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79) 주기도문 강해 (11) 10/12/2003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코드 성경과 오리지널 성경
우리 모두 동감하듯이 최근 한국 TV의 뉴스 보기가 겁난다. 특히 정치판 이야기가 나오면 아예 TV를 끌 정도다. 부정부패가 구조적으로 고질화 되어 깨끗하게 고쳐질 기대는 접은 지 오래다. 더 부아가 끓는 것은 허구한 날 국민들은 뒷전이고 자기들 끼리 밥 그릇 싸움만 한다. 정책대결은 아예 실종 되었고 치사하게 서로 말꼬리만 붙드는 싸움이 정말 말 그대로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런데 이런 풍조가 정치판만의 모습이 아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개인적 인간관계에 마저 널리 퍼져 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의 말은 그 내용이야 어찌 되었던 아예 귀를 막고 들으려 조차 하지 않는다. 맨 위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다 그렇다. 오죽하면 코드가 맞다라는 말이 한국 사회 최고 유행어가 되었겠는가?
지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성도들도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과만 교제한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도 자기 코드에 맞는 말만 찾고 들으려 한다.
주기도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거나 묵상할 때에 이 구절에 이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혹시라도 가파른 산 정상을 올라가다 중턱에서 잠시 한 숨 돌릴 수 있는 휴게소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 구절을 제외한 다른 모든 부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싸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고,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하고, 시험과 죄악을 멀리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한다. 반면에 본문은 유일하게 세상의 물질적 필요를 간구하라고 하셨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에 예수님이 이 구절을 말씀하지 않으셨더라면 아마 교회가 텅텅 비게 되었지 않을까?
그런데 사실은 이 구절에 신자더러 그 동안 공부 열심히 했으니 이제 좀 신나게 놀아도 된다는 의미는 그 속에 하나도 없다. 현실의 먹고 사는 문제를 구하는 가운데도 주님의 거룩한 뜻은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가 너무 쉽게 그 뜻을 간과한다. 이 말씀의 핵심 되는 부분은 놓치고 자기 기분과 생각을 앞세워 말 꼬리만 붙들기 때문이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본문에서 솔직히 가장 먼저 눈에 띄고 생각이 미치는 부분이 어디인가? 함께 외울 때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가장 큰 힘이 실리는 구절이 무엇인가? 아마 대부분 “양식을 주옵시고”일 것이다. 그럼 무엇을 놓쳤는가? 당연히 그 앞에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이다. 바로 이 부분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싶은 핵심이다. 언뜻 봐서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모든 신자가 자기 코드를 갖고 성경을 본다고 한 것이다. “곳간에 넘치도록 채워 준다.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는다. 자손이 하늘의 뭇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구절은 눈에 속속 들어 온다. 일부러 그런 구절만 골라 본다. 그런 구절만 모아 ‘코드 성경’이라고 이름 부쳐 팔면 당장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코드 성경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리지날 성경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씩 따져 보기로 하자.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가장 먼저 살필 것은 양식을 구하되 ‘오늘날’의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다. 미래를 위한 것을 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왜 주기도문에 바로 이어서 금식(16-18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재물을 땅에 쌓지 말라(19-24절)고 하셨겠는가? 나아가 6:34에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리라”고 아예 직설적으로 결론지었지 않은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말씀에 변개가 없으시다. 절대 말을 바꾸지 않고 말꼬리도 붙들지 않는다. 예수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양식과 재물을 구하고 쌓아두는 이유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하여 어떤 환난이 닥칠지 모르니 믿을 것이라곤 내 곳간에 쌓아 둔 먹을 것과 금고 속의 돈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는 좀과 동록과 도적만 들끓을 뿐이라고 하셨다. 너희들이 정작 무엇을 믿고 어디에 의지하는가를 되돌아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의 양식을 구하는 것도 결국 재물을 의지한다는 뜻이므로 그것마저 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루 세끼 먹는 것을 조달하는 것은 삶의 전부였다. 오늘날 같이 더 풍족하고 안락한 내일을 위해 비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살고 죽는 생존의 문제였다.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도 간구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최선을 다해 내일을 준비해야 하고 또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문제는 정작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하는 실체가 무엇인지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빈다는 것은 살고 죽는 모든 문제가 오직 하나님 은혜요 주권 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완전히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저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내일을 대비한다는 것은 벌써 생존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내 실력과 소유를 키우는 문제로 넘어간 것이다. “내일을 대비해” 기도하는 것과 “내일을 주님의 손 아래 맡긴다”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내일을 대비하면 재물이 쌓이지 않는 한 여전히 불안과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내일은 재물이 많든 적든, 있든 없든 심지어 완전히 현실적으로 파산을 당해도 흔들림이 없다.
