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25-33)
보고와 평가의 차이
한 이상한 사장과 여비서가 있었다. 사장이 외출하고 돌아오자 비서가 “김일성인가 김정일인가 하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는데요. 사장님더러 전화를 해달라고 했던가 본인이 다시 한다든가 했는데요”라고 보고 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그런 엉터리 같은 보고를 듣고도 사장이 “응! 그래. 알았어.”라고 대답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하고 어떻게 알아먹었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이처럼 한국인들은 대체적으로 말이나 사고에 논리가 없고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런데도 서로 말이 잘 통하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다. 사장이 그 여비서를 야단치지 않은 이유는 그 때쯤에 누가 전화했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짐작해 판단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습성이 신자들이 성경을 읽는데도 적용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둘째 치고 이야기처럼 기록된 객관적 사실조차 자기 짐작으로 얼렁뚱땅 판단하고 치운다. 대부분의 신자가 잘 알고 있는 본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애굽에서 사백 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으로 구원해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첫 관문으로 가데스바네야에 도달 시켰다. 본문은 모세가 열 두 정탐꾼을 보내어 그 땅을 탐지케 한 결과를 보고 받는 장면이다.
그런데 본문과 그 후의 결과를 대부분의 신자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열 명의 정탐꾼은 보고를 잘못하여 하나님의 벌을 받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제대로 보고하여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열 명의 보고는 엉터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바탕을 두었고 정확했다. 가나안의 거민은 네피림 자손 같이 강했고 성읍은 견고했고 산지와 해변과 들판에 물샐 틈 없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 성읍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약하고 거민은 작고 방어 상태가 형편없는 것을 부풀려 과장하지 않았고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허위로 보고하지 않았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이들의 보고에 단 한 번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 32절에 열 명이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라고 기록된 것은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보고가 아니라 평가다. 보고는 적군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평가는 적군과 아군의 현황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다. 아까 그 여비서의 예를 다시 들자면, “사장님이 안 계실 때에 김일성이라는 분한테 전화가 왔는데 사장님 안 계신다고 말하자마자 용건을 묻기도 전에 끊어버렸습니다”라고 하면 아주 정확한 보고를 한 것이다. 그 후에 “그런데 그분의 말투나 용건을 묻기도 전에 끊은 것을 보니 성격이 아주 급해 보이던데 아마 곧 다시 전화할 것 같은데요”라고 덧붙이면 이는 평가다.
그래서 열 명의 정탐꾼은 32절에 “악평(惡評)하여 가로되”라고 시작하여 33절 끝에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그 평가를 마치고 있다.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교 분석했더니 자기들은 완전히 고양이 앞에 쥐 꼴이었다는 것이다. 도저히 게임이 안 되고 아예 해보나 마나 하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평가를 들은 백성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하자 위로하면서 “아니다. 저들은 약하고 숫자도 적다. 우리가 강하고 많다”라고 보고 자체를 수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래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민14:8-9 참조)라고 평가만 다르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라.
지금껏 교회가 본문을 두고 잘못 가르쳐온 내용은 바로 보고와 평가를 구분해서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고와 평가를 합쳐 열 명은 보고 자체를 아예 잘못한 자로 취급 받아 왔다. 마치 없던 일이 있거나 있는 일도 없는 양 허위로 조작했거나, 또 있는 일을 과대 내지 과소 포장해 사실상 거짓 보고를 한 것처럼 간주했다.
또 그렇게 된 근본 이유는 그들이 여호수아나 갈렙처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에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본받아 어떤 대적과 환난이 닥치더라도 겁을 먹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진군하라”고 권면한다. 매사를 완전히 믿음 만능주의로 몰고 간다. 신자가 세상적인 현상을 세상의 지식과 정보로 분석하고 또 세상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거나 그 자문대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양 몰아붙인다.
