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째 나팔도 이미 불리워졌다. (계8:6-11)
전지전능한 싼타 할아버지
저는 주일 학교를 제외하고는 크리스마스에 특별한 행사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 하지 않는 편이다. 교회가 적어 성도들에게 부담을 줄까 염려해서가 아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희생이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려면 반드시 세상의 것들 중에 일정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 포기한 양과 질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큰 은혜와 축복이 돌아 옴을 체험하게 되니까 얼마든지 기쁘게 희생하게 된다.
또 요즘 한국에 있는 어떤 분처럼 형식을 따지지 않겠다는 뜻도 아니다.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그에 적합한 형식이 꼭 필요하다. 화려한 장미꽃 다발을 깡통에다 꽂을 수는 없다. 저희 바로 옆집에 사는 미국 친구는 주말이면 친구들 불러 먹고 마시며 왁자지끌하게 파티를 하고 주일에 교회는 전혀 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집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우리 동네에서 제일 멋지다.
크리스마스의 내용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취하는 형식을 교회도 똑 같이 취한다면 그들이 크리스마스에 관해 갖고 있는 인식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셈이 된다. 쉽게 말해 현재 시행하고 있는 크리스마스의 풍속들이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는 것이 거의 없다. 나아가 그 대부분이 이방 종교의 우상 숭배 풍속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하나 들자면 싼타크로스 할아버지다.
저는 처음부터 교회 주일 학교에서 싼타 행사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에게 착한 일을 하면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치고 다른 친구들은 싼타에게 선물 받았는데 자기만 받지 못했다는 것에 어린 마음에 상처 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에 그 동안은 마지못해 허용했다. 그러나 현재 돌아가는 세상의 풍조를 볼 때에 싼타가 없어서 생기는 부작용보다 있어서 주는 폐해가 훨씬 크기 때문에 올해는 주일 학교에서 싼타 분장을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싼타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 아이들이 일년간 어떤 짓을 했는지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전 세계의 모든 집을 동시에 다 갈수 있고 아이들이 받고 싶은 선물에 관해 기도하면 들어 준다. 성경적으로 왕이 입는 빨간 옷을 입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가지는 품성과 특징을 눈에 보이는 형상이 대신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싼타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겹쳐지게 된다. 그런데 그 싼타는 술주정뱅이 할아버지에다 서양 아이들은 싼타가 오면 먹으라고 우유와 과자를 벽난로 앞에다 제사상처럼 차려 놓는다.
싼타가 동화 속의 인물이고, 아이들은 그런 어려운 내용을 모르고, 크리스마스는 신나고 좋은 날이라는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고,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니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지 않느냐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너무나 신나는 심부름꾼
죄송하지만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다. 이전에 저희 집은 시골 동네에서 잘 살았다. 제사를 지낸 다음 날 아침에 일년에 한 두 차례 동네 사람 전부 불러 모아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당시는 쌀 밥에 소고기 국은 생일날도 제대로 얻어 먹지 못하던 때라 대단한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제사 날을 기억하고 기다릴 정도였다. 그런 날 아침에는 저는 형님과 함께 동네 집집마다 돌아 다니면서 식사하러 오시라고 초대하는 심부름을 했었다. 어린이로서 착한 일을 한 셈이다.
그 심부름을 할 때에 너무 신이나 동네를 헤집고 다녔고 속으로도 아주 뿌듯한 자부심을 가졌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져 보면 내가 선행을 해서 자랑스러웠던 것이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도 가난한 동네 사람들과 비교해 우월감을 즐겼던 것이다. 우리 집은 너희 집과 다르고 나는 너 같은 아이와도 다르다는 교만에 도취되었던 것 뿐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동네 아이들과 한 번도 마음을 터 놓고 어울린 적이 없다. 꽁보리 밥과 희멀건 옥수수 죽을 함께 나눠 먹어 본 적도 없다. 간혹 좀 안되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겠지만 동네 아이들을 진정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사랑해 본 적이 없다.
모든 인간은 어려서부터 자기 편한 것밖에 관심이 없는 철저하게 부패된 죄의 종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탄의 노예다. 제가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지금까지도 어렸을 때의 그 일이 자랑스러웠던 추억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동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비뚤어진 우월감에 신나 설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꿈에도 생각 못한 채 죽었을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이 베푸는 선행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경제적 여유가 많던지 지성적 윤리적 수준이 높든지 간에 남들과 비교해 남아 도는 여유 부분을 가지고 마치 거지 깡통에 동전을 던져 넣는 적선 하듯이 한다.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준다고 가르치면 나면서부터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이 그 가르침의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절대 착한 일을 해야 하는 것에 생각이 먼저 미치지 않는다. 상을 받는다는 데만 신경을 쓰고 가식적 선을 행해서라도 보상을 노린다. 어린아이도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만 따지게 된다. 나아가 그런 마음으로 자란 아이는 영적으로 더 폐쇄되어 커서도 십자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 들이기 힘들다.