나아가 매일의 생존을 위해 빈다는 것은 하루하루 주님과 손을 잡고 동행하는 싸움이다. 날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낮의 해와 밤의 달에서 지켜 주시는 그 분을 놓치면 바로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주님의 품을 벗어나면 눈 앞에 닥치는 것은 죄와 흑암의 세력과 사단으로부터 훼방 뿐이다. 재물을 쌓아도 기대했던 안락과 평강은 없고 생기는 것은 불안과 염려와 초조다. 그래서 주님이 언제 어디로 인도하실지 몰라도 그 분의 손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 ‘오늘날’의 양식을 달라는 간구의 의미다.
공동체를 위한 기도
본문에서 오늘날보다 더 신경을 쓰지 않는 단어가 있다. 외울 때마다 건성으로 입에서 붙어 나오지만 그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분의 코드 성경에는 없는 단어나 마찬가지다. 주님은 ‘나에게’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다. 유대인들의 경구에 “기도할 때는 반드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기도하라”는 말이 있다. 내 자신의 유익과 안락만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생각을 가질 자도 있을 것이다. “내가 뭐 내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이런 고생하나. 다 토끼 같은 내 새끼들하고 여우 같은 내 마누라 잘 먹이려고 하지. 내 앞으로는 돈 한 푼 안 쓰고 10년 넘도록 양복 한 벌 안 사 입고 작업복으로 버텼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마련해 주신 공동체인 내 가정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맞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가정은 공동체가 아니다. 가족은 나면서부터 서로가 서로의 분신이자 나의 생명 그 자체다. 자식이 죽을 지경이 되면 대신에 목숨 내 놓지 않을 부모 없다. 가족은 피를 함께 나눈 사이므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섬김은 자연 발생적이다.
공동체란 이질적인 사람들끼리 한 가지 목표와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 양보하고 희생하기 위해 모인 단체다. 아버지가 양복 사 입지 않은 것을 두고 희생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지난 20년간은 마누라가 옷 사도록 양보했으니 이번 20년은 내가 사 입을 차례라고 고집하는가?
가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최소의 책임이자 축복이다. 불신자도 자기 가정은 돌보고 책임진다. 신자의 가정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을 절대 의미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가정을 움직이는 힘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불신자의 가정이 세상에서 윤리적 관계라면 신자의 가정은 하나님 안에서의 연합이다.
하나님이 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양육하며 함께 찌지고 볶으며 살게 하신 까닭은 자기 가정이라는 공동체만을 위해 살아라는 뜻이 아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른 공동체에 속할 때에 실현해야 할 기준과 모범을 먼저 배우고 훈련하라는 것이다. 가족끼리 사랑하고 섬기는 법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 몸에 벤다. 가정에서 배운 사랑하는 능력과 기술을 다른 곳에 가서 적용해야 한다.
가정 다음에 있는 공동체가 무엇인가? 교회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장로를 세울 때 가장 먼저 보아야 하는 조건이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제대로 다스렸는가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딤전3:5)
하나님 할아버지
동일한 맥락에서 교회도 공동체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예수님의 보혈을 함께 나눈 형제요 자매다. 가정에서 부모 자식 간에 그럴 수 없듯이 교회 안에서도 희생하고 양보한 것으로 생색낼 수 없다. 교회에서 봉사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봉사는 일부러 자기 시간과 여유를 따로 떼어 내어 자기 본연의 업무가 아닌 일에 손해를 감수하며 섬기는 것을 말한다. 직장인이나 학생이 교통정리, 거리청소, 고아원 방문 하는 것들이 봉사다.
