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마태복음 강해 (199)
http://youtu.be/8IkUF6fSgw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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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18-22)
기도에 대한 상반된 두 시각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예수님이 말로 저주하자 뿌리부터 말라 죽어버렸다. 형식주의와 금권주의에 빠진 유대교를 하나님이 크게 질책한다는 의미다. 본문을 한 번 더 살펴보는 이유는 “너희가 믿고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2절)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때문이다.
마가는 같은 기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믿음으로 구하면 받는다가 아니라, 기도하고 구하면 당연히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다. 기도하면 받는 것은 확실히 보장되고 실체화 되는 것은 단지 시기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대하는 신자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우선 말씀 그대로 믿고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뤄진다고 믿기에 심지어 기도 시작할 때에 감사부터 한다. 반면에 예수님이 과장법을 사용했을 뿐이므로 문자적으로 믿을 필요 없이 기도의 권능만 중요하게 여기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비난한다. 기도의 능력을 강조하는 측은 상대를 향해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 단순하게 믿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에 영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측에선 상대를 초보적 맹신적 믿음으로 비하한다.
문제는 무엇이든 응답된다면 초자연적인 기적도 포함된다는 뜻인데 아무리 기도해도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잘못된 말씀을 할 리도 없고 허풍쟁이도 아니다.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의 진의(眞意)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고 했는데 무엇을 어떻게 믿으라는 뜻인가?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고 신자의 기도를 들어주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인가? 그러나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신자도 아니다. 또 기도한다는 자체가 바로 그런 믿음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기도의 모본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응답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뜻인지 아닌지 미리 알고 기도할 수는 없다. 아직 응답이 되지 않는 기도가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기도 쉽지 않다. 또 언제까지 그 기도를 계속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본문 안에 있다. 예수님은 ‘믿음’을 21절에서 “의심치 않는 것”과 동의어로 제시하고 있다. 그럼 22절에 믿음 대신에 그 동의어인 “의심치 않는 것”을 대입해보라.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의심치 않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가 된다.
역으로 따지면 “너희가 기도할 때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면 구하는 것을 다 받지 못하리라”가 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럼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고 야고보 사도가 말한 대로다.
의심치 말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나 그분의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시다. 무엇에든 한 치의 부족함이 없이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다. 하나님께 의심이 들면 무조건 신자에게 잘못이 있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아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따라 가보자. 만약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 달라고 기도한다고 가정했을 때에 전혀 의심치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바보요 광신자 맹신자일 것이다. 결국 예수님이 의심치 말라는 것은 신자가 기도하는 내용이다. 기도하는 제목에 스스로 미심쩍어지면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이슈이므로 더 자세하게 기록된 마가복음을 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니라.”(막11:23) 그 말하는 것은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이며 분명히 기도하는 제목을 뜻한다. 믿음의 초점을 하나님보다 기도하는 내용에 두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경을 말 타고 달리며 산을 보는 식으로 대충 읽고 치운다. 그러니 눈에 번쩍 띄는 것만 이해하고 적용한다. 요컨대 자기가 좋아하거나 믿고 싶은 일부 구절만 찾아서 붙든다. 본문에서도 무엇이든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 이뤄진다는 약속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의심하지 말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
마가의 기록에서 “이뤄질 줄 믿으라”고 말한 부분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에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다. 반면에 의심치 말아야 할 것은 기도하는 내용인데 기도가 응답될 수 있는 충분조건이다. 그저 뜨겁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에서 믿음이라는 필요조건 즉, 반(半)만 충족시킨 것이다. 의심을 제거하는 나머지 반 즉, 충족조건을 채우는 것이 기도에서 더 중요하다.
기도할 때에 의심은 당연한 것이다.
지금 본문을 해석함에 특별한 신학적 이론이나 성경적 교리를 적용한 것이 아니다.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관습을 따져본 것도 아니다. 단순히 성경을 있는 그대로 조금 더 자세히 비교해보았을 뿐이다. 문자적으로 해석이 정확해지면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적용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의심치 말라는 것은 의심이 들 수 있다고 전제한 것이다. 다른 말로 기도할 때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며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선 사탄은 신자가 기도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기도하는 것은 그만큼 신자가 하나님께 가까이 서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에 방해가 극심하다.
