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들부터 심판대에 설 것이다.
마태복음 강해(196)
http://youtu.be/1O7wtR11h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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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掘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마21:12-17)
제물 판매와 환전상은 율법의 규정이었다.
예수님은 삼 년간의 공생애 동안 불구자나 불치병을 치료해주고는 당신께서 고쳐준 사실을 비밀에 부치라고 당부해왔다.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할 때는 유대 대중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찬송하며 열렬히 환영해도 전혀 말리지 않았다. 당신의 메시아 되심은 끝까지 숨겨질 성질이 결코 아니다. 그 행하시는 사역이나 권세 있는 가르침은 지금까지의 어떤 선지자와도 그 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예수님 본인도 제자들더러 나귀를 끌고 오라 명하면서 “주가 쓰시겠다고”고 스스로 주(主)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9:9)을 성취하러 온 자라고 명백히 밝힌 것이다. 구약성경에 능통한 자라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로소 자타공인(自他共認)의 메시아로서 행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메시아로서 맨 처음 찾아간 곳이 어디인가? 로마군 부대도, 헤롯 왕궁도 아니었다. 곧바로 성전으로 찾아가 그곳의 장사치부터 쫓아냈다. 이 기사는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네 복음서가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하나님이 성전의 부패상을 심각하고 중한 죄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제물을 판매하는 것과 환전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아니 율법의 규정에 따른 것이다. 우선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로 소나 양의 제물을 대신할 수 있었다.(레5:7) 제물로 바치려고 비둘기를 집에서 키울 수는 없다. 본문도 “비둘기 파는 자들”이라고 밝혔다.(12절) 또 신명기의 십일조에 대한 규정(신14:24-26)에 따르면 사는 곳이 성전에서 멀고 행로가 어려워 소산을 들고 여행하기 힘들면 돈으로 바꿨다가 그곳에서 다시 제물을 사서 바치라고 했다.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릴 때에 하루 품삯을 계산해서 내는 속전세(레27장)와, 모든 성인 남자가 일 년에 한 차례 내는 성전세는 반드시 성소의 세겔로 드려야 했다. 여러 지역에서 온 순례객들이 각 지역의 화폐를 갖고 온데다, 당시 로마제국의 화폐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에 여호와께 드려질 수 없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대답한 이유 중의 하나다.
문제는 환율을 정상보다 훨씬 높게 책정했고 또 허물이 있는 제물을 고가에 판 것이다. 대제사장이 허락한 장사꾼에게 산 제물은 흠이 있어도 통과되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았다. 요컨대 장사꾼들과 제사장들이 결탁하여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았다고 기록했듯이 성전 뜰에서 매매했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월절 절기에는 세계 곳곳에서 2백만이 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정결하게 제사를 드리려 몸을 씻는 목욕탕만 수천 개가 임시로 개설될 정도였다. 제물 판매상과 환전상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성전 안에까지 들어와 성전이 장터처럼 시끌벅적했다.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기도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격분한 것이다.
대제사장을 두려워한(?) 예수님
그렇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장사치보다 더 큰 죄인은 따로 있지 않는가? 허가증을 내준 종교권력자의 잘못이 더 크지 않는가? 수억씩 뇌물을 받은 장차관은 멀쩡한데 십만 원짜리 봉투 하나 받은 말단 공무원이 잡혀가는 것처럼, 예수님도 몸통은 안 건드리고 영세상인만 야단친 것 아닌가?
예수님이 산헤드린을 두려워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만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자로서 “화 있을찐저!”라고 유일하게 정죄했다. 그들을 두려워했다면 십자가에 기꺼이 생명을 바치는 자리까지 가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했다.
