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91) 1/11/200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 족하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결론
예수님도 사람의 일생에 염려가 끝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고 신자에게도 그것이 삶의 가장 절실한 문제가 됨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산상수훈 전체에서 단일 주제로는 6장 19절에서 34절까지 가장 길게 언급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본문에서 그 결론을 맺었는데 신자들이 예수님이 그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신 것에 비해 염려에 대해 잘못 대처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본문의 결론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33절을 이 단락의 결론으로 보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면 나머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만 강조한다. 물론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고 또 틀림 없는 진리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겠다는 데 책임 안 져주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너무나 당연한 ABC다.
그러나 신자들이 실제 신앙 생활 할 때에 그 원리를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의 뜻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해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더 큰 일이다. 자꾸 교회 봉사나 전도 같은 기독교적인 색채가 분명히 나타나는 행위를 하면 복 주시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일에 조금 열심을 내어 보지만 기대했던 만큼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추가적 보상이 따르지 않으니까 당황하게 되고 다시 원래대로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본 단락의 결론은 33절이 아니라 34절이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어떤 말의 결론은 최종 구절에 있다. 또 예수님은 34절을 ‘그러므로’라고 시작했다. 그 앞 33절까지의 말씀은 34절의 결론을 위한 근거와 이유로 제시되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먹고 마시고 입는 염려를 없애는 근본적인 대안으로 하나님 일을 하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을 권면 하신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신자가 정작 먼저 붙들고 실천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날 괴로움을 그 날에 족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다.
한국 신자의 콤플렉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 나오는 베짱이처럼 아무 장래 대책도 없이 그저 당장 먹고 즐기라는 것이 아니다. 염려를 아예 무시하고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염려가 스스로 알아서 도망가 주는 법은 없다.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한 번에 과도하게 받지 않기 위해 오늘 염려할 것 내일 할 걱정 식으로 염려 시간표를 짜 나누어서 염려하라는 뜻도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되지도 않는다. 염려란 항상 불시에 찾아 오기 때문이다.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염려하는 시간이나 염려거리가 발생할 시점을 가지고 구분한 것이 아니다. 염려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인간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 대책이 세워지는가 아닌가를 먼저 따져보라는 것이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 개스가 떨어져 간다는 노란 경고등이 나오는데도 가다가 차가 서면 어떡하나 염려만 하고 있는 바보는 없다. 가까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기만 하면 된다. 고3 수험생은 대학 입시에 떨어질까 염려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 성적이 좋으면 합격하고 성적 나쁘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확실한 대책이 나와 있고 그에 따른 결과도 뻔하다. 내일 일을 염려 말라 해서 일년 내내 놀다가 시험치기 전날이나 당일 날만 걱정하라는 뜻이 아니지 않는가?
한국 신자에겐 믿음과 거룩에 관해 도가 지나친 컴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예민하다 못해 아예 알레르기처럼 습관적, 자동적, 조건 반사적으로 매사에 이 두 가지 기준만 가지고 반응한다. 신자의 삶에서 생기는 모든 모순, 상처, 분쟁, 갈등, 환난은 무조건 믿음으로 이겨야 하고 신자의 일상 생활은 항상 거룩하고 신령해야 한다.
이방인처럼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하지 말며 하나님 나라와 의만 구해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 기준에 비추어 생각한다. 신자는 세속적, 물질적, 현실적, 형이하학적인 것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해선 안 된고 대신에 항상 종교적, 도덕적, 영적, 형이상학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하고 또 그런 것들을 위해서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만큼 큰 착각은 따로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정 주부들이 가장 싫어 하는 일은 설거지라고 한다. 매일 똑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고 아무리 해도 끝이 없으며 다른 사람은 밥 먹고 이빨 수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자기는 지저분한 것들을 손으로 만져야 하니 얼마나 귀찮겠는가? 그런데 주부가 설거지 하는 동안 이 일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일이니까 나도 빨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아프리카 선교에 나서야 할 텐데라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아이들 기저귀 갈아 주면서 이일 대신에 심방 다니며 기도해주고 어떻게 구역 모임을 잘 이끌까만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인가? 미국 이민 와 한국에선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이 하는 도저히 일도 일 같지 않은 허드레 일을 그만두고 신학교를 가야 하나님이 비로소 기특하다고 여겨 나머지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 주시겠는가?