교회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곳이다. 신자의 개별 가정은 핵가족이라면 교회는 대가족에 해당된다. 모든 가정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셨으니 따지고 보면 표현이 이상하지만 하나님 할아버지 아래 자자손손 온 식구가 다 모인 곳이 바로 교회다. 교회 생활은 신자의 삶 자체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들이마시며 살아야 하는 안식처다. 가정에서는 육신적, 현실적, 도덕적, 정서적으로 성장한다면 교회에선 영적으로 자라는 곳이다.
교회는 단순하게 일요일 극장 구경하듯 설교 듣고 사람들 만나고 힘든 일 빌러 오는 곳이 절대 아니다. 세상의 집이 아닌 이 땅에 미리 마련해 둔 천국의 집에 오는 것이다. 희생, 양보, 봉사란 말은 교회에선 아예 써서도 안 되는 말들이다. 자기 집을 청소하면서 봉사했다고 자랑하는 바보는 아무도 없다. 자기 할 바를 한 것뿐이다. 자기 임무를 다한 것은 충성과 헌신이다. 그래서 성경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뿐이다고 했다.(고전4:2)
하나님이 신자를 교회라는 울타리 안으로 모으는 것도 이 곳에서 훈련하고 연습하여 다른 공동체에 적용시키라는 뜻이다. 가정에서 사랑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연습했다. 이제 그 연습한 것을 세상에 나가 생판 모르는 불신자들에게 실천해야 하는데 그러기에 앞서 교회에서 먼저 실험해 보고 훈련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어떤 때는 우리가 생각해도 무리나 욕심이다 싶은 기도도 기꺼이 응답해주시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나님 사랑의 본질을 먼저 알아라는 것이다. 그 분만이 주실 수 있는 세상과 다른 자비와 긍휼이 얼마나 풍성하며 은혜와 섭리가 어떻게 오묘하고 세밀한지 철저하게 체험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주위에 자랑하고 증거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약속이 무엇인가?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축복이 지나가는 파이프로 삼겠다는 것이지 그의 창고에 축복을 쌓아둘 정도로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말라기 선지자에게 1/10조에 대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도 마찬가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10:10) 이 말씀 어디에도 우리 창고 문을 열어라고 하지 않았고 대신에 하늘의 창고에 1/10조를 들여라고만 했다. 하나님이 세상 만사의 주관자임을 그렇게 못 믿겠다면 한번 온전한1/10조로 시험해보라. 그러면 쌓을 곳이 없도록 하늘에서 부어준다고 했다.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니 창고를 크게 지어야 하는가? 아니다. 쌓을 곳이 없으니 나눠주라는 것이다.
세상의 시기를 받아라
신자는 세상 앞에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사신(大使 Ambassador) (고후5:20)”으로 부름 받은 자다. 대사가 한나라의 전권을 대표해야 하듯이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고 신자를 본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신자란 자기들이 속한 가정과 교회는 세상 사람 앞에 거룩한 빛을 비추고 신비한 생명력으로 활기가 넘쳐 흐르도록 해야 한다. 불신자들이 우리 가정을, 우리 부부관계를, 우리 자녀와의 관계를 제발 저 교회 다니는 김집사네 집처럼 됐으면 원이 없겠다는 시샘을 받아야 한다. 우리 직장의 상사와 부하 관계가 저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의 사이처럼 변화시키는 것이 우리 회사의 목표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당장 변화가 안 되면 흉내라도 내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교회라면 고개를 흔들고 신자가 교회만 벗어나면 180도로 행동이 바뀌는 것을 보고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으니 어떻게 된 셈인가?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모든 신자가 오리지날 성경은 보지 않고 코드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고 ‘내게’ 일용할 양식만 구해서 그렇다. 받은 축복과 은혜를 가지고 가정과 교회 안에서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훈련과 연습한 후에 밖에 나가 나눠주라고 했는데도 집과 교회 안에만 쌓아 두었기 때문이다. 축복과 은혜가 쌓이기만 해 곰팡이가 쓸고 썩어서 그렇다. 땅 끝까지 가라고 하셨는데 집 문밖에도 나가 본 적이 없다.
