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90) 1/4/2004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사진에 찍히지 않는 북극 곰
지하철 역의 노숙자들이 한 겨울의 추위를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이 무엇인지 아는가? 소주를 병째로 나팔 불고 팍 뻗어 자는 것일까? 그러다 자칫 큰일 난다. 열기가 나서 덮고 있던 것마저 걷어차고 취해서 추운 것도 모르고 자다가 얼어 죽는다. 그들은 장롱이 없어 이불도 없고 옷장이 없어 끼워 입을 옷도 많지 않다.
옷 속에 신문지를 겹겹이 끼워 넣고 자는 길이 가장 간편하고 효과적이다. 두꺼운 옷 하나 입는 것보다 얇은 옷 여러 벌 입는 것이 추위를 덜 타는 원리다. 옷이 보온 효과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옷 사이사이에 공기가 차 있기 때문인데 공기가 열전도율이 가장 낮아 냉기를 차단해준다.
미국에서 멸종되어 가는 북극곰(Polar Bear)을 보호하기 위해 어디서 몇 마리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조사할 목적으로 항공 촬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진에 단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 원인을 따져 보니 곰의 털이 인간의 육안으로는 희게 보이지만 광학적으로는 유리창 같이 투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털 하나하나가 전부 속이 빈 아주 미세한 튜브 모양이었다.
사진이란 빛이 반사 되어야 찍히는데 빛을 통과 시키니까 아무 형상도 잡힐 수 없었던 것이다. 튜브 모양이니까 속의 공기가 냉기를 차단하고 투명하므로 따뜻한 햇빛을 통과시켜 튜브 속의 공기를 데우는 온실효과까지 내었다. 말하자면 북극 곰은 영하 수십 도의 얼음 위에 아무리 뒹굴어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북극곰이 미련하거나 살이 쪄 지방질이 많아 추위를 견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아직도 개발해 내지 못하는 하이테크 기술로 세계 최고급의 털 파카를 미리 입혀 놓은 것이다. 우연에 우연이 거듭되는 진화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곰이 그런 원리를 알아 스스로 만든 것도 절대 아니다. 공기 자체의 열전도율이 가장 낮게 만드신 창조주께서 곰의 털도 북극에서 살기에 가장 적합하며 최선의 것으로 예비해 은혜로 베풀어주었다. 곰이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너무나 오묘한 창조섭리를 못 알아 보는 인간이 미련하다.
예수님은 허풍쟁이
예수님은 본문에서 신자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는 이유를 비유로 설명하셨다. 공중에 나는 새들과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솔로몬의 영광도 들꽃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보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가 솔직히 서로 비교되는 대상이 잘못 선정되었고 좀 과장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가? 솔로몬 왕 때는 이스라엘의 4천년 역사 중에 한국으로 치면 광개토대왕 시절로 국운이 가장 융성해 외적의 침입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다른 모든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그런 영광을 예수님의 표현대로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과 어찌 감히 비교될 수 있겠는가?
나아가 예수님은 이 비유를 삼단 논법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솔로몬의 영광보다 들 꽃이 더 낫다. 들 꽃과 새보다 신자가 더 낫다. 고로 신자의 영광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렇다고 확신하는지 아니면 여전히 예수님의 풍이 좀 세다는 느낌이 드는지?
이 문제를 따지기 위해 역대하 9:13-21을 읽어 보라. 한 마디로 말해 궁중의 모든 집기 비품을 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나라에도 이 같이 만든 것이 없었으며”(19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20절)했다. 금이 너무 흔해 은은 개똥 취급을 당했다는 것이다.