하나님 나라와 의는 그렇게 거창하며 고상한 도덕적 종교적인 일이 아니다. 특별히 어려운 것도 아니다. 본문의 결론처럼 바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신자가 오늘의 염려는 오늘의 것으로 족하게 여길 때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
지난 주에 손님이 와서 함께 나가 식사를 했다. 우연히 옆 좌석에 앉은 어떤 한국 아줌마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마도 자기 딸과 있었던 일인 것 같았다. 내용인즉 딸에게 한번 심각하게 네가 꼭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뿐인데 키가 늘씬하게 크든지 공부를 정말 잘하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며칠 후에 엄마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키는 도저히 키울 자신이 없어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틀림 없이 여자가 먹고 마실 것 걱정 없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려면 얼굴은 좀 못나도 성형하면 되므로 체격을 늘씬하게 잘 가꾸어 좋은 신랑감을 만나든지 아니면 공부를 잘해 좋은 직장을 구하든지 둘 중 하나 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딸이 신자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지만 참으로 성경적인 대답을 했다. 예수님이 27절에서 인간이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다.
그런데 요즘은 세월이 좋아져 노력하면 키를 인위적으로 키울 수도 있다. 태권도, 농구, 수영 같은 키가 커지는 운동을 하고 항상 자세를 곧게 가지며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고 성장 홀몬을 먹으면 키도 어느 정도 키울 수 있다. 심지어 요즘은 무릎을 늘이는 수술까지 한다. 그런데도 그 딸 아이가 키를 키우는 대신 공부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한국에서 고시라는 고시는 다 패스한 사람이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고백했다. 머리가 특별히 좋아 천재였다는 뜻이 아니었다. 공부란 이미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어 아무 염려할 것 없이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었다는 의미다. 나아가 자신에게는 돈 벌 재주나 운동 잘 할 소질이 없었고 공부가 그나마 자기 적성에 가장 맞았다는 뜻이다. 자기 자랑이나 허풍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공부가 제일 쉬웠던 것이다. 마찬 가지로 그 딸아이에게도 키를 키우려 죽기 살기로 노력하는 것보다 공부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뜻이 무엇인가?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풍성하고 격조 높게 차지하려고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보다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더 쉽다고 확신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은 나를 속이고 시련과 죄악 가운데로 내몰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절대 속이거나 시험하지 않고 영원히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나는 실패해도 예수님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신다. 나는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며 심지어 완전히 실패해 전혀 회복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끝도, 전부도, 실체가 아님을 안다. 하나님이 다함 없는 인자와 긍휼로 자기의 자녀를 공평하고도 정의롭게 다스리는 눈에 안 보이는 영원한 그 분의 영역이 따로 있음을 영으로 볼 줄 알게 된 자다. 그래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그 분의 사랑 앞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반응하는 자가 신자다.
예수님의 본문의 결론은 이렇다. 너희가 스스로 키를 키우며 너희 힘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해결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것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쉽겠느냐? 더 쉬운 이쪽 길을 택했다면 마땅히 다른 염려는 없어져야 할 것 아니냐?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이방인이라고 해서 꼭 더럽고 추하고 죄악 된 것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도 인생이 고달프고 염려가 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아가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예수님이 본문에 지적한대로 그들도 절대자에게 기도한다. 무엇을 기도하는지 그 내용과 왜 기도하는지 그 이유가 다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보다 먹고 마시는 것을 채우는 것이 염려를 없애는데 더 쉽다고 믿고 오직 그것만 빈다. 말하자면 우리 아이가 일류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가져야 먹고 마실 것에 풍부해지고 그 인생에 염려가 없어지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것만 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제발 일류대학에 부쳐 주시옵소서! 시험 당일 날 대학 정문에 찰떡, 엿 갖다 바르고 절도 천번, 만번씩 한다. 대학 가는 문제는 기도할 것이 아니라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이미 해결책이 나와 있다.
