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18-25) 원색적 복음이 실종된 기독교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18-25)

 

너무 힘든 전도

 

바울은 세 번의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지금의 터키와 그리스 지역 곳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마케도니아 북서쪽의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여 이 지방에는 일할 곳이 없으므로, 당시로선 땅끝인 스페인으로 갈 계획이라고 밝힐 정도였습니다.(롬15:19, 23) 

 

그런데 본문에선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으나 실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은 여호와를 믿고서 율법을 지키며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사는 자입니다. 이방인은 우상을 섬기거나 아니면 자기 주관대로만 살아가는 나머지 모든 족속입니다. 요컨대 복음을 전해 듣는 모든 사람이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더라는 것입니다. 

 

바울 본인도 얼마나 답답하면 복음 전파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고 네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히브리인의 어법에는 비교급 최상급 표현이 없어서 반복하는 방식으로 강조했습니다. 두 번 강조하면 비교급, 세 번 강조하면 최상급이 되는 식입니다. 그런데 네 번을 강조했다면 다른 것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절대적인 의미인 셈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20절)라고, 그는 반어법으로 세 번 질문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지혜자, 선비, 변론가가 없다는 뜻입니다. 고매한 법률가, 철학자, 도덕군자는 물론 신령한 종교인도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따지면 그런 최고 지성인이라도 복음을 사람들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네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같은 반어법으로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했다고, 문맥상 의미로는 복음이 쉽게 이해되지 못하게 한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을 구원하기로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거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안 받아들일 줄 알고도 열심히 목숨까지 걸어가며 전했다는 뜻입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엄 캐리도 인도에서 무려 십 년 동안 겨우 한 명 전도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십자가 구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는커녕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너무 힘듭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구원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전도자나 전도 받는 사람들의 지혜를 높여 주셔야 합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가 풀지 못하는 의문이자 불만입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바울이 그 이유로 “유대인은 이적을, 헬라인은 지혜를 찾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이 무슨 뜻인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걸림돌인 복음.

 

먼저 유대인은 이적을 찾는 것이 자기들에게 거리끼는 것이 되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동족들에게 아주 의로운 이적을 많이 베풀었는데 어떻게 거꾸로 거리낌이 되었습니까? 무엇보다 자기들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인 로마에서 해방되어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그 이적을 이뤄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이 “a stumbling block”으로 번역한 ‘거리낌’이라는 헬라어 ‘스탠달론’은 죄를 짓게 만드는 덫이나 올가미를 뜻합니다. 십자가는 너무나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죄라고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사역 중에 당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고 밝혔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도 선교할 때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를 믿어서 구원을 얻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로선 영원한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심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아의 역할을 맡긴 인간이라고 쳐도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는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그리스도일 수 없기에 완강하게 거부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으라고 전하면 로마의 사형수 죄인을 내가 왜 믿어야 하느냐고 반발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거기다 당시 유대인들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죄인이라고 무시하고서 함께 식사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이방인은 물론 세리 창녀와도 함께 떡을 떼며 당신께서 오히려 자기를 낮추며 겸손히 그들을 섬겼습니다. 주님의 그런 모습도 정통 유대인들에겐 아주 꼴 보기 싫은 거리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와 안식일이 여호와 신앙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이방인과 구별되고 우월하다는 증거라고 여겼습니다. 이방인들의 신전 제사는 음주 가무와 문란한 성행위가 수반되기에 아주 추악했습니다. 그들에겐 또 하나님이 창조를 마친 마지막 날 쉬셨던 일을 기념하는 안식일 개념은 전혀 없었고, 심지어 고대 이방 사회에는 일주일 중에 공식적으로 쉬는 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성전 제사는 물론 안식일 준행 관습을 무시하는 것처럼 여겨졌기에 아주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복음에 대해 유대인이 그렇게 반응할 줄 미리 아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 밤 다락방 강화에서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완악한 그들의 잘못이자 죄이므로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당신을 증거하게 해줄 성령이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요16:1)라고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실족하지 않게’의, 즉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의 헬라 원어가 바로 본문 거리낌의 동사형 ‘스캔달리조’입니다. 

