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지더라.”(마 9:23-26)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흔히 영원한 잠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 비유가 단지 문학적인 상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표현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지막 때의 부활 혹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심판을 믿든 안 믿든 간에 영생 자체는 소원합니다. ‘잠’이라고 말한 것은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불사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소원일 뿐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영원히 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장면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말씀은 그런 인간적 소망이나 종교적 믿음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예수님에게만은 죽음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딸이 육신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잠시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두고 죽었다고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자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요즘으로 치면 장의사와 그 직원들입니다.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최고 전문가들로서 호흡과 심장의 박동을 정밀하게 확인 한 후입니다. 아마도 관공서에 사망 신고까지 접수한 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웬 젊은 랍비가 나타나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니까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쳇말로 식모 앞에 행주 빠는 격이 되었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고 쫓아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상주가 데려온 랍비라서 격식을 차려 주었기에 비웃는 것으로 그친 것입니다.
그들이 이미 죽었다고 얼마나 확신했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가달라고 부탁하니까 순순하게 비켜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에게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면 이 젊은 랍비가 혹시 마술을 사용해 살려내려는 것이 아닌지 곁에서 지켜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다시 살린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 네 마음대로 해봐!” 하고 비켜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야이로의 딸이 되살아 난 것은 인간 세상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는커녕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신자라고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의 죽음은, 특별히 믿는 자의 죽음은 하나님에게는 잠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력이 미치는 범위는 오직 물질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물질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도 물질계를 향해 열려 있고 또 그 안에서만 작동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면의 지정의가 하는 역할도 그 감각기관들이 외부로부터 인지한 자료들을 수집, 정리, 보관, 해석, 적용하는 일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인간 이성은 자신의 감각 기관과 지정의를 동원해 인식이 가능한 이 땅의 현상들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그 한계입니다.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 딸은 물질계의 영역에선 확실히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계의 영역까지 연장해서 그 현상을 파악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생명의 근원이시라 영계에서부터 생기(生氣)를 가져와서 그녀에게 불어 넣어 물질계로 소생시킬 것을 작정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선 어느 누구도 도저히 깨어날 수 없는 죽음 혹은 영원한 잠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잠이라고 표현한 의미는 언제 어디서라도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니 신자가 항상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어디에서 깨어 있느냐 뿐입니다.
신자로선 인간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물질계 안에서 깨어 있으면 이곳의 생(生)이고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계에서 깨어 있으면 저곳의 생(生)일 뿐입니다. 불신자 입장에선 전자만이 인생이고 후자는 완전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전자는 당신이 인간을 보내신 바요, 후자는 당신이 허락하신 영원한 생명을 인간더러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불신자에게는 죽음이 끝이지만 신자에게는 천국에서 다시 깨어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한 것뿐입니다. 신자에게 육신의 죽음은 더 좋은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길목일 뿐입니다.
그럼 그 영원한 본향으로 어떻게 해야 갈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했으니 자동으로 갑니까? 교인으로 평생을 성실히 살다가 언제 어디에서 죽어도 잠시 후 눈을 뜨면 천국일까요? 신자가 죽어 천국을 갈 수 있는 여부를 점검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실제적인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환난이나 고통이 그것으로 전부이자 실체(實體)라고 보느냐, 아니면 그것은 결코 전부나 실체가 될 수 없다고 보느냐에 달렸습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지정의 한도 내에서 모든 일들을 분석, 판단, 적용하느냐 아니면 그것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고 오히려 오류로 이끌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고 매번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느냐에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입니다. 인간 이성의 판단 범위는 물질계가 한도이므로 천국 보좌에서 세상만사 특별히 자신의 신자 된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는 성령으로만 교통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교통한 자라야 죽어서도 천국 보좌 앞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현재 이런 저런 환난 가운데 힘들어 하십니까? 그 시커먼 터널이 도저히 끝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그렇게 여겨질지라도 하나님 안에선 영원한 잠이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선 결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환난도 없습니다. 이미 당신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다 감당하시고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사망의 쏘는 것마저 정복하셨는데 이 땅에서의 인간적 환난이 그분에게 더 이상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부분에 진심으로 확신을 하면 영원한 본향은 보장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글쎄 예수 믿은 것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7/1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