지금 예수님은 혼자서 장사치들을 상대했다. 비록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요2:15) 휘둘렀지만 장사꾼은 여럿이었을 텐데도 꼼짝 없이 당했다. 성전을 지키는 하속들과 수직한 제사장들도 아무 항거를 하지 못했다. 순례객들도 그들이 쫓겨나가면 제물을 사고 돈을 바꾸러 멀리 나가야 하는 불편이 따를 텐데도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아무도 범접할 수 없고 사람의 것이 아닌 신적 권위가 예수님께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적 이유로는 그들이 담합(談合)한 부패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장사치나 제사장들도 최소한의 양심에 찔렸던 것이다. 순례객들도 그 동안 불만이 많았어도 아무 말을 못했었는데 예수님이 자기들 대신에 야단을 쳐주니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 일은 당시로선 어느 누구도 감히 행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대제사장을 거역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며 목숨을 내어놓는 무모한 짓이었다. 일반적으로도 죽기 살기로 목숨 내던지고 덤벼들면 다들 슬슬 피하지 않는가? 지금은 분명히 선한 일이라 더더욱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가르치고 성전을 거룩하게 유지할 책임이 있는 자들이 오히려 치부에 눈이 어두워져 있기에 불같은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성전의 제사장들이 더 추악한 부정을 앞장서서 범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완전히 경시 아니 무시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와 악을 향해 거룩한 분노를 터트린 것이다. 죄악에 동참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죄악에 침묵하는 것도 죄다.
정치 9단인 대제사장
산헤드린은 벌써부터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안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기에 틀림없이 사사건건 보고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성전의 어떤 방에 모여 모의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우르르 몰려나오지 않았는가?(15절)
그러나 만약 이 사건만 문제 삼으면 자신들의 부정도 함께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다. 예수님도 그 점을 잘 아시고 어쩌면 이 일로 당신을 잡아가라고 대놓고 행했을 수 있다. 인간의 영악함과 치사함은, 특별히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는 아주 비상하게 작동한다. 유대 최고 권력자들, 요즘으로 치면 정치 9단이 그런 정도를 계산 못할 리가 없다.
그래서 다른 것으로 시비를 걸어왔다.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송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 찬송을 분하게 여겨 저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고 예수님을 힐문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고 “다윗의 자손”은 아시다시피 메시아의 별칭이다. “네가 진짜 메시아인가? 정말 그렇다면 성전 제사를 훼방할 수 있는가? 또 네 말처럼 기도에 방해되지 않도록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말려야 하지 않는가?”라는 의미였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시편8:2를 인용해서 대답했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는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이성이 전혀 성숙되지 않았을 때다. 그런데도 그들이 창조와 구속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특별히 인간이 절대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라고 했지만, 원문은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세상 권력자나 흑암의 세력이 절대 훼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바로 자신에게 적용했다. 저들이 나를 찬미하는 것은 바로 내가 메시아임을 저들도 알았기 때문이라고 대제사장에게 명확하게 선포한 것이다. 너희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면서 나를 정식 랍비 취급도 안 했지만, 저 어린아이들조차도 메시아임을 인정한 까닭을 제대로 깨달으라는 것이다.
쉽게 비유해 벌거벗은 임금님이 아이들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 눈에도 성전의 부패상이 얼마나 추악한지 훤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이 그들을 성전 안에서 쫓아내고 대신에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는 것이 얼마나 의로운지, 또 사람들은 감히 행할 수 없고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일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치사하게도 자기들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 염려해 침묵하고 있는데 반해 순전한 아이들은 마음껏 당신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지금 시편의 예언이 온전히 실현되었다. 산헤드린 전체가 나서도 예수님 앞에서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의 영적인 수준이 저 어린이보다 못하지 않느냐고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예리하게 지적하며 꾸짖은 것이다. 항상 그러하듯이 그들은 예수님 앞에 일언반구 대꾸도 못했다.
그들은 당시 유대의 최고 지성인이었고 가장 경건한 종교인이자 구약성경의 전문가였다. 예수님은 너희가 도리어 저 아이들보다 성경을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그들에게 “너희가 (시편 예언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다그쳤다. 그들은 성경을 자기들에게는 전혀 적용 실천하지 않고 대신에 대중들에게 인간의 유전을 보태어 지키기 힘든 멍에로 짐을 지웠다는 것이다. 그들이 종교로는 9단일지 몰라도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교제 동행하는 영성으로는 완전 초급자인 어린이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성전이 존재하는 근본 목적
성전을 청소하는 사건을 단순히 부정을 바로 잡는 일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사역과 선포하는 말씀에는 반드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수반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어른들의 찬양을 막으면 아이들을 찬미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함과 말씀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진리가 드러난다.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깨끗이 씻어주는 참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님의 성전을 청소하신 뜻은 말씀 그대로 성전에서 강도짓을 그만두게 하고 원래 성전이 존재해야 하는 목적대로 기도하는 집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바꾸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서 그런 원리라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열왕기상 8장에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봉헌하는 기도가 무려 40절(22-61)에 걸쳐 길게 기록되어 있다. 그 모든 기도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여호와의 백성이 이 전에서 혹은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모두 응답해 달라”는 것이었다. 특이하게도 제사를 드리면 열납해 달라고 하지 않고 기도만 언급했다. 제사드릴 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드리라는 것이다. 나아가 제사보다 기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내용은 전쟁과 질병과 재앙에서 구원해달라는 것이다. 이 셋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징벌하는 도구였다. 유대인들도 현실의 고난과 질병을 죄의 결과로 간주했다. 솔로몬의 모든 기도에도 “여호와 주께 범죄하거든”이라는 전제가 붙었다.