 

신자가 신자답게 살면, 특별히 복음을 전하면 세상으로부터 온갖 훼방을 받고서 실망 좌절하게 되겠지만 너희와 함께하는 성령님만 의지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재차 약속해 주었습니다.(행1:8) 역으로 따지면 주님의 증인 역할을 하지 않으면 편안하게 지낼 수는 있지만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미련한 복음

 

이방인은 지혜를 구하므로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여겨진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여러 우상 신들을 섬기는 그들의 종교관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우상은 아예 실존하지 않은 허상이므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이성에 따라서 합리적인 분석을 하기 좋아하는 그들의 지혜가 복음을 수용하는 데에 장애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형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에선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로마 제국은 십자가 처형이 인간이 고안한 처형 중에 가장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너무나 부끄럽기에 로마 시민에겐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백성 중에 최고로 극악한 죄를 지었거나 제국에 반역한 자에게만 시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처형을 받은 자라면 모두가 치를 떨며 두드러기가 솟는 반응부터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 군병이나 백성들이 온갖 욕설로 조롱한 까닭입니다.

 

이방 족속들은 또 자기들이 믿는 신들끼리 서로 힘을 겨루어서 이기는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가나안 변방의 아주 작은 나라로 계속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고, 지금도 로마의 작은 식민지일 뿐입니다. 그런 나라의 이름 없는 한 랍비가 저항 한번 못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했는데도, 예수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추종 경배하니까 종교적 과대망상증에 걸렸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거기다 천하 만물을 창조하고서 통치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외에도 그와 동격이고 똑같은 능력을 지닌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따로 더 있다는 교리도 미련해 보였을 것입니다. 자기들처럼 서로 관장하는 영역이 다른 신들을 가능한 최고로 많이 믿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방인들은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 천국에 가야 하고, 그게 아니면 신에게 최고의 치성과 제물이라도 바쳐야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흉악한 범죄자라도 예수라는 사람만, 그것도 사형수인데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들에겐 엉터리 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도 종교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행위 구원이 옳다고 여기므로 아무 공적 없이도 무조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좀처럼 수용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당시 지중해 세계는 헬라의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에 조금씩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물질로 이뤄진 육체는 악하고 비물질인 정신은 선하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선한 정신이 우주와 인생의 절대적 진리에 관해서 영적인 깨달음(gnosis)을 얻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겐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부터 악하다고 판단하는데 그것이 구원을 준다니 아주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

 

바울은 인류를 유대인과 이방인 둘로 나눴습니다. 그 둘이 찾는 것이라면,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에게 바라는 사항이 그 둘이라는 뜻입니다. 이적 같은 풍성한 현실 축복과 자기를 지혜롭게 깨우쳐 주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이 그런 기대를 전혀 부응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거부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따지면 현실의 넘치는 축복이나 심오한 지혜가 인간으로 참 인간답게 만들지 못하므로, 인간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그분이 인간을 더 잘 알고 있으므로, 인간이 바라는 것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하나님이 주기 싫어서 안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둘을 풍족하게 주어도 인간이 선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상 인간 사회를 파멸로 이끄는 큰 죄는 주로 돈과 지식과 권력이 많은 자들이 자행했습니다. 

 

