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진짜 이유
마태복음강해(236)
http://youtu.be/sDR9beTn-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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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마26:14-16)
현대교회 안에 만연한 가룟 유다 같은 신자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당신께서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1)고 당부했다. 전도와 선교에 대한 지상대명(至上大命)을 주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뜻이다.
제자는 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있듯이 반드시 스승보다 뛰어나야 한다. 스승이 가르친 내용을 계승 확대시킬 책임이 있고 그래야 개인과 사회가 성장할 수 있다. 실제로 인간 사회의 모든 분야는 그런 이어짐의 덕분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유일한 예외가 하나 있다. 오히려 거꾸로 퇴보하는 분야로 바로 기독교 신앙이며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부분이다. 그것도 교회들마다 제자훈련을 아주 활발하게 시키고 있는 중인데도 그렇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할 신자와 교회가 이러니 세상은 더욱 타락하여 종말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계시 받아 성경을 저작한 사도들이나, 기독교 신앙체계를 정립한 개혁가들보다 낫거나 같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았고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그런 신앙의 선각자들이 세운 성경적 교리대로라도 잘 믿으면 다행이련만 현대교회 안에는 본문의 가룟 유다 같은 신자들이 너무 많으니 큰일이다.
혹시 너무 심한 말로 여겨지는가? 명색이 교회에 출석한지 10년, 20년이 되어서 장로 구역장 등을 맡아 충성하는데 무시하다 못해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것 같은가? 가끔 현실적 고난 이 생기면 환경에 시선이 빼앗겨 베드로처럼 주님을 의심하고 불신하기는 해도 곧바로 회개하고 제 자리로 돌아온다. 어떻게 스승을 배반하여 밀고했고 자살로 마감한 유다와 견줄 수 있는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렇게 반발할 자격이 과연 있는가? 유다는 자기 잘못을 뒤늦게 뉘우치고 자기 목숨으로 그 죄 값을 갚았지 않는가? 자살은 하나님의 뜻과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 위배된다는 그런 차원을 떠나서, 우리가 우리 죄를 그 만큼 진정으로 심각하고도 무겁게 받아드려서 엄격하게 처리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지금 유다가 잘했다는 뜻이 아니다. 베드로나 유다나 스승을 배신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죄를 씻는 방식에서 달랐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에 전적으로 의탁한 반면에 유다는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려 들었다. 그럼으로써 영원한 운명이 완전히 둘로 나뉘고 유다는 역사상 최고로 비겁하고 사악한 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럼에도 당시 상황을 면밀히 추적해 보면 “내가 베드로는 몰라도 유다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큰 소리 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유다가 범한 행위와 결과만을 단순히 비교해선 성경을 이해함에 크게 부족하다. 또 자꾸 그러니까 신앙이 퇴보하는 것이다.
유다의 배반이 과연 돈 때문이었나?
유다가 예수님을 밀고한 첫째 이유는 돈 욕심 때문이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마리아가 헛된 낭비를 했다고 비난했지만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쳤던”(요12:6) 자였다. 만약 그 향유를 쏟아 붓지 않고 차라리 헌물(獻物) 했다면 팔아서 돈궤에 넣었을 것이고, 그럼 시쳇말로 삥땅 칠 여지가 많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배반이 반드시 돈 때문만이 아니라고 추정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성경은 최소 두 군데 이상 제시하고 있다. 먼저 요한이 기록한 대로 유다가 돈궤를 맡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예수 모임의 재정부장 격이었다. 통상적으로 돈에 대해 공정하고 엄격하다고 남들에게 신뢰를 얻은 자가 맡는 직책이다.
유다를 도적이라고 지칭한 요한복음(13:26-30)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예수님이 제자 중에 한 명이 당신을 팔 것이라고 예고했다. 제자들이 궁금해 누구인지 물었고 주님은 떡 한 조각을 찍어주는 자가 그라고 대답하며 유다에게 떡을 떼어 주었다. 그리고 네가 하려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했는데 아무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명절에 쓸 물건을 사거나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나눠주라는 뜻인 줄로만 알았다.
그만큼 유다가 동료 제자들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물론 돈을 밝히는 자일수록 돈 관리가 더 철저한 법이긴 하다. 그럼에도 최소한 그가 처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에 예수로 인해 돈을 벌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또 그런 예상도 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은 삼십의 비밀
둘째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스가랴가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하는 중에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슥11:12)는 말씀이 성취되어다. 물론 유다가 이 예언을 실현시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돕겠다는 뜻은 전혀 없었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십자가 진리는 당시의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은 한 세겔은 노동자 4일의 품삯에 해당되므로 은 삼십은 120일, 4개월 임금이다. 유다가 정말로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지금 예수의 몸 값이 하늘을 찌를 듯 최고로 올랐는데 그렇게 약한 가격으로 흥정할 리가 없다. 세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의 주인공 샤일록이 그러하듯이 유대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탐욕적이고 상술에 능수능란하기로는 세계에서 최고다.
