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병거는 기도하여서 오지 않았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隨從) 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1:14-17)
머리부터 믿어야 한다.
흔히들 “머리로 믿지 말고 가슴으로 믿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언뜻 보면 아주 옳은 말 같지만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다. 신앙에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비유로 한 말로 이해해야 한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신앙에는 머리로 믿는 방식과 가슴으로 믿는 그것이 있는데 그 둘 중에 전자는 틀렸고 후자가 옳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둘을 정확히 구분해서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당장에 그 말대로 하려 해도 머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말라고 한다면 이미 모순이지 않는가?
믿음이란 일반적으로 머리가 동원되지 않고는 생기지 않는다. 예컨대 사장이 부하 직원을 신뢰하려면 이모저모로 따져 보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 머리가 거의 전적으로 개입되어야 한다. 만약 가슴이 잘못 작용하면 오히려 오류가 생길 수 있다. 연애 할 때 감정이 앞서 눈에 콩깍지가 씌워진 것 같았다고들 말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기독교 신앙에서 가슴으로 믿으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체험적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후 손을 놓지 않고 지금도 세상만사를 주관하고 계신다. 특별히 성도 개인과 인격적 관계를 이어가신다. 신자로선 하나님의 자기 인생에 대한 뜻을 깨달아 실제 삶에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 최우선적인 신앙 과제가 된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면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하여 동행해주기에 자신의 삶과 인생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헌신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때때로 신자의 머리가 온전히 작동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로 밀어 넣을 수 있다. 그럴 때에는 그 결말을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가슴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가슴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은 머리로 동의하지만 말고 실제 삶에서 실천해야 하고 또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이 너무 자주 강조되다 보니까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다른 부작용을 일으켰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성이 차지하는 영역을 없애버렸다. 믿음은 결코 이성으로 파악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성경을 지성적으로 분석하고 공부할 양이면 크게 잘못하고 있거나 심지어 믿음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이 이성과 반(反)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성을 초월할 뿐이다. 이성을 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히 믿음 안에서 이성이 해야 할 응분의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 이성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완전히 다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 신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까지는 최대한 자기 이성을 동원해 따지고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믿고 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성이 배제된 신앙은 자칫 미신과 맹신과 광신으로 이끌 뿐이다. 오히려 이해될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이성으로 잘 구분해 그에 맞게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만 이해하고 그치면 그야말로 머리로만 믿고 가슴으로 믿는 부분은 실종되는 셈이다.
머리로 믿는다는 의미는 신자가 어떤 신앙적 행동과 말과 사고를 하든지 간에 왜, 무엇을, 어떻게, 누구와, 언제, 어디서, 해야 하는지 정확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도 신앙적 반응은 이성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외부적으로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 일에 반응하는 것조차 본인이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대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아가 머리로 이해된 신앙은 반드시 가슴으로까지 내려와야 한다. 우선 자기 자신의 품성과 가치관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신앙을 갖기 전과 비교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발끝과 손끝까지 그 신앙이 내려가야 한다. 손과 발로 실제로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주위에 빛과 소금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믿음을 머릿속에만 남겨두면 그야말로 믿음으로서 아무 힘이 없다. 믿음이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손과 발의 끝까지 내려가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가슴으로만이 아니라 머리가 더 많이 작용하도록 믿어야 한다.
신앙의 두 축
니고데모가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묻고자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되물었다. 자기 이성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도저히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는 추가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요3:1-9)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는데 인간은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된다. 눈에 안 보이는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듯이 성령의 역사도 그러하다. 니고데모에게 이성적인 분별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듯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마저 깨닫지 못할 정도로 모든 인간은 영적 차원에서 전혀 무지하다.
따라서 원죄 하에 태어난 영적 소경이 예수를 믿게 되는 과정은 불가사의할 수밖에 없다. 인간 이성으로 분별하고 판단하여 결단하는 의지적 수고의 개입을 불허한다. 그렇다고 신통력이 있는 주사 한 방으로 인간의 지정의를 완전히 마취시켜 본인도 모르게 “뿅”가게 해서 믿게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사단에 미혹된 한 영혼을 당신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지정의를 초월할 만큼 불가항력적으로 크다는 것이다. 또 그런 은혜의 역사에 인간의 수고와 공로와 자격이 하나도 힘을 쓰지 못하기에 인간 이성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는 뜻이다.
