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도움 주셔서 '예수님과 당신' 소책자를 인쇄, 제작했고 지인들 및 알게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예수님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예수님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는 대상이 목적이었는데요. 

 

이번에는 위 책자를 읽었지만 아직 용기를 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과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과 당신 2 소책자를 제작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초록을 작성했고 아직 소제목이나 흐름, 구성을 완성하지는 못했는데요.

일단 초록을 보고 대대적 수정이 필요할 수도 있어서 조언을 구합니다. 

내용을 보시고 틀린내용이나, 논리에 맞지 않는 내용등을 검토해주십사 하고 글을 남깁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도움 부탁드립니다. ( 부담갖지 마셔요. 어려우셔도 정말 괜찮습니다. ) 

 

 [내용]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다음 두 질문에 대해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마음은 평안합니까?’ , ‘당신에게는 정말로 기쁨이 있습니까?’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께서는 오늘 별일없이 잘 지나 갔으니 지금 마음이 편하고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하기 지내니 기쁨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편안과 평안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재미와 기쁨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그럼 다음 두 질문에 대해 다시한번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올해 건강검진에서 당신에게 암이라는 판정이 내린다고 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평안 합니까?’ , ‘당신이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합니다. 당신에게는 기쁨이 있습니까?’ 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께서는 암에 걸린다고 하는데 어떻게 마음이 평안하며 회사에서 나오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기쁨이 있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불행한 일 일지라도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달라집니다. 마인드컨트롤이나 마음 다스리기 같은 훈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을 때 꾸밈없이 마음이 평안하고 더하는 것 없이 마음이 기쁘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제부터 같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외롭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자식이 공부잘하기를 기대했거나 내가 공부를 잘해서 성공하기를 기대해왔습니다. 또는 공부가 아니더라도 보란듯한 직업을 가지거나 어느정도에 벌이에 이르러 사회적으로 당당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나쁜것이냐고 물으면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도 나쁜것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 잘하고 있는것이지 우리 아들이 최고의 기업에 들어가서 연봉 많이 받고 안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너무 보기 좋지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스탠다드야 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삶의 정점에 다다른 사람들은 그 위치를 놓치지 않기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던 어떤수를 써서든 자기의 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은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 나보다 남을 높이고 치열하게 타인을 짓누르며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타인의 상처는 아랑곳 하지않고 사회적으로 높을 지위를 추구하는 부류가 우리 사회에 있는 반면 배움의 기회가 없었으나 먹고 살아야하겠기에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고 미용실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고 증권가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공직에 있는 사람도 있고 집에서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외롭고 목마릅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럴듯한 직장에 다녀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월급을 받으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고 근무 시간을 조금만 더 줄이면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여건이 갖춰지면 또 다른 요구사항이 생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콤플렉스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한 경험, 다른 사람들은 되는일인데 나에게만 허락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내적인 불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루하루 잡히지 않는 것을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위해 목메고 치열하게 전투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가 가장 원하는 것에 끝없이 목마릅니다. 그것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목마릅니다. 1억만 있으면 딱 좋을텐데 라고 하는 사람이 1억이 주머니에 있으면 주식투자해서 2억으로 불릴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10억이 있으면 아파트 사려면 5억이 모자라네, 5억만 더있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또 목마릅니다. 명예에 목마른 사람은 자신이 잊혀져 가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이렇게 각자 목마름 가운데 살아가다가 죽을날이 다가와서 침상에 누우면 내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 나와 길을 함께 가줍니까? 내가 쥐고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이가 들면서 내가 쓸모없어 질 때 나를 진심으로 매일 매순간 대해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재미는 끝나고 편안도 끝이 납니다. 우리의 인생은 정말로 외롭습니다. 그 빈공간을 재미로 채우고 순간의 인기로 채우고 순간의 자기자랑으로 채우고 없어질 돈자랑으로 채웁니다. 당신은 정말 행복합니까?