물론 신자도 자녀 대학 가는 문제와 공부 잘하는 문제를 두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당장 대학 붙게 해달라고는 하지 않는다. 평소 때부터 인터넷 게임이나 포르노에 중독되지 않고 나쁜 친구들에게 휩쓸리지 않으며 간혹 미처 공부 못했더라도 다른 아이들처럼 커닝하려는 마음이 안 들게 해달라는 자질구레한 일에서부터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가 무엇인지 분별할 지혜를 주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을 깨달아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다. 그것도 엄마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 본인이 스스로 하게 한다. 불신자보다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미주알고주알 기도한다. 모든 것을 기도한다는 이유가 하나님 품 안에서 당신의 인도하심을 받고 사는 것이 훨씬 쉽더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멀리 아프리카의 선교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쌍한 이웃을 찾아가 돕고 믿지 않는 시댁 식구를 위해 희생하며 섬길 때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신자 주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매일 변함 없이 일어나는 똑 같은 일을 붙들고 찌지고 볶으며 열심히 살아야 하는 고달프고 힘든 삶의 현장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학생이면 공부하는 일, 주부면 설거지하고 기저귀 가는 일, 남편은 세탁소 그로서리 마켓에서 돈 버는 일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의는 찬란히 빛이 난다.
남들에 비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 그것도 마치 내가 해선 뭔가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만 두고 싶은 일, 아무리 해도 별로 성과나 실적이 오르지 않고 멋이 안 나는 일, 특별히 기독교적인 냄새가 전혀 안 나 하나님이 별로 흡족해 하지 않을 것 같은 바로 그 일들 속에 예수님은 함께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현재 주어진 환경과 일과 사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발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도 너무 어렵고 거창한 표현이다.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게 여기며 살면 된다. 신자가 현재 일에 충실하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현재 일에 충실한다는 것이 성실, 근면, 검소, 자족하며 살아 인격과 품성과 성격과 습관을 고쳐 나가라는 단순히 윤리적인 가르침이 절대 아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느냐의 문제다. 그 분이 어떤 분이며 얼마만한 능력과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현재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 속에 오묘하고 신비한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여러분이 설거지하고 기저귀 갈 때에, 밤샘하며 입시 공부할 때에, 미국 와서 영어 스트레스 받고 백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인종 차별 받아 가며 시간 당 최저임금밖에 못 버는 바로 그 때에도 예수님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우리 삶의 근본적인 능력과 위로와 가치와 의미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오는가? 우리가 신자가 되었다는 신분과 소속과 위치와 특권을 제대로 아는가?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는가? 왜 일요일마다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교회로 향하게 하시는가? 그 뜻을 제대로 안다면 절로 범사에 감사가 넘치며 자연히 현재에 충실하고 기쁨이 넘치게 된다. 모든 일을 주께 대하듯 하고 그럴 때에 자연히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의다. 또 우리 생각에 가장 하나님의 일인 것 같은 전도도 저절로 된다. 모든 사람은 불안과 염려를 없애는 것을 삶의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다. 신자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그날의 괴로움에 족하게 여기며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이상의 더 효과적인 전도 방법은 없다.
