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바리새인은 위선적이지 않았다(마6:16-18)

조회 수 2234 추천 수 80 2003.11.25 16:26:10
마태복음 강해 (85) 11/23/2003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다이어트의 비결

금연학교나 다이어트 강습소에서 반드시 가르치는 비결이 하나 있다. 자기가 금연하고 있고 다이어트 중이라는 것을 만나는 사람마다 광고하고 자랑하라는 것이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져야 체면이 서고 또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듣기 싫어하는 자존심에 호소해 결심을 지키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본문의 바리새인의 경우는 이와는 정반대다. 그들은 일주일에 월요일, 목요일 두 번씩 꼬박꼬박 너무나 금식을 잘 했다. 그들의 자랑은 자기들의 결심을 잘 지키려 노력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랑을 위한 자랑이었다. 그것도 일부러 세수도 안 하고 재를 뒤집어 쓰고 과장하며 자랑했다.

초신자 시절에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한 전도사님 부부가 살았다. 가끔 제 집사람이 그 사모님에게 전화하면 전화를 안 받거나 한참 있다 받아 무엇하고 있었느냐 물으면 기도하고 있었다고 했다. 또 제가 전도사님에게 전화해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보고 있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래서 정말 신실한 주의 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차츰 교제해 가면서 실제의 삶에서는 조금씩 실망스런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떻게 기도와 말씀에 그렇게 열심인데 저럴 수가 있는가 이것은  아닌데라고 느꼈다.

그래서 제가 목사가 된 후 사람들이 전화하거나 찾아 오면 일부러라도 성경 보거나 기도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저도 실생활 가운데 말과 행동에 잘못이 많은데 남들도 제가 그 전도사님 부부에게 느꼈던 심정을 똑 같이 느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목사란 직업이 참 곤란할 때가 가끔 있다. 그렇다고 사실 대로 삼류 코메디 영화 비데오 빌려 보고 있다고 말했다간 금방 우습게 안다.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제가 제대로 답을 못하고 얼버무리고 있으면 성경보고 기도하고 있었거나 삼류 코메디 영화 비데오 보고 있었거나 둘 중 하나로 아시면 된다.  

예수님이 야단 친 유일한 이유

예수님이 3년간의 공생애 중에 야단치고 그것도 욕하고 저주하기까지 한 유일한 대상은 바리새인들이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목사, 전도사 장로, 안수집사 같은 자들이다. 야단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기도하고 금식한 것을 사람들에게 겉으로 자랑한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평신도보다 중직을 맡은 자나 사역자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금식한다. 그 전도사님 부부는 틀림 없이 평신도 시절의 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기도와 금식을 훨씬 많이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것을 구태여 안 했다고 말하면 거짓말한 셈이 된다. 또 일부러 거짓말하거나 과장해선 물론 안 되지만 평신도들에게 자극을 주고 목회자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알릴 필요도 있다.

반면에 나는 차라리 안 했으면 안 했지 그런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며 기도나 금식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가? 하나님과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좀 자랑하더라도 열심히 하는 쪽이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금식하지 않는 사람을 더 야단쳐야 맞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그렇게  안한 까닭이 무엇일까? 기도하지 않고 말씀보지 않는 자는 사실 주님이 야단칠 조건과 자격을 갖춘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라는 말이다. 남의 집의 아이가 잘못했다고 해서 옆집 아저씨가 야단을 치면 잘잘못은 누구에게 있었던 야단 친 아저씨만 이상한 사람이 된다. 신자가 기도하고 말씀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옆 집 아저씨 정도로 취급하겠다는 뜻 밖에 안 된다.

본문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정답이 형식적, 가식적으로 금식하거나 기도하지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정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나아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한 초점도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 행태가 무조건 가식적, 습관적, 종교적, 형식적, 위선적이었고 교만했다고만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반대로 순수하고 정직하고 겸손하게 진심으로 영적인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일부러 나서지 않고 집에서 조용히 혼자 묵상하듯 신앙 생활하면 잘하는 것으로 안다.

누가 위선자인가?

위선과 가식이라는 것의 근본적 의미는 무엇인가? 속에 생각하는 것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다른 것을 말한다. 강도가 총 들고 돈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그 행동은 나쁜 것이지만 가식은 아니다. 돈을 뺏고자 하는 생각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으로 남을 미워하면서도 겉으로 일부러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행동을 했을지라도 위선이다.    

