마나 참혹한 이야기인가? 그 두 여인이 특별히 잔인했기 때문이 아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인간이 죄의 노예로 묶여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일 뿐이다. 고대에는 아이들이 일찍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랍비나 장로에게 안수축복기도를 받는 관습이 생긴 이유다.
거기다 가족계획을 하지 않고 일부다처제인지라 아비가 아이 이름을 못 외울 정도로 자녀가 많았다. 똑똑하고 건강해서 집안의 기업을 이을만하지 않으면 종으로 팔아버렸다. 대신에 종들 가운데 똑똑한 자가 있으면 입양해서 대를 잇게 했다. 남자가 즉, 아버지가 전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하면서 아이들의 교육은 처첩과 몽학선생에게 맡겼다. 잘 자라서 자기 호적에 올리기 전까지는 사람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이방인 풍습처럼 그렇게 타락하진 않았을지라도 어린이를 인간 취급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제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를 꾸짖은 이유가 예수님의 권위를 높이거나, 바쁜 일정에 시간이 없거나, 스승을 피곤치 않게 하려는 배려의 수준이 아니었다. 예수님께 삼 년간이나 배운 그들조차 아이를 인간으로 보지 않을 만큼 즉,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영적 실상이었다. 반면에 예수님은 천국이 바로 이런 자의 것이라고 세상에선 가장 천대 받은 아이를 인간으로선 최고의 위치와 신분으로 올려주셨다.
이런 일련의 사건과 토론과 가르침과 선포에 통일된 흐름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겠는가? “그때에”가 우연이 그냥 흘러가는 시간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아주 특별한 의도와 계획이 사전에 작용된 필연이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아직 없고 한 사람의 랍비로 여겼다. 특별한 의미와 의도를 가지지 않고 당시 관습대로 아이에게 안수하고 기도해주길 바라고 나왔다. 그럼에도 이 일과 앞의 사건들을 연결해 살펴보면 동일한 주제가 있고 나아가 일이 일어나는 순서마저 반드시 그런 순서야만 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사람들은 평소의 자기 생각에 따라 행했지만 모든 일들이 바로 그 때에, 바로 그런 상황에서,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일어났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주님의 역사가 있다. 그 때에 그 시간을 주관한 시간의 주인공은 주님이었다. 주님이 그 모든 일을 일어나게 했다. 인류 역사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저자 마태 또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 그대로 기록했을 뿐인데도 후자의 성경독자들이 본문과 그 앞의 사건들을 연결해서 읽을 때에 일관된 맥락을 발견하고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침
이 일이 있게 된 발단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지 질문한 것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낮추는 자가 천국 입성할 수 있으며 또 천국에서 큰 자라고 답했다. 이제 14절에선 천국이 바로 이런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말씀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국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세가 있었다는 의미도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윤리 도덕을 가르치지 않았다. 성경에서 가장 윤리적인 가르침이라 꼽히는 산상수훈조차 그 주제는 천국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 이성으로 터득한 사상, 철학, 종교 차원의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율법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죄를 이혼으로 형벌을 낮추는 것은 서기관들로선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입에 담지도, 아니 꿈도 꾸지 못하는 말이었다. 하나님 본체 되시는 예수님만이 선포할 수 있는 말씀이었다.
쉽게 말해 서기관들은 인간더러 이런 저런 선행을 행하여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라고 가르쳤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 그분은 이런 저런 분이심을 가르치고 알게 하셨다. 신자가 그분을 온전히 알아 그분의 자녀가 된다면 당연히 그분의 자녀답게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온전해져야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분이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 오시기 이전의, 또 지금까지도 그분이 없는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하든 하늘의 하나님께로 올라가려는 목적이었다. 개중에는 심지어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곳도 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 당신으로서 이 땅에 고난과 죄로 신음하는 인간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시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그분이 어떠신 분이신지 보이러 내려오신 것이다. 또 인간이 그 고난에서 벗어나려면 죄에서 돌이키는 길 뿐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당신 전부를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주시고 그 십자가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려 오신 것이다.
제자들이 아이들이 예수님을 특별히 귀찮게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안수기도 받으려 왔는데도 꾸짖는 것을 현대인이 볼 때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 행위 같은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도 그들과 사실상 하나도 다르지 않다.
최근 한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려 하고 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미국식으로 동성애를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논쟁중이긴 하다. 그럼에도 어쨌든 교육당국이나 선생님들의 즉, 어른들의 전횡과 횡포를 막으려는 선한 시도다. 무슨 뜻인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는 21세기 한국임에도 아직도 아이들의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우리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아동의 인권이 보장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이천 년 전 제자들이 본문에서 보인 반응은 당시 유대인들 어느 누구도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꾸지람을 들은 아이들의 부모 또한 반발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오직 한 분만은 예외였다. 예수님 빼고는 말이다.