인간이 바라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전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로마의 사형수로 죽이고선 그 예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희의 모든 필요가 충족해지고 다른 것은 더 이상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서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원하는 것들을 보상해 주지 않으니까 의도적 능동적으로 거역한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시는데 그 방도인 십자가가 미련해 보여서 거부하면 당연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 딴엔 총명과 영성을 뽐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미련하다고 반발 거부하지만, 실은 인간이 한없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의 바울 자신부터 그랬습니다. 그는 율법에 능통한 유대인 랍비였으나 로마 시민권을 갖고서 헬라 사회 환경에서 살았기에 문화적으로 이방인도 됩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이 설교하는 복음을 들으면서 그에게 이 두 가지 반응이 동시에 생기면서 격분하여 처형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 체험에만 비추어 봐도 사람들의 복음에 대한 이 두 가지 반응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여겨지면 멸망하는 반면에, 그런 미련함을 깨트려서 영적 안목을 열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구원받는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기들은 이미 구원 안에 들어와 있기에 하나님이 행할 바는 자기들을 다른 민족보다 높이 세우는 일뿐이라고 믿고서 자꾸 현실적 이적을 부어달라고만 요구했습니다. 이방인은 권선징악의 원리에 따라서 남들보다 착한 자기는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기에 영원한 우주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일만 남았다고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구원에 관한 근본적인 개념은 인간이 조정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기에 구원에서 하나님이 행할 역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은 은혜를 받아들이라는 복음이 씨도 먹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3:9)고 썼습니다. 이미 선언했으므로 그렇게 선포하며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10,11절)라고 덧붙였습니다. 사람들이 착하거나 깨달으면 구원받는다고 믿었어도, 본문의 세 번 부정처럼 의인도 깨닫는 자도 찾는 자도 하나도 없으므로 십자가의 도를 모르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름대로 구원을 추구하는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에 그분을 제외한 채 인간의 생각과 방식으로 구원을 스스로 쟁취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그런 자를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려는 생각은 전혀 않고 평생토록 오직 자기를 높이고 치장하기 위해 세상의 형통과 풍요만 추구하기 바쁘다는 것입니다. 또 모든 인간이 그러니까 자기보다 잘 나가는 이를 두고 보지 못하며 서로 시기 질투 저주 분쟁하면서 피 흘리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원인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자신이 주도하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심판은 정작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형수로 수치스럽게 처형당한 예수를 두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죄를 사하려고 십자가에 대신 죽었다는 전도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과 세상만사의 주관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입니다. 구원도 자기가 그냥 자기에게 주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지혜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을 자기 지혜로는 이해하지 못해서 좀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지금도, 아니 모든 세대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싶어도 하나님에게도 다른 방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전도란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기보다는 그분의 죽음 앞에서 너 자신의 영적 실상부터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따져보라는 영적인 도전이어야 합니다. 너희는 십자가가 거리낌이 되고 미련하다고 비난 거부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너희가 어리석다는 최고의 증거라고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 표현은 온유해야 하지만 영적으로 타협할 여지를 주어선 안 됩니다. 다른 제 삼의 회색적인 방안은 없습니다. 복음은 더 좋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이라고 확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유대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기에 당시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의롭고 영적으로 가장 신령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열렬한 호응과 추종을 얻어가는 예수를 시기 질투하고서 자기들 기득권이 빼앗길까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인식시키려고 의도적으로 끈질기게 십자가 처형을 주도했습니다. 

 

일반 유대인도 자기들만 축복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예수가 미워져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합세해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아무 죄가 없고 오직 자기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기적으로 병도 고쳐주고 영적 진리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는데도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자기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서 모든 유대인이 거꾸로 수치스러운 죽음이라고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인류 역사상 최고 성자를 죽여버린 죄를 끝끝내 인정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들이 죄인이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인간의 선함과 깨달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방인의 대표 빌라도는 어떠했습니까? 예수가 완전히 무죄인데도 유대인들 간의 종교적 분쟁으로 억울하게 고소당했다고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내로부터 전날 밤 꿈에서 뭔가 불길한 징조를 받았으니 조심하라는 경고까지 받았기에(마27:19) 예수를 훈방하려고 여러모로 노력했습니다. 지혜를 구하는 이방인답게 예수님의 정체성과 행한 일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로마 황제가 이 땅의 왕일지 몰라도 당신께서 신자들을 통해서 세울 당신의 나라는 하늘에 속한 것이며, 당신 자신이 바로 그 나라의 왕이자 모든 인간이 절대로 따라야 할 진리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요18:36,37) 

 

빌라도는 곧바로 “진리가 무엇이냐? What is the truth?”(요18:38)라고 되물었으나, 주님은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미 그 전에 당신께서 진리를 증거하려고 이 땅에 오셨고 또 그래서 진리에 속한 자는 당신의 말씀을 따른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공사역 중에도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당신이 바로 진리라고 명확히 선언했습니다. 인간 중에 가장 지혜로웠던 빌라도도 진리에 속하지 않아서 결국 진리가 무엇인지, 아니 예수가 진리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현실적 욕심에 이끌려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라고 허락해 줌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작하여서 당신을 처형시킨 죄마저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이 공사역 중에 밝힌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사도들이 앞으로 전할 복음이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라는 것을 완벽히 증명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의 형벌로 인간의 모든 죗값을 당신께서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복음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제발 자기가 세상과 자신의 주인이라는 헛되고 완악한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항복하고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너희가 죽을 때까지도 너희의 교만과 탐욕과 죄악에서 스스로는 깨끗해질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만 선포하라.