유다는 그 중에서도 재정부장을 맡았기에 결코 호락호락할 인물이 아니다. 대제사장이 은 삼십을 달아 주었다.(15절) 대제사장이 고가를 결정했고 그는 순순히 오케이 했다. 그로선 돈을 많이 받기보다는 예수를 넘겨주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했다는 뜻이다.
대제사장 또한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시켜 예수를 메시아로 올려주려는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율법(출21:32)에 따르면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들이받아 죽게 되면 소 주인이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변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은 삼십은 바로 노에 한 명의 몸값이자 그 인간의 가치를 의미했다. 율법에 능통한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비천한 신분의 한 명의 노예로 취급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인격을 철두철미 무시하고 비하했다.
거기다 율법에서 하나님께 저주 받은 형벌인 나무에 매달아 죽이려 획책했다. 지금 유월절 전후에 예루살렘 성중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예수 현상을 일시에 진정시키고 유대 대중들을 다시 자신들을 추종케 하려 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에 너무 능통한 것이 도리어 자기들 발목을 잡았다. 은 삼십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연결될 줄은 몰랐거나 알아도 깜박 잊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가 메시아 됨을 자기들이 더 확증시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메시아의 예언을 하도록 만드신 하나님과 같다는 것이다. 지금 유다에게 네 하려는 일을 하라고 그의 배반을 예고하는 예수님도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라는 것이다.
그 때부터 배반할 기회를 노렸다.
유다의 배반에 돈이 개입된 것만은 사실이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더 중요한 이유인데 과연 무엇이겠는가? 본문에 그 힌트가 있다. 우선 “그 때에”(16절)라고 시작하고 또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16절)고 한다. 그 때가 두 번이나 강조되었다. 바로 그 앞에 있었던 마리아의 향유를 부은 사건이 배반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네 복음서가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마리아는 나드 향유 한 근을 부었다. 유다는 노동자 300일치의 고가품을 그냥 허비하는 것에 분개했다. 다른 제자들도 그랬지만 스승이 당신께 한 일로 당신의 장사를 위해서 한 선한 일이라고 하니까 완전히 납득이 안 되었어도 아무런 반발을 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여자가 돈의 귀중함도 모르고 내가 죽는다니까 감성적으로 슬프고 안타까워서 한 일이니까 너희들이 이해하고 참으라.”고만 했어도 그렇게까지 발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님은 자기 한 명에게 한 일이 삼백 명이나 구제하고 선행하는 일보다 더 의롭다고 했다. 거기다 가난한 자는 항상 있다고 고난 받는 자들은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 같으니까 도무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대 대중은 아주 힘들게 살았다. 예컨대 가난하여 소득 하나 없어도 전 국민이 로마에 주민세와 예루살렘의 성전세를 이중으로 바쳐야 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 성전제사와 율법준수에 소홀히 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자성하고 포로귀환 후로는 성전을 재건하여 성실한 종교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3-4백년이 지나도 여전히 노동자 농민 같은 무산대중의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궁핍해졌다.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될 기미는 없고 로마에 아부하고 결탁한 지도층들은 떵떵거리며 살기에 계층 간의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
유대 대중들 사이에 공평과 정의가 완전히 실종 된 이 세상이 한번 뒤집어지라는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고 그중 가장 열렬분자가 유다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난한 자는 항상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의 소망에 완전히 찬 물을 끼얹는 순간이었다.
어느 모임에서나 총무나 회계를 맡은 자에게 번거로운 일이 가장 많다. 명절에 쓸 물건을 사야했으니 유다가 그랬다. 지난 3년간 불평 한번 하지 않고 그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를 편애하는 것 같아 배알이 꼴려도 참았다. 그런데 다른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못해 줘도 당신 혼자에게만 잘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마치 이단교주처럼 말했다. 스승의 사상이 의심되었고 지금껏 가르친 것과 다른 이중인격자로 여겨졌을 것이다.
주님은 속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유다에게 기름을 끼얹는 말씀까지 하셨다. 마리아가 내 장사를 위해 향유를 부었다고 말이다. 마리아의 행위를 장차 계속해서 기념하라는 것보다 유다로선 더 참지 못할 말이었다.