여러분더러 지금 당장 가진 재산 다 털어 고와와 과부를 찾아가 도와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신자가 신자 된 참 특권이 무엇이며 주님이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고귀한 뜻을 제발 제대로 새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불쌍하고 비천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저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이 게으르고 무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신자가 평소때에 그들을 위해 도와주고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 만약 모든 사람이 제 스스로 알아서 다 잘 살만큼 능력 있다면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신자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으실 이유도 없지 않는가?
“저들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지 않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 먼저 된 너희가 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제발 너희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저들도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근거가 자기들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해주어라. 하늘과 땅 위에 여호와 만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해 주어라.” 하나님의 간절한 이 호소가 ‘우리에게’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참 뜻이다.
필수품과 사치품
본문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는 부분이 하나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를 알아 봤으니 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에 대해 제대로 아셔야 한다. 일용할(daily)의 뜻은 그 날 하루에 꼭 필요한 품목을 말한다. 초대교부 중의 한 사람인 닛사의 그레고리는 이 구절을 “육체의 양식만을 위한 기도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사치나 쾌락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먹을 양식만 있으면 족한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신자의 기도에 절대 등장할 수 없는 내용들이 몇 가지 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진귀한 음식, 유행을 앞서가는 옷, 번쩍거리는 귀금속, 웅장한 저택, 남 위에 군림하려는 권세, 세상 사람의 인기와 존경을 차지하려는 욕심 등이다. 필수품이 아니라 사치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는 전혀 상관 없고 자기 치장을 위한 것이다.
사치품과 필수품의 차이는 값이 비싼가 싼가,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인가 아닌가, 백화점에서 샀는가 시장에서 샀는가에 있지 않다. 없으면 당장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며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필수품이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생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사치품이다.
현재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한 번 구체적으로 기록해 보라. 혹시 기도하는 것이 없으면 필요해서 사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는 것들의 쇼핑 리스트를 정확하게 적어 보라. 그 속에 오늘을 위해 구한 것과 내일을 위해 구한 것으로 구분해 보라. 당장 꼭 없으면 도저히 생활이 안 되는 것들만 남기고 다 제해보라. 필요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포함되어 있는지 놀랄 것이다. 더 나아가 없으면 생존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만 골라보라. 아마 한 개도 고르기 힘들 것이다.
그럼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가? 나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럼 기도 안 해도 되는가? 그러니까 신자는 불쌍한 이웃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실현을 위해 먼저 구해야 한다. 이제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나를 위한’ 양식이 아니라 ‘우리에게’라고 해야 하고 현실적 필요를 위한 기도는 간단하게 한 구절만 언급한 이유를 이해하겠는가?.
역으로 말하면 신자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할 것은 두 가지 뿐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령과 거룩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저를 쓰임 받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카터 대통령의 식사 기도
“목사님 말씀이 다 맞는데 현실은 안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내 코가 석자고 내 형편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데 온전한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라는 생각이 드는가? 다시 한 번 일용할 양식이란 관점에서 그 생각을 한 번 따져 보기로 하자.
여러분이 하루 세 번씩 식사 할 때 어떤 기도를 하는가?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이지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는 아니지 않는가? 그럼 또 “미국에서 먹고 마시는 비용이 얼마 든다고 그러십니까? 나머지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 그것을 위해 빌어야지요?”라고 반발할 것이다. 물론 맞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허허 벌판에서 식사하며 기도하고 있지 않지 않는가? 최소한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원 베드 아파트에서라도 살지 않는가? 얼마 안 되는 식비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수입은 누가 주었으며 식탁과 아파트는 누가 구해 주었는가? 다 하나님이 마련해 주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을 이미 다 책임져 주셨다.
