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8:21,22) 참 용서(1)-불쌍히 여겨라

조회 수 1567 추천 수 91 2006.09.13 19: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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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2)


성경의 말씀은 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은 정말 살아 운동력이 있습니다. 도저히 범인(凡人)은 상상도 못할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을 뿐 아니라 역사상 어떤 고매한 철학가, 사상가, 종교인도 전하지 못한 훨씬 다른 차원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동일한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과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 같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인간은 불완전한 인간의 사고로 이미 왜곡되어 있는 인간 세계에 관해 말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분은 하나님 본체로서 천국 복음에 관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경우도 언뜻 보면 용서를 가능한 많이 해주라는 뜻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용서의 회수를 두 개로 나눠서 대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흔히 삼세번이라고 하듯이 사람은 어지간한 일을 세 번 이상 용서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베드로로선 한껏 부풀려 일곱 번(7은 3의 두 배가 넘음)의 용서를 하면 의인이 될 충분한 자격요건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가 일곱 번‘까지’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로선 최대한 크게 잡은 것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490회(3의 163배, 7의 70배)입니다. 의인의 자격으로 베드로가 내걸은 일곱은 너무나 초라하고도 우스운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천국의 의의 기준은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선하다고 하는 사람뿐 아니라 의인이라고 칭송 받을만한 사람과도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490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대답하면 될 텐데 예수님은 구태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그 회수를 구분 지었습니다. 참으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대답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사랑으로 많이 용서해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숫자를 늘린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490번까지는 용서했다가 491번째부터는 원수를 갚아도 된다는 뜻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의 일곱 번은 한 형제가 평생을 두고 자기에게 범한 잘못을 다 합친 숫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용서란 어떤 한 가지 잘못에 대해 한 번만 해주면 끝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곱 번의 용서는 서로 내용이 다르거나 최소한 시기가 다른 잘못에 관한 것입니다. 어쨌든 한 평생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동일한 상대가 자기를 일곱 번이나 배반했는데 그것을 다 용서 해주었다면 의인이 아니라 성자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예에 비견할 만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동일한 상대가 범한 동일한 잘못에 대해 몇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느냐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흔 번씩이라는 의미는 이미 한 가지 특정 경우를 따로 떼어내어 계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일곱 번씩 일흔 번(7X70)이라고 하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70X7)이라고 말한 그 순서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동일한 잘못에 대해 일곱 번까지는 그래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히 자신을 했지 않습니까? 아마 그로선 자신까지는 없었어도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훌륭한 가르침과 모범을 듣고 보고 배웠으니 자신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보겠다는 뜻으로 말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일 것입니다. 또 노력하면 일곱 번의 용서까지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대 아들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일곱 번 가출해도 부모로선 어지간히 참고 매번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70번 가출을 했다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열 번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같이 죽자고 덤빌 것이며, 나중에는 현실적으로도 뒷감당이 도저히 안 되어서 지쳐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아예 의절할 테니 호적을 파가라고 야단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잘못이 가출 한 번이 아니고 마약, 절도, 폭행, 강도, 강간 등등 일곱 가지 잘못을 일흔 번씩 범해도 용서해 주라고 한 것입니다.

나아가 상대에 따라, 또 저지른 잘못에 따라 용서의 횟수가 바뀌어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십대의 아들이 둘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둘 다 그렇게 용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주위에 그런 식으로 자기에게 잘못을 범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 전부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 전체가 용서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한 그런 용서가 현실적으로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고 예수님이 그냥 과장해서 말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까? 어차피 못 지키겠지만 목표라도 최대한 잡아 놓았으니 그 반이라도 따라 해보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까? 예수님이 무슨 숙달된 도덕 조교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도저히 인간의 정상적, 상식적 상태로는 참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용서란 오직 십자가의 긍휼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상대를 한 없이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인간이 가장 용서를 많이 또 쉽게 해 줄 수 있는 상대는 그나마 자식입니다. 본성적으로 가장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 인생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거나 그 자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에게 드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사실은 한 없이 측은한 마음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부모는 자기가 잘못 키워서, 자랄 때에 제대로 뒷바라지를 못해줘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도 모르고 그저 공부하라고 닦달을 해서 등등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못해 준 자기가 한스럽고 안타까워집니다. 자기에 대한 죄책감에다 자기 연민도 보태집니다.

한 마디로 상대를 긍휼히 여기지 않고는 참된 용서가 안 되지만, 또 그러기 위해선 자기부터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모에게 내가 그렇게 잘해 주었는데도 저럴 수 있어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면 참 용서는 절대 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 주는 상대에 자식 말고 배우자를 넣어 봅시다. 아내가 잔소리 하는 것, 남편이 술 먹고 늦게 오는 것을 넣어서 상상만 해도 당장 머리가 터질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충 한 열 번 정도 싸우고 참고 화해하고를 번갈아 하다가 열한 번째 쯤 되면 서로 의논할 것도 없이 가정 법원으로 달음박질 하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그 잘못에 배우자의 간음을 넣어 보십시오. 남편과 아내의 간음을 일흔 번이나 용서해 주겠습니까? 그것도 상대를 일곱 번이나 바뀌어 가면서 하는 간음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렇게까지 용서해 주라는 것 아닙니까? 아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예수님이 간음한 연고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했으니 간음의 경우는 일흔 번씩 참을 것이 아니라 이혼을 해도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끝까지 용서해주든지, 정 안되면  이혼과 용서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바람나 집 나간 아내를 이혼은 해 주어도 심정으로는 불쌍히 여겨 진정으로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욕정과 허영에 사로잡힌 그녀도 불쌍하고, 또 비록 그런 여자일지라도 내가 진작 진정으로 사랑해주었더라면 그녀에게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나도 너무나 못나서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가 성경에는 실제적 예로 등장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아예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그 불륜을 용서하고 심지어 그 불륜에서 난 아이들을 셋이나 자기 자식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도 다섯 남자와 결혼했고 또 다시 정식 남편이 아닌 자와 살고 있는 수가성의 여인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어 마시게 했으며, 현장에서 간음하다 온 여인에게 즉석 처형을 면하게 해주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참 용서란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도 불쌍하다고 여겨지는 예수님의 긍휼이 담긴 심령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 원죄 아래 있으면서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조종으로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모든 인간이 정말 측은하다는 온전한 인식에서부터 용서가 출발합니다.