 

죽어 마땅한 모든 인간의 죗값을 갚으려고 하나님 그분이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 복음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며 하나님 그분만의 지혜입니다. 당대에 가장 총명하고 논리적이었던 바울조차 십자가 복음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합리적으로 전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고 지금 고백합니다. 대신에 인간의 생각으로는 십자가가 아무리 미련해 보여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주신다고 선포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먹든 못 알아먹던 자신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성령으로 회심한 체험했던 진리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고 덧붙인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외에는 전할 것이 없으며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면서 인간적 지혜를 동원하지 않았고 그래봐야 오히려 복음에 대한 혼란을 더 가중(加重)시킨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만 선포하면 구원해 줄 자는 성령이 역사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구원해 준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영국의 침례교 목사인 챨스 스펄전의 회심 체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어느 주일에 폭설이 너무 내려서 자기 교회에까지 도저히 갈 수 없어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마침 그 교회 목사님도 눈 때문에 오지 못해서 평신도가 대신 설교했는데, 아주 단순하게 “예수를 믿으라!, 예수를 믿으라!”라고 거듭 외치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펄전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흐르면서 예수님 앞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드리며 항복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감히 추측하건대 그동안 출석했던 교회 목사의 설교는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 위주였거나, 십자가 복음에 인간적 지혜를 더해 좀 더 공교롭게 전하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예수라는 이름만 듣고서 완전히 회심했는데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의 간섭으로 그의 심령 깊숙이 역사한 것입니다. 스펄전도 자신의 회심 체험에 따라 오직 십자가의 도만 미련하게 강조하며 설교했는데 매주 많게는 2만 여명이 모이고 엄청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바울처럼 네가 죽어 마땅한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면서 너를 대신해 죽은 예수를 믿으라고 간곡히 권면 선포해야 합니다. 자기를 사형수 죄인과 비교하다니 인격을 모욕한 것을 넘어서 흉악범 취급한다고 크게 반발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로선 생전 처음으로 자기를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고 평가하는 경고를 접하게 되며, 사실은 그들에게 큰 축복이 됩니다. 자기가 그런 존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에 어쨌든 자신의 영적 실체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살펴보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경고에 화들짝 놀라서 추가로 설명해 주는 복음의 진리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에겐 성령이 역사해서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물론 그전에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의 심령의 문을 두드린 거룩하신 섭리가 선행된 자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그랜드 캐니언이나 나이아가라 같은 엄청난 자연을 보면 아주 겸손해집니다. 인간이 아주 연약한 존재이고 뭔가 조물주는 있을 것 같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분 앞에 죽어 마땅한 철저한 죄인이라는 인식은 하지 못합니다. 모두가 사탄에 미혹되어서 스스로 착하다고 스스로에게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선포되고 구원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스펄전 목사의 경우처럼 그 은혜가 너무나도 경이롭다고(amazing grace) 느낍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천하 죄인도 너무나 사랑하여서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하여 십자가 앞으로 기어이 이끌고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앞에 겸손히 눈물 흘리며 엎드리게 됩니다. 더 이상 십자가의 도가 거리낌이 되거나 미련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속으로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십자가만이 인간을 살리는 유일한 생명임을 절감하고서 바울처럼 다른 이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고 때를 얻든 못 얻든 어떤 방식으로든, 단순히 사랑으로 섬기는 형태로도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인생이 됩니다. 

 

한마디로 이전처럼 세상을 쫓아가는 삶은 더 이상 살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렇게 변한 것 자체가 아주 경이롭게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으면, 비록 죄로 타락했어도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영적인 존재이므로 불신자의 눈에도 그 모습이 경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인간이 자기 지혜로 구원 진리를 깨달았다면, 또는 자신의 선행으로 얻은 구원이라면, 다른 사람도 그와 똑같은 구원관을 갖고 있으므로 그 사람 안에서 절대로 경이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되어도 십자가의 도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 서 자기 체험으로 확신한다면, 참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오직 예수를 믿는 길뿐이라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작금 교회, 목회자, 성도들에게서 이런 원색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십자가 복음이 많이 퇴색 실종되었습니다. 신자가 이적과 지혜를 구하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정체성은 심령에 십자가 예수가 새겨진 것 하나뿐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반응에 상관하지 말고 성령의 권능에 의지하여 복음을 원색적으로 순전하게 전하면 그다음 구원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질 구원까지 신자가 염려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9/29/2024)


날마다순종

2024.10.02 17:55:13
*.14.99.126

오타제보 :  우상은 아예 실존하지 않 허상이므로 => 않 (앞의 '실존하다'란 동사의 현재시제 부정이므로)

 

예수를 십자가에 달라고 허락해 줌으로써 => 매달도록 (이편이 부드러운 것 같습니다)

 

성령으로 회심 체험했던 진리대로 =>회심하여 (이편이 조금 더 부드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 서 => 거듭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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