결국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소지하지 못하면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어리석고 무지하며 완악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김씨 왕조와 그 주변에서 아부하는 무리들로 인하여 그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꽃제비가 되어서 너무나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가? 열왕기하 6장의 기록이 삼천 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예수님과 그분이 하나님임을 밝히는 성경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지금도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모습
이 땅에 하나님 본체로서 오신 예수님은 당신께 안수기도, 병 고침, 혹은 가르침을 받으려 나오는 자를 단 한 명도 금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받기를 소망하기에 스스로 어린아이처럼 겸비하여진 자들에게 무상으로 구원을 베푸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그 차별 없는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었는지 아는가?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신 본인은 오히려 모든 인간의 모든 차별을 다 받는 방식이었다.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리가 없다고 멸시했다. 갈릴리 변방에서 술이나 마시고 창녀, 세리, 이방인, 죄인들과 교제하는 인단 중의 괴수라고 매도했다.
특별히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과 종교권력을 다투는 강력한 경쟁상대로 여기곤 로마 당국에 반역죄라는 누명을 덮어 씌어 십자가에 죽였다. 이 또한 너무나 모순이다. 로마에 반역한다면 이스라엘로선 아주 애국적인 선한 일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여호와를 알고 가르쳐야 할 지도자들이 눈도 깜박하지 않고 사형에 해당하는 살인죄를 공모하고 저질렀다. 평소에도 별 잘못도 없는 아내를 이혼증서를 주어 내어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갔다. 하나님의 참 뜻은 그러는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죄인데도 도리어 거룩한 율법을 잘 지키는 양 뻔뻔한 얼굴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인간에게서 그 모든 수치와 차별을 당하셨지만, 정작 당신께선 그런 인간들을 대할 때에 전혀 차별하지 않으셨다. 출신, 신분, 재물, 학력, 권력 등이 당신 앞에 나오는 데에 조금치도 플러스나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다. 당신의 제자들도 거의 다 소외 받은 계층이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나, 남편 다섯과 이혼하고 또 다시 남자와 동거하는 사마리아 여인과도 만나고 구원을 베푸셨다. 모든 사람이 부정하다고 아예 근처에 가지도 않는 문둥병자를, 그것도 환부에 손을 대고 고쳐주셨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꾸짖은 아이들이야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에는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원수들마저 용서하고 긍휼을 베푸셨다.
따라서 신자가 예수님을 알아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는 바로 그 차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랑을 깨달은 것만이 아니라, 이미 그런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누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가진 외모(外貌) 즉, 자격과 공로와 능력과 성품 등으로는 아무리 사람들 사이에서 뛰어나도 결코 구원 받을 수 없었음을 절감한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있은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고 진정으로 어린아이처럼 낮아진 그 중심을 보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5:14-17에서 어떻게 고백하고 있는가? 그는 예수님을 순전히 외모로만 판단하고 나사렛 이단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그분은 바울 같은 사람들의 차별을 담담히 감당하시며 오히려 그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시고 용서해주셨다. 그 모든 사람 안에는 예수와 예수 믿는 자를 극렬히 핍박하여 당신의 가장 큰 원수였던 바울도 포함되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그를 먼저 찾아오셔서 용서하는 긍휼을 베푸셨다.
그래서 바울은 앞으로는 자기를 대신해 죽은 예수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다짐했다(15절). 또 그러기 위해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16절)고 결심했다. 예수님을 자기가 이전에는 육체대로 알아 이단으로 매도했지만, 그분은 오히려 자신을 전혀 육체대로 알지 않고 차별 없는 사랑으로 구원해주셨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사도는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17절)라고 한다. 앞으로 사람들을 육체대로 판단하지 않는 일을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과 연결시켰다. 지나간 이전 것이 사람을 외모로 보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습관과 사고였다는 뜻이다.
바울은 자기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철두철미 깨달은 것이다. 그가 예수를 알기 전에 초대교회 신자들을 볼 때에는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밥 먹을 때 손도 씻지 않으며, 창녀와 세리와 이방인들과 교제하기에 이단 중의 이단으로 판단하고 정죄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끼리는 전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다. 왕족과 귀족이 노예와 세리와 함께 예배드리고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그들 사이에 예수님의 차별 없는 십자가 사랑이 넘치고 있음을 바울은 보았던 것이다.
반면에 자기는 세상 앞에서 자기 가진 것으로 한껏 자랑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하나님께 가장 열심이라고 자부했다. 자기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인 줄도 모르고 자기가 잘나서 자기 능력으로 쟁취한 양 여겼다. 그러다 예수를 만나고선 비로소 자기가 가장 어리석고 죄 많은 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빌3:7)이라면서 그 모두를 버릴 있었던 까닭이다.