오늘 날의 신자의 영광이 이런 솔로몬 시대와 비교되려면 침대 밑에 백불 짜리 다발을 깔아 놓고 자며 차고에는 벤즈, BMW차가 서너 대 있고 부엌에는 영국제 본차이나 그릇뿐이어서 백 불은 돈으로도 여기지 않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실제 우리 상황은 어떠한가? 새해가 되어도 궁핍하고 힘들긴 마찬가지이며 작년보다 특별히 나아질 기미는 여전히 안 보인다. 혹시 불경기가 닥치면 어떡하나, 의료 보험도 없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프면 어떡하나, 내일 모레 당장 아파트 렌트비는 어떻게 내나? 하나님의 영광을 논하기는커녕 당장 제대로 생존해낼 수 있을까부터 걱정해야 한다. 예수님이 신자가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는 비유가 도저히 실감나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솔로몬의 만든 금 방패도 빼앗은지라 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에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대하12:9,10) 성경은 애굽 왕이 와서 솔로몬 궁전의 모든 집기를 다 빼앗아 가버려 흔해 빠져 개똥처럼 여겼던 은으로도 만들지 못하고 겨우 놋으로 대신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르호보암 왕이 누구인가? 솔로몬의 아들이다. 무슨 뜻인가? 한국 속담에 부자가 망하면 3대는 간다고 했는데 1대도 못 가 망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땅에 쌓은 보물은 좀과 동록이 해치고 도적이 훔쳐간다고 하신 그대로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예수님이 들꽃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고 할 때 삶의 질과 내용을 비교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풍성하고 화려하고 쾌적하며 안락하고 세련되게 사는가는 하나님의 영광과는 아무 관계없다. 만약 그런 것으로 따지자면 아무리 들 꽃이 청초하고 아름답고 많이 있어도 솔로몬의 궁정에서 정원사가 잘 가꾼 한 송이 장미보다 못하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피조물의 살고 죽음이 하나님의 소관 안에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다. 일상의 세밀한 구석, 슬프거나 기쁘거나, 힘들거나 편안하거나, 세상에 이름을 날려 출세하거나 빛도 없이 지내거나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자기 전존재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 두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쌓은 부는 아무리 화려하고 풍요롭고 쾌적해도 그 분의 영광이 함께 할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좋은 차 좋은 집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그 은혜가 함께 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책임져 주지 않는 좋은 차 좋은 집은 땅에선 보물이 될 수 있을지언정 하늘의 보물은 결코 될 수 없다. 땅에서의 보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해 그것들이 목숨과 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보물이 될 뿐이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현대 엑센트도 벤즈보다 안전하고 영국제 본차이나 보다 99센트 가게에서 일불 주고 산 중국제 싸구려 접시에 하나님의 영광은 보석처럼 더 빛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돈을 벌 소망과 계획과 지혜를 얻어 하나님의 방법대로 정직하고 공평하고 성실하게 돈을 벌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돈을 쓴다면 단 돈 백불이라도 솔로몬 궁정의 모든 금은 보화를 합친 것보다 하나님은 더 귀하고 가치 있게 평가하신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혼자 잘 먹고 잘 살려 하고 그래서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며 자기만 치장하려고 쌓은 부와 권력과 명예는 1대도 못 가 망한다. 꼭 하나님이 벌을 따로 주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좀과 동록이 썩고 도적이 훔쳐가도 좋으니 오직 내 사랑은 돈 뿐이라고 노래 부르며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며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마저 오직 그 일에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다. 그런 썩어빠진 인간들이 서로 많이 차지하려 경쟁하는 아비규환 속에선 결국은 가장 힘세고 치사하고 비겁하고 더러운 인간이 더 많이 차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도 몰라라 하신다. 그들에게 따로 벌을 주지 않으신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단지 죄와 사망과 사탄 아래 썩어가는 세상 속에 그냥 헤매게 놓아두실 뿐이다.
신자란 다른 자다.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을 기뻐할 줄 아는 자가 된 것이다.(빌3:7,8) 세상에서 내 겉 모습이 후패해 개똥 취급을 당해도 하나님 만은 나를 보석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나아가 스스로도 그렇게 사는 것이 훨씬 가치 있고 힘이 나며 신나기 때문에 실제 그렇게 살고 있는 자다.
하나님 섭리의 원칙
솔로몬의 영광이 왜 1대 밖에 못 갔는가? 잘 아시는 대로 사치의 도가 지나치고 하나님만 의존하지 않고 정치 군사력에 의존하려고 주위 나라들과 화친을 맺어 그 보상으로 천명이나 되는 후궁들을 데려왔다. 그 후궁들이 자기 나라의 우상들을 갖고 들어 와 왕의 궁전과 하나님의 성전에 천 개의 우상들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왕상11:11-13)
아버지 다윗 때문에 그 아들 솔로몬 대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벌을 주시겠다고 한다. 솔로몬이 잘못한 것을 왜 그 아들이 벌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다윗이 잘해 그 아들 솔로몬이 복을 받았고 솔로몬이 잘못해 그 아들 르호보암이 벌을 받았다. 적용 원칙이 달라지면 불공평하지만 아버지가 한 대로 아들을 대우했으니 불공평하지 않다.