말하자면 무엇이든 세상적 수단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그분이 반드시 다 이루어준다고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환난이 닥쳐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면 믿음이 부족한 것처럼 취급한다. 신자는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이 당당해야 하며 항상 자신감과 미소를 잃지 않아야 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보여주는 대표가 바로 이 사건의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가졌던 믿음이 두려움이 없는 믿음은 아니었다. 그들이 정말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열 명이 악평할 때에 “그 놈들이 뭣이 장대하더냐? 허우대만 멀쑥하게 컸지 완전히 허풍선이던데. 내가 볼 때는 그들이 메뚜기 같던데”라고 말을 한 마디라도 보탰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상황을 정상적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그 결과는 항상 같다. 예컨대 사과가 상자에 열 개가 있다는 사실은 숫자를 세지 못하거나 사과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것이 맛있어 보이는지 혹은 잘 익었는지 평가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한 사안에 대한 객관적 분석(보고)은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신자와 불신자는 그 상황을 평가하는 부분에서만 달라진다. 불신자는 현실을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고 또 그 본 것을 자기의 지식과 경험으로만 평가하고 결정한다. 반면에 신자는 현실을 보이는 대로 보고 자기의 지식과 경험으로도 분석하는 데까지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분석한 바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한 번 더 거르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그들과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 번 더 거른다고 해서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때까지 실제 삶에서 터득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 경험으로 비추어 객관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다시 판단해 보라는 것이다. 여전히 냉철한 이성적 분석과 판단이 요구되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이 현실을 아예 도외시하고 현실적 대책을 전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도 현실은 현실대로 더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한다. 세상적 실력을 최선을 다해 갖추어야 한다. 세속적 직업을 가지고 정말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그 현실적 대책을 반드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하며 또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믿음이다.
열 명의 정탐꾼의 잘못은 보고를 잘못한 것이 아니라 평가를 잘못한 것이다. 불신자처럼 자기 지식과 경험만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를 때의 습성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현실과 함께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한 번 더 그것을 평가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과연 얼마나 큰지에 관한 인식이 부족했거나 알았더라도 당장 눈앞의 현실에 눈이 어두워 잊어버린 것이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객관적으로는 현실적 상황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가나안 족속들은 견고한 성채와 온갖 무기를 갖춘 정예부대로 기골도 장대하며 전쟁에 아주 경험이 많은 자였다. 반면에 자기들은 사백년 간 한 번도 전쟁을 치러본 적도 없고 무기도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다. 어리이로부터 노약자까지 제대로 대오도 갖추지 않은 채 엉겁결에 도망쳐 나온 거지 떼 같은 몰골이었다.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도무지 승산이라고는 없는 전투였다.
그래서 동료 열 명이 보고한 객관적 상황에 대해선 한 번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 객관적 상황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시 한 번 더 거르는 작업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밀어 넣으시는가? 상식적인 상황으로는 도무지 승리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골몰히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겪었던 출애굽도 사실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던 것이다.
세계 최강 애굽과 맞서서 그것도 자기들은 전혀 앞에 나서지 않고 80이 넘은 노인 한 명이 지팡이만 든 채 한 번의 전투도 없이 10전 10승했다. 마지막에는 홍해를 가르는 기적으로 자기들을 인도해 내셨고 애굽의 병거와 군대를 수장시켰다. 그 모든 승리가 오직 모세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이루셨다.
그렇다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 때보다는 객관적 상황은 더 좋다. 전투 경험은 없어도 노예 생활을 하느라 육신은 강건하게 다져졌고 군대의 숫자는 하늘의 뭇별처럼 많다. 자기 민족만의 나라를 세우고 싶은 소망도 있다. 전쟁을 치더라도 형편없이 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그 무엇보다도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을 큰 이적으로 가능케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있고 또 바로 그분이 수백 년 전부터 주신다고 약속한 땅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메뚜기로 보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으로는 우리가 그들에 비해 메뚜기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보면 우리는 결코 메뚜기가 아니다. 그분이 그렇게 되도록 절대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현실은 현실대로 정확하게 보고 객관적으로 분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분석한 내용이 과연 하나님 안에서 바른 것일까 점검을 다시 해본 것이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거나 그렇게 되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여전히 현실은 아주 크게 보이고 나는 메뚜기처럼 보일지라도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배후에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이 믿음이다.