 

이렇게 삶은 고통과 고독으로 가득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자기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근본적인 추구의 방향성 때문에 사람은 서로 부딪힙니다. 한정된 자원에서 나를 위해서 각자의 것을 챙기기 위해서는 다른사람의 것을 더 가져와야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자기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활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욕심이라는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타인을 위해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질지 모릅니다. 동물의 세계만 봐도 적자생존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제가 옳다고 한다면 결과도 옳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회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만연하고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모든 사람이 각자 욕심부리는 것에 있어서 항상 목마릅니다. 그 목마름에서 부딪히는 상대에게는 악감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는 옳습니까? 이 옳지 않은 전제를 우리는 옳다고 여겨왔고 이것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는 우리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옳은 전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잘못 살아왔음을 인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지극히 높은 창조주와 같이 되겠다는 교만함으로 시작된 죄의 본질은 우리가 우리삶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높아져야되고 내가 이득을 봐야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죄에 찌든 죄인인지 한번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매일 매일 갈등합니다. 김밥집에 가서 나보다 늦게 주문한 사람의 음식이 먼저 나오면 화가납니다. 같은 얘기를 두세번 반복해서 말했는데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면 안에서 화가 조금씩 치밀어 오릅니다. 운전을 할 때 깜빡이를 켰는데 양보해 주지 않고 속도를 올리는 옆차선 차량을 보면 욕이 생각납니다. 불우이웃을 불쌍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나눠주는 소득은 1/10 도 되지않고 어떻게든 편법으로 자식에게 소득을 물려주고자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것이기에 합리화 하지만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 댑니다. 이런 사소한 사례가 아니어도 우리 모두는 우리 스스로가 이미 너무 마음이 더럽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는 정말로 사랑이 있나요? 정말로 나는 죄로 더렵혀지지 않았나요? 성경에는 여러 가지 계명들이 나옵니다. 그 계명을 하나님이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런것들은 죄이니 너네가 이런 것이 죄임을 알고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계명을 두가지로 요약하면 첫 번째는 하나님을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웃을 너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기준에 비춰봤을 때 여러분은 강도, 살인을 한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요? 하얀 도화지에 먹물을 조금 떨어 뜨리건 많이 떨어뜨리건 하얀도화지의 기준에서 보기에 나머지는 전부 더렵혀진 도화지입니다. 조금 먹을을 덜 머금은 도화지가 먹물을 많이 머금은 도화지보고 너 까맣네 라고 하는 격입니다. 이렇듯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셨을 때 우리가 가진 기본적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습성 자체가 죄인것이고 근본적으로 자신만 사랑하는 우리가 타인이 자기 스스로를 사랑해서 지은 범죄를 가지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먹물이 조금더 큰 먹물보고 까맣다고 하는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이 근본적으로 옳지 않은 전제를 가지고 삶을 목마르게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시고 자신 스스로의 잘못된 전제와 죄인임을 깊에 통애하고 깨달아 하나님앞으로 나아오시길 원하십니다. 그 결단이 있을때에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시작됩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시인하십니까?

 