나아가 하나님의 섭리의 참 비밀은 따로 있다. 모든 사람들이 돈을 죽기 살기로 버는 목적이 무엇인가? 자신의 안락도 있지만 결국 자식들 호강시키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식더러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돈으로 자식을 키우려는 자 특별히 신자가 그럴 때에는 절대로 돈으로 자식의 인생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나아가 르호보암 왕은 왕국의 절반 이상이 나눠지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이것도 징계가 아니다. 죄악과 사망이 설치는 사탄의 영역과 의와 생명과 빛이 넘치는 하나님의 왕국의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다. 자기 백성과 사탄의 종들과 구획정리를 다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원리는 오직 하나다. 그 인생과 그 집과 그 나라에 얼마나 많은 금은 보화가 쌓이고 화려하게 치장되는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 되고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자답게 거룩해지도록 세상과 구별시키며 그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만 당신의 모든 섭리가 집중한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결코 허풍도 과장도 아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세밀하고도 정확하며 정의롭고 신실하고 공평한 진리를 드러낸 것이다. 이 비유의 뜻은 이렇다. “너희가 공중 나는 새나 들의 백합화만 제대로 보아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걱정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느냐? 성경을 조금만 신경 써서 읽어도 솔로몬의 영광이 얼마나 헛되고 썩은 것인 줄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왜 너희는 지금 차고에 벤즈가 없고 부엌에 금 그릇이 없는 것을 가지고 감정과 생각과 심지어 믿음마저 요요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며 주위 사람이 괜히 싫고 미워지며 교회 안의 성도들 사이에도 그런 것들이 자랑과 시샘과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느냐?”
신자가 실패하는 원인은?
신자가 된 후에도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 읽고 찬양하며 예배를 보아도 여전히 염려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다. 은혜와 사랑과 권능을 베푸시는 그 분의 원리를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얼마나 그 사실이 안타까웠으면 본문에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느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고 두 번씩이나 한탄하셨다.
하나님은 천하 만물을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의 찬양을 받기 위해 이 땅의 모든 것을 베푸셨다. 예수님의 그 한탄이 인간을 더 고급한 동물로 만들었기에 더 많은 복을 주니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들꽃과 새들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너희 인간이 새와 꽃들과 다른 것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도 왜 염려하느냐는 것이다.
신자가 염려하는 것 말고도 시험이나 유혹에 넘어가거나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불신에 빠지는 등 신앙 생활에서 겪는 모든 실패의 원인이 딱 하나 있다. 자기가 하나님을 붙들었기에 자기가 잘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엄격하게 말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며 그런 인식을 갖는 자는 신자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붙들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그 분이 나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만드시고 성장하도록 보호하셨다가 어느 순간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하시고 사랑하셔서 지금도 함께 하고 계신다. 앞으로도 나에게 이미 계획 해 놓으신 일들 가운데 당신만의 의지와 능력과 긍휼로 당신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시고야 말 것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자 전부다.
북극곰의 수십 억 개의 털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하나님의 그 신비한 능력과 은혜가 그것의 또 수십 억 배의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양으로 인간과 함께 하신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으시며 우리의 이름을 그 분의 손 바닥에 새긴 바 되었고 그 분은 오직 우리로 인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며 안타까워 하시고 노여워하신다. 전 우주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그 확신의 바탕 위에 모든 삶의 결정과 행위가 이뤄지는 것이 신자다.
예수님이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을 때의 그 믿음이 적은 자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기도 적게 하고 말씀 안 보는 자가 아니라 바로 이 확신이 없거나 알고 있어도 자꾸 잊어 먹는 자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우리의 생각까지 멀리서 통촉해 하신다. 그 분의 인자하심은 크고도 진실하며 영원하시다. 그 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훨씬 크시다. 그런데도 왜 무엇을 염려하는가?
하나님의 신비
소금은 나트륨과 염소 두 원소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각각의 원소를 따로 섭취하면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극물이 된다. 하나님은 이 둘을 합쳐 생명체를 썩지 않게 하며 인간의 몸에 가장 필수적인 성분으로 만드셨다. 또 물은 수소원자 두개와 산소원자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산소는 불이 타는데 필수적이며 수소는 발화성이 너무 강해 조금만 열기가 곁에 가도 폭발할 정도다. 하나님은 이 둘을 합쳐서 불을 끄는 물을 만드셨다.