위선과 가식은 속 마음이 깨끗한가 나쁜가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진심으로 남들 앞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면 위선이 아니다. (여기서 진심이란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인가 가짜인가(true or false)의 의미에서 진심을 말한다.) 반면에 그들이 속으로 자랑할 마음이 없었는데 자랑했다면 가식이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식으로 속 마음에 자기를 앞세우고 남을 깔보면서도 일부러 나서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것이야말로 가식이다. 교만에도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형식과 속으로 숨기는 형식 둘이 있는데 그 중 둘째 번 형식을 취한 것 뿐이다. 아무리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좋아도 여전히 겉과 속이 다르고 일부러 겸손을 가장한 것이므로  위선이다.

엄격하게 판단해보면 바리새인들은 속이 나쁘고 겉도 나빴지만 우리는 속이 나쁜데 겉은 나쁘지 않는 척 하는 것 아닌가? 둘 다 속에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똑 같았는데 저들은 최소한 가식은 떨지 않았지만 우리는 위선이라는 죄를 덧붙인 셈이다. 이것이 결코 논리적 말장난이 아니다. 신자의 실제 신앙 생활이 그렇다.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들이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3대 의무로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실천했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물론 사람들 앞에 드러내 놓고 했던 데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6장 4절, 6절, 18절에서 은밀하게 하라고 지적했고 신자들은 자랑만하지 않으면 된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은 2절, 5절, 16절의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이다. 그들의 모든 신앙 생활의 목표는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듣는 것이었다. 그런 속 마음에서 회당이나 시장 어귀에 나와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한 것을 자랑하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므로 그 목표를 이미 달성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너희는 이제 그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 단지 외적으로 길거리에서 떠벌리느냐 아니면 집에 혼자서 조용히 신앙 생활을 하느냐의 문제를 거론 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신앙 생활의 목표가 사람들의 칭찬을 받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 데 둘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확실히 하라는 것이다.

신자가 찾는 보상

한국 서울의 강남에 살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국회의원 선거에 경기고, 서울대 출신에 미국 MIT에서 손 꼽히는 수재로 불렸던 아주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출마했다. 선거 운동으로 아파트 집집마다 스텐레스로 만든 커다란 쟁반을 하나씩 돌렸는데 서울의 아주 큰 교회 안수집사 아무개라고 큰 활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 비용이 어디서 나왔는지 둘째 치고 안수집사라는 것을 꼭 자랑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것은 아닌데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당선은 되었지만 얼마 안가 뇌물 수뢰로 감옥신세를 졌다.

우리가 믿음을 가진 것이 그 국회의원처럼 명함에 어느 교회 장로라고 크게 인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고달프고 영혼이 평강하지 못하며 죄의 문제를 하나님의 보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찾는 그 보상이 어떤 보상인가? 솔직히 우리가 갖고 있는 기도 제목들을 한 꺼풀만 벗기고 그 속내를 한 번 가만히 들여다보라.  혹시라도 이웃의 누구보다 뒤쳐지는 것이 싫어서 아니면 내 체면과 자존심이 있지 최소한 이 정도는 해 놓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에서 소원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또 그 심정은 내가 열심히 믿었는데도 왜 아직 이 모양인가의 불평과 의심으로 가득 차있지  않는가? 반면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내 삶에 실현되기를 소원하는 기도는 얼마나 하고 있는가? 또 그런 일에 얼마나 내 시간과 여유를 투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에 신앙 생활의 목표를 두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혹시 일용할 양식이 떨어져 정말 굶어 죽을 형편이 되었고 내일 모레 아파트 렌트비가 당장 없어서 힘이 드는가? 이런 것은 신앙 생활의 목표와는 별개의 문제로 얼마든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간구해도 된다.

하나님이 가끔 우리를 꼼작 못하도록 코너에 몰아 넣으시고 사방팔방으로 막히며 도저히 소망이 보이지 않는 경우를 겪게 하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신자더러 조용히 신앙 생활하지 말고 울부짖으라는 것이다.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상태에서 집에서 도 닦듯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좀 알아서 안 해주시는가? 옆집의 누구는 가뭄에 콩 나듯 교회도 건성으로 다니는데도 저렇게 잘 풀리는데 제가 그놈 보다 못한 점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생각하는 속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다.