스승은 결국 죽고 말 것인가? 십자가에 매달릴 결심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말인가? 그럼 누가 조국을 로마에서 해방할 것인가? 이 썩어빠지고 형식적 가식적인 유대 종교를 개혁할 방도는 없다는 말인가? 스승에게 정녕 그럴 의사조차 없었던 것은 아닌가?
당장에 로마에 전쟁을 하고 유다에서 혁명을 일으키자는 뜻은 아니다. 뭔가 단체를 결성하여 데모라도 해야 할 텐데 단 한 번도 시도조차 않고 찍소리도 않은 채 바보처럼 죽겠다니 이럴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그렇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내가 그 죽음을 재촉해주겠다고 결심했을 수 있다.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던 유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일이 예수님 일행의 식사 중에 있었던 것이 흥미롭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300명 이상의 풍성한 잔치를 벌일 수 있는 돈이었다. 그 순간 유다는 어쩌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렸는지 모른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끼의 식사인데 노동자 하루 품삯 한 데나리온으로 충분히 사고 남는다. 약 2만 명의 사람들을 먹이려면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6:37)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했다. 그런데 주님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한 데나리온에도 못 미치는 오병이어로 그들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
기적을 단순 산술로 따질 수는 없지만 삼백 데나리온의 현찰이면 그 기적의 삼백 배 즉, 육백만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뜻이다. 유월절 전체 순례객 2백만 명이 절기 기간 내내 잔치를 벌일 수 있다. 가뜩이나 주님은 유대뿐 아니라 이방지역에까지 명성이 자자한 판에 만약 그랬다면 이스라엘 전 백성이 주님께 충성 서약을 할 것이다. 대제사장이 염려하는 민요가 아니라 당장 유대 개혁을 이룰 수 있고 로마와의 일전도 기대해 볼 만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유대 대중들이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나? 예수님을 억지로 왕을 삼으려 했다.(요6:15) 그 때에 유다는 산으로 비겁하게 피하는 예수에게 일차로 실망했을 것이다. 이번이야말로 절호의 찬스로 여겨졌을 것이다. 마리아 같은 아녀자들마저 향유와 귀금속을 바칠 것이므로 거사 자금도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그런데 또 다시 주님은 꽁무니를 빼려고 하고 있다.
유다는 정말로 이제나 저제나 언제 거사를 결행할까 기다려 왔다. 예수님의 오심과 메시아 되심을 선포했던 요한도 감옥 안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사역을 전해 듣고는 실망하여 또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할지 물었다. 유다도 그렇게 반신반의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금껏 참고 따라왔다. 그런데 예수는 이틀 후에 죽겠다고 날짜까지 지정했다. 유다의 소망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역으로 말해 유다로선 예수가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핍박을 받다보면 뭔가 저항할 것이고 그럼 개혁운동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간과해선 안 될 정말 중요한 사실 하나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여 성경을 근거로 개연성 있는 추측을 한 것뿐이다. 유다의 속내는 아무도 모르고 그와 하나님만이 아신다. 반면에 본문에는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되는 정말로 중요한 사실 내지 진실이 하나 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도 믿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였다. 유다만은 십자가에 죽으시겠다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었다. 그 현장에 마리아와 유다 오직 2 명만이 주님의 처형에 관심을 두었다.
마리아는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을 메시아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권능으로 자기라는 존재가 거룩하고 의롭게 되며 새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소망했다. 복음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반면에 유다는 예수를 하나님이 아닌 인간 스승, 개혁자, 종교가의 위치에 두고 해석하였다. 더 정확히는 자기 갖고 있는 기존의 가치관, 사상, 철학, 윤리, 종교의 잣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했다.
유다는 자신의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목적과 소망과 계획을 예수님이 큰 능력으로 이뤄주길 바랬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주는 현실적 축복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 그분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자신의 자기됨이 오직 예수 안에 있기에 예수로 인해 살고 죽었다.
두 사람 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전개될 사태가 궁금했다. 어떤 면에선 그 죽음을 앞당기려 시도한 셈이다. 마리아는 십자가 복음으로 죄인들의 타락한 영혼이 깨끗해지고 갈급하고 허망하기만 했던 인생들이 새롭고 활기차며 아름답고 충만해지는 것을 기대했다. 반면에 유다는 이 땅에서 인간들끼리 인간의 능력과 자격과 공로와 의로써 인간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그 지도자로 인간 예수를 모시고 자기는 그 밑에서 한 자리 하려 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품 안에 자기를 완전히 의탁했다. 반면에 유다는 주님의 능력만 인간 세상으로 끌어 들어와 자기 희망을 실현하려 했다. 그 계획과 기대가 무산되자 가차 없이 주님을 배반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으로 둔갑한 개인의 탐욕
이제 처음에 제기했던 주제로 돌아 가보자. 지금 교회 안에 유다 같은 신자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많은가 적은가? 불행하게도 너무 많다. 거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제자훈련을 시행하고 있는데도 유다 유사품의 교인들만 양성해내고 있지 않은지 정말로 심각하게 점검해 봐야 한다.