아무 풍채도 없고 흠모할 것 하나 없이 천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수난의 종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인간이 구원을 얻었고 부활하심으로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 죄악을 의로, 흑암을 빛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변화시켰다. 하나님의 신비다.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는 바로 하나님의 이 신비가 숨겨져 있는 수수께끼이다. 그것을 풀 수 있는 자습서는 성경이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직접 풀어 보인 선생이셨다. 신자마다 개인 가정 교사로 성령님을 보내주셨다. 기도와 말씀은 그 문제를 푸는 공식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베풀 수 있는 모든 은혜를 완비해 놓으셨고 그것을 찾아 먹을 수 있는 수단마저 우리에게 다 주셨다.
그런데도 신자가 자꾸 염려하고 불안한 이유는 자꾸만 내가 더 세게 하나님을 붙들려 하기 때문이다. 내가 더 세게 붙들어야 복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거나 최소한 놓치지 않겠지 생각한다. 제발 이제는 이런 생각을 없애야 한다.
새해 아침에 여러분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각오를 다졌는가? 틀림 없이 삶의 질과 내용을 고급화 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기도를 더 하고 말씀을 많이 보아 하나님을 좀더 세게 붙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공할 것 같은가? 제가 장담하건대 그런 마음만으로는 백이면 백 실패한다.
올해만은 생각을 정반대로 바꾸어야 한다. 현실의 계획은 뒷전으로 제껴두고 먼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제가 종교적 훈련을 시키거나 교회의 일을 시키고자 하는 뜻이 아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성공하고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여러분이 현재 갖고 있는 현실적인 계획들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대로 귀하게 여기고 더욱 열망을 키우셔서 소중하게 이뤄나가야 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 계획 때문에 염려하거나 안절부절 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의 필요한 것,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신다. 그 소망마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심어 준 것이다. 올해에 열심히 실천하고 붙들어야 할 것은 아침마다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강하고 의로운 오른 손으로 붙들고 계시는가를 매일 확인하고 또 확인하셔야 한다.
기도하고 말씀 보아 우리가 갑자기 신령해지고 영성이 늘어나 염려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도와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다함 없는 사랑과 풍성하신 은혜 안에 우리 자신을 몰입시키는 과정일 뿐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아 만유를 채우고도 남을 영원하신 초월자의 충만을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지 내 자신의 실력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신자란 염려거리가 없어지거나 자신의 신앙 실력이 늘어서 평강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임재 아래 들어 갈 때만 참 자유를 맛본다.
염소와 나트륨 두 독극물로 가장 유용한 생명의 활력소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비록 하나님을 아는 신자이지만 그 속 내면의 깊은 자아 가운데 사탄의 부패된 흔적이 남아 있고 또 우리 자신의 탐욕과 정욕이 넘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개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은총을 부어 주셔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게 하신다. 여전히 어리석고 무지하며 게으른 생각과 연약하고 무능하고 쇠퇴해가는 육신 두 가지를 합쳐서 하나님은 빛과 생명이 넘치는 영생으로 이끄신다.
올해도 우리의 현실은 사방이 꽉 막힌 환경 속에 갇혀 있을 것이며 우리가 가진 세상적 능력과 배경과 자원과 믿음마저 너무나 연약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둘을 섞어서 광야가 옥토가 되며 사막에 강이 흐르는 기적으로 이끄실 수 있다. 단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갓난 아기가 젖 병 붙드는 힘 정도도 될까 말까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있는 힘은 전 우주를 떠 받히고 있는 힘이라는 것을 365일 잊지 않을 때만 그렇게 된다.
지금까지 되풀이한 실패를 올해 또 다시 겪지 말아야 한다. 아침 마다 북극 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생각해 보라. 공중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그것들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매일을 정말 설레이는 기대 속에 주님의 영광을 소망해 보라.
올해만은 그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걱정되어 이것 저것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요구만 하지 말라. 그렇게 해선 여전히 실패 뿐이다. 대신에 먼저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할지 진정으로 하나님께 여쭈어라. 그리고 그 일에 여러분의 전 인생을 걸고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에 전 존재를 내어 맡겨라. 그럼 이 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승리와 기쁨을 틀림 없이 맛보게 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