우리가 7시에 아침을 먹고 난후 간절히 “하나님 오늘 점심 끼니가 걱정입니다. 제발 채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더니 점심이 생겨서 점심 식사 때에 “점심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지 않지 않는가? 또 점심 먹고 난 후에 오늘 저녁을 제발 굶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저녁이 생겨 감사 기도하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단 한 시도 주님을 잊고 그 손을 놓으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왔다 갔다 했다.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바로 그렇게 살아라는 뜻이다. 현대의 신자에게 맞추어 이 구절을 해석하면 이런 의미다. 신자가 하루 세끼 식사기도 때마다 주님의 은혜에 제대로만 감사하면 우리의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화려하고 거창한 사치품은 아닐지라도 우리 생존에 필수적인 것은 무조건 책임져 주신다. 월 수입 만불, 십 만불 달성하는 그것이 기도의 목표가 아니고 정말 하나님과의 교제와 동행하는 삶을 소원한다면 말이다. 예수님을 진정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사랑과 은총과 권능이 갈급해 하나님 당신을 기도의 목표로 삼는 신자는 절대 굶기지 않는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자기 손자 잭을 결혼시킬 때의 일이다. 조지아 주지사 관저에서 결혼 전야 축하 만찬으로 모였다. 많은 정치인들, 친척, 친구들이 모여 부폐로 식사하기 전 대통령이 유리잔을 두드려 사람들을 식탁 주위로 모으고 기도를 시작했다. “주님! 아내와 저는 지금까지 멋진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와 같은 즐거움을 잭과 주디 부부도 똑 같이 누리도록 해 주시옵소서” 라고 간단하게 기도했다. 얼마나 멋진 식사 기도인가? 결혼식을 앞 둔 특별한 날이기도 하지만 그 분의 평소 생각과 신앙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너무나도 기본이다. 단 두 문장의 기도 안에 아내와 자기, 부부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기도했다. 아내와 자기가 각자의 감정과 의지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보혈로 서로 주 안에서 연합했기에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고백이다.
또 먹고 마시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즐거운 시간을 위해 기도했다.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그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뜻이다. 아내에게 좋은 옷을 사 입히고 남편에게 맛 있는 음식을 해 먹이는 것은 둘째 문제다. 부부 관계를 이어나가는데 그런 것들이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손자 부부에게 자기들의 그 기쁨을 물려 주고 싶다고 기도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주는 유산이 돈이 아니었다. 카터는 단지 복의 근원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통과하는 파이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손자 잭 또한 먼 훗날 자기 손자의 결혼식에 할아버지를 닮아 그 신앙유전을 물려주는 파이프 역할을 해달라는 간구였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믿어 이처럼 식사기도라도 제대로 하는 집안은 반드시 천대 만대까지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된다.
물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수하다. 생명의 원천이다. 그 물도 고이면 반드시 썩는다. 흐르는 물에만 이끼가 끼지 않는다. 하나님의 축복을 내 창고에만 쌓아 두려 해선 썩을 수밖에 없다. 아니 아예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조차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이 그럴 때에 좀과 동록과 도적이 들끓는다고 하셨는데 이미 말씀하신 것을 바꾸실 리도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좀과 동록과 도적이 파 먹도록 내어 주실 리가 없지 않는가?
대신에 이제부터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성경의 코드를 바꾸셔야 한다. 오리지날 예수님이 말씀하신 코드로 바꾸는 것만이 신자가 살고 복을 받는 길이다. 절대 하나님 말씀을 말꼬리만 물고 늘어져선 안 된다. 단어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믿고 완전하게 순종하셔야 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기도하셔야 한다. 하루 세끼 식사 기도라도 진정한 감사가 넘치고 정말 구해야 할 것을 구하는 기도로 바꾸셔야 한다. 그러면 바로 여러분의 인생에 의와 거룩과 생명이 흘러 넘치고 먹고 마시는 필수적인 문제는 죽을 때까지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목사가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되신 우리 주님이 보장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