교회 안에서마저 싼타가 설쳐대니까 불신자들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님마저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동일한 줄 착각한다. 하나님을 인생살이는 전혀 간섭하지 않고 하늘에 가만히 있다가 사람들이 죽고 난 후에야 착한 일을 했는가 아닌가로 판단해 상벌만 주는 채점관으로 전락시킨다.
우리의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바리새인들처럼 못사는 집 아이들을 상대도 하지 않고 속으로는 온갖 교만, 완악, 고집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사람들로부터 착하고 똑똑하다는 칭찬만 듣기를 좋아했던 저 같은 자도 주님은 사랑해 주셨다. 그것도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예수가 밥 먹여 주나’ 큰 소리 치며 하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당신과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주님이 먼저 찾아 와 주셨다. 온갖 죄와 방탕으로 흑암에 빠져 있던 저를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씻겨 주시고 제 인생을 단 번에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다.
예수를 몰랐을 때는 단 한 번도 평강이 없이 올바른 향방도 없이 그저 되는대로 인생을 살았었다. 성령의 임재로 생전 처음 참 평강과 참 자유와 참 사랑이 내 삶에 넘쳤고 지금도 예수를 알기 전의 옛날을 생각하면 아무런 소망도 없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지경이다.
교회에선 절대 싼타가 강조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부인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흔적이 양심의 형태로 누구에게나 남아 있기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안 가르쳐 주어도 다 안다. 착한 일을 하면 상 준다고 가르치면 오히려 상만 받기 위한 거짓 선만 조장한다. 싼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사탄의 교묘한 노림수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신 그 풍성하고 신비한 은혜는 인간이 갖고 있는 어떤 형식으로라도 그 뜻을 절대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다. 흔히들 크리스마스를 아기 예수 탄생한 잔치로 지내는데 그것도 사실 별 의미가 없는 짓이다. 우선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실제 생일이 아니다.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분은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히7:3)로 영원한 제사장이요 구세주 하나님 본인이시다. 생일과 기일(忌日)은 출생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마감하는 유한한 인간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게 생일은 아무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있지도 않다.
2000년 전에 보여 준 환상
신자가 정작 따져야 할 성탄의 의미는 따로 있다. 계시록 8장 7-13까지를 보자. 종말의 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해 놓은 것이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며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7절) 산성비가 내려 삼림이 황폐화 된다고 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8-9절) 바다가 오염된다는 것이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10-11절) 강물이 썩어 마실 물이 없게 된다고 한다.
요한 사도는 이 글을 약 2천 년 전, 정확하게는 1910년쯤 전에 기록했다.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라. 강이 썩어 마실 물이 없어지고 바다가 오염되어 생선이 떼 죽음을 당하리라 예상은커녕 꿈에라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제가 어렸을 때 지금부터 40, 50년 전만 해도 한국의 흐르는 개울 물은 어지간히 그냥 마셔도 배탈 나지 않았다. 이천년 전이라면 배탈 안 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개울의 물이 생수요 천연 광천수가 따로 필요 없었다. 온 천지가 무공해 자연 식품이었다. 또 당시의 문명 발달 상황과 속도로 보아 강과 바다가 썩는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때다. 또 이 글을 기록할 당시 요한 사도는 이미 90넘은 노인이었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에게 직접 계시를 받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이런 글을 남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언서니까 당연한 일이거니 생각해선 안 된다. 불과 백년 전만 해도 지구 상의 어느 누구도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을 기록했다. 예수님이 직접 요한 사도를 찾아가 이천년 후에 일어날 일을 정확한 환상으로 보여 주셨다.