영원한 현재형의 하나님
그런데 문제는 신자가 이 원리를 알고 실천하려 노력하고 기도하는데도 염려와 불안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일 일어날 일을 하나님도 내일 가서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내 기도한 제목들이 하나님의 다이어리엔 몇 년 몇 월 며칠 날에 표를 해 놓으셨을까에만 자꾸 관심을 가진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장래의 하나님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에게는 장래가 없다. 과거도 없다. 오직 현재 뿐이다. 하나님은 과거나 미래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이다. 그 분에게 있는 시제는 영원토록 오직 현재 진행형이다.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8분의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는 것은 전부 8분 전의 태양이다. 그런데 만약 아주 거대한 거인이 있어 한 쪽 발은 지구에 두고 다른 발은 태양을 딛고 서 있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에게는 태양을 8분 전에, 지구는 8분 후에 보이지 않고 언제나 현재형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이 거인보다 큰가 작은가? 우주 복판에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우주의 삼라만상을 오직 현재형으로만 바라 보고 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지구상에 사는 인간에게만 해당 된다.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도 인간만의 문제다. 특별히 현재에 충실하지 않고 그저 되는 대로 사는 베짱이 같은 인생에게 더 골치거리다. 현재를 열심히 사는 자는 염려할 시간 조차 아까워 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신자를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다이어리엔 날자 구분 없이 완전한 백지다. 우리에 관한 모든 계획을 지금 갖고 있으며 또 바로 지금 그것을 이뤄나가고 있는 중이다.
고3 수험생은 일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 아니 중1이나 요즘 한국은 국민학교 일학년 때부터 앞으로 12년간에 일어날 일을 알고 시간표까지 다 짜 놓는다. 하나님은 12년이 아니라 우리 일생 전부와 영원까지 계획과 뜻을 갖고 계신다.
학생이 12년 뒤에 있을 대학 입시를 대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염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은 연약하고 불완전해 게으름을 피울 수 있고, 병이 날 수도 있으며, 나쁜 친구를 사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모든 일을 다 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신자에게 일부러 나쁜 일을 일으키실 분도 아니며 무엇이든 좋게 변화시킬 능력과 그런 의지가 있다.
사람이 내일 일을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 당장과 그 일이 결판이 날 미래와 시간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에게는 인간과 같은 시간적 간격이 없다. 하나님의 다이어리에는 날짜와 시간이 없는 백지에 각 신자들에게 부어줄 축복과 은혜의 리스트만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염려라 하지 않고 ‘괴로움’이라는 단어를 쓴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내일 일이란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러니 당연히 염려가 되지만 현재 이미 일어난 일은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나아가 일년 뒤에 시험이 있다든지, 한 달 후에 아파트 렌트비가 모자라든지 하는 일들도 염려할 대상인 내일 일이 아니라 이미 발생해 있는 현재의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너에게 가장 최선의 것으로 예비하신 만큼 너도 한 날 괴로움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공부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가장 신경 쓰고 고민하는 돈 버는 것도 가장 쉬운 일이 된다.
하나님이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사는 모습을 보고 기특해서 따로 더 복을 얹어 주시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시간표대로 신자에게 최선의 것으로 주실 준비가 다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다이어리에 적힌 축복의 리스트를 가지고 지금 당장에도 실현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더 많은 것들이 합력하여 더 좋은 선을 이루어 내게 할까를 모색하느라 인간의 시간표 상으로는 미래의 일로 나타날 뿐이다.
불신자 시절에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도 꿈도 꾸지 못했다. 하나님에게 무조건 많이 바쳐야 하고 어떡하든 열심히 빌어야만 먹고 마실 것을 해결해 주는 줄 알고 천번이고 만번이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절했다. 신자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자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 그것 하나만 생각해도 힘을 얻는 자다. 우리가 빌지 않아도, 갖다 바치지 않아도 그 분이 먼저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신자란 바로 그 크신 사랑에 자기 전 존재와 전 평생과 일상 생활의 아주 세밀한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내어 맡긴 자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왜 내일 일을 염려하는가?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가장 길게 당부하신 이 말씀들 위에 다시 제가 감히 결론을 내려 보고자 한다. 내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될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여러분 스스로 솔직히 자문해 보라.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염려하면서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쉽겠는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지금 나에게 마련된 여건과 사건과 사람들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 쉽겠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