그래서 그 분의 뜻 안에서 콩알 만해졌던 간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는 실력이다. 더 정확하게는 여전히 콩알 같은 간을 갖고도 반석이신 하나님의 등 뒤에 숨을 수 있는 능력이 믿음이다.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그래야 하므로 간이 여전히 콩알만 할 때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자는 다윗처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니까? 나를 영영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언제까지 숨기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할 수 있다. 밤새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염려 걱정으로 골수가 마를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하는 중에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며 자신은 한 없이 작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밤새도록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해결해 달라고 울부짖기만 해선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시간과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이르도록 어떻게 인도하고 보호 하셨는지 자신의 이성을 다 동원해서 회상해야 한다. 신자는 하나님과 자신 둘만 아는 홍해의 기적과 열 가지 재앙에서 구원 받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전에도 지금과 비슷하거나 더 큰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이 결국에는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신 것을 기억해 내어야 한다. 하나님 당신과 자기와의 인격적, 개인적, 체험적 추억을 더듬어 들어가 그분의 은혜와 권능이 어떠한가를 구체적이고도 명확하게 알아 나가야 한다.
그래서 현실은 분명히 크고, 나보다 훨씬 크지만,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나게 더 크신 하나님을 기어이 발견해내는 것이 기도다. 또 그렇게 발견해낸 것 자체가 바로 기도의 응답이다. 그럼에도 신자들이 기도할 때에 왜 자꾸 “믿습니다”가 아니라 한껏 목청을 돋우어 “믿~슙니다. 믿~슙니다” 만 연발하는가? 얼마나 다급하면 그렇게 할까 이해는 되지만, 솔직히 하나님이 잘 안 믿어지니까, 크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으니까 그러는 것 아닐까? 하나님마저 자꾸 작아져 보이니까 하나님더러 “커져라 뚝딱! 제발 커져라 뚝딱! 어서 빨리 커져라 뚝딱!”하고 주문을 외우는 마음을 자신도 숨길 수 없다는 표시다.
여리고성 함락의 비밀
열 명의 정탐꾼과 그를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과 새로 태어난 세대들만 다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이 마주친 첫 관문은 여리고성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여리고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승리를 주셨는가? 성을 둘러싸고 침묵의 행진을 6일간 6바퀴, 마지막 7일 째 7바퀴를 돌게 한 후 지른 고함 한마디가 그들이 한 전투의 전부였다. 그러자 전차 두 대가 교차해 지나가는 그 견고한 성벽이, 어떤 수를 써도 무너질래야 무너질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철옹성이 일순간에 폭삭 무너져 내렸다. 정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함락 시켜 주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가나안 정복의 첫 번 전투를 그렇게 기발한 방법으로 승리하게 해 주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여리고는 40년 전이라면 가데스바네야에 해당된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가나안 족속이 네피림의 후손 같고 자기는 메뚜기 같아 보였을지라도 만약에 그들이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아니 발견이라도 했더라면, 아니 하나님 쪽으로 고개라도 한번 돌렸더라면, 아니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이 자기들을 기뻐한다는 사실이라도 알았더라면, 아니 그 모두가 아니더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겠다는 소망이라도 있었더라면, 하나님이 가데스를 여리고보다 더 큰 기적적인 방법으로 차지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이것이 이해가 되는가? 여리고성 전투가 이해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조금이라도 이해되는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인간의 짐작, 기대, 분석, 예상, 측량의 범위를 완전히 넘어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그분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 등을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와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2:8-11)
가데스에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메뚜기 신드롬(Grasshopper Syndrome)에 걸려 스스로 너무 작게 여기며 간이 콩알만 해져 벌벌 떨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떻게 변했는가? 가나안 족속이 오히려 간이 콩알만 해져 기절 초풍 할 지경이 되었다. 하나님이 미리 저들을 주물러 물렁물렁한 반죽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남쪽 끝에서부터 하나하나 진격해 들어가지 않고 인천 상륙 작전처럼 허리를 잘라 들어가는 전략을 구사했다. 상하의 적들의 연결 상태를 먼저 끊어 보급과 협력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다. 물론 그 전략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시 자기 백성들이 겁먹을까 배려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남쪽부터 쳐 들어가면 이전 가데스에서의 나쁜 추억이 되살아나 다시 메뚜기 신드롬에 걸릴까 일부러 빙둘러 가게 한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딛는 첫 발자국을 요단 강의 급류를 물러가게 한 후 맨 땅을 디디게 했다. 홍해의 기적을 상기시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깨닫게 해 담대하게 만드신 것이다.