결국 성전이 존재하는 근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율법대로 살지 않아 그분과 이웃에게 범죄하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라는 것이다. 온전한 회개를 하여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율법에 규정된 모든 제사의 의미도 속죄제였다. 화목제마저 반드시 속죄제인 번제와 함께 드리도록 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그분께 은혜는 물론 사람들 사이의 화목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솔로몬 봉헌기도의 결론도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를 벗어나지 않고 지켜서 여호와께 가까이 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상 만민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했다. 여호와의 백성들이 자기들 죄를 씻고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어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일을 당신께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분의 사랑을 입은 신자들이 주위에 나눠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인데 그 일을 위해 성전에서 기도하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다 이뤄지게 하는 것이 성전이 존재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성전 문을 닫으러 오신 예수님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솔로몬의 기도대로 행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즉 기도가 빠진 제사만 드렸다. 전쟁과 재앙과 질병이 그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졌다. 솔로몬은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하나도 없게 해달라고 간구했는데, 거꾸로 제대로 응답되는 기도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나라는 망하고 바빌론에 70년간 포로로 잡혀가는 징벌을 받았다. 포로에서 돌아와선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려는 영적 회복 운동이 일어났으나 잠시뿐이었다. 다시 기도가 빠진 형식적인 껍데기 제사만 행해졌고 급기야 성전을 공공연히 자기들 배만 채우는 강도의 굴혈로 타락시켰다.
포로기 이후에도 하나님은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선지자들을 보내어 헛된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계속 경고했다. 마지막에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더러운 떡과 흠 있는 제물을 바치면서도 복만 달라는 그들에게 지쳐서 하나님은 성전 문을 닫는 이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한탄을 터뜨렸다.
예수님은 바로 그 성전 문을 닫는 자로 오셨다. 성전 청소로 그치지 않고 돌이 돌 위에 하나도 남지 않게 성전을 파괴하실 분으로 오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을 하자 바리새인이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예수님은 그들을 말려도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고 했다.(눅19:41,42) 돌마저 당신을 찬양케 하실 수 있는 분이 오히려 우상 숭배하는 로마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며 기도하는 거룩한 성전의 돌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돌덩이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성전을 보고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의 그 비탄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성전에서 당신의 자녀들과 기도를 통해 온전한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실현되길 소원하셨다. 당신 안에만 거하면서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망과 약속은 무시하고 오히려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 다시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벌줄 수밖에 없으니 하나님 가슴이 얼마나 찢어졌겠는가? 아들이 너무나 나쁜 짓을 많이 해 곧바로 사형에 처해질 것을 알고도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갈가리 찢어지는 심정에 그나마 비견될까? 지금 호산나 찬송하며 따르는 유대 대중들도 진정성 있는 회개는 빠트린 채 하나님께 제사를 열심히 드렸으니 로마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하나님은 그 40여년 후에 오히려 로마로 유다를 멸하게 했다.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가? 하나님은 당신의 성전을 로마군대에 의해 돼지 피로 더렵혀지는 일을 당신께서 스스로 허용했지 않는가? 지금 제사장의 허가를 맡은 상인에게서 산 제물은 어떤 허물이 있어도 제사장들이 받아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돼지 피로 지성소를 더럽히는 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전을 하나님을 빙자해 자기들 돈 벌이하는 도구로 삼았다. 하나님을 자기들 종으로 부려먹었다.