외모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세상에서 권력과 재물이 많아 잘 나가는 자들에게 빌붙어 조금이라도 유익을 얻고자 함이다. 또 자기 가진 것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려는 의도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세상 종교도 잘못이니 고치라고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다.
기독교가 설명하는 사람들이, 심지어 예수 믿은 신자들마저 다른 이를 외모로 차별하는 이유는 다르다. 한마디로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삼 년간 동고동락하면서 가르침을 얻은 제자들조차도 아이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그런 수준밖에 안 된다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서 엎드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 예수님 사랑의 그 무한한 은혜와 권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자들 중에 간혹 자기가 구원 받았는지 확신이 없는 자가 있다. “목사님 내가 구원 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무슨 기준으로 점검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 그에 대한 정답을 바울이 다른 이를 세상에서 가진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라고 명료히 밝힌 것이다. 특별히 그 영혼에 예수가 없이 계속 사단에게 미혹되어 외모로 차별하는 이를 볼 때에 예수님처럼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지 여부다. 또 바울처럼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지 여부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기 전부를 바쳐서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도 모든 이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최대한 양보해서도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불쌍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님의 차별 없는 사랑이 필요치 않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음을 아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는 요컨대 세상에 자기보다 못한 자가, 심지어 어린아이 중에서도 단 한 명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외 안에서도 차별하는 신자들
그러나 작금 너무나 유감스럽고 불행하게도 교인들이 세상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둘째 치고 교회 안에서마저 차별하고 있다. 신앙의 목표를 안수집사, 장로가 되어서 교회 안에 행세하는 것에 둔다. 도덕적 종교적 규정으로 사람들을 판단 정죄하려 든다. 목사들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 바쁘고, 교회의 건물을 화려하고 거창하게 짓는다. 또 그런 교회에는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만 모이고 자기들 수준에 비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 오면 아주 백안시한다.
거기다 유명한 목사가 시무하는 이름 있는 큰 교회에 다니면 마치 자기 신앙도 덩달아 좋은 줄 착각한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에서 어느 목사 지도로 제자훈련 풀코스를 수료하여 구역장 하고 있는 것만 내세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런 좋은 교회에서 마땅히 제자훈련을 받아야 한다. 아주 선한 일이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이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여기고 또 그런 것으로 다른 이를 외모로 차별한다면 예수님께 저주 받은 바리새인들과 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그들을 데리고 나오는 부모를 꾸짖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 제자들을 야단치지 않고 묵과하셨다. 아무렇지 않게 그냥 그러려니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아무리 당신의 제자들일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당신께선 아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너무 쉽게 좌우되는 죄의 본성에 묶여 있는 존재다. 예수를 믿는 신자도 자기를 앞세우는 인간중심인 죄의 본성이 되살아나 그분의 십자가를 잠시라도 놓치면 너무나도 쉽게 다른 이를 외모로 차별하게 된다. 지금 인간 존재의 본성을 끝없이 격하시켜 여러분들의 부담감 죄책감을 높이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의 영적 본성의 실태를 온전히 알게 되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유일하고도 원천적인 소망이 예수님의 십자가뿐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십자가 앞에 엎드리고 그분의 차별 없는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시간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말이 단순히 당신의 전지전능성으로 인생만사를 주관 인도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의 차별 없는 사랑으로 창조 때부터 당신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할 때까지 이 땅에 풍성하게 채운다는 것이다. 13절의 “그 때에”가 그 공간과 그 시간에서 그 사건의 필연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때에도 주님의 차별 없는 사랑은 충만하게 죄인들에게 넘쳤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완악한 인간들은 그 차별 없는 사랑을 받고도 인간끼리는 다시 차별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본문이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근거 구절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계명과 의식으로 우리를 묶으려 오신 시시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 본체시다.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서 신음하는 인간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당신이 모든 이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참 생명을, 참 사랑을 부어주어서 우리를 당신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차별 없는 사랑의 하나님임을 실제로 당신의 전부를 던져 몸으로 실천해 보여주신 것이다.
지난주가 한국 추석이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뉴스 하나를 접했다. 자폐증 아들이 부모가 야단치자 상처를 받고 KTX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기 친 자식을, 그것도 불구자를 살인한 것이다. 물론 의식적으로 살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온전한 사랑을 못하는 다 같이 불쌍한 존재라는 것이다. 절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혹은 그 정도가 조금 약하다는 것뿐이지 그 부모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필요치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단적인 예일 뿐이다. 아니 신문에 보도되는 뉴스 모두가 자세히 보면 십자가 복음의 절대적 진리 됨을 입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분에게 다시 물어보겠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는가? 지금도 혹시 다른 이를 외모로 차별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9/22/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