그래도 혹시 겁먹을까 아예 정탐꾼으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이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다는 것을 직접 두 귀로 똑똑히 듣게 했다. 그 동안에 아낙 자손들이 갑자기 난쟁이가 된 것도 아니요, 여리고 성에 곰팡이가 쓴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부딪힐 외적인 상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 변함이 없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가나안 백성들이 홍해 물을 마르게 한 일을 듣고 떨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40년 전에도 듣고 떨었다는 것이다. 그 때는 가데스가 홍해에 가장 가깝고 홍해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훨씬 더 떨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지금도 그 일로 떨고 있다면 무슨 뜻이 되는가? 40년간 줄곧 떨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나안 족속은 아무리 성읍이 견고하고 거민이 장대했어도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대체 언제, 어디로, 어떤 모습으로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왜 떨 수밖에 없었는가? 가나안 족속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뱅글라데시 같은 소국에 불과한 400년간 종살이 한 이스라엘이, 미국과 같이 세계 최강인 애굽을 상대로 10전 10승하는 모습과 마지막에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 그 군대가 전부 수장되는 것을 목도 했는데 어떻게 안 떨 수 있는가? 그들은 그저 점술사를 찾거나, 우상에다 대고 자나 깨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 비나이다 비나이다만 하는 족속들이다. 천지를 지으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이 함께 하기는 커녕 알지도 못하니까 아무리 성읍이 견고하고 군대가 강해도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의 한 천한 기생도 인정했듯이 그들 앞서 행하며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대적들을 무력화(無力化) 시키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있었다. 그 분 앞에는 그 어떤 것들도 당신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선하신 뜻을 이루는데 결코 방해가 될 수 없었다. 40년 전의 가데스나 40년 후의 여리고나 그분에게는 식은 죽 먹기(a peace of cake)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로선 가데스 때가 훨씬 여건이 더 좋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이후 40년간을 무엇을 하며 지냈는가? 아무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광야에서 유리하던 신세가 되었지만, 스스로 여전히 메뚜기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저 자고 깨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불평만 하나님께 쏟아 놓았다. 하나님은 그런 완악한 백성들을 그래도 불쌍히 여겨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반석의 생수를 마시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은 또 다시 겁을 더 먹었다. 지금으로 치면 미국 네바다에 있는 죽음의 사막(Death Valley) 같은 곳에서 40년간을 그 많은 종족들이 전혀 목마르거나 굶지도 않고 생생하게 살아 났다.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고 발도 부릍지 않았다.(신8:4) 그것도 사막의 기후와 지리에 전혀 생소했던 한 거렁뱅이 민족이 말이다.