최근에 와선 유대인들은 자기들 잘못은 전혀 회개하지 않고 성전이 로마에 의해 돼지 피로 더렵혀졌다는 사실만 분개해 한다. 예수님께 회개하고 돌아올 생각은 전혀 없고 제 삼의 성전을 지으려 하고 있다. 그 일에 기독교인들마저 선한 일이라고 동참 내지 옹호하고 있으니 인간이 죄로 타락한 모습이 이 얼마나 완악한가? 어떻게 하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멀어질 궁리밖에 하지 않는다.
강도의 굴혈이 된 한국교회들
지금 이천 년 전의 유대인들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금의 한국 교회의 실상이 어떠한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은 이단들만의 짓이 아니다. 정통복음주의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성행한다.
간단한 예로 교회 바자회를 하면 시중보다 더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한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강매(强賣) 혹은 헌금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교회당을 화려하고 크게 짓는 일이 경쟁이 되었다. 교인의 숫자와 건물의 크기로 영성의 우열을 가름하고 있다. 일부 담임목사의 개인적 재정적 비리는 썩어서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다. 최근 이곳 미주 교계에도 몇몇 대형교회의 목사들의 스캔들이 터졌지 않는가? 죄송한 표현이지만 그 썩어가는 냄새를 세상 사람들도 쉽게 맡으니까 기독교를 세상보다 더한 개독교라고 비방한지 오래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맨 처음으로 성전, 지금으로 치면 교회부터 찾아간 이유는 간단하다. 십자가 구속 사역을 성취해도 교회가 바로 서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당신의 죽으심만으로 십자가 구속을 완성하지 못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 권능과 은혜는 온 우주를 뒤엎고도 남는다.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아도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은 단 한 치도 손상이 없다.
그러나 복음은 듣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또 알지 못하고는 믿지 못한다. 복음을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모든 불신자에게 전할 사명을 교회가 맡았다.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면 복음을 복음답게 전할 수 없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 최고 지성인과 종교인들은 물론 당신의 제자들도 십자가 진리를 몰랐다. 지금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자연인이 스스로 그 진리를 깨달을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이 완악하고 치사하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인데 그 사실을 하나님은 더 잘 아신다. 그러니까 당신께서 구원을 주기로 택한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되 신자와 교회들이 행하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성전을 청소하신 것은 바로 이 시대의 교회와 교인들에게 제발 복음 안에서 올바르게 서있으라는 당부요 경고다. 현대 신자들은 누구나 성령 안에 거하며 신약 성경을 소지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래야 한다. 교회가 복음을 바로 전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만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구라파 교회들이 술집과 호텔로, 심지어 이방인들의 신전으로 변했지 않는가?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만 만들지 않아도 성령이 역사하여 순진한 아이들로 찬미하는 모습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를 가장 먼저 찾아가셨다. 그 구속을 최종적 궁극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재림하실 때도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의 장소가 어디인지 설왕설래가 많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심판의 순서다. 저 같은 목회자들부터 먼저 주님의 심판대에 설 것이다. 특별히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은 목사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절대 용서 받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셨는가?
이 기사를 읽으면 어찌 성전에서 저럴 수 있는지 “쯧쯧!” 혀를 차고 그쳐선 안 된다. 예수님 다시 오시면 그 쯧쯧 혀를 차는 것부터 금지시킬 것이다. 주님이 지금의 나와 나의 교회에 말씀하신 것이다. 정말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사건 앞에 서야 한다. 단순히 교회의 금전적 부정을 야단치는 기사가 아니다. 주님의 주님다우심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모든 교회가 진정한 회개의 기도가 앞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주님의 주님다우심을 정말로 깊이 깨닫고 알아야 한다. 그분에 대한 참된 찬양과 감사와 경배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만이 신자와 교회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교회와 기독교에 아무 소망도 없다. 그 말은 이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그것을 막을 힘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다. 실은 너무 그렇게 거창하게 따질 것도 없다. 신자 자신에게서부터 어떤 평강과 자유와 안식도 없게 된다.
12/1/2013
말씀에 진정 순종치 못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 봅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라 착각함은, 로마에서의 해방만을 소원하며 제사를 위한 제사를 여전히 행하는 저들과 같은 자리에 머물고 있는 모습임을...예수님의 눈물 흘리시며 애타하시는 그 맘을 이성없는 어린아이와 같고 이기적인 유대인과 다름없는 저에게도 가르쳐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