작금 목사와 교인이 자신의 탐욕과 야망을 하나님의 비전과 소명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처럼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물량성공주의가 교회성장의 첫째 목표가 되었고 또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거룩하게 포장하고 있다. 마리아처럼 자기 전부를 바쳐 예수님의 장사를 기념하는 신자가 없다. 십자가로 살고 죽으며 예수님처럼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을 비춰내는 신자가 너무나 드물다.
물론 우리 중 대부분은 너무 연약하여 고난이 닥치면 베드로처럼 수시로 주님을 의심하고 부인한다. 그중에 일부는 진정으로 통곡하고 회개하기는 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기꺼이 가려는 신자는 찾기 힘들다.
최소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릴 줄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는 신자가 없다.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고 간단하다.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지금 유다와 마리아 사건을 기록한 본문만 보아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또 그러면 이웃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뜻을 따르는 대신 신자들은 현실에서 조금만 어려운 고난이 닥치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자존심이 쥐꼬리만큼만 상해도 주님을 의심한다. 제가 새벽 기도 나와선 천일 제단을 쌓았지 않느냐고 대든다. 교회에 헌금과 봉사를 그렇게나 많이 했는데도 왜 아직 이 문제 하나 해결해주지 않느냐고 의심과 불만으로 가득 차있다. 하나님이 그 런 기도에 왜 응답해주지 않는지 아는가? 바로 그런 의심과 불만을 품은 때문이다. 당신께 대들어 괘씸해서가 아니다. 성경에도 없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또 심지어 유다가 가진 믿음 수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다는 그래도 이스라엘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오직 자기와 자기 가족의 안일과 형통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입술로는 간절히 주여, 주여 외치지만 속마음으로는 은 서른이 육십이 되고 육십이 백이 되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갚아달라는 탐욕뿐이다.
신자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일
예수님을 자기 생각과 가치관으로 판단하면 그분의 십자가를 절대 통과하지 못한다. 구원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구원을 얻지 않은 자가 그분의 현실적 은혜를 어떻게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자기 소원과 계획을 이루는데 예수님의 능력만 빌리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죄인지 아는가? 바로 예수님을 노예나 종으로 취급하고 은 삼십으로 그 몸값을 쳐준 본문의 대제사장과 같은 죄를 범한 것이다. 출애굽기의 그 율법에 따르면 종을 죽인 소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종으로 취급하여 능력만 빌리는 것은 그분을 십자가에 다시 죽이는 셈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하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너무나도 다행이고 은혜가 되는 사실은 그러도록 하나님이 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성경에 율법만 있고 십자가 구원이 없었다면 당장에 저부터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은 삼십에 당신을 팔았다. 유다와 대제사장이 십자가 죽음을 주도한 것이 아니다. 태초부터 우리를 구원하려는 주님의 계획이 다 세워져 있었다. 당신께서 소에 받아 죽는 비천한 노예의 자리에까지 낮아지도록 말이다. 소에 받혀서 즉, 사탄과 죄악의 세력에 패배하여 죽어 마땅한 우리 대신 당신께서 죽으신 것이다.
이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인가? 우리에게 십자가 외에 과연 어떤 소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찌 예수님이 처음이자 끝이 아닐 수 있겠는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서 이 곤고한 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의탁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 마리아처럼 자기 전부를 바쳐서 예수님의 장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또 그 기념하는 뜻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적 의무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유일하고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히 충만하게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은 후에 신자가 그분께 받는 진정한 은혜요 축복이기 때문이다.
9/14/2014
그러나 자주 유다의 모습이 제 속에 있음을 말씀 속에서 깨닫습니다. 의~~리로, 공동체의 단합을 위해서라면...등등의 이유가 예수님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보다 더 중요한 듯 생각하고 행하는 모습. 이 또한 자신의 괜찮음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의 비롯인 것임인 것을요.
감추고 싶은 욕망들, 자존심들, 이기심들을 신앙이라는 종교행위로 포장하며 스스로도 속고 있는 이런 자도 여전히 사랑하시어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 여러 죄성들을 고백하며 고쳐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