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89) 12/28/200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염려를 지고 가는 인생
미국의 일간 신문은 독자로부터 질문을 받아 인생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칼럼이 꼭 있다. 그런 상담가인 론 애슐리씨가 전국에서 오는 그 수 많은 상담 편지의 주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염려’라고 했다.
인생은 염려로 시작하여 염려로 끝이 난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엄마 젖만 먹고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되는 갓난 아기도 염려한다. 배 부르고 잠 잘 잤고 기저귀도 갈아 주었는데 까닭 없이 울고 보채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엄마 태 속에서 안전하게 있다가 세상의 온갖 위험에 신체가 노출되므로 그 시기는 본능적으로 조금만 불편해도 불안을 느끼게 되어 있다. 세상에 적응 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이므로 그럴 때는 억지로 달래려 하지 말고 조금 울게 내 버려 두는 것이 낫다. 또 사람은 죽기 직전에도 죽음이 가져 올 고통을 두려워 하고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닥칠까 몰라 불안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염려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해 교회에 출석하는 계기나 믿고 난 후 신앙 생활의 중심도 따지고 보면 염려를 없애고 평강을 얻으려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직접 신자를 대면하여 주시는 말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 아니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가? “두려워 말라”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신기하게 성경 전체에 두려워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온다. 일년 365일 힘든 일의 연속으로 염려가 끊이지 않으며 신자도 예외가 아니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러분은 어떻게 염려를 없애는가? 다른 바쁜 일에 몰두해 잊어버리려 하는가? 염려거리 자체를 아예 망각하려고 노력하는가?
청계천에서 빈민 선교하셨던 김진홍 목사님이 유신시절 반정부 데모를 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한 겨울에 감방 안이 너무 추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불이나 뜨거운 것에 관한 기사를 처음부터 한 절씩 찾아 읽으며 추위를 이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 차가운 시멘트 바닥과 벽이 온돌 방처럼 뜨끈뜨끈해지는 성령체험을 했다는 간증을 한 적이 있다.
우리도 성경에 365번 적혀 있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매일 한 절씩 찾아 읽으며 간절히 기도하면 염려가 없어지겠는가? 지난 경험에 비추어 기도하고 말씀보았더니 염려가 없어졌는가? 아니면 기도하고 말씀 본 적이 별로 없어 잘 모르겠는가?
미래는 하나님의 소관
대부분의 신자들은 큰 일이 생겨야 기도한다. 그러나 고난이 이미 발생한 후에는 힘들고 불편하고 짜증은 나지만 염려는 없어진다. 더 이상 고난이라 할 수도 없다.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지고 진행 과정도 알 수 있고 어느 정도 결과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간혹 구체적인 원인과 결과를 도저히 모를 때도 있지만 어쨌든 고난이 발생한 후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고난을 이겨내는 일만 남는다. 미국 이민 생활에 아파트 렌트비나 집 페이먼트가 모자라는데 집에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하고 있다면 살짝 맛이 간 사람임에 틀림 없다.
염려의 대상은 근본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우리 아이가 남들 아이보다 미숙한 아이가 되면 어떻게 하나? 애인이 변심하면 어떻게 하나? 직장에서 해고당하면 어떻게 하나? 245 I 조항이 영영 다시 발효되지 않고 불법체류자 단속이 더 강화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 즉 미래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돈으로 세상 만사를 떡 주무르듯 할 수 있는 재벌 회장이나 정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대통령이나 심지어 평생을 미래 예측만 연구하는 미래 연구가도 알 수 없다. 먼 장래가 문제가 아니라 단 5분 10분 앞도 내다 보지 못한다. 19세기 말의 미래 연구가들이 인터넷이나 유전자 공학 기술이 개발 되리라고는 꿈도 못 꾸었고 10-20년 후에 등장할 공산주의마저 예견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은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야 준비하고 대책을 세워 연습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 밖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18세기의 불란서 영성 신학자 프랑소와 페네롱은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오직 그 분만이 주관하신다”고 너무나도 당연하면서도 우리가 잘 잊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것으로 그쳤다면 평범한 말이었을 텐데 “그 분의 마음을 미리 추측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온 것은 근본적으로 매일이 염려의 연속이라는 뜻일 뿐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기의 죄를 씻고 영혼의 고통을 덜어내지 않고 자유와 평강과 능력을 맛볼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려면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 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도 받고 보호 받는 길 뿐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이 추측해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방도는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 삶을 맡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기도할 수 밖에 없다. 고난이 닥쳐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닥치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예측과 통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기도해야 한다.
인생으로 따지면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하루로 따지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걱정거리 투성이므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뿐이다.(살전5:17) 불신자는 인생을 염려로 시작해 염려로 마칠 수밖에 없지만 신자란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칠 수 있는 자다.