대신에 그런 구원 이후에는 하나님은 신자가 당신의 뜻을 완전하게 계시해 놓은 성경을 읽고 깨닫도록 성령을 내주케 하셨다. 처음 구원을 얻은 과정은 이성으로 인지, 이해, 분석하지 못했더라도 믿고 난 이후에는 예수를 믿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기 위해서다. 예수를 믿기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자신의 신분, 위치, 특권을 제대로 알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실하고도 경건하게 이어가라는 뜻이다.
바꿔 말해 비록 처음에는 가슴을 통해 예수를 믿었지만 그 이후에는 머리로 그 신앙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대상이 누구인지, 그분이 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는지, 어떻게 하면 그분과 관계를 더 풍성하고도 아름답게 이어갈 수 있는지 잘 알아야 한다. 또 이 세상을 움직이는 그분의 원리는 어떠한지, 반면에 세상은 그 원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그에 반해 신자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당한지 깨달아야 한다. 나아가 인간의 고통과 갈증의 원인이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죽음 이후의 영역은 어떠하며 인간은 그 준비를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등등 정말 머리로 알고 손발로 실천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물론 아무리 이성적으로 믿음을 유지한다 해도 하나님이 영적으로 역사하는 모습은 여전히 신비롭기만 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절대 전부가 아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이 생긴다. 믿음은 그야말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일 수밖에 없다. 또 보지 못하고 바라는 것들은 머리로 분석할 수 없다. 정말 그분의 약속이 이뤄질 소망을 키우면서 인내 가운데 가슴으로 믿어야 한다.
따라서 구원 이후에도 신앙에는 가슴으로 믿어야 할 부분과 머리로 믿어야 할 부분 두 가지 측면이 다 있다. 그 둘이 완전히 격리된 채 서로 다른 영역에서 따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둘은 항상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머리로 먼저 믿게 된 신앙은 반드시 가슴까지 내려가야 하고, 또 가슴으로 믿는 신앙도 머리로 보완해 주어야만 더 견고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요컨대 신자는 오직 말씀과 기도로 신앙을 견고히 세우고 자라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은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깨달아 일어난 현상을 그에 맞추어 머리로 분석하는 신앙이고, 기도는 눈에 안 보이는 그분의 역사를 가슴으로 믿는 신앙이다. 어느 한 쪽도 등한시 할 수 없다. 이제 가슴뿐 아니라 머리로 믿어야 하는 신앙의 대표적인 예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불신앙의 의미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1-34)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말씀의 결론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신자가 염려하는 문제를 이방인의 종교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것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걱정해서 오직 그것만 자기들 신께 비는 모습과 말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우선 이방인들, 기독교에서 볼 때는 불신자들도 신앙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들도 어떤 형태가 되었든 신(神)이라는 존재가 있으며 그 신이 인간의 먹고 마시는 것을 주관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럼 기독교 신앙과 무엇이 다른가?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는 고상한 신앙을 가졌고 그들은 먹고 마시는 것만 구하는 저급한 신앙을 가진 것인가? 물론 그런 차원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모습을 비교한 것뿐이다. 그런 결과를 불러온 내면적인 차이부터 따져봐야 한다.
우선 예수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일 일의 가장 큰 특성은 먹고 마신다는 저급한 차원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기에 미리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람이라면 불신자든 종교인이든 안 보이는 것은 자연히 염려 될 수밖에 없기에 자기가 믿는 어떤 힘을 붙들게 된다. 신을 믿는 자는 당연히 그 신에게 가장 먼저 빌 것이다.