정말 힘들 때는 새벽기도에 나와 남이야 듣든 말든 부르짖어도 된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당신을 진정으로 뜨겁게 사랑하기 원하신다. 절대로 남의 집 아저씨 취급을 당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당장 꼭 필요한 것이라면 오히려 당당하고도 떳떳하게 구해야 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29:11) 금식 기도하는 것을 주위에 광고해 합심해서 중보 기도해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것은 가식, 위선, 형식, 교만이 아니라 가장 겸손하고도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상

세상의 칭찬을 바라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라고 하니까 대부분의 신자들이 보상이 누구에게서 나오는 것인지 그 출처에만 관심을 갖는다. 세상과 사람들이 해결해 주지 못하고 내 능력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면 하나님의 보상을 구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연약하고 부족하며 무능력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해 모든 환난과 고통에서 건져 주실 이는 분명 하나님이다. 그 분만이 우리의 구원과 산성과 피난처가 되신다. 잠간만 생각을 바꾸어 보자. 신자의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지 누가 인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 간구해야지 어느 누구에게 기도할 것인가? 하나님이 이뤄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하나님이 그 일을 해주시므로 하나님께 기도만 한 것으로 하나님의 보상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일차원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의 보상을 바란다는 것은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목적에 동원되는가에 신경을 써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목적 대로만 발휘된다는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가진 신앙의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권할 때 거부하는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믿으면 자기들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바꿔야 되니까 안 믿으려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오직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에만 두고 있는 데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을 채워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인정 받기 위해선 세상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 외는 생각할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절대 형식적 가식적이 아니었다. 자기들의 신앙 목표대로 행동했던 것 뿐이다. 성전에서 나는 저 죄인 세리와 다르니 특별 취급해달라고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쳐들고 기도했을 때 실제로 저들은 자기들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속 마음과 다르게 행동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어떠한 미개하고 미신적이며 우상숭배하는 종교나 기독교 이단이라도 나름대로 다 진심을 갖고 전심으로 기도한다. 오히려 더 진심이고 더 전심이다. 갈멜산의 바알 선지자 450명이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찔렀을 때 그렇게 하면 정말 바알 신이 자기들에게 응답할 것이라고 믿었다. 가식과 형식으로 자기 몸에 칼을 찔러 피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자의 진심과 전심은 달라야 한다. 속도 깨끗하고 겉도 깨끗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신령해져 죄를 안 짓는다는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분명하게 서 있고 그것이 겉으로 제대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는 반드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 하나님만의 정직하고 공평하고 완전한 방법과 때에 따라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결과를 이루어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확신을 갖고 사는 것이다. 자기 인생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진정으로 소원하고 나아가 그 하나님의 일에 초대 받아 실제로 인도 받고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에게 인정 받으려는 소원을 하나님의 힘만 빌려 이루려는 것은 바리새인보다 못한 꼴이다. 바리새인들은 진심과 전심으로 그래도 경건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으려 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열심인 사람으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껏 사업 잘 되고 병 낫고 아이들 일류대학 가는 것 인정 받아 남 부럽지 않게 사는 일에 우리의 진심과 전심을 동원하고 있지 않는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은밀하게 갚으신다고 하신 말씀이 단지 신자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도를 닦듯이 기도하고 신앙 생활한 것을 잘했다고 상 주시겠다는 말씀이겠는가? 그 정도라면 너무나 가난한 말씀에 불과해지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만홀히 여김을 당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어떤 마음과 의도로 기도하고 금식하는지 꿰뚫어 보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신자의 삶과 인생에 실현되며 신자가 속한 공동체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변화되길 진심으로 원한다. 우리라는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겪는 사건 마다, 가는 장소마다 복음이 확장되고 있는가? 어려운 이웃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위로를 우리를 통해 얻고 있는가? 주위에 죽어가고 이단 사설에 묶여 있는 불쌍한 영혼들이 주님의 새 생명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가? 신자로 인해 사회와 민족과 국가가 깨끗해지고 소망이 있게 되는가? 썩어 무너져 내리며 죄악이 관영하는 이 땅의 성벽을 하나님 대신에 막아서는 일을 위해 울부짖으며 금식하는가?
너무 그렇게 거창하고 고상한 일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아내, 남편, 자녀간의 관계에서 만이라도 아주 작은 일부터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 그 영혼에 기쁨과 평강이 되살아 나게 하는가?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며 전심으로 신뢰하게 되어 절로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서로 나누는가? 최소한 신자 자신의 심령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신령해지고 거룩해지고 있는가? 주위의 불신자들이 우리를 보면 부러워 죽을 만큼 예수 믿는 일이 보람차고 당당하고 자신 있는가?