또 기도 중에 의심이 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응답의 일부 내지 과정일 수 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아! 이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겠구나.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겠구나.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기도이겠구나!”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기도 응답이 안 되는 일이 반복된다고 해서 기도의 능력을 의심하거다, 또 그래서 역시 기도보다는 말씀에만 집중해야 된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가보다 지레짐작하고 기도에 나태해져서도 안 된다. 도리어 그럴수록 쉬지 말고 무엇이든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기도가 응답이 잘 되고, 어떤 기도는 응답이 지체 혹은 안 되는지 Follow-up(사후점검)을 철저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고 지금 자기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계시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기도다운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차츰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기도를 하게 된다. 신자가 꼭 해야만 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말해 기도가 응답이 잘 될 때보다 잘 되지 않을 때에 오히려 영적 성장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주 미국에 또 로토 광풍이 불었는데 정상적인 신자라면 당첨되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또 예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 이뤄준다고 해놓고 왜 그러지 않았느냐고 따지지도 않는다.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겠다.
오래 전에 동대문 시장에서 포목장사를 크게 하는 장로가 이중장부를 만들어 탈세로 치부했다. 하루는 세관원이 조사하러 급습하자 다급해서 방석 밑에 장부를 감추고 제발 들키지 말라고 기도했더니 응답되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그것은 기도도 아니고 하나님의 응답도 아니다. 단지 요행일 뿐이다.
과격하게 말해서 사탄이 도와준 것이다. 하나님은 탈세 같은 부정으로 번 돈은 창기의 더러운 돈처럼 받지 않으신다. 또 신자의 악행을 조장 격려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 그 장로는 믿음이 전혀 없는 것이다. 아니 기본 양식과 상식조차 없다. 장로이기 이전에 인간이 덜 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는 그런 기도는 하지 않는다. 사업이 정상적으로 번창하게 해달라거나 신규 사업을 벌일 때에 기도하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그대로 될지 확신이 생기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생기지 않고 대신에 이유도 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님이 그 기도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의 사인(sign)일 수 있다.
반대로 신자 스스로도 엉뚱하고 분에 넘치는 기도인지라 혹시 내 욕심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이상하게 평안하고 기쁨은 몰라도 확신이 생겨서 응답 될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다. 그럴 때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와 상충되지는 않는지 면밀히 점검해야 하며, 되어져 가는 상황이 기도한 것과 일치하며 긍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지 잘 살펴야한다.
기적의 역할
기도에서 예수님이 의심치 않는 것을 믿음과 동격 혹은 더 우위에 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지성, 이성, 경험, 지혜 등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아니 당신께서 인간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다. 기도 제목이 자기 이성과 모순되거나 불합리하면 그 제목을 두고 깊이 상고하고 먼저 그 기도제목에 대해서 기도해보아야 한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다거나, 기적이 필요한 경우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반대로 기도만 하면 기적이 매번 일어난다는 뜻도 아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은사는 역동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 의미와 역할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 최대의 기적은 아무래도 80넘은 노인 모세가 지팡이 하나 들고 세계 최강국과 홀로 싸워 십전십승(十戰十勝)한 출애굽일 것이다. 애굽 군대를 수장(水葬)시킨 대신에 이백만의 비무장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음란하게 경배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기적적 치유를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중에 성전결례를 마치고 주님께 감사한 자는 한 명뿐이었다.
신자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차원에선 물론 불신자가 믿음을 갖는 단계에서조차 기적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성경의 생생한 증거다. 기적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기도에 응답해준다는 객관적 사실에 수긍하는 정도의 효능이 있다. 인간의 거룩한 변화에는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한다. 사탄도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에 불신자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인 힘이 인간사에 아주 드물게 특별한 사람에게 간섭하는 경우도 있다는 정도의 인식만 하게 하는 것이 기적의 현실적 실상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기적을 바라고 기도할 때에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지금껏 배운 바로는 의심은 믿음에 나쁜 것이니까 무조건 지워버리고 다시 굳세게 믿고 끝까지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특별히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기도하는 내용에 의심이 들면 응답이 되지 않으니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기적을 부인하는 뜻이 결코 아니다. 기적이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오직 하나님의 소관사항이라는 것이다. 또 신자는 이미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며 당신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하면 다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 크심을 깨닫게 하는 기적을 자주 계속해서 일으켜 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기적이란 하나님 당신께서 만드신 원리와 규칙을 깨는 일인데 자꾸 그럴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꼭 필요하다고 여길 때에 당신의 때와 방식에 따라 전적으로 당신의 주권으로 베푸실 뿐이다.