이천년 전의 예수님이 이천년 후에도 동일하신 예수님이 된다는 의미다. 그 분은 알파요 오메가로 시작이요 끝이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시는 분이다. 전지전능하시고 천하만물을 창조하신 후 선한 섭리로 신실하게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이 땅의 모든 인생을 다스리시며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시며 때가 차면 천사들의 호령과 나팔 소리와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신자를 일대일로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는 하나님의 고귀한 은총을 입게 한 후 하늘의 생명책에 요한 사도와 같은 반열로 그 이름을 올려 놓으셨다. 신자의 인생의 모든 세밀한 부분은 이제 그 분의 아시는 바가 되었고 강하고 의로운 손으로 붙들린 바 되었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삶이 현실적으로 형통했던 고달팠던 상관없이 그 분만의 은혜와 사랑이 신자의 곁을 단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 영원토록 함께 계시며 지금 이 자리에도 오셔서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고 계신다.
셋째 나팔이 불린지 오래다.
유엔 산하의 UNEP(유엔환경계획)라는 기구에서 지구환경보고서 #3를 지난 5월에 발표했었다. 현재 세계의 강들의 절반이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이고 2032년에 가면 전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을 겪을 것이라고 그 보고서는 예상하고 있다. 특별히 아라비아 반도를 포함한 서아시아 즉 중동은 90% 이상의 물 부족을 겪을 것이라고 한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참 이상하다. 이슬람의 코란에는 땅 밑의 검은 황금으로 인해 크게 번영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지금은 석유로 부자가 되어 흥청망청하고 있더라도 그 매장량이 언제 바닥날지 모르지만 곧 석유와 물을 맞바꾸는 시대가 30년 내에 올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하나님이 이슬람만 따로 벌을 준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당장 먹고 사는 것밖에 모르고 정작 그것들을 책임지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지금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 10절에 강의 삼분의 일이 썩는다고 했는데 벌써 절반이 썩었다. 셋째 나팔이 불리운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곧 넷째 나팔이 불리울 것이다.
넷째 나팔이 불면 어떻게 된다고 했는가?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를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禍), 화, 화가 있으리로다”(12-13절)
육안으로 별들의 삼분의 일이 블랙 홀에 삼켜져 가는 것 같은 천지개벽을 볼 수 있는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구태여 언제 어떤 모습으로 일어날지 구체적으로 상상할 필요도 없다. 하늘의 해, 달, 별들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하늘의 영광이 가리워진다는 의미다. 하나님에게만 돌려야 할 영광과 경배와 찬양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의 삼분의 일 이상이 크리스마스에 싼타 잔치를 하니까 성인 신자마저 올 한해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도 잘 했는데 왜 하나님은 아직 복을 안 주시나 하고 예수님을 싼타 할아버지 선물 기다리듯이 한다는 것이다. 벌써 넷째 나팔마저 불리워졌다는 뜻이다.
UNEP에서 이런 현상에 대해 모든 나라가 인류 공존 우선 정책을 펴야 한다는 대책을 내어 놓았다. 서로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정답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지금 세상의 모든 나라는 신보수주의(Neo –Con.) 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내 나라의 안전과 유익이 모든 정책의 최우선 달성 목표다. 다른 나라야 어찌 되든 상관 않는다. 신보수주의라는 것이 특별히 새로 개발된 참신한 정책이 아니다. 인류 유사 이래로 항상 그래왔는데 새삼스레 더 강조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개인들도 자기 좋아서 하는 일에 대해 남에게 절대 간섭이나 비난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설사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와 규범이라도 그렇다. 당사자끼리만 좋으면 더 이상 남들이 정죄, 비난, 심지어 화제로 삼아서도 안 된다. 간음과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백주에 떳떳하게 큰 소리치게 되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 이래 수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교회 안에서 조차 동성애 목사가 버젓이 더 옳다고 설쳐 댄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마저 하나님은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려진 상태다.
새로운 크리스마스 풍속을 만들자
크리스마스는 신자에게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임은 틀림 없다. 물론 아이들이 잘한 일을 칭찬하고 선물도 주어야 하며, 이 땅을 구원하러 오신 아기 예수에 관한 이야기도 해 주어야 하며, 성도들 끼리 모여 잔치도 벌려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이날은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다. 태초부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이 땅과 우리 모든 인생의 주권자 되시는 그 분이 이 땅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영역 안에 직접 들어 오셔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준 날이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역을 특별히 되새겨야 한다. 역사의 주인이 예수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당신의 뜻과 시간표대로 이 땅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신다.
세상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도 제대로 인정한 적도 없으면서 온갖 화려한 형식으로 성탄절을 보내고 있다. 신자는 달라야 한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바람은 세상의 전교회가 크리스마스 전후 삼일간 금식하며 회개하는 기간으로 선포되고 실천되었으면 싶다. 이 날에 네 번째 나팔이 이미 불리워졌음을 선포해야 한다.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 성탄절에 예수님이 화려하게 장식하며 싼타 잔치를 하는 교회 안에 오시겠는가 아니면 썩어져 가는 강물 곁에서 눈물을 흘리고 안타까워하고 계시겠는가?