따라서 신자가 내일의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해 기도해선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예수님도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지 그런 것을 구하지 말라고는 말씀하지 않았다. 당신께서 직접 가르치신 기도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은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줄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만 구하거나 먼저 구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한 것이다. 당신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면 하나님이 먹고 마실 것을 책임져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다 아신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신자가 이방인과 다른 혹은 달라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방인도 먹고 마시는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고 뭔가 눈에 안 보이는 손에 의해서, 특별히 자연의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신이 자기들이 필요를 일일이 알고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한다. 말하자면 신과 자기들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가 아예 형성되어 있지 않다. 그 신이 어떤 분인지, 자기들을 어떻게 대해주는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염려만 생기고 또 그 염려만 어떡하든 없애달라고 간구하게 된다.
신과 개인적인 관계가 없기에 그 신의 각 개인을 향한 계획과 목적도 있을 리 없다. 당연히 이방인은 신의 뜻과 계획대로 살고 또 그 신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문제를 간구하 않고 간구할 줄도 모른다. 쉬운 예로 점쟁이를 찾아가는 자들이 인생이 자기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신들의 조종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믿거나 눈치는 채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천지신명의 자기를 향한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 뜻대로 살겠다고 물어보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건강, 진학, 취업, 사업, 결혼, 가정에서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만 해결 받으려고 즉 먹고 마시는 것만 구할 뿐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믿는 신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에 아무리 간구해도 응답되지 않는다. 어쩌다 채워지는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이거나 자신들의 노력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런 줄을 전혀 모르니까 빌고 또 빌기만 한다. 또 더 많이 받기 위해 자꾸 더 많이 바친다. 그렇지만 아무리 간구해도 채워지지 않는 일들이 계속해서 생기니까 염려가 끊일 리가 없고 점쟁이 집 문턱은 닳고 복채는 갈수록 올라갈 따름이다.
불신앙이란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신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무지(無知)가 불신앙이다. 보이지 않는 내일의 염려를 없애려면 정말 가슴으로 믿는 신앙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머리로 믿는 신앙이 뒷받침이 안 되니까 지금 빌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전혀 모르고 그저 빌기만 할 뿐이다. 자연히 어떤 신이라도 다 수용하고 오히려 빌 수 있는 신이 많을수록 더 좋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신자에게 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더러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그럼 그렇게 하는 신자도 있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내일의 먹고 마실 것이 염려되어 그저 달라고만 빈다는 것이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은가? 보이지 않은 내일을 위해선 분명히 가슴으로 믿는 신앙이 필요하기에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렇게만 하면 염려가 줄지 않는다고 말한 셈이다. 대신에 너희가 간구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내일의 일도 구태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분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신자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는 그분 쪽에서 자기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깨닫도록 기도해야 한다.
다시 말하건대 신앙이 하나님의 존재함과 그분이 이 땅의 주인임을 믿느냐 못 믿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은 단지 신이 누구인지 모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이 오히려 가슴으로만 믿는다. 또 신자라도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내일의 먹고 마시는 염려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힘든 일만 생기면 기도하고 또 그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믿으라는 가르침만 받다보니 신자들은 자연히 거의 맹목적으로 그분을 믿으려 든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께 무조건 자기 요구를 채워 달라는 떼를 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교회 안에도 이방인처럼 그저 빌기만 하는 신자가 있을 줄 예수님은 미리 아셨던 것이다.
믿음의 오류
가슴으로 그분을 믿으려면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히 체험이다.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받은 은혜가, 그것도 자신의 먹고 마시는 것이 풍요로워지는 응답이 없으면 믿음이 약한 것처럼 된다. 대신에 성경 진리를 이성으로 따져서 그 약속을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붙드는 면은 약해진다. 눈에 안 보이는 내일의 일이 염려될수록 더더욱 그분이 어떤 분인지 머리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가슴으로만 믿다보면 우리가 이미 어떤 신분으로 바뀌었는지 그래서 무슨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지 미처 모른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가 세상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맺어져 있음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분으로부터 사랑을 가시적으로 겪어봐야만 겨우 사랑인줄 안다. 가슴으로 체험하지 않고는 머리에 깨우침이 없다. 또 머리는 겨우 그 체험을 기억하는 정도로만 동원한다.