기도 응답이 절실한 신자
기적이 거의 일어나지 않음을 알긴 해도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고달프기에 기적 같은 응답이 절실할 때가 있다. 또 어리석고 믿음이 적어서 기도 제목이 응답될지 확신이 없을 때도 많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아닌지 분별이 쉽지 않다. 그 해답도 성경 안에 있다.
마가의 기사에서 주님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막11:25) 다른 이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는 기도를 하면 무엇이든 응답이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내용이 서로 간에 사랑을 증진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하나님께 받은 참 생명력이 주위에 나눠져서 다 같이 그분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며,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하고 거룩해지는 일이라면 사탄의 훼방이 아무리 집요해도 반드시 이뤄진다.
사업을 번창시키는 문제나 일상적 삶에서 어떤 일을 선택하기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다. 소망하는 사업이나 선택으로 인해 예수님의 은혜가 더 증거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측면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종교적 모습을 꼭 띄어야 할 필요는 없다. 쉽게 말해서 단 100불을 구해도 나 혼자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라면 이뤄지지 않아도, 사업을 하여 종업원의 복리 후생을 개선하고 그 이익금으로 빈민을 구제하는데 사용하겠다면 천만 불, 일억 불이라도 당당히 간구할 수 있고 또 응답 받을 수 있다.
의심하면 받을 생각을 말라고 한 야고보 사도는 의심을 “두 마음”이라고 정의했다.(약1:8)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이다. 자신의 주인으로 하나님과 돈 둘을 모시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두 마음이라고 했다. 돈만 주인으로 모시는 “한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과 주인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다.
본문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거룩한 성전을 이용해 돈 벌이를 한 것은 아무리 경건한 제사를 많이 드렸어도 오히려 돈만 목표로 했기에 한 마음이다. 신자들이 의외로 하나님과 세상을 적당히 타협하는 식의 기도를 예사로 한다. “이번 이 사업만 크게 번창시켜 주시면 감사헌금 십일조 듬뿍하겠습니다. 그럼 하나님도 좋고 저도 좋지 않습니까?” 감히 하나님에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으로 흥정하려는 것이 두 마음이다. 엄밀히 따지면 이 또한 최종 목표가 돈이기에 한 마음이지만...
세상의 것도 물론 소중하다. 그 중에는 돈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하나님의 능력만 구하면 두 마음이다. 반면에 세상의 모든 것들을 구하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으로만 삼아야 한다. 물질만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예외는 정말로 없으면 생존이 안 되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뿐이다.
엄밀히 또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어떤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고 그 마음에 합한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거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 욕심과 평안만 구하려는 뭔가 잘못된 기도라고 짐작되니까, 다른 말로 응답이 힘들 줄 예상되니까 더 뜨겁게 “믿슙니다!” 큰소리로 부르짖는다. 문자적으로 의심치 말고 받은 줄 믿고 구해보려는 뜻이다. 자기 의지력만 강해지면 자연히 의심이 없어지고 믿음도 강해지는 줄 착각한 것이다.
기적도 충분히 일어난다.
기도하는 내용이 자신의 이성으로도 응답의 확신이 생기는 기도라면 기본적으로 초자연적인 기적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응답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단순히 강조하기 위한 비유법에 불과한 것인가? 결코 아니다.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일을 상고해보라. 총칼로 진압하거나 핍박하지 않았기에 희생자 없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때에 정말 순식간에 무너졌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 해머로 무너뜨렸을 뿐이다.