고난은 나의 친구
그럼 다시 처음 제기 했던 질문을 해보자. 과연 기도하면 불안, 염려, 초조가 없어지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 경험했듯이 기도할 당시 뿐이지 않는가? 조금 염려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다가 얼마 안가 전과 같아진다. 그러다 뾰족한 수가 여전히 보이지 않으면 이제는 다른 염려가 더 겹친다. 하나님이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지? 내가 죄를 지어서 그런가? 지난 주일 교회 오지 않고 오랜만에 골프 치러 갔더니 하나님이 노하셨는가? 그래서 믿음으로 이기려 찬송가 테이프도 틀어 놓고 '믿슙니다' 하며 더 뜨겁게 기도하고 의지적으로라도 이기려 해 보는데도 나아지지 않는다.
신자가 믿음이 약해지거나 죄를 지어서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미래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이 왜 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빨리 응답을 받고 싶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를 자기의 예측 가능한 가시(可視) 거리 안에 두고 싶어 안달한 셈이다. 하나님에게 어서 빨리 내가 통제 할 수 있는 사정권 안에 미래가 들어와야 한다고 요구한 것과 같다.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그 분께 완전히 맡겨야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염려의 연속이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라는 것이다. 내가 믿었으니 그렇지 않으리라 혹은 그렇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 착각은 없다. 염려가 생기고 불안하며 형통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불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데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가장 큰 불신앙이다. 믿음이란 미래를 하나님의 손 안에 맡기는 것이지 믿음을 이용해 미래를 내 입맛대로 조종하려는 것은 믿음이 아닐 뿐 아니라 가장 교만한 죄악이다.
목사도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을 수 있다. 정말 신실하고 남에게 손해 한 번 끼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자기 가진 것 희생하며 남을 섬기고 도와 준 사람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불행을 겪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다. 그것도 당사자 본인이 겪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하나 뿐인 아들이 희귀한 병에 걸려 옆에서 부모로서 쳐다보지도 못할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간다. 그 고통을 들어주는데 부모로서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기도해도 묵묵부답일 때도 있다.
이것은 신자의 잘못이 아니며 하나님의 심술도 아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악한 사탄이 교묘하고도 치사하게 인간과 이 세상을 조종한 것이다. 불신자는 영혼이 전적으로 부패해 있으며 신자도 아직도 더럽고 추한 죄의 본성이 영혼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잘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모든 인간의 죄와 사탄과 세상이 합작하여 만들어 낸 결과다. 이 세상은 썩어 무너져 내려가고 있으며 흑암의 세력에 눌리고 묶여 있다.
울리버 윈델홈즈란 분이 “만일 내가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내 자식에게는 절대 가르치지 않겠다. 고난을 이겨내는 힘은 고난 만이 만들어 낸다. 고난은 친구처럼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 인정하기 싫고 신자가 된 후는 더 인정하기 싫지만 인생은 고난의 연속임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일들이 잠시 쉴 틈도 주지 않고 밀려 온다. 우리 쪽의 형편과 사정을 봐 주는 법이 없다. 하나가 끝난 것 같으면 바로 다음 것이 오고 어떤 때는 한꺼번에 여러 개가 겹친다. 염려가 그치지 않는다는 것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다. 미친 사람과 바보 두 사람을 빼고는 말이다.
돈을 벌면 누구나 하는 일
미래는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인트도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으셨다. 기도하고 말씀 보아 염려를 없애라고 하지 않았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기도와 말씀을 등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염려를 없애는 근본적인 대책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염려 전부를 부정하여 아예 아무 염려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오해를 마셔야 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이 물질에 불과하고 형이하학적이라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이 신자가 쳐다보지도 말고 구하지도 말아야 할 사악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강조하는 포인트는 본문 후반부에 있는 대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을 염려하라는 것이다. 당장 아파트 렌트비 몇 백불 모자라는 것과 직장에서 해고 당하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염려해야 하는가? 아이 공부 잘하고 못하고보다 나중에 마약을 하며 갱단에 휩쓸릴까 더 염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장이 회사 부도나는 것과 자기가 암에 걸리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예수님의 뜻은 염려하는 순서를 분명히 정하라는 것이다. 인생이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고 염려가 끝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미래를 예측하고 염려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통제해서 염려를 없애려 한다.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으며 신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도 불안이 끊일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어차피 염려가 끝이 없다면 큰 염려부터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염려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염려하는 순서를 정해서 마땅히 염려해야 할 것부터 염려하는 길 말고는 없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셨다. 앞(19-24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이유 내지 근거가 되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 선택하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중요하면 재물은 덜 중요하게 되고 재물이 중요하면 하나님이 덜 중요하게 되므로 당연히 자기 마음이 가는 곳에 보물을 쌓게 된다.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더 중요하고 목숨과 몸을 보호하고 유지해준다고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부족하면 필연적으로 염려하게 된다.
예수님은 지금 신자들더러 “네 인생의 중심이 무엇이냐? 분명한 삶의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느냐? 무엇 때문에 먹고 마시고 입는가? '너'라는 존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 땅의 삶을 영위하는가? 인생의 소망과 비전과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대로 생각하고 염려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고 해서 평강이 속에서 항상 샘솟듯 하고 무슨 환각제 먹은 것 같이 비몽사몽 간에 구름 위를 걸어가는 듯이 염려 불안 하나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법은 절대 없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불신자 시절과는 그 염려의 순서가 정 반대로 바뀌었다는 것 뿐이다.