지금 제가 독자들이 스스로 죄인됨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듯이 성경에서 예수님 시대때도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세례를 베푸는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알아야한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고 자꾸 강조하는데 예수님을 만나려면 먼저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자꾸 그럽니다. 왜그럴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알면 해결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용서해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지 먼저 자각해야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겸허한 마음으로 낮고 낮아진 마음으로 발가 벗겨진 마음으로 숨김이 하나도 없는 마음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앞으로 나아 왔을 때 비로소 당신은 용서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앞으로 나온다면 반드시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한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 창녀는 매일 몸을 팔았고 남자들에는 신물이 났습니다. 남자들은 그저 성욕만 풀려고 합니다. 사람과 대중들 앞에서는 고상한 척 겸손한 척 하지만 뒷구멍으로는 여자를 무시하고 돈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람자체에 이골이 나고 그저 성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것으로 매일을 견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는 낙이 없습니다. 이미 창녀로 낙인 찍혔기 때문에 거리에 나가도 사람들은 값싸게 쳐다보고 손가질하며 그저 성욕을 해결하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녀는 그래서 자존감이 없습니다. 그저 하루를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 그녀의 동네에 예수님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수고하고 짐진자들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저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우니 죄의짐을 벗고 나의 짐을 메라’ 라고 말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짐도 벗을 수 있을까 나같은 사람의 짐도 벗을 수 있는것인가 생각하는 찰나 예수님과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자한 미소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날저녁 예수님은 지금으로 치면 국회의원급 정도 되는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집에 초대에 응하셨고 그 집에는 국회의원급을 비롯해 사회적으로 지위가 꽤나 있다는 사람들이 몰려있습니다. 그때 그 집의 문이 열리더니 그 창녀가 들어옵니다. 그 창녀는 그 집에 들어오기 까지 너무나 망설였을 것입니다. 나를 대놓고 무시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이 꽉차있는 집인데, 저곳에 내가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될까. 내가 그분의 말을 따라 짐을 벗을 수 있을까. 그러고는 굳게 마음먹고 그 집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 창녀를 바라봅니다. 감히 여기가 어딘데 오냐는 눈빛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그 창녀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십니다. 그리고 이리오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앞과 뒤가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르게 그 창녀는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십니다. 그리고는 창녀의 일을 할 때 한방울씩 사용하던 귀한 향수를 통째로 전부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경배합니다. 이제는 창녀의 삶에서 벗어나겠다는 결단과 함께 자신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용서하시고 이런 사람이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목이 뻣뻣하고 곧은 사람, 오늘은 말고 다음 기회에,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포기해야될 것 들이 많은데 일단 믿는 것으로 치지 라는 사람은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려놓고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을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만드실 때 마술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빛이 있어라’ 하니 빛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자신이자 하나님의 말씀이자 아들로 이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분이 썩어서 흙으로 될 유한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땅에 온 목적은 유한한 인간으로 죄없이 삶을 살아내고 자신을 흠 없는 재물로 하나님께 드려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값을 치루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 자신이기에 죽을수도 유한한 속성을 가질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본래 창조한 목적에서 어긋나게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너무나 안타까워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자기 스스로의 완전함에 예수라는 사랑의 상흔을 남긴 것입니다. 그 분은 머리 둘 곳 없이 말씀을 전하러 돌아다니시고 질고를 겪고 고난을 겪으며 수난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채찍을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가시관과 벌겨 벗겨진채로 저주의 십자가위에 달리셨을 때도 그 십자가에 메단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과 저같은 더럽고 더러운 죄인을 위해 그 인생을 질고와 고난을 겪으며 사신것이고 여러분과 저같이 남은 판단하고 죄있다, 왜저래 하면서 나는 깨끗한줄 착각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용서해주기 위해 그 십자가에 치욕스러운 모습으로 달리셔서 스스로 재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세주임을 믿을 때 죄에 살았던 우리의 이전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는 것이고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게 되는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족을 핍박하던 동족의 배신자도, 몸을 팔던 더러운 창녀도,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어부도 그분안에서 다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근본 모습을 인정하고 자신들에게 현재 주어진 모든 상황을 내려놓고 예수님앞에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나정도면 잘살고 있어, 뭐 이쯤이면 사회적으로 나쁘지 않지, 그래 이렇게 사는게 멋진거야 라고 사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른 사람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그것의 결과는 편안인지 평안인지, 그것의 결과는 사랑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있지 않고는 평안도 기쁨도 단언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자신의 죄를 내어놓고 예수님을 따를 때 다 버리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쉬운길이 아닙니다. 좁고 험한길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매우 힘든길입니다. 돈,명예,권력 등 자기가 편안해지고 높아지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은 어떤 의미 입니까? 선택권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영원한 사망과 영원한 목마름으로 살 수도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따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을 하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 입니까? 자기를 잊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잊을 수 있을까요? 서두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놓는것에서 근본적인 죄가 시작됩니다. 즉 자신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과 십자가 은혜를 놓으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그동안 나를 위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전부 내려 놓아야 합니다. 