그 일은 동독의 힌 작은 시골교회의 적은 무리의 기도 모임에서부터 발단이 되었다. 그들이 동독해방을 위한 기도를 할 때에 틀림없이 응답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라는 면에서 한 치의 의심도 없었을 것이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이런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길 정도였을 것이다. 남은 것은 시간문제뿐으로 응답될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한 것이다. 정말로 산보다도 더 견고한 철옹성 같던 베를린 장벽과 공산주의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이런 기적이 어디 있는가?
무슨 뜻인가? 최근 북한에서 비상식적, 비인간적 일들이 잔인하게 자행되고 있기에 남한 주민들이 불안해한다. 그런데 김씨 세습 왕조의 폭정에 신음하는 비참한 북한 동포를 위해 남한 국민들이, 특별히 교인들이 수수방관하고 있을 것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누리게 해야 한다. 최소한 인간이 반드시 누려야 할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도록 남한 교회와 교인들이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 않는가?
이야말로 본문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받을 수 있는” 바로 그런 기도다. 휴전선이 무너지고 통일 되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그 일을 하나님이 더 안타까이 바라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응답하지 않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체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남한의 주민들이 자기들 먹고 사는 경제적 형편이 나빠질까 염려되어 통일을 원치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의 죄악상은 하나님의 공의로 철저히 저주해야 하지만, 그 정권 아래 신음하는 백성들을 위해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품고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만약 남한의 교회와 교인들이 이 일을 등한시 한다면 바로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요한 사도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요일4:20)라고 했다. 본문에서 거짓말한다는 것은 신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성탄절을 가장 성탄절답게 지내려면?
이번 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계절이다. 죄인들을 위해서, 그중에는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포함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서 오셨다. 죄인을 구원하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제물로 바쳐졌다. 주님의 그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다.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권세를 주었다.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한다. 신자는 이 땅의 더럽고 추함을 고쳐달라고 스스로 겸비하여져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되 의심치 않고 기도해야 한다.
북한의 장성택이 저지른 그 동안의 죄과는 엄청났을 것이나, 그 마지막 가는 길이 너무나 비참해서 연민의 정마저 들지 않았는가? 초췌한 얼굴을 한 김정은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그 전날 과음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 만약에 강경파에 휘둘려 꼭두각시 노릇한다는 루머가 사실이라면 그도 불쌍하긴 마찬가지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을 무조건 용서해주거나 방치하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인간만큼 가장 불쌍하며 가장 실패한 인생이 없다는 뜻이다. 북한은 하나님을 철두철미 부인하는 대표적 국가다.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 죄악의 힘이 어느 정도까지 음흉하고 추악해지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實例)다. 남한의 교회와 신자들이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요구할 가장 시급한 기도제목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가장 먼저 무엇을 기도하라고 했는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것이었지 않는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한 후에 예수님이 주신 첫 약속도 무엇인가?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이지 않는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만도 너무나 큰 기적이다. 거기다 우주의 중심에 계시며 전 우주를 거룩하게 통치하는 하나님의 일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북한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미국의 원자탄도 아니요, 한국의 정치인들도 아니다. 오직 신자들의 기도다. 하나님이 북녘 땅을 고치고 싶길 더더욱 원하시고 애통해하신다는 그 마음을 헤아려서 응답에 확신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은 남한의 교인들이 먼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스스로 겸비하여져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전적으로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며 헌신해야 한다.
성탄절을 가장 성탄절답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에서 그분의 오심을 기념하는 큰 잔치를 벌이며 다 함께 모여 식사하며 즐겁게 보내는 것인가? 물론 그렇게 해야 하고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평소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로 이 땅을 고치려 들지 않고 두 마음을 품고 있다가 이날 하루만 한 마음을 가지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치 부모를 양노원에 맡겨놓았다가 일 년에 한 번 생일날만 찾아와 잔치를 벌려주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것도 온갖 부정과 나쁜 짓으로 번 돈으로 말이다.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해야 비로소 성탄절이 정말 성탄절로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땅을 고치려는 기도를 한다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큰 은혜를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모습으로 체험케 된다. 너무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부터 깨끗케 되길 간절히 소원하면 하늘의 신령한 보물로 넘치도록 채워 주시어 신자 주위에 번져나가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다. 또 그럼으로써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기적 같은 은혜는 시간문제로 남을 것이다.
12/22/2013
글의 마무리가 안 올려진 것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