삶에서 진정으로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인지, 참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알게 되어 그것을 위해 염려하는 자로 변한 것이다. 인생이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으며 돈으로 쌓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가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게 된 것이다. 진정으로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 할 줄 알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은 이제 더 이상 안 중에도 없게 된 자가 신자다. 더 큰 갈등과 고민을 갖게 됨으로 그 염려의 질과 내용이 바뀌었다.
인생에서 돈이 주는 유익과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제공하는 풍요로움은 일시적인 편안한 삶은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좀과 동록과 도적이 들어 썩어지게 마련이다. 진정으로 인간의 영혼과 전 존재가 살고 죽는 것과는 아무 관계 없고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를 씻어 주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길만큼 시급한 일이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 품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공급 받으며 사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모든 인생이 백이면 백 돈을 벌고 나면 꼭 하는 일이 있다. 남자는 바람 피우고 여자는 사치하는 것이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의 걱정이 없어지고난 후 그 다음에 가치 있는 일을 모르니까 당연히 따라가는 순서다.
걱정하는 순서를 정하라
염려의 성경적인 뜻은 불안하고 초조해져 손에 땀이 나는 식의 감정적 생리적 현상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지성적 의지적 의미를 갖고 있다. 생각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을 말한다. 걱정하는 우선 순위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저 이것도 걱정, 저것도 불안하여 인생에 향방이 없어 단지 오늘 하루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만 염려한다. 365일 염려로 시작해 염려로 끝난다.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사탄과 죄악에 조종당하며 산다.
하나님 안에 자기가 갈 길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 자는 진정으로 죽고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오직 그것만 걱정하니까 나머지는 자연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죄송하지만 순전히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겠다. 저는 솔직히 돈 걱정은 거의 하지 않는다. 절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현재도 매달 적자다. 대책을 세우지도 않고 별 염려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때에 맞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공급해 주셔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꾸려가게 해 주신다. 대신에 진정으로 가장 크게 걱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께 소명 받은 일을 제대로 다 이루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를 끝없이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 낭비하는 것을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 동안 허송세월하며 보낸 것만큼 후회 되는 일이 없다. 다른 사소한 염려가 끼일 틈 새가 없다.
사람의 앞날은 분명히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며 염려거리 자체를 다 없앨 수는 절대 없다. 불신자도 믿음과 상관없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어지간한 상식을 가지고 인생을 조금만 살아 본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도 나름대로 먼저 걱정할 순서를 정해 놓았고 각 자 나름대로 그 대비책을 세워 놓고 산다. 권력, 학식, 집안 배경, 건강, 자신의 배짱, 종교, 심지어 점쟁이나 폭력도 의지한다.
그러나 그들 인생살이의 결론은 한결 같다. 하나님과 자기 삶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하나님과 예수가 밥 먹여 주나 차라리 내 주먹을 믿고 말지다. 오직 관심은 밥 많이 먹는 것 뿐이며 금고 속의 돈이 내 목숨을 살리고 몸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다. 걱정하는 우선 순위가 첫째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요 둘째도, 셋째도 전부 그것이며 그 염려를 없애 줄 수 있는 돈 뿐이다. 그래서 저들의 염려 순서는 자나깨나 돈이다.
신자는 어떠한가? 여전히 세상에서의 삶은 궁핍하고 힘들어 염려가 끊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도저히 움치고 뛸 수도 없는 궁지에 몰린다. 가끔 스스로 죄악과 유혹에 넘어져 쓰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를 겪든 돈이 해결사가 아니라 최후에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 뿐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미래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맡기게 된 자다.
신자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들리고 손에 잡히는 일들이 자기 인생의 실체(reality)가 아님을 안다. 비록 그것들이 자기의 기대와 예상과 심지어 기도한 것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정 반대로 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렇다. 대신에 신자가 붙들고 있는 삶의 유일한 실체는 그런 와중에도 엄연히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하셔서 당신만의 계획을 갖고 자기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염려거리로 가득 차 있지만 십자가에 독생자를 죽이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일년 365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신자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결국은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기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추측하려는 것이 신자의 염려거리가 되어선 안 된다. 정작 염려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이 포함되어져 있는 지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내고 있는가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을 분명히 확신하고 그 일을 이뤄내고 있는 지부터 두려워 해야 한다.
기도란 하나님께 간구하여 자기 염려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먼저 걱정해야만 하는 일을 하나님과 함께 걱정하는 것이 기도다. 나아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우리 인생들과 나 자신을 위해 갖고 있는 걱정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 기도다.
본 단락의 마지막에 예수님은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미래는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고유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대신에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셨다.(마6:34)
목사로서 내년에 여러분에게 일어날 일 하나 예측해 줄 수 있다. 쪽 집게 점쟁이(?)처럼 100% 맞다고 절대 장담할 수 있다. 내년에도 여러분 모두의 삶은 일년 365일 고달플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자기의 소명을 확실히 붙들고 진정으로 염려해야 할 순서대로 염려하는 자는 오히려 염려가 없어지고 승리할 것이다. 반면에 오직 염려거리만 없애려 하는 자는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도 여전히 불안하고 힘든 한 해를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