돈, 명예, 권력, 가족, 친구 등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저는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구제도 많이하고 선행도 베풀고 하나님도 경외하고 했는데 저는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지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 너가 가진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청년은 결국 재산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가시적인 것들을 모두 내려놓는 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예수님이 내 마음에 중심에 계시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여러 가지 중에 예수님이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돈이랑 예수님이 있으면 예수님을 택할 거야, 나는 예수님이랑 엄마가 있으면 예수님을 택할 거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그분이 나의 중심이자 나의 전부가 되시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길을 가는것에 방해되는 세상의 것들을 전부 단번에 끊어버린다는 의미가 됩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광적으로 좋아해 예수님이 중심에 있는 것을 방해한다면 축구조차 잘못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칼은 주방에서 쓰면 도구가 되지만 범죄자가 쓰면 흉기가 되고 마약은 병원에서 쓰면 약이 되지만 취할 목적으로 쓰면 범죄도구가 됩니다. 이처럼 개인에게 미치는 의미와 목적에 따라 그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 돈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어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고 돈을 많이 추구하는 것은 일단 같이 해야지라는 식의 위안은 통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되돌아 보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이미 자기 앞에 나올 때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나오는 사람에게 함께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를 때 자기를 부인하려면 아내도 사랑하지 못하고 돈도 벌면 안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분을 통해서 아내를 사랑하고 그분을 통해서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모든 시작점과 중심은 예수님 이어야 합니다. 그분을 통해서 맺지 않는 관계 그분을 통하지 않고 추구하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아래서 없어질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결혼을 했는데 예전 여자친구와 연락을 하고 있는 남자가 가정에 충실한 남자 입니까? 결혼식장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잠깐만 근데 나 예전 여자친구도 사귀면서 결혼도 하면 안될까? 라는 말이 말이 되는 이야기 입니까? 예수님앞에서 자기부인을 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결혼도 별도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생활을 예수님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 일까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 입니까? 자신은 죄가 없는데 타인의 죄를 위해 진 용서의 십자가입니다. 자신은 저주 받을게 없는데 타인의 저주를 대신받은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자신은 모욕 받을게 없는데 벌거벗겨 진채 모욕받은 순종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신길을 우리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네 원수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도 내어줘라’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 주 너의 하나님의 너의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 이 말씀을 십자가를 통해 이루셨고 예수님이 가신 발자국을 우리도 같이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결국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죄에 찌들어 사는 것은 지금은 쉽고 편한길이지만 그 사망의 무게는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무게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그 무거운길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놓았다. 그러나 내가 너네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이길은 지금은 어렵고 불편한 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깃털과 같이 가볍고 기쁨이 넘치는 길이다.’입니다. 여러분 사망으로 가는길은 너무나 편합니다. 그냥 내 욕심대로 멋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길은 나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좁고 힘든길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가치에 반해서 역류하는 삶 이기 때문입니다.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해야 하며,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하고 내것을 내어주고 나는 굶주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일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돕는 하니님의 영을 주시고 그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이 비춰주는 예수님의 발자국만 따라가면 됩니다. 우리가 갈등의 상황을 겪을 때 성령이 비춰주는 발자국을 따라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셨을 거야 라며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지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 어떤 결과가 있는지 아십니까? 진정한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내가 과거에 지은 죄와 잘못, 현재도 내가 죄인된 본성이 있기에 짓고 있는 죄, 죄인된 본성으로 미래에도 잘못해서 지을 죄까지 모두 예수님이 해결해 주셨기에 삶이 끝난다 해도 영원히 예수님과 같이 사는 아름다운 삶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생을 살아가는데 고난, 슬픔, 염려할 상황이 와도 평안합니다. 나누고 베풀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흘려보내고 섬기고 양보하고 내가 낮아져도 기쁜 이유는 나의 이런 행동을 기뻐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보시고 갚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도 비교할 수 없게 가장 큰 것은 ‘하나님 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어떤분 입니까.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것은 만든 유일한 신이고 창조주 이십니다. 그분과 삶에서 추억이 하나하나 쌓여가는 놀라운 사랑의 교제입니다. 나의 기도 한마디를 그분이 경청하고 기억하시며,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나의 순종한번을 잊지 않고 영원히 칭찬해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주어진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을 신뢰함으로 동행하며 추억을 쌓기 위함입니다.

 

당신을 지금도 사랑하고 불러주시며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죄의 종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불러주심을 허락하시고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 당신의 삶에 깃들어 삶의 근본을 회복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master

2021.02.26 09:21:51
*.16.128.27

Thanks님 전도에 대한 열정과 노력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집니다. 코로나 사태가 오히려 전도의 호기가 될 줄 믿습니다. Thanks님도 건강에 유념하시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복음의 귀한 열매가 형제님의 삶과 사역에 풍성히 열리길 기원합니다. 전번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지만 천천히 읽어보고 이메일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샬롬!

master

2021.03.02 06:48:55
*.16.128.27

방금 이메일 보냈습니다. 참조하십시오. 미혹된 영혼을 사랑하는 형제님의 간절한 마음과 수고를 주님께서 분명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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