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2:33,34) 신자로 만들려 하지 말라.

조회 수 1108 추천 수 55 2007.02.04 20: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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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2:33,34)


일본에 희대의 살인범으로 토키지 이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방해 하는 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죽여 버릴 정도의 흉악범이었습니다. 캐나다 여자 선교사 두 명이 감옥으로 찾아가 복음을 전했지만 콧방귀도 뀌지 않아 성경이라도 읽어보라고 주고 갔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어내려 가다가 바로 본문에서 그만 그 인생이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 구절에서 멈추었다. 마치 커다란 대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강퍅한 내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형을 집행하러 온 간수가 본 것은 야수가 아니라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며 웃음을 띤 얼굴이었습니다.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톰 휴스턴]

그가 아무리 포악한 자라고 해도 부모, 형제, 친구들이 그를 변화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을 것입니다. 또 감옥에 있는 동안에 변호사나 교정간수들도 얼마나 많이 타일렀겠습니까? 자기 지은 죄를 회개하거나 혹은 그 품성이 변화되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아도 그가 지은 죄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잘못인지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피해를 입힌 자들에게 사과라도 하라고 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추호의 반성하는 빛이 없고 흉폭 함이 전혀 변하지 않았던 그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자 선교사들은 얼마나 큰 자비와 온유로 그를 대했겠으며 또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를 변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 성경 말씀을 통해 살아 역사하는 예수님의 사랑만이 그의 가슴을 찔렀던 것입니다.

하필 이 말씀에서 그가 변화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사실 자기 죄를 마음 속 깊이 회개하고 있었으며 정말 용서받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진정한 용서를 말입니다. 그리고 지난 그의 모든 행적이 사단의 가공할 힘에 묶여서 자기도 모르게 노예처럼 그 힘이 하자는 대로 끌려갔던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단순히 추측하여 억지로 갖다 붙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사실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는 자기가 의식했던 못했던 자신의 깊숙한 심령으로부터 끊임없이 울부짖으며 찾고 찾았던 해답을 바로 이 구절에서 들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는 가족, 친척, 친구, 사회로부터 큰 상처와 모멸을 당했고 또 그것에 대한 복수 내지 보상 심리로 첫 범죄가 발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통쾌한 감정이 생기고 나중에는 살인이 타성이 되고 심지어 즐기게까지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감정과 생각과는 달리 동료 인간의 피로 더렵혀진 영혼은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대못이 되어 꽂힌 것은 참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그의 영혼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어떤 말도 그에게는 공허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한 번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에 자신은 인간 사회에서 사형에 처해지고 완전히 버림받을 존재라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포기했을지 모릅니다. 어떤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 모두가 자기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똑 같은 죄인이면서 겉으로 아닌 척 위장하는 위선자로 비춰져 더 반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그런 용서를 빌었다는 데에서 결정적으로 그의 심령이 움직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용서를 비는 그 말씀이 당신 좌우에 달린 행악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듯이, 자기처럼 똑 같이 사형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서 하셨기에 그 진실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 순간 사단의 흑암의 권세에 붙잡혀 있던 그의 영혼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씻으심으로 깨끗케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자신이 변화 되는 것은 거절했어도 용서는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사람들은 자꾸만 그를 변화부터 시키려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똑 같이 죄를 지으며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두고 회개하여 새로운 인간이 되라고 하니까 반발만 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절실했던 것은 자기 죄에 대한 진정한 용서 그것도 인간이 아닌 절대적 존재로부터의 영원한 용서였던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꾸 불신자를 변화시켜서 예수를 믿게 만들려 합니다. 교리를 전해 즉시 신자가 되도록 그것도 자신의 신앙 실력으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합니다. 사실은 신자라기보다는 교회의 신규 회원에 가입시키려고 더 애를 씁니다.

전도란 신규 교인을 모집하는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예수를 모르는 이에게 예수를 소개하는 일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진정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믿어서 기도하면 복을 주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자기 죄에 대해 참 용서를 찾는 절규에 대한 유일한 해답으로서만 소개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죄인(사실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가 용서되어야 변화되는 것이지 자기가 변화되어 그 죄가 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절대 자기 죄를 깨끗케 할 수 없음을, 즉 인간 사회에서 규정된 벌을 심지어 사형을 받아도 여전히 용서받을 수 없음을 인간 스스로도 잘 압니다. 감옥에서 벌을 받고 있어도 계속 양심의 찔림이 있습니다. 이시처럼 구체적으로 의식을 못하는 자라도 심령의 갈급함을 도저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죄가 씻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다른 것이 선하게 변화된다고 해도 허사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살인하여 이미 사형이 확정된 자가 새롭게 변화되려고 노력해봐야  어떤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 정말 선하게 살려고 마음먹고 어느 정도 변화되었다 해도 영원토록 그 죄의 흔적이 결코 지어지지 않기 때문에 진짜 변화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이 자기 죄를 절대로 씻을 수 없다면 성령의 역사로 죄가 씻긴 후에야 진정으로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을 때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인간이 그분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죄 씻음의 중생을 통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나 이시의 경우나 사형 일보 직전에 그 죄만 용서 받았습니다. 육신적인 사형은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나면 언젠가 죽게 됩니다. 사형을 당한 것은 그 죽음이 조금 앞당겨진 것뿐입니다. 다른 말로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다 같이 죽기에 육신의 죽음은 한 인간의 인생에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에겐 결국 영혼이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만 남게 됩니다. 세상에서 어떤 인생을 살았어도 남는 것은 무덤 하나뿐입니다. 다른 말로 영혼의 영원한 운명을 어떻게 결정지을 것인가 만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영생을 얻지 못한 인생은 그야말로 인생의 결론으로 무덤만 남습니다. 즉 무덤 하나 남기려고 그렇게 열심히 인생을 산 것입니다.    

따라서 죽기 직전까지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죽기 직전에 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신규 교인으로 모집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죄 씻음의 사랑만 전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예수 믿는 본질이 그것이라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 믿는 것은 믿음으로 복 받는 것과는 궁극적인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나아가 예수 믿은 후에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엎드려 영혼의 중생을 소원하는 것이 가장 먼저라는 뜻 아닙니까?

죄 씻음이 있으면 변화가 되고 깨끗케 된 영혼이라야 주님의 은혜와 권능이 온전하게 역사합니다. 주님의 능력은 거룩하게 된 영혼에만 그것도 자동으로 임하지 믿음으로 떼쓴다고 따라오지 않습니다. 신자가 너무 힘들어 완전히 망하게 됐을 때가 아니고선 말입니다.

불신자를 자꾸 당장 변화시켜 신자로 만들려 들지 마십시오. 단지 죄를 용서해주는 주님의 사랑을 이왕이면 자신과 비슷한 현실적 처지에서 힘들어 하고 있는 자를 찾아가서 전하기만 하십시오. 십자가 사랑으로 죄부터 씻어지면 그 다음 문제는 주님이 알아서 책임져 주십니다. 요컨대 신자도 자신에게 매일 십자가 용서를 가장 먼저 간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5/2007

조인구

2007.02.05 02:27:13
*.75.52.2

허경조

2007.02.05 14:12:16
*.80.180.75

김형주

2007.02.05 17:19:24
*.173.42.18

아멘!

허관

2007.02.06 20:58:37
*.91.249.80

아멘 아멘 !! 감사합니다.

공문수

2007.02.09 15:50:58
*.153.235.184

눅23:33~34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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