거기다 시혼과 옥을 전멸시켰다고 하니 가나안 족속으로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요, 죄악에 대해 진노하는 하나님이라 가축까지 진멸하라는 명령을 이미 내렸음을 아마 저들도 소문에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들이 시혼과 옥처럼 전멸을 당할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정복 전쟁에서 아간의 범죄로 패한 아이성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패하지 않고 연전 연승했다. 여리고 성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기발한 방법으로 자기들 성 주위를 돌고 있는데도 얼마나 미리부터 겁에 질려 있었으면 단 한번도 응전하지 않고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정복 전쟁을 하기 이전에 가나안 땅 전체에 이미 이전에 애굽에 보내었던 죽음의 사자를 다시 보내어 그들 모두를 두려움으로 초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두 부류의 사람들
하나님은 크시다. 엄청나게 크시다. 지금까지의 설명도 사실은 그분에 대한 백만 분의 일, 아니 수조 분의 일을 묘사한 것도 아닐 만큼 크시다. 그 말은 정말 그 크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 그 크심에 걸맞게 자기 인생을 반응시키는 자도 하나님 만큼 크게 해 주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14:12)라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니 신자들은 오직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똑 같은 시간, 장소, 사건, 환경에서도 열명의 정탐꾼들처럼 이미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놓으신 천국의 보화와 이땅의 열매를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하는 자들과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그것을 풍성하게 차지하고 누리는 자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 사실은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는 자다.
그럼 그런 차이가 생기는 근거와 이유는 무엇인가? 인격적으로 품성이 악한 것인가? 도덕적으로 선행을 적게 한 것인가? 종교적으로 열심을 덜 내었는가? 기도와 말씀에 등한히 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째째하신 분이 아니다. 그런 결점들로 인해 하나님이 자기를 미워해서 혹시 벌을 주시지 않나 우려하는 자들을 볼 때에 하나님은 더욱 애처롭게 여긴다.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장 크게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을 가장 크게 볼 줄 아는 자다.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진정으로 잘 알아 그분에게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의 모든 부분과 일생 전부를 완전히 내어 맡길 수 있는 자다. 하나님의 크심이 자기의 인생을 통해 크게 드러나기를 소원하는, 아니 갈급해 하는 자다.
하나님은 신자가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 당당하게 서기를 원하신다. 아니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로 바꾸어 놓았다. 신자란 자신이 그렇게 바뀐 것을 확신하고 그대로 사는 자다. 비록 신자의 현실적 모습은 여전히 별 볼일이 없고 세상은 엄청 크게 보이고 자기가 가진 것은 너무 형편 없을지라도 그렇다. 신자가 커진 것이 아니라 신자의 속에는 이미 자기와 일대일로 생명을 맞바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로 임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신자를 대면하면 신자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그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불신자가 신자를 보면 저들이 먼저 사시나무 떨듯이 떨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재벌 회장이든 대통령이든 그들 속에 예수가 없기에 참 신자를 보면 자기들이 오히려 메뚜기처럼 여겨지고 먼저 고개를 숙이며 저도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바울이 재판정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아그립바 왕에게 무엇이라고 했는가?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9) “예수 없는 왕보다 예수 있는 죄수가 더 크니까 왕이여 당신도 이 거룩한 자리로 내려 오시오”라고 당당하게 선포했지 않는가? 신자가 가는 곳마다 세상은 의와 거룩과 생명으로 가득차고, 썩어 없어질 더러운 것들은 뒤집어지게 된다. 아이성에서처럼 죄로 더럽히지만 않는다면 승리는 항상 신자의 것, 아니 하나님의 것이다.
신자가 기껏 세상 사람보다 죄를 조금 덜 짓고, 욕심을 조금 덜 내고, 쥐꼬리만한 선행을 해 놓고, 교회에서 조금 기도하고 말씀 보았다고 아주 신령하고 거룩해진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십자가 안에서 예수를 주로 부르는 자가 되었다는 그 신분, 위치, 은혜, 권능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메뚜기 신드롬이 단순히 자신에 대한 심리학적, 도덕적, 종교적 열등감이 아니다.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과 결부시키지 않아 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먼저 행하셔서 완전히 떡 반죽이 되도록 주물러 놓은 눈 앞의 현실에 그저 겁을 먹고는 “하나님! 어서 빨리 커져라 제발 커져라”라는 주문 밖에 외울 줄 모르는 자들이다.