심지어 성경을 보는 태도마저 무조건 믿고 보는 식으로 바뀐다. 살펴 본대로 진짜 불신앙은 신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성경의 앞뒤를 이성적으로 따지면 오히려 불신앙으로 간주한다. 본문의 엘리사의 불 병거 사건은 성경을 왜곡된 가슴 신앙으로 읽는 가장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신자가 이 기사를 볼 때에 엘리사가 기도했더니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불 병거와 불 말은 그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그곳에 있었다. 엘리사는 단지 “저(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반면에 아람 군대들의 눈은 어둡게 해서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뿐이다. 그가 “아람의 대군이 쳐들어와 성을 에워쌌고 게하시마저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염려하고 있으니 어서 빨리 불 병거와 불 말을 보내어 우리를 구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 종은 바로 내일의 먹고 마실 것만 염려하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다. 은혜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부재증명(不在證明)이 결코 될 수 없다. 명색이 신자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니까 그분이 명료하게 보이지만 않으면 아예 없는 양 간주한다.
대신에 엘리사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믿고”가 아니라) 있었다. 물론 그가 평소에 “믿음으로” 자기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즉 하나님의 의와 그 나라를 위해서 꾸준히 기도했기에 그런 “앎”을 가질 수 있었다. 또 그 결과 이번 침공에도 하나님은 반드시 지켜 주시리라는 확신을 이미 가졌던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그 반대다. 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만 불 병거와 불 말이 출동 준비하는 줄 안다. 그리고 그 출동을 어떻게 하든 빨리 재촉하려고 가슴으로 더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가 없으면 당신의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기도로 그분의 섭리와 주권적 통치마저 변경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세상만사를 특별히 신자에 관한 일을 오직 당신만의 계획과 일정에 따라 다스리신다. 그런데 그분이 역사하는 출발은 언제나 눈에 안 보이는 곳이다. 신자가 기도하면 그분의 주권적 통치가 자기가 기도한 내용과 연관되어져 눈에 보이게 되는 것만 달라질 뿐이다. 또 기도로 그분의 역사가 신자의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힘을 얻어 염려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계획에 자연히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신자로 하여금 그분의 일군이 되고자 하는 열심과 소원도 품게 만들어 준다.
요컨대 평소에 꾸준히 기도하는 신자는 그분의 불 병거와 불 말이 항상 자기를 호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이 없다.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이 가는 곳마다 항상 먼저 가 계신다.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어디인지 알기에 그곳으로만 찾아 간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확고히 약속했지 않는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 예수님이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다짐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겨우 대적을 무찌를 수 있는 불 병거와 불 말 뿐이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1,32,35, 37-39)
곤고, 환난, 핍박, 기근, 위험, 적신, 칼 같이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것에서 지켜 주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위에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다고 했다. 그것도 지켜주신다는 말씀에 앞서 먼저 약속했다. 지켜 주시는 것은 대적이 우리를 그분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게 만드는 최소의 방어책일 뿐이다. 당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시며 대속하신 자녀들을 대적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계실 리는 절대 없다.
특별히 “현재 일이나 장래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하게 유효하다고 했다. 현재 일이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장래 일이 눈에 전혀 보이지 않아도, 가슴으로 믿는 믿음만으로 수용하기 힘겨울 때에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믿음은 먹고 마시는 것만 비는 이방인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직접 오신 그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로 알게 하셨지 않은가?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방어만 해주는 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 오히려 공격적인 의미를 지닌다. 받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주는 것, 그것도 오직 상대의 유익을 위해서 조건 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가 신자들이 좋은 것을 그분께 바쳐서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오로지 당신께서 자녀에게 주고 싶어야 참 사랑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기 전에, 아니 알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찾아 오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다.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잘못된 주일 대표기도
주일 대예배 때에 대표기도를 하는 분들이 공통적으로 저지르는 잘못이 하나 있다. 완전히 잘못되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뭔가 부족한 것만은 틀림없다. 바로 “하나님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신자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또 이미 그곳에 함께 계시는 분한테 또 다시 함께 해달라고 간구하면 이상하지 않는가?
