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0:37,38)신자가 져야 할 참 십자가

조회 수 1122 추천 수 82 2006.07.28 19: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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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8)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를 너무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너무나 억울한 고통을 지셨다는 것입니다. 죄라고는 하나도 없는 분이 정치적, 종교적 음모에 희생되어 말로 표현 못할 심한 모욕과 비방과 고통을 당하며 심지어 제자들의 배반까지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이 사악한 인간들에게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길을 따라 가야 하는 신자들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려 듭니다. 자신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 즉 가장 좋은 예로 며느리가 예수 믿는다고 시부모로부터 핍박 받는 경우를 상정합니다. 또 매일 십자가를 져야 하므로 오랫동안 핍박 받거나 환난을 겪을수록 더욱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며 심지어 그러면 천국에서의 상급도 비례해 커질 것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만한 큰 착각은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죽음이 과연 억울한 죽음인가를 따져봅시다. 제 삼자가 순전히 객관적으로 십자가 사건을 볼 때는 인류 역사에 그만큼 억울한 죽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억울하다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 일을 당한 본인의 주관에 연관된 사항입니다. 본인은 전혀 억울한 마음이 없는데 제 삼자가 “네 억울하지, 정말 억울하지,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니 말이 돼, 네 바보가 아니야?”라고 다그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과연 십자가의 죽음을 당신께서 억울하게 생각했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고통스럽게는 생각했지만 억울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십자가에 달리시려 오셨기에 때가 되매 담대하고도 기꺼이 그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으로 이제 이뤄질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벅찬 기대와 감격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1,2)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 앞에서 또 그들을 위해서 하신 기도입니다. 죽음이 임박했어도 십자가를 영화롭게 생각했으며 공사역 내내 억울하다고 불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신자가 자신이 겪고 있는 환난이나 핍박에 대해 억울하다는 마음이 앞서면 벌써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런 핍박을 받게 된 경위 자체는 억울합니다. 말하자면 제 삼자가 봤을 때는 단지 교회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말할 수 없는 구박을 받는 것 자체는 분명 억울합니다. 그러나 그 핍박을 당하는 본인마저 그런 생각이 들면 그 때는 억울한 것은 분명 맞지만 십자가는 아닙니다.

물론 신자도 연약하고 부족하며 죄의 본성이 아직 남아서 때로는 반감이 생기고 심지어 분노와 저주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자연스런 감정적 반응에 그쳐야지 현재 겪는 일 자체가 억울하다는 인식이 들면 벌써 주님이 지라고 하는 신자의 십자가와는 거리가 멀어진 것입니다. 오히려 핍박을 주는 자와 동일한 죄의 연장선 상에 서 있기는 즉, 서로 미워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에서 최고로 고통스럽긴 하지만 전혀 그분에게는 억울하지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전 인류를 사랑하고 용서하여 그 영혼을 구원한 후에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뜻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겐 오직 이런 목적밖에 없었으므로 십자가 상에서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억울하게 죽는다고 생각한 자의 입에서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위선자입니다. 바리새인을 위선자라고 호통 칠 근거도 전혀 없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억울한 환난이나 핍박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절대로 십자가가 아닙니다. 신자가 져서는 안 되는 십자가입니다. 말 그대로 억울한 고통입니다.  지고가야 할 것이 아니라 당장 없애야 할 고통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빨리 해결해달라고 울부짖으셔야 합니다. 사람과 세상을 향한 모든 불평, 불만. 분노, 저주까지 들고나가 “하나님 너무 억울합니다. 어서 빨리 신원해 달라”고 떼를 써야 합니다. 정말 억울한 일이면 당연히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이요 아니라면 무엇이 잘못인지 오히려 신자 자신을 책망하고 깨우쳐 주십니다.

한국에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드니까 어지간한 주부가 부업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불신자는 심지어 노래방 도우미로 몸을 파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신자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니까 식모살이 하면서 자식 과외비를 법니다. 이럴 때에도 단지 식모살이 한다고 그것이 엄마가 지는 십자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모로서의 누구나 하는 희생일 뿐입니다.

오히려 자식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신자 부모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또 그것이 자식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입니다. 단순히 과외 시키지 말고 주일날은 교회에 억지로라도 데리고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직 과외 공부를 위해서 엄마가 식모살이까지 한다면 결국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만이 인생의 가치요 목표라는 인식을 자식에게 심어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도저히 생활비가 없어서 혹은 특정 과목의 실력이 너무 뒤쳐져서 과외를 시켜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부모는 세상적 가치와 재정적 풍요를 목표로 사는 자가 결코 아님을 평소에 자식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주로 모시는 삶이 얼마나 평강과 위로가 넘치는지 자식이 눈으로 보고 또 함께 체험해 갈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도 진정한 인생의 목표와 가치를 주님 안에만 두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과외를 하느냐, 또 그러기 위해서 부업을 하느냐 마느냐는 신자에게는 사실은 둘 째 문제이며 십자가와는 더더욱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신자가 져야할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자를 하나님과 화목시키려는  한 가지 목적으로만 어떤 일이라도 감수하고 아니 기쁨으로 감사하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고통스럽고 희생이 따르고 억울하다고 다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7-19)  

신자는 가장 먼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받았다는 분명한 소명감의 바탕 위에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또 어떤 경우가 되었든 하나님과 화목시키고자 하는 진정한 뜻과 사랑이 상대에게 진실 되게 전해져야 합니다. 자기의 도덕적 종교적 실력과 열심으로 상대를 자기를 따르는 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전적인 간섭과 인도에만 의지하여 그 사람의 영혼이 주님의 보혈로 새롭고도 깨끗케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우선 신자마다 하나님과 화목시킬 대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목이 목사, 전도사, 선교사, 전도부 전용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꾸만 억울하게 여겨지는 자신의 환난과 핍박을 주님의 복음 안에서 다시 살펴보아 진정한 십자가로 바꾸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원수가 핍박을 해올지라도 그를 용서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억울한 십자가가 있으면 가장 먼저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되돌아보십시오. 반면에 주님과 화목시켜야 할 십자가가 있으면 얼마든지 기꺼이 지십시오. 그 영혼을 눈물로 끌어안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도 임하여 주시길 애끓는 심정으로 기도하십시오.

7/29/2006

김문수

2006.07.29 02:05:02
*.75.16.91

아멘!!!!!!!

국중후

2006.07.31 15:44:12
*.147.129.60

아멘!!!!!!!

날마다순종

2020.12.10 15:15:13
*.14.99.253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아주 오랜시간동안 내버린채 잊고 지냈더랬습니다. 참으로 후회스럽고 아까운 시간이였음에 이를 생각하면 탄식이 절로 납니다. 이제는 날마다 매순간 이 직책을 잊지 않도록 쉐마처럼 적어 보이는 곳에 놓지 않더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항상 마음에 새겨져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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