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객들이 자기 술법으로 이같이 행하여 이를 내려 하였으나 못하였고 이는 사람과 생축에 있은지라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았더라.”(출8:18,19)
출애굽시에 열 가지 재앙 중에 애굽의 술객들도 처음 두 이적은 흉내를 내었습니다. 나일 하수를 피로 바꿔 고기가 죽게 하는 일과 또 강과 못에서 개구리들이 땅 위로 올라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이적인 땅의 티끌을 쳐서 이로 변화시켜 사람과 생축에게 오르게 하는 이적은 시도는 해 보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처음 두 번에는 생명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티끌에다 생명을 부여해 살아 있는 이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사탄이 개구리, 메뚜기 떼, 우박 같은 것들을 만든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인간의 눈을 속이는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귀신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도 그 실체가 없는 헛것이라는 뜻입니다. 사탄에게 현혹되어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간혹 사탄이 살아 있는 생명체에 기생하여 악한 짓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살아 있는 생명 그 자체를 만들지 못합니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나아가 그들도 “이는 사람과 생축에 있은지라”고 인정했듯이 이는 사람과 생축에게는 해로운 동물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사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과 사람, 특별히 당신의 백성에게는 절대로 손을 댈 수 없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생축에게 악질이 나게 하는 재앙을 일으켰는데 아주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의 생축과 애굽의 생축을 구별합니다. 그전에 파리 떼가 온 땅에 가득할 때에도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했습니다. 당신 백성과 사탄의 백성을 구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백성들에게 속한 생축까지 구별했습니다.
신자의 소유물과 불신자의 소유물에 하나님이 복과 재앙을 구별해서 내리셨다는 뜻입니다. 사람 뿐 아니라 음식, 물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당신의 소유로 구별하면 거룩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저주 받게 됩니다. 예컨대 신자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그 의미도 나쁘지만 그에 사용된 집기나 형식도 하나님이 구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에게는 사탄의 일에 마음은 두고 몸만 형식적으로 참여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독종이 술객으로부터 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대적한 죄를 가장 먼저 물었습니다. 그들은 티끌에서 이를 만들지 못했을 때에 이미 모세의 이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다른 말로 자기들이 한 이적은 단지 속임수에 의한 눈가림이라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하며 오직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술객들만큼 자기들 우상이 엉터리임을 잘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바로에게 빌붙어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했는데 독종이 발하기 전까지는 자기들에게 당장의 불이익이나 피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아무리 알아도 자기에게 이익을 주어야 경배하고 도저히 꼼짝 못할 지경이 되어도 항복할까 말까한 존재입니다.
술객부터 재앙을 내렸기에 사탄에게 속한 백성들도 하나님은 구별해서 차례로 벌을 주신 것입니다. 사탄의 왕국도 하나님이 전부 다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들마저 간혹 하나님과 사탄이 거의 대등한 능력으로 대결하기에 서로 때에 따라 이기고 질 수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애굽 술객이 열 가지 재앙 중에 두 번째까지 겨우 흉내만 내었지 않습니까? 도저히 그 능력은 상호 비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능력을 행사할 권세도 아주 제한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 내지 묵인 하에만 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사탄이 생명 자체에는 절대 손을 대지 못한다는 의미는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생명만 빼고는 모든 극한적인 환난도 겪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신자는 사탄과 피 흘리기까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인간의 삶과 인생이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님을 다른 사람들 앞에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신자가 사탄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신자 스스로 점검해볼 기준은 무엇입니까?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 가서 누가 능력이 더 센지 대결해야 합니까? 하루 종일 찬송하고 말씀을 읽으며 그들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해야 합니까? 아니면 죄는 절대로 짓지 않고 도덕적으로 선한 일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에서 애굽과 이스라엘 앞에 가장 먼저 보이고 싶었던 것은 당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술객들과 힘겨루기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능력으로 치면 처음부터 장자들을 몽땅 죽여 버렸으면 되고 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해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을, 그들이 거주하는 땅을, 그들이 소유한 생축을, 그래서 결국은 그들의 마음과 영혼도 구별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도 사탄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려면 끝까지 사탄과 하나님을 구별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야 합니다. 사탄에 묶여 있는 세상 백성들과, 그들의 소유와,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들과, 자신의 것들이 완전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들과 같은 소원이 생길 때마다 피 흘리도록 그것을 외면하고 하나님 쪽으로 시선을 완전히 돌려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로 자신의 생각과 생활과 일생이 좌우 되거나 영향을 받게 되면 이미 사탄에게 진 싸움입니다. 꼭 우상을 숭배하고 이단에 빠져야 사탄에게 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성령과 사탄 중에 누구에게 지배를 받고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현실의 삶에서 자신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구별되어지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구별이란 우월의 차이가 아닙니다. 우월을 따지자면 항상 조건과 상황이 동일해야 합니다. 역도 선수는 체중이 같은 급이어야 등수를 따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플라이급보다 몇 배를 들어도 같은 체중에서 꼴찌면 여전히 꼴찌인 것이지 플라이급에서 일등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구별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합니다. 고센 지방은 바로가 사는 왕궁뿐만 아니라 애굽 백성들이 사는 곳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노예들만 따로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의 거처와 그 피를 바르지 않는 애굽인들의 집도 전혀 달랐습니다. 신자가 싸울 싸움도 바로 이 구별의 싸움입니다.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혹시라도 누가 기도를 많이 하는가, 누가 성경을 많이 읽는가, 누가 봉사를 많이 하는가만 따지고 있으면 구별하는 싸움이 아니라 우월을 다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별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우리끼리의 자존심 대결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믿음이 좋다는 그럴싸한 종교적 명칭으로 구별했더라도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마저 또 다시 혈과 육에 지배 받은 것으로 그 배후에 있는 사탄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신자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것은 종교적 실력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날이 갈수록 세상과 구별되어져 가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신자가 하는 행동, 말, 일을 볼 때마다 애굽 술객이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라고 인정한 것 같은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술객이 할 수 없는 이적을 일으켰듯이 우리 또한 불신자들이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생명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혹시 예수 믿기 전에 세상에서 우월을 따진 버릇이 아직도 남아 하나님의 이적을 동원해 세상에선 세상의 소유로, 혹은(and/or) 교회 안에선 종교적 실력으로 우월을 드러내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것은 헤비급 체중을 가진 자가 플라이급에서 일등 했다고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라 절대로 신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신자가 세상에서 불신자와 우월을 다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그런 기도는 안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구별될 뿐입니다. 아니 구별되어 있지 아니하면 신자가 아니든지 지금 시험과 죄악에 빠져 있든지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7/5/2006
'신자가 싸울 싸움도 바로 이 구별의 싸움입니다. 모든 면에서 세상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술객이 할 수 없는 이적을 일으켰듯이 우리 또한 불신자들이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생명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부끄럽게도 오래전 한때 이런 말씀들을 보면 특별히 선택받은 선지자, 지금으로 치면 선교사, 목사같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먼 이야기마냥 치부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신자 모두가 창세전부터 선택되어 그분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음에 하루하루 날마다 그 구별됨이 뚜렷이 나타내어 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