그 보다는 “하나님께서 이곳에 변함없이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경배를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혹시라도 우리가 가진 의심과 불만 때문에 그분이 함께 하심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면 차라리 솔직히 확신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니면 죄 지은 것이 많아서 진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앞선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을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무슨 뜻으로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신앙일 뿐이다.
간혹 하나님이 교회 안에 이미 임재해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믿지만 좀 더 강하고 풍성한 모습으로 임재해 달라는 뜻의 기도라고 말한다. 물론 그 충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잘못이다. 하나님이 일단 어디라도 임재하면 하나님 당신의 전부가 임재하는 것이지 일부만 임재하는 법은 없다. 말하자면 어떤 곳에는 불 병거와 불 말로 함께 해주지만 다른 곳에는 단순한 병거와 말로 임재해 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일 뿐이다. 하나님의 권능이나 은혜가 상황과 사람과 시기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났다 하지 않는다. 영원토록 스스로 자존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조차 없다. 그분이 하시는 일에 작은 것은 없고 그분의 임재에 약한 임재란 없다. 언제 어디서나 전지전능하시며 완전하시다. 그 권능과 은혜에 부족함이 있도록 임재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 아니 그분이 약해지거나 강해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법이다.
주일 대예배에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으로 이미 임재해 있다. 따로 더 강력하게 임재해 달라는 간구도 원칙적으로 틀린 기도다. 단지 인간이 그분의 임재를 감지하고 인식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분은 그분이시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바로 엘리사처럼 우리의 눈을 열어서 불 병거와 불 말을 보게 해달라고 해야 맞다. 우리가 뜨겁게 기도할 테니 불 병거와 불 말을 특별히 오늘만 따로 보내달라는 것은 틀린 간구라는 말이다.
물론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때때로 아주 강력하게 임재하는 것 같은 경우도 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처럼 특별한 부흥이 필요하면 하나님 당신의 계획과 일정에 따라 특별한 장소의,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모습으로,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임재 하신다. 그러나 그 때도 단지 임재하는 방식이 특별한 것이지 하나님이 더 강해진 것은 아니다. 대신에 신자들의 기도를 통해서 혹은 기도와 무관하게 사람들의 눈을 더 활짝 열어주어 그 특별한 방식을 더 강하게 인식하도록 해준 것뿐이다. 나아가 필요하다면 엘리사의 기도로 아람 군대의 눈을 열었다 닫았다 했듯이 불신자의 눈에도 확연히 보이도록 가시적 방식으로 스스로를 현재(顯在-드러내 보여서 임재 함)하신다.
신앙의 절실한 과제는 하나님의 임재 여부가 아니라 신자가 그 임재를 볼 줄 아느냐 모르느냐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이미 임재해 있는 그분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분을 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으키는 그런 특별히 가시적인 현재가 아니고는 말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라.”(호3:6) 신자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그분의 임재를 더 가깝고도 강하게 체험하게 되고 자연히 그분의 은혜를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된다.
신앙은 그분을 더 많이 알아나가는 싸움으로 평생을 두고 머리로 그 일을 해야 한다. 아무리 체험이 많아도 가슴으로 믿어 머리에까지 이르지 못하면 반쪽 믿음일 뿐이다. 아니 자칫 이방인의 믿음으로 변질될 수 있다.
실제로도 구원이후에는 머리로 믿어 가슴으로 내려가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울러 손발까지 가서 그 믿음이 실현될 때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는 가슴으로 되돌아온다. 또 그런 은혜로 인해 머리는 신자로 완전한 확신에 거하게 만들어 준다. 한 마디로 처음 예수를 영접할 때 말고는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가슴과 머리를 병행하여 믿어야 하며 또 그러기 위해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10/24/2007
생수 마신 기분입니다!
머리와 가슴 이야기는 늘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왜 목사님들이 이에서 끝내는지 의아했습니다.
"우리 신앙은 머리와 가슴을 넘어 사지백체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이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목사님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