어떤 면에선 구원에 관한 메시지는 지난 이천 년간 선포된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이제는 심판과 재림이 강조되어야 한다. 임박한 종말로 사람들을 겁을 주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이 모든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살고 죽는 문제요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임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이 얼마나 심각하며 고귀한 것인가를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방식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갈수록 교회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만 강조되는데 이제는 인간의 죄와 타락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인간을 향한 그 사랑의 뜻이 식었거나 변경이 된 것은 절대 아니다. 인간의 죄가 더 흉폭하고 교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심판이 없는 용서는 사랑이 아니다.
틀림 없이 이 땅에 넷째 나팔의 화가 곧 미칠 것이다. 재앙이 닥칠 것을 하나님이 이천 년 전부터 미리 아시고도 왜 안 막아주시는가 불평하고 의아해 할 문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끝까지 부인하는 인간의 완악함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멸망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서 신자는 반드시 큰 화를 겪을 것이다. 얼마 안가 예수를 제대로 믿는 신자는 고리타분하고 앞뒤가 꽉 막혀 이상하고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할 것이다. 아니 벌써부터 그렇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커서 성인이 될 때쯤에는 그런 추세는 더 확연해질 것이며 그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 세상 풍조에 휩쓸릴 것인가 예수를 섬기며 살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외적으로 보장된 종교의 자유와는 상관 없이 예수를 믿는 것으로 인해 현실적인 생존마저 힘들게 된다. 세상은 그 만큼 예수 믿는 자들을 증오와 분노로 대할 것이다.
우리 자녀들을 싼타로 선물 주어가며 착한 일을 하라고 가르쳐선 안 된다. 착한 마음을 심어 주어야 한다. 나무 자체가 바뀌어 절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기도하며 완전히 예수님에게 맡겨 그 분의 계획과 뜻이 얼마나 신비하고 풍성한 은혜인지 본인이 직접 겪게 해야 한다. 주위의 어려운 친구들을 먼저 찾아가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시게 해야 한다. 보상을 바라며 선한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선한 일 자체가 보상이자 인생의 가장 참된 행복임을 스스로 알게 해야 한다. 자기 삶의 주권자가 누구인 줄 확실히 알아 그 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기 인생을 아름답고 신령하게 만들어 가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아이들이 할 일이 아니라 부모가 해야 할 일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평소에 하는 대로 배우고 따라 한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삶이 정말 저들 눈에 신나고 능력 있고 즐거워 보여야 한다.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증오와 핍박을 받는 모습에서 더 큰 의와 빛이 비추어져 나와야 한다. 돈이 힘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가르치고 예수를 따라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그렇게 살면 된다.
물론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 어른들에게도 갈수록 쉬운 일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 넓고 편하고 풍성하며 화려하고 재미나고 신이나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에 단 하나 빠진 것이 있다. 생명이다. 그 길에서 발견되는 것은 오직 더러움과 추함과 썩어질 것 뿐임을 알아야 한다. 대신 주님을 따르는 좁은 길을 묵묵히 걸어 갈 때에는 거룩한 빛과 의와 소망이 우리와 함께 간다.
비록 신자가 가는 길이 당장은 희생하고 손해보고 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반드시 최후의 영원한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로 흑암과 사망의 세력에 묶이고 눌려 있는 인간을 구원해 주신 그 분이 하늘의 별이 삼분의 일이 떨어지는 화가 닥치는 그 때도 여전히 신자들의 구세주 임을 잊지 않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절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넷째 나팔이 이미 불리웠고 다섯째 나팔에 대비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말고 세상이 교회가 하는 형식을 보고 그 속에서 깜짝 놀라고도 저절로 무릎 꿇을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하게 해야 한다. 저희 교회의 신자부터라도 성탄절을 세상 사람과는 완전히 구별되게 보내어 넷째 나팔 소리를 울려 퍼지도록 하자.
하는 사람...
모든 만물보다 더 부패한 인간의 참 모습, 나의 참 모습은 들여다 볼수록 한숨이
나오는 자신이기에,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나의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이미 나의 부끄러움, 수치스럼, 모멸감...을 이미 대신 감당해 주셨기에
찬양과 경배만을 우리 주님께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