역으로 따져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은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참 용서와 참 사랑을 아예 할 수조차 없는 불쌍한 존재인데 왜 서로 미워하고 원수를 스스로 갚으려고 나서는가라고 따진 것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용서 못하는 것은 권총 든 강도에게 인질범으로 잡혀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불쌍히 여기지는 못할망정 그런 와중에도 서로 미워하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의인의 축에 들 수 있습니까”라는 당돌한 뜻으로  물었을 때 예수님이 그를 얼마나 측은하게 여겼겠습니까? 너는 한 번이라도 남을 제대로 용서 못하는 주제인데 감히 일곱 번을 논하고 있으니 참으로 너야말로 불쌍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잡히는 날 밤에 당장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지 않습니까? 수난 받는 메시야의 모습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왜 그 크신 능력을 한 번도 쓰지 않고 저렇게 병신 같이(?) 무참하게 당하고 있는지 납득이 안 되어 화가 치밀어 오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세 번 그것도 저주하며 부인하자 정확하게 닭이 울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일곱 번이나 용서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져 통곡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자기라는 존재가 한 번도 참 된 용서를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찾아와서 당신만의 사랑으로 똑 같이 세 번 용서해 주셨습니다. 반드시 잘못한 횟수만큼 용서하고 보상해 주어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떤 잘못을 해도 하나 빠짐없이 다 용서 해줄 수 있는 분이며 또 그래서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더라도 그 모습 그 대로 그분께 나아가면 모든 죄를 사하고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고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쉽게 용서할 수 있다고, 최소한 믿음을 갖고  의지적으로 용서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도덕성, 종교성으로 한두 번, 아니 삼세번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먼저 베드로는 그래도 재판정까지 따라 갔지만 자기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줄행랑을 놓았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남을 세 번은 몰라도 일곱 번까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부터 철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을 자기 의지로 용서하기 이전에 주님께서 그런 나부터 불쌍히 여겨달라고 십자가에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주위에 있는 사람도 나와 똑 같이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참 용서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잘못을 범한 형제와 나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확실히 서있어야만 용서가 됩니다. 그 사람도 십자가로 용서 받고 나도 십자가로 용서 받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각자가 예수님의 용서를 먼저 받아 들여야만 서로가 용서됩니다. 사실은 각자가 그 일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먼저 받아들이기만 해도 용서는 이미 달성 된 것입니다. 용서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시 솔직히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아내가 똑 같은 잔소리를 칠십 번을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반대로 남편이 70번을 말도 안하고 술 먹고 늦게 들어와도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둘 다 분명히 No 아닙니까? 그럼 똑 같이 용서 못해주는 불쌍한 존재인데 왜 서로 미워하고 있습니까? 왜 용서 못해줍니까?

신자니까 반드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자꾸 먼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선하고 의롭지 않습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십자가 보혈의 용서와 사랑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한 시도 제대로 의롭게 살지 못합니다. 먼저 십자가 앞에서 자신부터 되돌아보아야만 용서가 가능합니다.

혹시라도 용서는 못해주어도 헤어지지 못해 산다든지 포기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부부이기를 단념한 것입니다. 어떤 영화제목처럼 적(敵)과의 동침입니다. 그럼 오히려 그것이 법적 도덕적 육체적 간음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영적 간음 아닙니까?

9/13/2006

김광찬

2006.09.13 22:41:35
*.8.157.125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아멘 †

김형주

2006.09.14 01:15:00
*.173.42.18

아멘!
직장에서 같은 문제로 지적을 하면서, 2번 까지는 부드럽게 참았는데 3번째가 되니까 버럭 화를 내게 되고 별 소리를 다 하게 되더군요.
그런 저를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당신의 가슴이 미여지셨을까요? "내가 너 같았으면 넌 에전에 죽었을 것을, 쯧쯧쯧..."
귀하디 귀한 말씀입니다. 저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샬롬!

김문수

2006.09.14 02:22:01
*.168.183.20

아멘††††††††††♥♥♥♥♥♥♥♥♥♥♥♥♬♪♩♭♭♩♪♬♭♩♪♩
흠~~흠~~두분 형님들 반갑습니다!!! 샬롬!!!!

허경조

2006.09.15 15:47:16
*.80.180.85

아멘 아멘

날마다순종

2021.01.07 15:18:03
*.14.99.253

저의 실상은 예수님 믿기 전과 믿은 후 모두 똑같이 눈안의 들보가 가득합니다. 다만 다른점은 주님을 만나고 내안의 들보를 보고 부끄러움을 알았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 긍휼만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빼어내도 빼어내도 눈안의 들보는 여전하지만 이제는 날마다 주님의 그 한없는 긍휼로 베풀어 주신 사랑을 닮고자 소망합니다. 하루하루 한걸음 한걸음 그리되도록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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