가나안 족속들이 40년 간이나 이스라엘을 향해 떨고 있었듯이, 지금도 사실은 참 하나님을 몰라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는 불신자들이 먼저 떨며 신자를 주목하고 있다. 신자가 정말로 죄악과 사단과 사망 앞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신자가 속한 가정이, 직장이, 사회가, 교회가, 민족이, 국가가 거룩하고 아름답게 변해 생명력이 넘치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자기들도 우리가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을 부르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런데도 신자가 오히려 현실이 커 보이고 자신은 작아 보이니까 자기 짐작으로 하나님도 작으리라 생각하고 행동해선 그들이 절대 신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메뚜기 신드롬을 극복할 수 있는 길
예수 믿는다는 것, 절대로 시시한 것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이실 만큼 하나님이 크시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죄악에 빠져 있더라도 그 분이 크시기에 우리 또한 큰 자임을 세상 앞에 드러내보여야 한다. 신자에게 바로 이 소망이 없다면 모든 수를 다 동원해 아무리 노력해도 메뚜기 신드롬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솔직히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도 현실적으로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육신에 중병이 들고, 가게는 장사가 안 되어 당장 임대료 걱정이 앞서고, 아들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마약을 하고 가출해 지금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기도한다고 염려 걱정이 사라지겠는가? .
그렇다고 의지를 동원해서 환난을 믿음으로 이겨야지 또는 스스로를 메뚜기처럼 낮추어 보는 이 열등감을 극복해야지 단단히 결심하여 노력한다고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 믿음 없음을 용서 해 주시고 염려 걱정을 없앨 수 있는 믿음이 생기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더니 믿음이 순식간에 강해지는가? 그래서 자기보다 상대가 메뚜기처럼 보이기 시작하든가? 잠시 잠간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 지금껏 경험했듯이 곧 다시 염려에 사로잡히고 주눅이 들기는 이전과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해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 한 하나님만 완전히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수도원에 가서 세상만사를 다 끊고 평생을 정진해도 안 된다. 아마 죽기 직전에야 다른 것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으니 가능할지 모른다. 완전히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천국에 가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믿음으로 염려를 이기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범사에 기뻐해야 하는 것은 하나 틀린 것 없으며 모든 신자가 도달해야 할 신앙 목표다. 그럼에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신자들이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엉터리로 파악한 것조차 오직 현재의 자기 믿음 수준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 모두의 실질적인 믿음의 수준이 하나님을 완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정도인데도 자꾸 그 정도의 믿음으로 현실을 평가하려니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요컨대 신자들이 진정한 믿음보다는 자기 짐작과 연결시켜 범사를 분석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두에 예를 든 사장과 비서가 얼렁뚱땅 대화하는 수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자가 정말로 노력해야 할 일은 의지적으로 자기 믿음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현실을 도외시하고 손을 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일부러 무시한다고 무시 되는 법은 절대 없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하여 나름대로 분석하되 그 분석된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해 재 여과 시키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 재 여과 작업을 범사에 특별히 현실이 커 보이고 자기는 메뚜기 같아 보일 때에 정말 모든 의지를 동원해서 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아들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1,32,38,39)
신자에게 사망이나 깊음이나 높음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것들이 다 있다. 실제로 현실은 커고 자신은 작다. 그러나 영원토록 신자와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비록 신자가 죽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은 신자와 영원토록 함께 한다는 것이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가나안 족속은 실제로 장대했고 이스라엘은 메뚜기 같았다. 그럼에도 갈렙과 여호수아가 철저하게 확신한 것은 자기들은 하나님 사랑 안에 있고 저들은 밖에 있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다른 말로 자기들이 죽더라도 하나님 품 안에서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진정한 실체다.
또 그것이 신자가 메뚜기 신드롬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재삼재사 말하건대 의지로 믿음을 키워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주께 바쳐서 언제든 주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이 메뚜기 신드롬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12/7/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