하나님은 신자를 은밀히 보신다. 우리 속 마음의 완전한 밑바닥까지 완전히 발가벗겨 보신다. 우리가 신앙 생활의 포커스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절대 놓치지 않고 보신다. 우리가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시기도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의 그 은밀하신 시선을 절대 비켜갈 수 없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은밀히 갚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두렵고 떨리는 것인지 모른다.

저는 강해로 성경을 차례대로 설교하기 때문에 일부러 특정 성경 구절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특별히 의도한 적이 없는데도 어떤 절기나 특정한 상황과 설교의 본문 순서가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인데 본문은 금식에 관한 것이다. 얼마나 절묘한 조화인가? 예배 후 여러분이 마련해 온 음식으로 푸짐하게 교제할 텐데 금식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가? 본문이 역설적 재미로 맞아떨어지는 말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일치한다.              

오늘 우리는 가장 먼저 지난 일년간 생업을 지키시고 모든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셔야 한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올 한해도 이 자리에 까지 이르게 하셨다. 그러나 그 감사가 과연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고 내 체면과 자존심을 유지할 정도로 채워 주셔서 감사한 것은 아닐는지? 큰 재앙 없이 액땜을 해 주셔서 “휴우!”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도의 감사 뿐이라면 아무리 풍성한 뷔페라도 그것 만큼 가난한 식사는 없을 것이다.

대신에 겉으로는 여전히 후패하고 궁핍하고 곤고해도 하나님께 드릴 진정한 열매를 갖고 나왔다면 아무런 식사 없이도 배부르지 않겠는가? 올 한 해 나로 인해 주위의 불쌍한 영혼에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진 일이 있었는가? 내 가정, 이웃, 직장, 교회, 사회에 그리스도의 향기로 감화를 주어 저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오늘의 교제는 지금껏 먹어본 최고 일류 호텔의 어떤 뷔페 보다 더 풍성하고 맛 있는 식사가 될 것이다.

그런 자신이 올해 당장 없어도 된다. 추수 감사절은 매년 돌아 온다. 내년 감사절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열매, 다른 감사, 다른 중심을 바치면 된다. 추수 감사절은 직접 그 해에 손으로 추수한 것을 바쳐야 한다. ‘올해도 무사히’는 불신자도 할 수 있는 감사일뿐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추수한 것이 아니다. 신자는 불신자와 달리 생선을 낚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다. 사람의 낚시 즉 나로 인해 내 주위 사람이 주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나눠 받은 체험들을 들고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내년 감사절까지 일년이란 기간에 그렇게 되기까지 너무 촉박한가? 그럼 최소한 우리 자신이라도 달라진 모습으로 나와야 한다. 하나님 앞에 2004년의 저는 2003년의 저와는 분명히 다릅니다라는 고백의 열매라도 바쳐야 한다.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은밀히 갚으신다는 말씀이 참된 신자라면 결코 두려운 말씀이 될 수 없다. 신자가 중심을 세상 사람의 인정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보상에만 둔다면 무서울 것 하나 없다. 내 신앙 생활의 목표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자신 있고 떳떳하다면 우리의 중심을 은밀히 보신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지시며 보상해 주신다. 이 만큼 큰 위로와 능력과 축복이 되는 말씀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낙타무릎

2010.12.02 03:47:53
*.129.121.63

항상,매일 감사함으로 말씀 접하면서 은혜받습니다
감사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8.22 15:58:05
*.14.99.253

저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오직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 인생의 첫째목표가 되어 이에 기쁘고 즐거워 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자녀들로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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